한국 고대사 용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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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용어 2 상고사/쥬신제국

2008/05/06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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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림토(加臨土) : 가림은 가려낸다는 뜻으로 가림다문(加臨多文)이라고도 한다. 한글의 전신이다. 그 정음 38자의 모습은 훈민정음의 한글 모습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세종실록 계해 25년 12월 조에, '10월 초,친히 말글28자를 정하시니 그 글자는 옛 글자를 모방하였다.' 라는 말이 있는데 원문은 '고전'이라 하여 상형문자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그보다는 형상의 유사성에서 볼때 바로 이 가림토 한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 가림토 한글의 모습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과의 유사성은 거의 거부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2. 가태라곡(加太羅谷) : 목단강 하류 가목사(佳木斯) 일대로 추정한다.

3. 낭야성(琅邪城) : 오늘날에도 산동성의 남동해안에 있다.그러나 이 낭야성은 백제가 산동성을 경영할 때에 백제 성양태수(城陽太守) 휘하의 낭야성이었을 수도 있다.

4. 갈로산(葛盧山) : 갈로는 개로, 개루 같은 어원으로 칼로 추정됩니다. 바로 검산(劍山) 이고 다시 거미산(한자로 지주산, 적봉과 부신에 있음)으로 추정됩니다. 부신시 아래 철장로구(제철소?)같은 것이 있고 석탄이 산출되고 또 구리산지로는 난하 좌우로 하나씩 있는데 승덕의 동쪽 소사구(적봉요녕하북경계)에서 구리가 나오고 난평의 서북쪽에서도 산출이 됩니다.

5. 갈성(碣城) 또는 갈산(碣山) : 갈석산(碣石山) 부근으로서 오늘날의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추정된다.

6. 감성(監星) : 지금의 천문대.

7. 갑비고차 : 지금의 강화도를 말한다.

8. 개사원(蓋斯原) : 숙신족의 터전인 아사달과 같은 격으로서 부여족의 터전을 가리킨다. 내몽고 개로(開魯) 부근이 첫 번째 개사원으로 추정된다.

9. 개원(開原) : 만주 요녕성 도현 남쪽.

10. 객현한국(客賢汗國) : <광개토왕 비문>의 객현한(客賢韓)으로 본다. 객현은 중국 발음으로 케산이며 이는 우리말 계산(鷄山)과 비슷하므로 오늘날의 계관산(鷄冠山)으로 추정하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여러 지명과 관련하여 와방점시(瓦房店市) 안파진(安波鎭), 험탕진(險湯鎭) 부근으로 추정한다.

11. 거용성(渠용城) : 북경시 서북쪽에 있다.북경시 관광지인 팔달령의 만리장성 북쪽이다.

12. 견아성(犬牙城) : 영흥군 진성봉에 있던 진술성(鎭戌城)이다.

13. 계성(계城) : 계는 주(周)때의 나라 이름. 직예성(直隸省) 안에 있었다.

14. 고두막한(高豆莫汗) : 동명왕(東明王)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高朱蒙) 역시 시호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나 고구려 시대에는 <광개토왕 비문>에 추모왕(鄒牟王)이라고 기록하였으니 고두막한 동명왕과 구별되는 것이다.

15. 고리국(藁離國) :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킨 곳으로 [삼국유사]에서 북부여시조 해모수(解牟漱)가 대요국 의주계(醫州界)에 있는 홀승골(忽昇骨)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신개하(新開河) 유역의 과이심좌익중기(科爾沁左翼中旗) 육가자(六家子) 문화로 고려된다.

16. 고운 : 고구려의 고양 고씨의 후예로 모용보가 태자일 때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의 성을 주었다.

17. 고임무 : 고임무는 본래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이었다. 대조영의 회유를 뿌리친 고임무의 명분없는 당나라 선택에 의하여, 다시 요령성 영주는 당나라 땅이 되고 발해와 당나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8. 공상(空桑) :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이다. 개봉시 동남쪽 교외에 진류(陳留)라는 곳이 치우의 첫번째 수도였던 공상(空桑)의 정확한 위치다.

19. 관미성(關彌城) : 대련시(大連市) 북쪽 금주시 대흑산산성이다.

20. 관방(關防) : 제방을 쌓고 관문을 놓아 만든 방위진지를 말한다. 백제의 관방은 고구려와의 최전선으로 백제 방위의 일차 관문이다.

21. 괴곡(槐谷) : 충청북도 괴산으로 추정한다.

22. 구다천국(句茶川國) : 평안북도 위원과, 압록강 건너 마주보는 길림성 통화시 지방에 살다가 독로국에 패하여 장춘시(長春市) 동북쪽 구대시(九臺市)에 옮겨 있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일찍이 발해(길림시 중심)에 복속된 것이다.

23. 구려하(九黎河) : 오늘날의 수수하(秀水河)이다. 요하의 한 가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철법시 서쪽에 위치한다.

24. 구막한국(寇莫汗國) : [진서(晉書)]에서 양운국으로부터 100일을 더 간다고 하였다. 양운국과의 거리로 보아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만나는 하바로프스크(伯力) 북쪽으로 추정한다.

25. 구모액국(句牟額國) : <광개토태황 비문>의 구모객두(句牟客頭)로 추정하여 평안북도 운전군(雲田郡) 가산면(嘉山面)의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일본말로 구모는 구름이다. 구모액국에서 <광개토태황 비문>에 기록된 구모성, 구모객두가 비롯된다.

26. 구천(狗川) : 충청북도 회인 부근에 있던 양성(壤城) 부근으로 추정한다.

27. 국내성(國內城) : 요원시 공농산성.

28.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 : 개원시(開原市) 서풍현(西豊縣) 낙선향(樂善鄕)으로 비정한다.

29. 궁홀산 :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궁홀산 금미달과 [단군세기]의 상춘 구월산은 같은 곳으로 추정한다.궁홀산 금미달(弓忽山 今彌達)은 개원시 위원보진(威遠堡鎭) 용담산성(龍潭山城)으로 추정한다.

30. 금현성(金峴城) : 금천군 우봉면으로 추정된다.

31. 기 : 주(周)의 옛읍.

32. 기연 :  기주(冀州)와 연주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그리고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33. 기자(箕子) : 흘달 단군(5431-BC1767)때에 하(夏)나라의 빈.기의 점령시 수유족의 일파가 점령지에 잔류하였다. 후에 태곡(太谷)에 거주하던 수유족의 일파가 은나라에 의해 기라는 작호를 받아 그 우두머리를 기자라 하였다. 수유는 원래 서우여(徐于餘)의 후손으로 후에 수유(須臾)로 변하고, 기자족으로  변하였다. 단군 색불루에 의해 번한이 된 서우여가 죽고 아들 서여가 번한을 이어받지 못하자 후손 서여들이 이에 불만을 품어 오다가 6078(B.C 1120)년 당시 서여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에 거주하던 수유족 무리들을 이끌고 태행산맥 서북 의 땅으로 이동하였다.

34. 나반(那般)과 아만(阿曼) : 나반과 아만은 성경의 아담과 이브와 같은 존재이다. 바로 최초의 인류로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그 연대는 가히 알 수 없으나. 언어학적으로 추적해 보면 나반이 이두식이나 우리말의 한자표현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나반+이(인칭접미사) => 나반이 => 나바이 => 아바이 => 아버지

  아만+이(   "      ) => 아만이 => 아마니 => 어마니 => 어머니

35. 낙랑홀(樂浪忽) : 조선의 제후국인, 낙랑국으로 철령시 동남쪽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이다.

36. 낙씨 :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때, 서기 22년에 고구려가 동부여를 쳐서 동부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이자 동부여의 후예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갈사국을 건설하고 하나는 낙씨부여이다. 낙씨부여는 본래가 해부루를 따라서 동부여로 가지 않고 강평현 부근에 남아 있던 해모수의 후예로 고려된다.

37. 남가라(南加羅) : 거제도(巨濟島)로 추정한다. 금관가야, 대가야보다 먼저인 구야한국(狗邪韓國), 구야가야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고성에서 가까운데 대마도가 보이는 가라산이 있다. 따라서 [위지왜인전]의 구야가야(拘邪伽倻)가 거제도이다.

38. 남려성(南閭城) : 북부여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南黎>를 둔 곳으로, 뒤에 부른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39. 남산 : 약산(藥山) 북쪽, 고성면(古城面) 고성(古城)으로 추정.

40. 남옥저(南沃沮) : 현재의 집안(集安) 지방으로 추정된다.

41. 납림동굴(拉林洞窟) : 삼위산의 납림동굴은 현재 돈황(敦煌)지역이다.

42. 낭산(狼山) : 하북성(河北省) 청원현(淸苑縣) 서북쪽에 있는 산.

43. 낭야성(琅邪城) : 오늘날에도 산동성의 남동해안에 있다. 그러나 이 낭야성은 백제가 산동성을 경영할 때에 백제 성양태수(城陽太守) 휘하의 낭야성이었을 수도 있다.

44. 노관 : 한(漢)의 풍(豊) 땅사람으로서 고조와 한 마을에 살고 같은 날 낳았다고 하여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뒤에는 흉노로 항복해 들어가 동호로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

45. 녹산(鹿山) : 오늘날 류산(劉山)을 말하며, 한나라 장잠현인 것이다. 장잠은 아사달의 한자어 표기이다.

46. 눌현(訥見) : 홀본부여성으로, 쌍성보진 편검성이다.

47. 다파나국(多婆那國) : 삼국사기에 그 위치가 왜국 동북 1천리라 하였다. 현재 탐라국 즉 제주도라 생각되어진다.

48. 단웅국(檀熊國) : 배달나라 말기에 단웅국의 비왕으로 섭정하던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요임금의 난을 피하여 동북의 아사달로 가서 서기전 2333년에 조선(朝鮮)을 건국하게 된다.

49. 대두성(大豆城) : 충남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이다.

50. 대박산 : 최근 북한 강동군(江東郡)에서 발굴한 대박산(大朴山) 단군릉(檀君陵)에 대한 뒷받침으로서 이보다 정확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강동군의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또한 강동현의 옛군명이 바로 송양군(松壤郡)이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풍류강은 대동강의 북지인 비류강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51. 대산(帶山) : 마도산(馬都山) 전투를 가리키는 것이다. 마도산은 노룡의 진산(鎭山)이라고 하였는데 진황도시 청룡현에 남아 있는 도산(都山;1846M)이다. 하북성 노룡현으로부터 만리장성 바깥에 있다.

52. 대수 : 해성시 해성하(海城河).

53. 대요(大撓) : 대요는 일찍이 배달나라에서 간지(干支)의 술(術)을 배워 갔으며, 간지는 이미 배달나라이전부터 있었다. 10간12지는 10천간(天干) 12지지(地支)로서 바로 하늘의 작은 왕 10, 땅의 작은 왕 12라는 뜻이다. 즉 간(干)은 거서간, 마립간, 징기스칸의 간, 칸, 한(汗)과 같은 말로 왕이라는 뜻이고, 지(支)는 막리지 등에서 쓰는 지와 같은 말로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하늘에 왕을 10을 배치시키고 땅에 우두머리를 12을 두어 배치시켜 서로 조합하여 60갑자를 만들어 시간(時間), 일(日), 월(月)을 정립하여 달력의 기초로 삼았다. 60갑자는 60진법이다.

54. 도곤성(都坤城) : 백제는 도압성(都鴨城)이라고 기록하였다. 대곤호(大困湖), 압해산이 있는 신포시 구남대천(舊南大川) 남안 발해고도비(渤海古都碑) 부근으로 추정한다.

55. 도산(塗山) :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북쪽에 있다.

56. 도살성(道薩城) : 백제 초기에 십제국(十濟國)이라고 부른 하남 위례성이 도살성을 가리킨다. 즉 [일본서기]의 한성은 바로 평산군 태백산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붙인 도살성이라는 이름은 고구려군이 백제왕성, 즉 평산위례성을 공략하여 백제 왕족을 도살(屠殺), 도륙(屠戮)하고서 붙인 섬뜩한 새이름으로 추정된다.

57. 도압성(都押城) : 고구려쪽에서는 도곤성(都坤城)이라고도 기록하였다. 북청군의 통팔령천의 동쪽 가지는 곤파천, 혹은 압파천이라고도 한다. 즉 당시에 도곤성과 도압성이 각각 양국에 기록된 흔적으로서 지금도 곤파천, 압파천이 병용되는 것이다. 아무튼 도곤성은 대곤호(大困湖), 압해산이 있는 신포시 구남대천(舊南大川) 남안 발해고도비(渤海古都碑) 부근으로 추정한다.

58. 도이(島夷) :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였던 회이(淮夷) 또는 래이(萊夷)와는 달리 도이(島夷)는 단지 '뭇 도서(島嶼)에 흩어져 살아가는, 또는 일부 해안지역으로 올라와 정착한 이족(夷族)'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당시만해도 회이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의 남쪽인 장강의 하류 남부지역의 이족들을 '도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아울러 발해 연안의 뭇 섬들에 살다가 황하의 하류 북부지역에 정착한 이족 또한 '도이'라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서는 일본을 '도이'라고 지칭하고 있기까지하다.

59. 도정(都亭) : 도성(都城)의 작은 말로서 추정되며 그 위치는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도관(都館) 부근으로 추정된다.

60. 독산성(獨山城) : 황해도 황주(黃州)의 서쪽 성이름이다.

61. 동경(東京)  : 연변의 용정 일대가 된다.

62. 동경성(東京城) : 연길시(延吉市) 동북쪽 장안성(長安山城).

63. 동모산(東모山) : 오늘날의 쌍료현 후고가(后高家)로 추정된다.

64. 등래(登萊) : 등주와 동래로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이다.

65. 령(營) : 작은 호수가에 거주하는 부락보다 작은 공동체로 추정된다. 그 가구수는 어느정도인지 모르겠다.

66. 마두책(馬頭柵) : 오늘날의 함흥시 북쪽 오로촌고성(吾老村古城)이다.

68.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 2명을 번한(飜汗.番汗), 마한(馬汗)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최고위 관리를 오이, 마리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 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부여의 고위관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69. 마립간(麻立干) : 방언으로 궐(말독)을 이르는 것인데, 궐은 곧 시조이며 이것은 자리를 정하는 것으로 왕궐이 주가 되고 신궐이 그 밑에 벌여 있음으로 유래한다.

70. 마수성(馬首城) : 요덕군 마유봉(馬踰峰; 972M), 모도봉(毛都峰;1883M)과 관련하여 대동강 발원(發源)인 대흥군(大興郡) 신성면 창의리 부근으로 추정한다.

71. 만번한 : 부신시 하얼투(哈爾套) 서남쪽의 탑영자향(塔營子鄕) 만한영자촌(滿漢營子村)으로 추정된다. 단 만번한은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조금 훗날의 이름인데, 뒤에 위만의 번한성이 되었기 때문에 만번한이다.

72. 매구여국(賣句餘國) : 혹은 직구다국(稷臼多國)이라고도 함. 독로국에게 패하여 금산(金山)으로 옮겨갔다고 전하는데, 이는 구대시(九臺市)로 옮겨간 것이다. 구대시는 금주(錦州)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편에 등장한 매구곡(買溝谷)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매구여국은 <광개토태황 비문>에도 소개되었는데 오늘날의 길림시 매하구(梅河口) 지방으로 추정한다.

73. 모산성(母山城) : 충청북도 진천읍에 있던 대모산성으로 추정하는데 오늘날의 진천군(鎭川郡) 만근산의 만뢰산성에 해당한다.

74. 박랑(博浪) : 장량(張良)이 역사(力士)에게 진시황(秦始皇)을 저격하게 한곳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남쪽에 있다.

75. 반고가한(盤固可汗) : 회남자의 기록에 나오는 중국창조신화의 인물로 삼황의 한사람이다. 즉 반고가 태초에 존재하여 우주를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이후 여와가 인간을 만들었다. 삼황은 반고, 여와, 신예 이다.

76. 백랑곡(白浪谷) : 연국(燕國)의 동쪽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부신시(阜新市) 지역이다.

77.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 1세 거발환(居發桓) 환웅은 환인의 환국이 있던 파나류산(波奈留山)의 후륜바얼(呼倫巴爾) 지구, 하이라얼(海拉爾)에서 출발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리하여 그가 나아간 곳에도 새로운 흑수(黑水), 백산(白山)을 정하여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 생겨난 흑수(黑水), 백산(白山)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하이라얼 (海拉爾)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길림성 백성시(白城市)가 있고, 두번째로 길림시(吉林市)를 들 수 있으며, 세번째로는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赤峰市)가 가능하다.

78. 달지국 백아강(白牙岡) :  백아강은 단군 왕검의 도읍을 이르는 호칭인 백악산 아사달의 백악산과 같은 뜻이지만 조금 다른 말이다. 단군 조선의 아사달을 지키는 백악산(白岳山)은 일개 산이고, 그에 비하여 웅백다의 마한을 지키는 백아강(白牙岡)은 산맥인 것이다. 마한에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한산(馬韓山)이 있었는데 이 마한산은 바로 묘향산(妙香山)이고, 묘향산의 산 줄기인 낭림산맥(狼林山脈)이 바로 백아강인 것이다. 낭림은 백랑(白狼)으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79. 번한성 : 백랑성(白狼城)과 같은 말이다. 요령성 능원(凌源)의 동남에 있는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가 번한의 백랑성이었다. 그 위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번한 왕검성의 백산(白山)인 것이다. 후대에는 백록산(白鹿山)이라고도 하였다.

80. 병산(甁山) : 평안남도 맹산군 병풍산(屛風山;1166M) 남쪽 철옹산성(鐵甕山城)이다.

81. 복희(伏犧) :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 제물에 쓰이는 동물)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규원사화

82. 봉산(烽山) : 춘천 서남 강촌의 봉화산으로 추정한다.

83. 봉산성(烽山城) : 춘천 서남 강촌의 봉화산으로 추정한다.

84. 부거(副車) : 본인이 타지 않고 여벌로 따라가는 수레.

85. 부현(斧峴) : 평양과 순안 사이로 추정된다.

86. 북박(北박) : 은나라 북쪽 서울.

87. 북옥저(北沃沮) : 동명성제가 북부여에서 도망나온 후 북부여가 한에게 망한 후 장춘부근으로 이주 한 후 이해에 멸망한 것으로 사료된다. 즉 북옥저는 북부여의 후예이다.

88. 북한산성(北漢山城) : 진흥왕 때에 신라가 쌓은 북한산성이 오늘날의 서울 북쪽 북한산성이다. 그후 신라의 북한산성을 신라가 한성주(漢城州)라고 고쳐 불렀다.

89. 북한산성(北漢山城) : 개천군(价川郡)의 고사산산성(姑射山山城)으로 추정한다.

90. 분릉 : 이통하와 송화강이 만난 곳을 이른다. 다시 말하면 분릉수의 가지가 이통하이고 이통하의 가지가 개사수이다.

91. 화려, 불내 : 최리의 낙랑의 후예로  낙랑의 두 현민으로 추정된다.

92. 불리지(弗離支) : 고모수(高慕漱)라고도 하며, 옥저후를 지냈다. 해모수의 차자인 고진의 손자이다.

93. 불열국(拂涅國) : 우리가 아는 해모수의 부여는 북부여인데, 졸본부여의 성립으로 해부루가 동부여로 떠나갈 때에 이를 따라가지 않은 북부여의 후손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낙씨부여라고도 인정되었다. [요사지리지]에서는 불열국(拂涅國)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불열국은 [위지동이전]에서 부여국이라고 기록하고 또 예(穢)(hu )라고도 하였으니,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를 가졌었다. 요녕성 부신(阜新市) 지방의 불열국은 고구려 태조대왕(53-146) 때에 고구려의 중국 공격을 저지하여 괴롭혔으며, 또한 불열국은 요동왕 공손탁(194年卒)의 질녀를 왕비로 맞이했고 의려왕(-282年)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외에게 쫓겨 일본으로 갔다.

94. 비려(碑麗) : 비려의 위치에 대한 추정은 많이 연구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비려가 거란의 한 일파라는 것이 보편적인데, 북경 서북쪽 연경시 근처로 비정되어진다.

95. 비류국(沸流國) : 개원시 서풍현(開原市 西豊縣)이다.

96. 비류수(沸流水) : 길림성 사평시 쌍료현 동명(東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즉 비류수는 지금의 동요하이다.

97. 비리국(卑離國) :  [진서(晉書)]에서는 비리국이 숙신(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200일을 간다고 하였다. 이 비리국은 부이르 강변의 후륜바얼(呼倫巴爾)지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파나류산으로 추정한 후륜바얼지구가 곧 12연방의 중심인 비리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98. 비미호(卑彌乎) : 이분이 바로 일본 최초의 여왕인 아마테라스(즉 天照大神)로 추정되어진다. 왜(倭) 여왕 비미호가 삼국사기에 최초로 등장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8대 아달라 이사금 20년 여름 5월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요청해 왔다."

99. 비왕(裨王)  : 임금의 사위를 일컷는 말이다. 단군의 배필이된 배서갑(拜西岬)의 하백녀 즉 웅씨왕의 딸을 맞아 들였다. 웅씨는 배달국 환웅때부터 시작된다. 즉 환웅족과 웅씨족의 본격적인 결합이 이때에 되서야 이루어 진 것이다.  배서갑의 위치는 환인현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100. 비자본(比自 ) : 빛홀(忽)에 해당하며, 섬진강(閃津-->蟾津)과 관련하여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부근으로 추정된다.

101. 빈 : 주(周)의 조상 공유(公劉)가 세운나라.

102. 사납아국(斯納阿國) : 사와라(斯瓦羅) 환웅과 관련되며, 시라무렌강(西喇木倫河) 상류, 즉 거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今 巴林左旗) 서쪽인 파린우기(巴林右旗) 부근으로 추정한다.

103. 사백력(斯白力) : 시베리아의 고어로 추정이 된다. 즉 환족이 천산으로 이동하기 전 환족이 머물렀던 곳으로 바이칼호의 서쪽으로 추정된다. 추정하건데 아이시타 즉 사타여아와 위치상 비슷한 곳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104. 사비(泗비) : 충청남도 부여군의 사비성(泗비城).

105. 사성(蛇城) : 강동군 고천면(高泉面)의 고성(古城)이다.

106. 사수(蛇水) : 오늘날의 대동강을 말한다.

107. 사현성(沙峴城) :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으로 추정된다.

108. 살수(薩水) : 살수는 혼하(渾河)이다.

109. 삼년성(三年城) : 현재의 보은 지방이다.

110. 삼조선 :  대부여의 단군 구물(丘勿) 이후로 마한조선(馬韓朝鮮), 번한조선(番韓朝鮮) 진한조선(辰韓朝鮮)등 삼조선이 제각기 독립하게 되었으며 대부여도 부여조선이라고 칭하였다.이 때에 이르러 비로서 진한(辰韓)조선이 생겨났는데 그 위치는 개주시(蓋州市) 부근으로 추정된다.

111. 상경(上京) : 상경홀한성(上京忽汗城)으로, 홀한하(河), 즉 송화강의 동쪽이며 길림시 용담산성이다.

112. 상곡(上谷) : 찰합이성(察哈爾省) 연경현(延慶縣) 북쪽.

113. 서란(舒蘭) : 만주 길림성 영길현 북쪽.

114. 서우여(徐于餘) : 13세 단군 흘달때의 하나라의 빈기의 공략으로 인하여, 그 땅에 남아있던 한 일파의 후손으로 후에 등장하는 수유족의 조상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힘을 길러 소태 단군의 뒤를 이어 단군으로 오르려고 하나, 색불루에 의해 저지되고, 수유족으로는 처음으로 색불루 단군에 의해 번한에 임명된다. 하지만 서우여 이후 다시 번한에서 물러난 후 기후에 의해 다시 번한으로 등극하게 된다.

115. 석문성(石門城) : 함경남도 문천군(文川郡)으로 고려한다.

116. 선비국(鮮卑國) : 혹은 시위국(豕韋國) 또는 통고아국(通告斯國)이라고도 함.

선비산(鮮卑山) 부근으로 알려졌는데 알 수 없는 곳이다. 시위(豕韋)는 먼저 [한서지리지] 요동군 실위산(室僞山)과 관련지으면 요령성 부신시이다.

117. 선비산(鮮卑山) : 내몽고 과이심(科爾沁) 서쪽에 있는 산.

118. 설유 : 단군조선 시대에 지금의 내몽고 지방에서 유목을 하던 종족. 하(夏)나라 때는 훈육이라 불리었고 은(殷)나라 때는 험윤이라 불리었다.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가 된다.

119. 소도(蘇塗) : 천신에게 신단(神壇)을 베풀고 제사지내던 성역(聖域), 그 앞에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웠는     데 지금의 "솟대"는 여기에서 기원되었다고 한다.

120. 소호(少昊) : 소호의 후손중 소호금천씨가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중국(즉 熊國)의 천자가 되었다. 소호금천씨가 김씨의 시조임. 벼슬이름을 새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봉황이 총리격이었는바, 나중에 왕으로 상징화되어 봉황새는 임금을 가리키게 되었다.

121. 소호씨(少昊氏) :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김씨의 시조인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인데 황제헌원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나, 원래 소호(少昊, 少 )라는 자가 있었으며 소호는 소전과 함께 웅족인데, 소호를 서쪽의 제왕(帝王)인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도 하는 바, 아마도 소호의 자손중 소호금천씨라고 기록된 사람이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122. 수곡성(水谷城) : 함경도 함흥 근처로 고구려 장곡현(長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현재의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이다. 백제 수곡성은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123. 수곡성(水谷城) : 정평군(定平郡) 금진강변(金津江邊) 세류고성(細柳古城)으로 추정되며 토축이고 성둘레는 4228척이었다.

124. 수밀이국(須密爾國) : 훗날 우수국(牛首國), 우수주 등으로 불리었다. 우수하(牛水河)는 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 노하하(老哈河)로 추정된다. 적봉시(赤峯市)를 지나는 노하하의 서쪽 지류에 소소하(召蘇河)와 관련된다.

125. 수인(燧人) : 수인씨로 중국 삼황(복희씨,신농씨,수인씨)의 한 사람. 최초로 불을 사용했다고 한다.

126. 숙군성(宿軍城) : 영주자사의 치소이면서 용성의 동북에 있었다고 전하므로 진황도시 청룡현의 동북이며 요녕성과 경계 지역이 된다.

127. 숙군성(宿軍城) : 영주자사의 치소이면서 용성의 동북에 있었다고 전하므로 진황도시 청룡현의 동북이며 요녕성과 경계 지역이 된다.

128. 신독인(身毒人) : 인도(印度)사람.

129. 신성(新城) : 창도현 팔면성으로 비정한다.

130. 신시(神市) : 신시의 위치를 비정함에 있어,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근거로 하여 추적하여 보면, 기원전 4000년전부터 기원전 2000년까지 대릉하와 내몽고 적봉시의 홍산문화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심은 신수(神水)가 흐르던 부신시 자도대 호두구문화지다.

131. 신원목(申寃木) :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도록 설치한 나무.

132. 실직(悉直) : 강원도 삼척 땅이다.

133. 음즙벌국(音汁伐國)은 안강지방이며, 실직곡국(悉直谷國)은 삼척지방으로 군, 현을 가리킨다.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여, 신라의 군현을 국(國)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134. 쌍현성(雙峴城) : 서흥군의 대현산성이다.

135. 아리수(阿利水) : 예전의 압록하이던 오늘날의 동요하를 말한다.

136. 아사달(阿斯達) :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쓰여진 것이다. - 규원사화

단군 왕검이 즉위한 곳으로서 길림 평양, 또는 길림시 아사달로서 오늘날의 길림시를 가리킨다. 길림시 동편의 동단산성(東團山城)이나 용담산성(龍潭山城), 서단산성(西團山城)이 그 유적지이다.

137. 아이사타 : 사타여아(斯 麗阿) 라고도 함.(태백일사) 이 천산(天山) 줄기 중에서 알타이 산맥은 전설 속의 나반과 아만이 만난 아이사타(阿耳斯陀)의 전음으로 추정된다. 즉 알타이산맥은 구석기 시대의 바이칼 문명과 그 남쪽의 중앙아시아 문명이 만나는 곳이자 경계 지역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이사타(阿耳斯陀)는 바로 단군의 수도 아사달(阿斯達)의 고어로 고려한다. 아사달은 "높은 땅, 즉 신성한 땅"이라는 뜻이다.

138. 아차성(阿且城) : 아단성(阿旦城)의 오기일 수도 있는데 아단성은 선천군(宣川郡)으로 추정된다.

139. 탕지산 안덕향 : 오늘날의 북경 서쪽 당산(唐山)으로 추정된다.

140. 안라인(安羅人) : 안라국이 본래 홀본인(忽本人)이라고 하였는데 홀본은 비류수가 있는 중국의 사평시 서쪽 쌍료현 땅이다. 이 홀본인들은 고구려인 협보(陜父)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에서 다파라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다파라국 위치와 안라국의 위치는 같다.

태황릉비에 의하면 아소산(阿蘇山)을 경계로 북쪽에는 왜국(倭國; 百濟 侯國)이 남쪽에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성장한 안라국(安羅國)이 임나 10국의 하나로서 자리하였던 것이다. 임나 십국 중의 일국이 대마도 임나가라(인위가라)가 되며, 따라서 임나는 때때로 대마도를 가리키고 때로는 임나 10국이 있던 규슈(九州)와 한반도 남부를 말한다. 즉 고구려군은 대마도에 주둔하고 규슈에서는 안라국이 고구려를 대신하였다.

141. 안시성(安市城) : 옛날 안촌홀(舊 安寸忽)로 현제 태안현 손성자 이다.

6) 안파견(安巴堅) : 아버지라는 뜻이며 거발환(居發桓) 이라고도 한다. 안파견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를 세운다는 이름이며, 거발환은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정한다는 칭호이다.

14) 암연현(巖淵縣) : 와방점시(瓦房店市) 득리사진(得利寺鎭) 용담산성(龍潭山城)으로 추정한다.

60) 압록수(鴨록水) : 오늘날의 대요하(大遼河)로 지금이 압록이 아니다.

16)약수(弱水) :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내리는 강. 부력(浮力)이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 앉는다고 한다.

24) 양맥은 강평현으로 추정한다. 숙신은 길림시로 추정한다.

20) 양수(洋水) : 양천(洋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향현(西鄕縣) 남쪽 경계에서 시작된다.

12) 양운국(養雲國) : [진서(晉書)]에서 비리국으로부터 말을 타고 50일(산술적 의미는 확실치 않다. 같은 시대 왜인전의 기록에서 거리 표시가 불확실한 것과 마찬가지다.)을 간다고 하였다. 방향은 표시되지 않았다.

(雲)은 현재 우리말로 구름이며 일본어 고어(원시 부여어 추정)로는 구모이다. "구"와 "후"는 몽고족 말과 중국 말에서 호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후륜호의 근원이 되는 강을 몽고어로 케룰렌강이라 하고 중국어로는  헤를렌강으로 병음 표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얼호로부터 50일 거리로 기록한 것을 볼 때에 흑룡강성 북  쪽 흑룡강 지류인 후마하(呼瑪河) 부근이 양운국(養雲國)으로 추정된다.

5) 어하라(於瑕羅)는 어하(於河)의 땅(羅)으로 분석할 수 있다.  어하라(於瑕羅)는 지역 이름을 의미하는 "라"로 끝나고 어라하(於羅瑕)는 존칭의 의미가 있는 "하"로 끝나니 왕의 우리말 호칭이 될 수 있다.

14) 연타발(延타勃) : 후대의 소서노의 부친인 연타발과는 다른 사람으로 부여의 장수였다. 이러한 연타발의 동명이인은 혹 연타발이 부족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1) 연타발(延타勃) :  고구려 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召西努)의 부친이다.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3) 연호법(烟戶法) : 사람과 집 수를 조사하여 해마다 나라에 보고하는 법.

28) 염수(鹽水) : 하천 이름, 근원은 산서성 하읍현

14) 염제신농(炎帝神農) : 신농씨(神農氏)의 아버지는 소전(小典)인데 소전은 웅씨(고시씨의 방계이다.)에서 나누어졌다. 8세 안부연환웅이 소전에게 군병을 감시하라는 명을 내려 강수(姜水)에 갔다. 신농씨는 강수에서 온갖 풀의 맛을 보고 의약의 제도를 세우고 나중에 열산(列山)으로 이주하였다. 신농씨의 성(姓)은 강수에서 살아 강씨(姜氏)가 되었다.

18)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은 서기전 3218년 배달나라의 우가였던 신농이 건국한 배달나라의 제후국이다. 우가는 배달나라의 농사담당관이다. 지금의 농산부 장관과 같은 격의 벼슬이다. 염제신농이 우가였다는 것은 중국기록에서 염제신농이 인신우두(人身牛頭)이었다는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염제는 달리 적으면 적제(赤帝)이다. 즉 남쪽의 임금(帝)이라는 말이다. 염제신농은 진(陳)을 수도로 삼고 나중에 곡부(曲阜)로 옮겼다. 오방에는 오제가 있다. 즉 동, 서, 남, 북, 중앙을 맡은 임금을 가리킨다. 적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 신농이 우가에서 물러나 남쪽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염제라 부르는 것이다. 염제신농은 강성(姜姓)의 성씨를 가졌다. 즉 강씨라는 말이다. 염제신농국은 8대 520년간 이어졌는데, 8대 제유(帝楡)에 이르러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제유는 서기전 2753년 임금이 되었다. 이때 수도는 공상(空桑)으로 진류(陳留)라고도 한다. 모두 산동성 지역에 있다.

34) 영고탑성(寧古塔城) : 모란강이 흘러가는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부근인데 상소도(上蘇塗)라고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29) 영지(令支) : 나라 이름, 은(殷)이 망한 뒤에 고이(高夷)·고죽(孤竹)·영지(令支)가 남아 있었다.

7) 영지성(令支城) : 하북성 당산(唐山)의 동북 천안(遷安) 부근에 있었다.

4) 오가(五加) : 우가(牛加), 마가(馬加), 구가(狗加), 저가, 양가(羊加). 각기 관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부족의 대표격으로 추정이 된다. 일종의 오행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며 신석기시대 이후 가축화가 시도되면서, 신석기시대말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며 경제단위로서의 목축이 전개되었고 또한 고조선이 이들 목축중심의 부족들을 연합하여 문화공동체(지역공동체로, 정치공동체로 발전)로 발전된 것이다. 일종의 샤머니즘적 요소가 포함이 되어있다. 5가의 전통은 오늘날 윷놀이에도 남아있다.

·도(刀): 돼지(猪)의 옛말‘돝’에서 유래

·개(介): 개(狗)

·걸(乞): 양(羊)의 한자어 결(羊自:숫양)에서 유래

·윷(兪): 소(牛)의 옛말‘유’에서 유래

·모(毛): 말(馬)의 옛말‘몰’에서 유래

52) 오곡원(五谷原) : 황해도 서흥군이다. 즉 쌍현성을 쌓아 방어하던 곳이다.

27-2)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 2명을 번한(飜汗.番汗), 마한(馬汗)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최고위 관리를 오이, 마리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 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부여의 고위관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16) 옥저낙랑(沃沮樂浪) : 옥저의 낙랑국으로 철령시 최진보산성(鐵嶺市 催陣堡山城)으로 추정한다.

19) 옹호창 :  옹호산(雍狐山)에서 캐낸 쇠로 만든 갈라진 창

17) 와산성(蛙山城) : 충청북도 보은군 읍 부근에 와산이 있었다고 전하므로 보은의 노성산(老城山)으로 추정한다.

2) 왕검(王儉) : 대감(大監)이라는 뜻으로 신시(神市)시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11) 운장(雲章) : 조선과 부여의 전방 전초기지로 만번한 지역을 가리킨다. 군사적 목적이 강한 자치 행정구역적 성격을 띤 조직으로 생각되어진다. 상운장은  당시의 구려하인 유하근처이고, 하운장은 압록수인 요하 하류 반산(盤山)이 된다.

8) 웅습국(熊襲國) : 구마소(熊襲;九州)가 (백제에게) 조공을 하지 않아 이를 정벌하였는데, 부여로부터 도래한 의려(효령)왕과 의라(숭신)왕에게 이미 정복되어 규슈로부터 백제에 대한 조공이 그친 것이다.

1) 웅심산 : 흥안령(興安嶺)을 웅심산으로 추정한다.

3) 웅씨(熊氏) : 사아라환웅(배달나라 13세 환웅)초에 웅녀군의 후손을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封)함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었다.

45)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성.

49) 원산성(圓山城) : 선천군 대원산(大圓山)의 고성으로 추정한다.

20) 원산향(猿山鄕) :금산군 서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10)  위만 : 유방이 죽자 노관은 여황후(呂皇后)의 전횡(유씨 왕, 즉 자기 아들이 아닌 왕은 다 죽여버리는 처사)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흉노에 망명하였다. 이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이 번한(后新秋)으로 망명하였고, 번한왕은 위만에게 연나라와의 경계에 살면서 상하 운장(上下 雲章; 閭陽+黃泥崖)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번한왕 기준(箕準)을 속여서 번한성에 입성하였고 번한왕을 내몰 았으며 스스로 번한왕이 되었다.

50) 위천(葦川) :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남쪽 가물천(可勿川; 今 東路江)으로 추정한다.

21) 유망(楡罔) : 염제신농국의 마지막 왕으로 제유(帝楡)이다. BC 2753년 임금이 되었다.

13) 유소(有巢) :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삼황이전에 천왕씨, 지황씨, 인황씨, 유소씨가 있었다고 한다.

33) 유청(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22) 유철(劉徹) : 한(漢)의 무제(武帝), 경제(經濟)의 아들.

53) 을지문덕(乙支文德) : 고구려(高句麗) 석다산(石多山) 사람으로 고구려의 명장. 612년(영양왕 23) 수(隋)나라의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이 113만 여의 수륙양군(水陸兩軍)으로 고구려를 침범하자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실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적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거짓 패배를 가장하여 평양성(平壤城)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다. 이때 장군은 적장 우중문에게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라는 희롱의 시를 보냈다.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로 회군(回軍)하자, 을지문덕은 살수(薩水)에서 수나라의 후군(後軍)을 무찔러 대승하였다(薩水大捷).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20) 을파소(乙巴素) : 유리왕(琉璃王)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을파소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애하여 몸을 바친다.

7) 음즙벌국(音汁伐國)은 안강지방이며, 실직곡국(悉直谷國)은 삼척지방으로 군, 현을 가리킨다. 김부식이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여, 신라의 군현을 국(國)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4) 의로(懿路) : 요하 동쪽으로 철령시 남쪽(심양시북계)으로 추정된다.

15) 일군국(一群國) : [진서]에서 구막한국으로부터 150일을 말을 타고 간다고 하였다. 숙신으로부터는 대충 50000리라고 하였다.  러시아 알단(ALDAN)강 유역의 한디가(KHANDYGA) 부근으로 추정한다.

3) 엄리대수(淹利大水) : 개사수(蓋斯水), [한단고기]에서는 분릉수(분陵水)라고도 한다.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가 통하(通河)의 가섭원(迦葉原) 땅인데 가섭원은 개사원과 같은 "가시"를 어원으로 하는 말이고 현재 지명으로 통하는 이통하(伊通河), 개사수는 신개하(新凱河), 분릉수는 이통하와 송화강이 만난 곳을 이른다. 다시 말하면 분릉수의 가지가 이통하이고 이통하의 가지가 개사수이다.

12) 여성(黎城) :  산서성의 여성(黎城)이다.

56) 연개소문(淵蓋蘇文) : 혹 개금(蓋金)이라고 하며 성은 연(淵)씨며 그 조상은 봉성(鳳城) 사람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祚)이며 대대로 막리지(莫離支)를 지냈다.

30) 연나부(椽那部) : 고구려 오가(五加) 속에 있는 절노부(絶奴部).

12) 연비(延丕) : 후한서와 남북사에는 고구려후 추(鄒)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과라고도 한다. 이 고구려후 추가 바로 황룡국 여달왕으로 추정된다. 왕망은 이후에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하였는데, 졸본부여를 그렇게 부른 것이다.

21) 요거성(腰車城) : 함경남도 신흥군(新興郡)으로 추정된다.

요동(遼東) : 요동이라 함은 요하의 동쪽을 가리킨다. 그 서쪽은 요서라 하였다.

본래부터 고구려와 중국간의 접경지역으로 치열한 싸움이 계속된 지역으로 국력의 변화에 따라 그 위치가 달라졌다. 처음은 난하를 요하로 보아 그 동쪽을 요동이라 불리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중국의 팽창으로 서서히 동진하여 대능하를 경계로 하다. 지금은 현재의 요하를 사이에 두고 그 동쪽을 요동이라 한다.

또한 고구려의 요동성과 중국의 요동성이 각각 존재하였는데, 각 나라에서 보는 요동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의 요동성은 고구려 공략의 전초기지적 역할을 하고, 고구려의 요동성은 수당시대 요하(지금의 대능하)를 경계로 하는 전방방어기지로 그 중요함이 매우 컷다.

57) 요동성(遼東城) : 현제 창무시(彰武市)로 부여성(夫餘城) 혹은 불열국성(拂涅國城)이다.

18) 우거(右渠) : 위만(衛滿)의 손자 우거(右渠)는 북부여를 살수 이북으로 물리치고 요양의 연주산성으로 천도하였으나 한무제에게 토벌당했다.

16)우곡성(牛谷城) : 법동군(法洞郡)으로 추정한다.

16) 우루국(虞婁國 또는 畢那國) : [진서]에서 숙신국과 동일한 곳으로 취급하였다. 길림의 숙신국과 구별하면 러시아 접경의 우수리강 유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진서]의 우루국은 후대의 우루국이고 본래의 우루국은 요동반도 북부에 있었다.

20) 우산국(于山國) : 울릉도를 말한다.

47) 우산성(牛山城) : 강릉 명주 지방으로 추정된다.

40) 임나가라(任那加羅) : 대마도(對馬島)를 지칭한다.

6) 임나인(任那人) :  의라왕이 왜국에 오면서 중간에 대마도에 들려 임나를 건설하니 후에 왜국을 평정하니 임나인이 조공한 것이다.

36) 장당경 : 개원시 창도현(昌圖縣) 대영반석성이다.

5) 장량(張良) : 전한(前漢)때의 공신 소하(簫何)·한신(韓信)과 함께 한의 삼걸(三傑)의 한 사람.

39) 장령(長嶺) : 민주 길림성 영길현(永吉縣) 동북쪽에 있는 산.

10) 장령(長嶺) : 내몽고 적봉시(赤峰市)와 조양시(朝陽市) 경계인 영성(寧城)으로 추정한다.

51) 장안성(長安城) : 무순시 동쪽 신빈현(新賓縣) 영릉진(英陵鎭) 노성(老城) 즉 신빈현 혁도아라성이다.

24) 적현성(赤峴城) :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적봉(赤峰) 동쪽 성내리로 고려한다.

26) 졸본(卒本) : 고두막한이 일어난 곳으로 동요하와 서요하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졸본천은 비류수(동요하)의 한 가지인 현재의 온덕하이다.

4) 졸본부여 : 고두막한의 북부여이다. 해모수의 북부여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21) 좌원(坐原) : 구려하(句黎河)를 말한다. 오늘날의 수수하(秀水河)를 국경으로 지킨 것이다. 고구려의 좌원(坐原; 今 法庫縣)이 또한 이곳이다. 법고현 주지구(周地溝)가 좌원으로 추정된다.

9) 주인씨 :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13) 중마한 : 월지는 웅백다(熊伯多) 마한 조선의 개국지, 영변의 달지국(達支國)과 같은 곳으로 본다. 우리말 달지가 중국말 월지(月支)로 바뀐 것으로 본다. 따라서 중마한 탁의 월지국은 청천강패수 일대이다.

16) 중부여(中夫餘) : 북부여(北夫餘; 今 康平縣)에 비하여 개원시 일대가 중부여(中夫餘)인 것인 바, 단군 구물(丘勿) 이래 대부여(大夫餘)를 중부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28) 지남거(指南車) :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게끔 되어 있다.

45-1) 지두우(地豆于): 그 위치를 비정함에 대싱안링산맥부근으로 추정된다.

2) 진한 6부 :  이곳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유민으로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산산고야촌으로 진한 6부이다.

 

12) 국내 사서에 보이는 삼랑성과 참성단에 관한 기록.

* 혈구[강화도] 마니산에 행차하여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세 아들에게 혈구[강화도]의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고는 삼랑성이라 이름하였다.《동사년표》

* 병인 59년 단제께서 남쪽으로 순행하며 아사달에 이르러 봉선의 의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화에 이르러 세 아들에게 명하여 갑비고차[지금의 강화도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이라 이름하였으며 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설치하게 하고는 참성대라 이름하였다.)  《동사년표》

*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 규원사화

* 제천단은 강화의 마니산에 있다. 단군께서 혈구의 바다이며 마니의 언덕에 성을 파고 단을 쌓아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제단은 17척으로 돌을 쌓아 이루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사방이 각 6척 6촌이고 아래는 각 15척으로 둘려져 있다. 혹은 이르기를 [마니는 강화의 모퉁이이다. 그 땅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하고 깊어 신명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 까닭에 제사를 지내는 터를 세워 상제께 제를 올리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히 여기는 까닭에 제단을 이룰 때는 반드시 물 가운데 있는 산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게 하는 것은 땅과 하늘의 뜻을 담아 세우는 것이다] 하였다.)<<신단실기》에 인용된《동사(東史)》와《수산집(修山集)》

* 조선 인조 17년에 개축하였다.《신단실기》에 인용된《문헌비고(文獻備考)》

* 조선 숙종 26년 5월에 고쳐 쌓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여 이르기를 [동녘 땅 수천 리를 둘러보면 강도가 바로 보호하여 위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땅이며, 강도 수백 리를 둘러보면 마니가 바로 섶을 태우며 멀리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명산이다. 산의 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이루니 곧 참성단이라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께서 그것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 되돌아보건대 연대는 아득하여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서쪽과 북쪽의 두 면은 태반이 헐어 무너지고 동쪽 가 편의 뜰 층계도 또한 많이 기울어졌다. 고을의 어른들이 서로 슬퍼하고 탄식한지 오래였다. 재주도 없는 내가 외람되게 이 지방의 유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해 봄에 순찰하며 살피던 중 한 번 올라가 보고는 개연히 거듭 수리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총섭승 신묵이 그 일을 주관하여 개축하니 20일만에 공사를 마쳤다. 오호라!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결손된 것을 보충하여 옛 모습이 폐기되지 않게 함은 관리되는 자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께서는 요 임금과 같은 세대에 나셨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 민족의 조상이며, 제단이 설치된 곳 또한 둥글게 에워 쌓인 언덕의 정결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수천 년을 지내 오며 지금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공경을 받아 오는 곳이니 수리하여 보완하는 일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자고 신묵이 요청하니 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노라.) [유수 최석항 지음]  《신단실기》

16) 창힐(倉詰) : 창힐은 중국기록에 의하면 새의 발자국 모양을 글자로 푠현한 조족문자(鳥足文字)를 만들어 한자(漢字)를 최초로 만든사람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실제로는 창힐이 배달나라의 글인 녹도문(鹿圖文)인 부도문(符圖文)을 배워가 황제헌원에게 가르쳐 준 것이 된다.

55) 천리장성(千里長城) : 부여성(夫餘城; 今 彰武市=遼東城= 拂涅國城)에서 서남쪽의 바다까지 쌓았다. 즉 천리장성이 당시 수도 장안성의 남쪽까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제까지 추정해온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한 천리장성은 고구려 국토의 상당 부분을 바깥으로 하고 있으므로 잘못 비정된 것이다. 부여성은 [요사지리지]에서 불열국성이었다는 고구려 요동성인 창무시로 보아야 하고 그 서남쪽의 바다는 반금시 부근으로 추정한다.

3) 천문령(天門嶺) : 무순시 청원현 남천문 부근으로 추정한다.

4-1) 천부인(天符印) : 천부인이란 군장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일반적으로 고인돌등을 발굴하게 되면 늘 함께 발견되어지는 비파형동검, 번개무늬청동거울, 청동방울을 의미하지만, 이건 청동기가 보편화 되어진 조선시대 단군의 천부인이었을 것이다. 즉 환웅시대의 천부인으로는 마제석검, 번개무늬(혹은 뱀, 용 문양)석판 또는 옥판, 타동기(석판악기) 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고높게 비서갑(斐西甲)의 경내에 우뚝 서 있다.

水를 뒤로 업고 山을 안고 있는데 크고 둥그렇게 돌아가는 곳(四焉之處)이 있는데 大日王이 祭天하는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이곳까지 순수하시어 사냥하시고 제사를 지낸 곳'이라한다.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면서 환무하고 운사(雲師)는 백검(佰劒)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 의식은 장중하고 위엄있었다. 즉 천부의 거울인 번개무늬석판과 북으로 보이는 타동기(후에 방울로 대체) 그리고 백검 즉 흰색 마제석검(후에 청동검으로 대체)이 천부인이 아닐까 추정이 된다.
5)) 천산(天山) : 옛 이름은 백산(白山) ·설산(雪山)· 기련산(祁連山), 천산산맥의 동쪽의 산.

 천산은 어느 한 곳으로 국한되게 보면 안될 것이다. 즉 천산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현재의 천산산맥의 부근과 바이칼 서쪽의 새하얀산 즉 Sayan Mt.으로 구석기 문화인 말타(malta)유적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주인공은 황인종으로 밝혀져 있다.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환인의 나라, 최초의 천산(天山)은 바이칼 호수의 남쪽 한가이(杭愛) 산맥, 셀렝가(SELENGA)강 부근으로 추정되고, 현재의 중국 서북쪽 국경 천산산맥(天山山脈)도 당시의 천산(天山)으로 유력하다. 중국과 키르키즈의 국경을 이루는 천산산맥에는 한텡그리산(汗騰格里峯;6995M)이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천산(天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엇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다만 현재의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 한가이산맥이 모두 합쳐서 하나의 중심으로서 당시의 천산(天山)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3) 천정군 : 원산 지방이다.

8) 천해(天海) : 혹은 북해(北海)라고도 하며 지금의 바이칼 호수로 추정된다.

36) 청목령(淸木嶺) : 청목령은 고구려와의 주요 통로이므로 고구려 집안 평양에서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의 만포천을 따라 청천강 상류를 타고 내려오는 길목으로 추정된다. 성을 쌓았는데 청목성(淸木城)이고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고읍성(古邑城)으로 본다.

최숭(崔崇) : 최씨낙랑의 왕. 기원전 195년에 낙랑국(樂浪國)의 후예가 해모수에게 패전하여 철령시 낙랑홀 땅에서 마한의 왕검성 주위, 즉 대동강변으로 이주하였다. 최씨 낙랑은 낙랑홀, 즉 철령시 최진보산성에 살다가 해모수(解慕漱) 북부여의 성립에 의해 그 압력으로 마한땅으로 옮겨간 것이다. 철령시의 낙랑인들이 마한에 옮겨가서 상륙한 곳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부근으로 추정한다.

최씨낙랑(崔氏樂浪) : 낙랑국의 한 분파. 해부루에 패하여 한반도로 이주하고 남은 최숭의 후예로 일명 옥저낙랑(沃沮樂浪) 이라고도 하며 철령시 최진보산성(鐵嶺市 催陣堡山城)으로 추정한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로 잘 알려진 낙랑이 바로 최씨낙랑으로, AD33년 고구려 대무신왕때에 낙랑왕 최리(崔理)가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46) 치양성(雉壤城) : 치양(稚壤)은 영흥군(永興郡) 서쪽 70리에 있었다는 평주진(平州鎭)으로서 현재 요덕군(耀德郡) 선흥면(宣興面)의 고성(古城)이 된다.

8)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족원(族源)과 천사(遷徙) : 족원(族源)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라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 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   귀주민족출판사(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 596만, 이족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탐라국(耽羅國)  : 고대 제주도를 일컷는 말. 다파나국의 후신으로 추정이 된다. 백제 문주왕 2년(AD476)에 백제에 조공한 기록으로 보아 이시기에 백제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문무왕 2년(AD662)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17) 탁순(卓淳) : 탁씨(卓氏)가 살았던 산청군 단성(丹城)면 부근으로 추정한다.

15) 탕정성(湯井城) : 충청남도 온양의 온양성.

8) 통도(桶道) : 용도성과 같은 말로 생각된다. 용도성은 북경의 북쪽에 있었다.

25) 통하 : 오늘날의 이통하(伊通河)이고 가섭원은 우리 고어에서 개사원과 같은 발음으로서 장춘 서북쪽의 부여시 백도눌성 일대를 가리킨다. 가섭원(迦葉原)  금와(金蛙)가 도읍한 땅이름. 원(原)은 벌판이라는 뜻이다.

9) 파내류국(波奈留國) : 진서(晋書)에 보면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요, 서쪽은 구만한국 (寇漫汗國)이요, 북쪽은 약수(弱水)의 끝이다.

바이칼 호수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천해의 동쪽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세워진 환국의 중심은 오늘날의 내몽고자치구의 후륜바얼(呼倫巴爾)지구로 추정한다. 뜻으로 백산(白山)이며, 발음으로 파나류산(波奈留山)이 되는 곳은 오늘날의 바얼산(巴爾山)으로 추정되는데, 후륜바얼(呼倫巴爾)지구는 후륜호(呼倫湖)와 바얼호(巴爾湖, 몽고와 접경으로서 몽고에서는 부이르 호라고 하고 비류수, 비리국의 어원이다.), 하라하하(哈拉哈河), 하이라얼(海拉爾), 아무구랑(阿穆古郞), 백랑산(白狼山), 아얼산 (阿爾山)등의 지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8) 파리성(波里城) : 현재 삼척지방이다.

37) 팔곤성(八坤城) : 요동반도 애양현(애陽縣) 관수진(灌水鎭) 고대자산성(高臺子山城)으로 추정한다.

2) 패대수(浿帶水) : [한서지리지]의 패수와 대수로서 각각 요양시 태자하(太子河)와 해성시 해성하(海城河)를 가리킨다.

36) 패수(浿水) :  패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으로 백제기 371년 근초고제 26년에 싸웠던 패하(浿河)는 단군 시대 패수인 중국 요양시의 태자하(太子河)로 추정된다.

패하(浿河) : 중국 요양시의 태자하(太子河)이다.

평양(平陽) : 고구려에서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 고구려 최초 평양의 등장은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평양성을 새로 쌓고 천도 하였는데, (AD247) 현재의 무순시(撫順市) 서북쪽 기반산의 기수(淇水) 상류로 위치는 철령시 최진보산성이다. 그러다가, 연의 침략에 대비 하여 환도성을 개축하고 다시 수도를 환도로 옮기는데, 모용황에 의해 환도성이 다시 불타자,(AD342) 다음해에 평양 동쪽 황성으로 천도 하였다. 이때의 평양은 집안이다. 그런데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승하를 하게 된다. 고구려의 팽창에 발 맞추어 장수왕에 의해 새로운 평양(무순시 고이산성)으로 천도를 하고(AD427), 586년 평원왕때 장안성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당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망한 평양은 지금의 대동강 평양으로, 그 천도가 명확한 기록이 없다.

이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 즉 남평양성으로, [한단고기]에 의하면 642년에 있었던 연개소문의 반정 때에 영류왕(榮留王)이 송양(松壤)으로 도망쳤는데, 송양은 오늘날의 평양 동쪽 강동군의 고지명이다. 영류왕은 송양에서 조서를 내려 대신을 모아 연개소문에게 반격하려다가 실패하고 죽었다. 따라서 이 영류왕 시해 사건 전의 고구려 수도는 이미 오늘날의 평양이다.

16) 하단갑(河亶甲) : 은나라 제 12 대왕.

하백(河伯) : 지금의 요하 중류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예족의 족장이름. 유화의 아버지이다. 신화로는 물을 다스리는 물의 신이라고 한다.

23) 사군(四郡) :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은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군(眞番郡)이고 현도군은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

19) 하슬라주(何瑟羅州) : 강릉지방이다.

33) 한산(漢山) : 평양 동쪽 대성산성, 안학궁 일대이다.

43) 한성(漢城) : 평산한성(平山漢城)으로 하남 위례성이다. 아신제가 광개토황에게 한수 즉 대동강 이북 땅을 잃고 이곳으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19) 한수(漢水)는 평양의 대동강이고, 한강(漢江)이 서울 한강이다.

32) 항산(恒山)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산서성(山西城) 경계의 구주산(句注山)에서 시작된다.

11) 해명(海明) : 유리왕 27년, 서기 8년에 왕자 해명은 황룡국왕(黃龍國王)의 선물인 활을 훼손하여 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유리왕은 해명왕자를 자결토록 하였다.이 황룡국왕은 바로 졸본부여의 고구려 여달왕(閭達)으로 추정된다.

18) 해성(海城) : 만주 요령성 무순시.

38) 해성 : 무순시 망화구(撫順 望花區)의 옛이름 해성(海城)으로 인하여 무순시 망화구로 추정된다.

6) 험독(險瀆) : 창려의 동남이면서 평곽의 서쪽에 있는 험독현은 반산현으로 추정한다.

32) 현도 : 노룡현의 요동성과 수중현의 현도성.

51) 혈성(穴城) : 요동반도 수암성(岫巖城)으로 추정된다.

27-2)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 2명을 번한(飜汗.番汗), 마한(馬汗)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최고위 관리를 오이, 마리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 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부여의 고위관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15) 호동(好童) :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둘째비 갈사왕 손녀의 소생으로 용모가 아름답고 수려하였다. 낙랑공주가 그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후 그도 자살하였다.

4) 홀한성(忽汗城) : 통화시 대통구(大統溝) 나통산성(羅通山城), 즉 천통성으로 추정된다.

22) 홀한주 : 발해의 중경현덕부이면서, 현제 무순시 신빈현 영릉진 노성으로 추정하는 곳이다.

4) 화려, 불내 : 최리의 낙랑의 후예로  낙랑의 두 현민으로 추정된다.

21) 환도성(丸都城) : <광개토태황 비문>에서 비류수가의 홀본동강(忽本東崗)으로 기록한 사평시 쌍료현의 대하라파산이 환도성이다.

4) 환인(桓仁) : 삼성기 전편에서는 桓仁을 桓因으로 표기하고 규원사화에서도 "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라하여 환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태백일사나 삼성기 후편에 仁으로 표시하니 거기에 따른다.

21) 환화(桓花) : 무궁화.

6) 황산진(黃山津) : 현재의 양산을 말한다.

28) 황성(黃城) : 집안(集安)의 성산자산성.

황수 : 오늘날의 내몽고 파림좌기(巴林左旗)라는 곳의 아래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倫河, 즉 임황수)가 발해의 서쪽 경계라는 것이다. 오주목(烏珠牧)이 현재의 오이길목(烏爾吉木)이다.

17) 황제헌원(黃帝軒轅) : 배달나라 유웅국(有熊國)의 시조가 된 소전(少典)의 후손에 공손씨(公孫氏)가 있었다. 소전은 염제신농의 아버지이다. 소전은 소호와 함께 고시씨(高矢氏)의 방계 후손이다. 공손씨는 서기전 2760년경 감병(監兵)을 잘못하여 헌구(軒丘)로 유배되었던 사람이다. 즉 소전이 강수(姜水)에서 감병을 담당하였는데, 그 아들인 신농은 배달나라 우가가 되어 나중에 염제국에 봉해졌고, 다른 후손인 공손씨가 감병을 세습하였는데, 군사 훈련과 감독을 게을리하여 처벌을 받아 헌구로 유배를 갔던 것이다. 공손씨의 자손에 헌원이 있었다. 바로 황제가 된 헌원이다. 헌원(軒轅)의 이름은 바로 헌구(軒丘)에서 땄다. 헌원은 헌구의 토착세력의 우두머리였다. 헌원의 원래 성씨는 공손씨이다. 공손이라는 말은 곰의 후손이라는 뜻의 이두식 표기이다. 즉 웅족이라는 말이다. 헌원의 나라를 소전의 유웅국의 후계국이므로 웅국(熊國)이라고도 한다. 황제헌원은 나중에 성씨를 희(姬)로 바꾸었다. 황제헌원을 별고(別孤) 즉 아비없는 자식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공손씨의 후손으로써 훗날 서방족(환웅족의 동방족의 반대 개념으로 한(漢)족의 뿌리족속)이 있는 서릉지방의 누저에게 장가들어 데릴사위로 들어간후 서방족을 대변하게 된다.

26) 회대(淮岱) :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그리고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48) 횡악산(橫岳山) : 황해도 신평군(新坪郡)의 달보산성(達堡山城)으로 달보산(달보산, 801M)으로 추정된다.

흉노(匈奴) : 만주(滿洲)에 거주한 기마족(騎馬族)이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중국인들에게 해(害)를 끼친다고 하여 중국인들이 만주에 거주한 기마족을 멸시(蔑視)하여 부른 명칭이다. 이 흉노는 넓은 의미로는 만주에 거주한 모든 기마족을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몽고 방면에 거주한 기마족만 가리킨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만주에 거주한 기마족이 여러 가지 명칭으로 적혀 있는데, 중국에 해(害)를 끼친다고 흉노(匈奴)로,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무리라고 하여 불여(不黎.夫餘)로, 직업을 기준으로 하여 유목족이 호(胡)로, 농어업족이 예(濊)로, 사냥족이 맥(貊)으로,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 조선(朝鮮)으로 각 적혀 있다.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국가의 명칭.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 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술·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와 그 아우인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48). 남흉노는 간쑤[甘肅]·산시[陝西]·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북량(北凉)·하(夏)를 세위,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91),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그 후 흉노의 잔당들은 선비, 또는 유연(柔然) 등 국가에 복속하였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진(秦)·한을 위협했던 흉노의 자손이 바로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불러일으키는 인연이 된 훈족이라는 설이 있다. 이 문제는 처음으로 학계에 제출된 지 2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흉노의, 다분히 지배층의 서방 이동과 훈족의 서방 이동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훈족이라는 이름이 흉노에 유래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몽골계(系)·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굴된 한식(漢式) 궁전은 흉노에게 항복한 한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것이라고 한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4)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 1세 거발환(居發桓) 환웅은 환인의 환국이 있던 파나류산(波奈留山)의 후륜바얼(呼倫巴爾) 지구, 하이라얼(海拉爾)에서 출발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리하여 그가 나아간 곳에도 새로운 흑수(黑水), 백산(白山)을 정하여 이름을 붙였다.

이후에 생겨난 흑수(黑水), 백산(白山)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하이라얼 (海拉爾)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는 길림성 백성시(白城市)가 있고, 두번째로 길림시(吉林市)를 들 수 있으며, 세번째로는 내몽고 자치구의 적봉시(赤峰市)가 가능하다.

9) 흑수부(黑水府) : 백성시 흑수진(黑水鎭) 부근으로 추정된다.

3) 구환(九桓) : 황이(黃夷), 백이(白夷), 현이(玄夷), 적이(赤夷), 남이(藍夷 - 풍이(風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견이로 족속의 모양에 따라 나눈 것으로 보인다.

18) 3도 : 왜국(倭國), 일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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