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고려의 땅은 베이징 바로 동쪽이었다. (??)

2015. 5. 22. 00:05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과 고려의 땅은 베이징 바로 동쪽이었다.(??) view 발행 | 조선전기영토

 

손에 손잡고 2011.06.03 17:55

      

早發過楡林堡。抵十三山驛

구전집(苟全集) 조선 중기의 학자 김중청(金中淸:1567~1629)의 시문집

유림보를 지나서 십삼산역에 다다랐다.

 

십삼산역(十三山驛) : 요동 지휘사사(遼東指揮使司) 광녕위(廣寧衛)의 서남쪽 70리의 십삼산보(十三山堡)에 있는 역(驛)이며 그 80리에는 금주(錦州) 소릉하역(小凌河驛)이 있다. <讀史方輿紀要 卷37> 독사방요기요는 명나라지리지

 

유림보를 지나니 나타난 것은 명나라 광녕땅이었다. 의무려산 역시 광녕땅에 있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31 청나라고지도

 

楡關在薊州北百餘里

錄 북송떄 路振이 쓴 글

유관은 계주 북쪽 100여리에 있다.

 

원사에 보면 금나라 중도를 계주로 바꾸었다고 써있고 지금 베이징시를 모든 사람이 금나라 중도라고 하니 지금 베이징시 북쪽100리에 유관이 있어야 한다. 마침 고지도에도 유림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수 있다 유림은 유관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결국 명나라 요동성이라고 한 지금의 창평성 서쪽에 명나라 광녕땅이 있음이 증명되었다.

 

                                                                                      원나라고지도

 

                 원나라고지도도 같은 내용을 닮고 있다. 계주 즉 지금 베이징시 북쪽으로 목엽산과 의무려산이 있고 유관도 있다.

 

   강전(康戩)의 자(字)는 휴우(休祐)이니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윤(允)인데 고려에 있었으며 3세(世)로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전이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 무렵 홀승성(紇升城)에서 거란과 교전(交戰)하였는데 전이 윤을 따라 목엽산(木葉山) 아래서 전투를 하다가 연달아 두 개의 화살을 맞고도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그 뒤 거란에게 함락되어 묵두령(墨斗嶺 광인령(廣仁領))에서 은둔(隱遁) 생활을 하면서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렀다가 샛길로 고려에 돌아왔는데, 그때에 아버지인 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송사전(宋史筌) 고려열전(高麗列傳)

 

   고려군이 거란군과 목엽산 즉 광녕(의무려산 일대)의 서쪽에서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천추태후라는 드라마를 보면 천추태후가 고구려 옛땅을 되찾기 위해 북진을 준비했지만 북진한 적은 없다고 나온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보면 고려가 북진한 적이 있다. 그러니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제대로 연구하고 후학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엉터리로 가르치니 우리 민족이 패배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용주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요사지리지

 

발해의 부여부가 지금 베이징시 서쪽임을 알수 있다. 또한 고려군과 거란군이 싸운곳 역시 베이징시 서쪽임도 알수 있다. 실제로 베이징동북쪽에 고려영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것을 기록에는 고구려군과 당태종이 싸울때 고구려군주둔지라고 하는데 나는 이 곳이 고려군 역시 주둔했던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맞다는 것이 또 한번 입증된다.

 

권남(權擥)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천제(天帝)가 태자(太子)인 해모수를 보내어 부여(扶餘)의 고도(古都)에 하강하게 하였는데, 그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따르는 사람은 1백여 명으로 흰따오기[白鵠]를 탔다. 채색 구름이 그 위에 떠 있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오더니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러 10일을 지난 뒤에 비로소 하강하였다. 머리에 조우관(鳥羽冠 새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검(龍光劒)을 찼는데,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에서 이를 천왕(天王)이라 하였다. 이때는 곧 한(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 4월 8일이다.”
하였고,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것 역시 같되 더욱 모순되어 믿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고도(古都)는 곧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니 대요(大遼) 의주(醫州)에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요나라 의주는 의무려산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고 즉 다른 말로 광녕이다. 발해의 부여부였으며 최초의 부여의 수도였다. 우리 고대기록에는 단군이 아들 해모수를 부여왕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바로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천자의 정통성을 가진 단군은 아들 해모수에게 그 지위를 넘겼고 그래서 부여왕은 천자가 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의 직계라고 주장한 것도 사실은 부여의 직계가 바로 천자의 정통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遼於其下。置醫州玄菟郡。距洛陽東北四千里。所屬三縣。高勾麗是其一焉。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本。蓋漢玄菟郡之界。遼國東京之西。漢志所謂玄菟屬縣高勾麗是歟。昔遼未亡。遼帝在燕京時。吾人朝聘者。過247_582d東京。涉遼水。一兩日。行至醫州。以向燕薊

수산집(修山集 )조선후기문집

 

주례에 북진 의무려산이라는 것은 요나라가 그 아래에 의주현도군을 설치했다. 중략 한나라 현도군의 땅은 요나라 동경의 서쪽을 말하는 것으로 중략 요나라 황제가 연경(지금 대동시일대)에 있을때 우리의 사신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의주에 다다른 뒤에 연계지방을 향해 갔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982요나라의 남경은 대동시에서 그 서쪽,

 

위의 기록으로 조선시대에 고구려의 현도군이라 생각했던 지방이 지금 베이징시 북쪽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하연·황보인·박종우·정갑손·정인지·허후를 불러 이르기를,
“지금 혜성이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의 분도(分度)에 나타났다 하니 재변을 면하게 하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며, 재변을 사라지게 할 도량(道場)을 베푸는 일도 또한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국역조선왕조실록 >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

 

조선이 고구려의 현도라고 생각한 땅은 조선땅에 일부 속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혜성이 나타난 보고를 받았을까?

 

 

 

                                                                                      동국지도

   세조 때 작성되었다고 알려진 동국지도에 분명히 낙랑과 고요동이 있다. 요동 다음이 현도이기 때문에 조선은 현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고 베이징 북쪽의 장성 근처까지 이미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고려는 요나라를 치기위해 대군을 동원해서 북벌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송사고려열전에 위와 같은 기록이 나온 것이다. 고려가 대군을 동원한 이유는 베이징 서쪽 일대가 발해의 부여부였기 때문이다. 즉 발해와 고구려땅을 수복하려 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고려의 땅과 거의 비슷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서북쪽은 배나 넓혔다. 왜냐면 고려 당시 요나라의 땅을 조선은 상당 부분 차지했기 때문에 거란요의 땅이 조선땅에 있다고 지도에다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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