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

2015. 5. 22. 14:52우리 역사 바로알기

 

 

 

 

 

       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

 

등불 (ste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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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때부터 오늘날까지 잊혀졌던 김유신의 평양왕국과 신라의 북방영토>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은 한국사를 피동적, 타율적으로 인식시키는데에 있다. 그중에 신라사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학자들도 나당전쟁과 삼국통일기를 보는 관점은 식민사관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영하, 서영교를 비롯한 일부는 더 나아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백제를 통합한 것에 불과하다거나, 나당전쟁은 승리가 아니고 당이 토번의 발호때문에 한반도를 방기했을 뿐이다고 하여 일본과 중국 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또한 식민사관의 나당전쟁인식은 고구려 부흥군에 초점을 두고 신라의 역량을 축소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는 식민사관의 아류인 현재의 민족사관도 마찬가지여서 철저하게 신라의 관점을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라사를 주체적 관점으로 신라의 관점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나오고 있는데, 강경구의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  그리고 이상훈의 <나당전쟁 연구>는 타율적 역사관을 벗어나게하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신라가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부흥군을 직간접적으로 통제, 제어, 지원하였고, 평양지역이 군사적으로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밝히고, 최종적으로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당을 요동으로 몰아내었다는 관점이다.

 

 

 

<1>신라사를 주체적 관점으로 본 강경구의 책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의 줄거리를 살펴본다.

 

   그는 668년 평양 함락의 과정을 논증하면서 신라군이 평양 동북 대성산에서 당군과 합류하였다고 보았으며,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포위하여 신라군은 평양 소성에서 승리하고 평양성 북문, 평양 남교(南橋)등에서 공격하였고, 평양 내성 남문은 승병대장 신성(信誠)의 내응에 의해 문이 열려 신라가 항복을 받아 낸다.

결론적으로 당군은 외부 포위에 치중하고, 신라군이 백병전에 투입된 것이 평양성 함락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평양지방이 발해의 세력권이다가 고려에 와서 수복한 것으로 보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물론이고 실학을 거쳐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신라가 평양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인데, 그러한 인식이 달라진 계기가 일제강점기때 일제 관학자들이 통일신라의 국경을 대동강으로 고정하면서 부터이고, 우리가 그 식민사관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현재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저자는 신라가 평양 일대에 진출한 것이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라고 보고, 평양지역을 관리한 신라 측 주체를 김유신과 그 가문으로 보았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당이 평양을 접수한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당이 신라와 분할 관리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평양의 안동도호부 설치는 1년도 안돼 669년에 요동으로 옮겼고, 당이 나당전쟁에 패해 요동으로 물러나기까지 실효적 지배는 하지 못했고, 신라 김유신 가문의 군대도 당군과 같이 처음부터 평양을 진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측은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이후에 안동도호부를 일시 설치했지만 669년 요동의 신성으로 일시 이전되었다. 671년 9월 나당전쟁이 시작되면서 당군은 평양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하였고,

672년 8월에 평양 인근의 마읍성과 한시성에서 전투가 있었다.)

 

   신라는 661년 7월 예성강과 대동강 유역에 작전권을 부여하는 양하도총관에 김유신을 임명하였고,

당 또한 김유신에게 665년에 평양군개국공(平壤君開國公)으로 책봉하여 평양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보장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분열책을 썼다,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설인귀를 평양에 잔류시키면서 평양군공에 봉책하였지만, 저자는 고구려 멸망 직후 평양은 신라의 김유신가문이 당측의 설인귀와 함께 진수하고 있었다고 보았으며, 설인귀의 당군이 신라군의 직간접 통제와 지원을 받고 연합을 한 고구려 부흥군에 밀려 669년 평양에서 철수함으로써 평양지역 통치권은 김유신 군대로 넘어갔다고 본다.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부흥군의 주요인물 3인방 안승, 검모잠, 고연무는 모두 신라와 직간접적으로 통제와 지원을 받으면서 연합하고 있음을 저자는 사료를 근거로 보여준다. 사료상으로는 안승은 669년에 신라로 귀순하여 활동하였고, 검모잠의 행적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관인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이동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고연무도 670년 3월 신라 설오유와 함께 각각 1만명씩 군대를 연합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공격하였다, 673년 5월 고연무를 중심으로 한 부흥군 주력이 최후의 거점인 예성강지역을 상실하고 신라로 망명하였고, 680년이 되면 안승 휘하에 대장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672년에 평양 부근에서 당과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김유신의 아들 원술이고, 675년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물리칠 때도 원술은 참여하여 승리를 이끌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신라가 당의 요청을 받고 발해를 공격할 때도 신라측에서는 김유신의 손자 윤충, 윤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출정하였음 등을 들어 김유신 가문이 평양지역의 지배권을 계속하여 가지고 있었음을 주장한다.

 

   특히 성덕왕이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 영유를 공인받은 후, (발해가 완전한 국가로 존재하므로 이는 명목상의 정치행위일 뿐이고, 사료상으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신라의 북방영역에 대한 인식은 압록강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유신 가문의 인사가 주축이 되어 평양지방을 감찰하고 있고(삼국사기 성덕왕 35년조), 김유신의 후손인 김암이 패강진 두상(頭上)으로 취임한 것도 김유신가문의 평양지배와 관련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패강과 패강진의 위치 비정 문제는 시대와 상황 변화에 따라 이동이 있었다고 본다.)

 

   한편 저자는 675년 매초성 승리로 당이 평양지방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676년 신라가 당군과 마지막으로 벌인 전투가 도림성 전투인데, 그 위치 비정을 종래의 통설인 강원도 통천부근으로 보지않고, 도림성 전투가 청천강 이북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무시해왔던, 유일하게 김유신 군대의 평양 진수 사실을 기록에 전하고 있는 향고기(鄕古記)의 가치를 강조한다.

삼국유사 문무왕조에 보면 그런데 <향고기>에서는 당나라에서 육군 장군 공공, 수군 장군 유상 등과 함께 신라 김유신 등으로 하여금 (평양 지방을) 진수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삼국사기) 김유신이 없고 김인문, 김흠춘만 있으니 이상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저자(著者)는 고구려 멸망후 평양성은 당군과 함께 신라 김유신 군대가 진수하고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명기하고 있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향고기>는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유신의 군대와 가문이 고구려 멸망 후부터 계속하여 평양지역에 지배권을 가졌고, 나당전쟁 승리후부터 김유신 가문의 후손들의 행적을 근거로 평양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 유지하였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당을 물리친 후 신라는 평양지역을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이 아닌 김유신 가문의 군벌이 관할하게 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 말미에 첨부된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있는 지명들을 서북방 지명들로 보았다. 또한 당측이 성덕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신라가 패강지역에 를 설치하려 한다고 지적한 국서 내용을 근거로 들면서 신라가 평양지역을 포함한 서북방에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제가 아닌 특별 군사지역인 향성(鄕成)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이제 식민사관의 틀에서 극복할 때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압록강 일대가 신라의 옛지역이라는 언급이 나오고, 1107년 윤관 장군이 동북방 여진을 정벌할 때도 스스로의 공적을 신라의 김유신에 비기고자 하였다. 즉 12세기 고려인들은 압록강을 북방경계라는 의미에서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이는 신라에서 계승되었다고 하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이상훈)

   적어도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부터 조선후기까지는 신라가 평양일대와 서북방 지역을 관리,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 인식이었음을 밝히면서, 우리가 일제의 시각이 아닌 한국의 주체적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 강경구가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에서 논증하려던 바일 것이다.

 

 

<2>나당전쟁의 인식 문제 (이상훈의 나당전쟁연구 참조)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의 연장이냐 아니면 고려 조선시대의 일반적 인식이었던 우리의 주체적 관점이냐의 문제이다.

나당전쟁의 종전이 신라의 승리로 보는가 아니면 당이 한반도를 방기해서 얻어진 결과이냐의 인식문제는, 일본과 중국의 이해관계(식민사관과 중화사관)가 합치되는 지점에 있기에 중국과 일본은 신라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도 식민사관의 연장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나당전쟁의 결과가 백제통합에 불과하다거나, 토번의 역할만 강조하고 신라의 역할을 평가절하 하거나, 신라가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부흥군을 직간접적으로 통제,지원하면서 나당전쟁을 이끌어 갔는데도 고구려 부흥군만을 확대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일제 관학자들이 발해사를 만주사로 보면서 발해영역을 확장시켰고, 이에 따라 신라영역을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시켰는데, 우리는 지금 그 아류를 철저히 답습하고 있다. )

 

668년 9월 평양 함락 직전에 급찬 김동암이 전격적으로 왜를 방문한다. 이는 당과의 충돌을 미리 예상하고 신라가 왜에 대해 화해를 타진하고, 우호중립화정책을 취한것으로 볼 수 있다(이상훈)

668년 10월 평양 함락으로 고구려 멸망

669년 초엽 신라가 백제 고지를 공격하여 당군과 충돌한다.

           이때부터 나당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669년 2월 고구려 안승은 신라로 투항한다.

669년 5월 당이 신라의 사자를 억류한다.

(당이 신라 사자를 억류한 것은 두나라가 전후처리를 놓고 대립하고 있고, 서로간에 전쟁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하며, 나당전쟁의 시작은 전후처리를 놓고 대립하던 가운데 신라가 먼저 일으킨 것이다.)

669년 9월 토번이 당을 공격

670년 정월 당이 신라 사자를 다시 억류하고, 수군으로 신라를 공격한다.

670면 3월 설오유의 신라군과 고연무의 고구려부흥군이 연합하여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선제공격한다.

              (이 시기 압록강 이남에 대한 당의 통제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670년 4월 검모잠이 평양 남쪽으로 가서 당 관인과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갔다.

          (669년에 이미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이전되었는데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으로 인해 평양일대는 당의 통제권에서 벗어난다.)

670년 6월 검모잠은 신라의 사야도에서 안승을 만나 임금으로 삼았다.

670년 7월 신라가 백제고지를 전면 공격하여 백제의 82개성을 점령한다.

671년 <답설인귀서>의 내용은 신라의 입장에서 대전제가 되는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의 전영토를 약속대로 내놓으라는 뜻이며 당이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과 결전할 수밖에 없다는 결연한 선전포고문이다(이호영)

671년 9월 당이 번병 4만병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 진지를 구축한다.

672녀 8월 당군이 평양 인근 한시성과 마읍성을 공격한다.

          (한시성과 마읍성을 지키는 주체는 신라군이거나 신라의 직간접 통제와 지원을 받는 고구려 부흥군일 것이다.)

675년 9월 신라가 매초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한다.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당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

 

   “나당전쟁의 시기구분은 신라가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는 동시에 국지전을 수행하여 요동을 선제

공격하는 공격하는 단계인 개전기(669~670),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 이후 당군의 한반도 공격으로 인해 황해도

일대에서 나당 간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단계인 확전기(671~673), 임진강선을 중심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선을 돌파하려던 당군과 신라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이후 당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단계인 종전기(674~676)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이상훈)

 

   또한 나당전쟁시 신라는 수시로 사죄사를 파견하여 당에게 저자세를 보였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굴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술적인 유화책일 뿐이다. 신라는 669년 사죄사를 파견 후 요동의 오골성 공격을 준비하여 670년 3월 고구려의 고연무와 함께 요동을 선제공격하였고, 672년 사죄사 파견후 전국적인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675년 사죄사를 파견후 매소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하였고, 신라가 676년 기벌포전투를 끝으로 당은 한반도에서 물러나 요동으로 옮겨갔다.(이상훈)

 

 

3)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

 

   나당전쟁이 끝난 후 신라와 당은 대립관계가 계속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당은 한동한 재침략의 의지가 있었다.

 

692년 신문왕때는 당나라가 태종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이 천하를 통일한(一統天下) 당나라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고치라고 요구하였으나, 신라는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一統三國) 태종이라 하였다고 하면서 당의 요구를 거절하였다.(삼국유사)

698년에는 발해가 건국되었고,

700년경에는 신라 효소왕이 발해 대조영에게 제5품 벼슬인 대아찬이라는 관직을 하사하였다.

이때는 당이 신라와 발해에게 공동의 적이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외교적 통교가 이루졌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발해는 신라와 통교함으로써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명목상으로 대조영이 관직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발해가 강성해지자 신라와 당은 그동안 대립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끝내고 함께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의 요동지배는 몇십년간에 불과하고, 발해와 북방의 제민족들에 밀려서 요동에서 마저 철수함으로써, 영토적으로는 기나긴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사라져버리는게 된다.

이후 신라와 발해와 당은 대립관계에서 현상유지상태로 변화된다.

결론적으로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당이 요동으로 물러 감에따라, 시대구분은 발해 건국전까지 통일신라시대가 되고, 발해 건국후부터 남북국시대로 이어진다.

 

다음은 조선시대 성종실록에 보이는 삼국통일에 대한 인식이다.

 

   『 김종직이 아뢰기를, “≪삼국유사≫에 신라 무열왕을 태종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당나라 무후가 보고서 꾸짖기를, ‘천자가 태종이라고 일컬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참람되게 일컫느냐?’ 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무열왕이 어진 신하 김유신의 무리를 얻어서 삼국을 통합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일컫습니다.’ 라고 하니, 무후가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 宗直曰 ...三國遺事 載新羅神武王 釋太宗 唐武后 見而責之曰 天子稱太宗 爾何稱歟 對曰 神武王 得賢臣金庾臣輩 而統合三國 故稱太宗 武后置而不問 [성종실록 권제200, 성종 18 2 10(경진)]  

 

 

4)신라와 발해, 당나라의 국경

 

          <지금 우리는 왜 저지역을 당연한 것처럼 발해나 당의 영토로 봐야 하는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인식한 신라의 영토는 위지도에서 압록강 유역까지 확장하여 인식

하였다(고려사). 신라와 발해와 당의 완충지대인 지역을 고려와 조선시대는 압록강까지는

신라의 영토로 인식했다. 행정력은 아니더라도 군사적 지배력은 있었다고 인식한 것이

고려와 조선이다. 발해가 압록강 이남의 완충지역을 귀속했다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만주원류고가 기록한 발해가 건국하기 전 신라 영토>

 

흠정만주원류고 권8 길림(吉林)

謹按 吉林 周以前爲肅愼地 漢以後屬挹婁 靺鞨 唐初爲新羅之鷄林州 尋屬渤海

"삼가 살펴보건대, 길림은 주() 이전에는 숙신의 땅이었고, () 이후에는 읍루와 말갈에 속했다.

() 초에는 신라의 계림주가 되고 이어서 발해에 속하였다." (만주원류고 역주 남주성)

 

   청나라가 만주원류고를 편찬하면서 만주의 길림은 신라영토라고 한건 설득력이 약할 수 있지만,

최소한 압록강 유역까지는 신라영토라는 기록은 고려사에도 나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청나라가 나당전쟁후의 만주영유권을 신라가 관할하다가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로 넘어갔다고만 했고, 당나라의 영토로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주원류고가 기록한 발해가 강성해진 후의 신라 영토>

 

흠정만주원류고 권9 신라구주(九州)

開元以後 渤海盛强 其西北諸境 盡爲所 新羅所有 僅鴨綠江以南

개원(713~741)이후 발해가 강성하면서 신라의 서북쪽 지경을 모두 병합하게 됨에 따라,

 신라는 겨우 압록강 이남의 땅만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식민사관의 잔재로(일제식 만선사관은 신라를 축소시키고 발해를 과장한다),

발해는 과장되고 신라는 축소된 아래 지도가 현재 국사교과서에 쓰이고 있다.

발해가 완충지대에 행정력이 미쳤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말이다.

 

    <식민사관의 잔재인 신라영토> 

 

   한국은 일제의 식민사관의 잔재로 그리고 북한의 분단사관의 결과로, 현재 한국과 북한은

신라를 축소하고 발해를 과장하는 신라영토를 교과서에 싣고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은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지역은 행정력은 아니더라도

신라의 군사적 영유권은 있었다고 보는 기록이 있지만 발해가 영향력을 미쳤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에는 압록강 이남 영토를 신라영역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12세기 초 (여진)에게 타격을 입은 (거란)가 내원성과 구주성을 환부해주고 달아나자, 고려조정에서는  압록강을 경계로 관방을 설치하였다. 백관이 왕에게 표문을 올려 이를 축하하였는데, ‘압록강 일대는 신라의 옛지역이라는(고려사 권14, 세가, 예종12 3월조) 언급이 나온다.”(나당전쟁연구 P.42, 이상훈)

 

   또한 신라 최치원이 당황제에게 올린 사불허북국거상장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신라 효소왕이 발해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관직을 준것으로 나온다.

이는 당이 대조영에게 발해 군왕으로 책봉하기 전으로 형식적으로나마

신라는 만주와 한반도의 통일국가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당나라의 관점과 왜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역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현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스스로가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남북한 모두 발해를 강조하면서 일제강점기 때 식민사관으로 형성된 신라의 북방영토 축소는, 현재 (신라를 축소시키고 발해를 강조하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남북한 모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고착화되기에 이러렀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게 신라의 북방영토를 인식하였던 고려, 조선의 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나라는 아예 발해건국전까지 신라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울렀다고 기록했다.

신라의 관점으로 신라의 북방영토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시대구분도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676~698) – 남북국시대 고려시대로 재정립이 필요하다.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는 한반도와 만주가 동일한 역사 카테고리에 묶인다는 것을 주장한다. 중국 한족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만주원류고에는 고구려의 역사는 빠져있다. 숙신-여진족의 역사체계를 만들다 보니 고구려 역사 자체를 빼버린 것이다. 그러나 숙신, 부여, 삼한, 백제, 신라, 발해, 금나라, 청나라는 동일한 역사카테고리로 묶고, 특히 금나라 국호는 신라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신라인이 여진으로 건너가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고 만주원류고는 기록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역사문제인, 동북공정을 이길려면 논리적 정공법도 필요하지만, 동북공정식 논리로 공격하는게 훨씬 효과적이다. 미국이나 서구인들에게 그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강경구의 <신라의 북방영토와 김유신> 요약

-이상훈의 <나당전쟁 연구> 요약 참조

 

    ㅡ 다음 아고라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