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의 舍利信仰과 舍利莊嚴

2015. 6. 24. 18:08들꽃다회

 

 

 

 

 

       한국의 사리신앙과 사리장엄|  스님 법문

팔공산 | 조회 86 |추천 0 | 2011.11.23. 14:17

 

韓國의 舍利信仰과 舍利莊嚴

 

 

차 례

 

Ⅰ. 사리신앙과 탑파의 발생

1. 광의의 사리

2. 사리장엄과 사리구

3. 사리장치

Ⅱ. 인도 중국 한국의 사리장치

1. 인도

2. 중국

Ⅲ. 한국의 사리장치와 관련 문화재

1. 고 신라시대

2. 통일신라시대

3. 고려시대

4. 조선시대

Ⅳ. 맺음말

Ⅴ. 참고문헌 - 한국의 사리장엄(혜안, 신대현)

                         한국 불교의 사리장엄(열화당, 강우방)

 

 

韓國의 舍利信仰과 舍利莊嚴

Ⅰ. 舍利信仰과 塔婆의 發生

 

   석가모니께서 B.C 480년 경(일설에는 386년) 중인도의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사라쌍수 밑에서 열반(涅槃)에 들어 80세의 생애를 마치자 그 제자들이 유체(遺體)를 인도의 장법에 따라 다비(茶毘, 화장)하니, 이때 나온 유골이 사리(舍利)이다. 이를 진신사리(眞身舍利) 또는 육신사리(肉身舍利)라고도 하며 이러한 성자의 사리를 봉안하고 예배하기 위해 건립된 축조물이 탑파(塔婆, 줄여서 탑)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와 탑파의 관계는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

 

 

1. 廣義의 舍利

 

   사리는 범어(梵語:Sanskrit)의 Sarir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인데, 중국에서는 설리라(設利羅), 실리라(實利羅)라고 음역했고, 우리는 이를 번역하여 신골(身骨), 유신(遺身), 영골(靈骨)이라고도 한다. 이 사리는 한량없는 육바라밀을 닦는 공덕과 계정혜 삼학을 수행하여 생기는 매우 얻기 어렵고 제일가는 복전(福田)이 된다고 금강명계 밝히고 있다. 원래는 신체라는 뜻이나 불교에서는 석존의 신골을 뜻하며 불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예배대상이 된다. 그리고 사리는 불사리(佛舍利)와 법사리(法舍利)로 나누어지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승려의 화장골까지도 합하여 넓은 의미에서 사리라고 통칭한다. 그리고 법사리란 석존의 정신적 유산인 불경(佛經)을 비롯하여 치아(佛齒), 손톱(佛爪), 머리카락(佛髮), 석존 재세시에 사용하신 옷, 바리때(鉢), 지팡이들도 포함하기도 하며, 사리를 신골사리(身骨舍利)와 법송사리(法頌舍利) 혹은 법신사리 분류하기도 한다. 신골사리는 화장 후 남은 유골을 말하고 법송사리는 불타가 설한 법 즉 법신의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쓰는 사리는 보통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혹은 골사리, 발사리, 육사리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또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條에 진신사리 이외에 변신사리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진신사리의 대용품으로 분사리하면서 사리의 수가 자꾸 줄어드니까 사리와 비슷한 광석을 봉안하면서 나온 말인 듯하다. 그래서 사리는 그 수가 극히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리를 대신하여 벼(稻), 우황(牛黃-소 뼈 속의 結石으로 이를 如意珠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석가의 가르침으로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마치 벼가 성숙하고 결실하여서 볍씨가 되어, 그 한 알이 곧 싹이 나고 잎이 나며 이삭이 나와, 수없이 많은 수의 벼를 생산하듯이, 크게 인류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사리를 대신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탑에서 간혹 종자가 발견되는 일 -의성 관덕동 석탑- 이 있는데, 이런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석존의 입멸 후 5-6세기까지 부처님을 형상화하지 못한 이른바 무불상(無佛像)시대에도 불교신앙은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리신앙이 주가 되었다. 사리는 종자(種子:bija)로 부르고, 사리를 봉장하는 반원형의 스투파는 사리를 봉안하는 알(卵:anda) 또는 태(胎:garbha)로 불러왔는데, 적어도 인도에서는 이러한 형태로 석존은 오래오래 삶을 이어나간다고 하겠다.

 

 

2. 舍利莊嚴과 舍利具

 

   불교에서 장엄(莊嚴)이란 아름답고 엄숙하게 장식하는 것으로, 그것은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불정토의 모습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 · 보살을 조성하여 각종 장신구로 장식하고, 수미단이나 연화좌 위에 봉안한 후 광배(光背)와 천개(天蓋)를 마련한 후 이들을 안치하기 위하여 건립한 불전(佛殿)을 번(幡)이나 영락으로 장엄하는 것은 인간들이 극진히 희구하는 불정토(佛淨土)를 현세(現世)에 표현하려는 열렬한 신앙의 산물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장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여러 가지 물건이 장엄구이며, 정토를 방불케 하기 위하여 만든 각종 공예품이므로 온갖 기술을 다하여 아름답게 만든다.

 

   장엄(莊嚴)범어의 Vyūha의 한자번역어로서 당탑(堂塔)이나 불 · 보살을 장식하는 것을 이른다. 이들에서 보이는 장엄수법은 불사리에 대한 존숭의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탑의 내부나 탑기(塔基)에 봉안되는 사리용기만 보더라도 어떤 경우에나 2중, 3중의 입자식용기(入子式容器)로 하는데, 먼저 불사리의 직접용기가 되는 중핵용기는 유리나 수정, 황금 등으로 만들고, 이것을 금, 동, 석제의 외용기로서 차례로 덮어씌우는 엄중한 보호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석존의 보관(寶棺)이 금, 은, 동, 철로 된 4중관이었다고 하는 경전에서 설(說)하는 바와도 일치되어 흥미롭다. 사리용기는 불탑건립과 불사리 신앙이 인도에서 최고조에 이른 마우리아(Maurya)왕조 제3대 아육왕(阿育王:Asūka 273-292 B.C)시대인 B.C 2,3세기까지는 기본형식이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불교국에서는 모두 인도의 옛 방식을 본받아 사리용기에 각자의 전통과 관습을 더하여 독자적인 사리용기를 고안하여 탑에 안치하니, 그 현저한 예가 중국 당대(唐代)의 관형(棺形) 사리용기와 통일신라의 전각형(殿閣形) 사리용기인 것이다.

 

 

 

3. 舍利裝置

 

   사리구(舍利具)란 탑파에 봉안되는 사리장엄구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리용기와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탑 안의 사리공 속에 납치되는 사리구의 차림새까지를 모두 사리장치라 하고 있다. 사리구는 사리용기, 공양소탑(供養小塔), 탑지(塔誌) 등 셋으로 분류되는데 사리용기는 직접 사리를, 공양소탑은 법사리 납입하며, 탑지는 건탑 연유를 기록한다. 사리용기는 석존의 골장기(骨藏器)로서의 성격상, 당대의 최고수준의 기술과 최선의 재료로서 신앙심을 가지고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공예수준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정한 형식이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고 불탑이 조성되는 지역의 전통, 풍습 등의 반영으로 이루어진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리기의 형태가 합(盒), 병(甁), 호(壺), 통(筒), 탑형(塔形)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불사리장엄에 대한 특징을 몇 개 들어보면, 첫째는 사리용기의 안팎에 불전에서 설하는 칠보(七寶)를 생각나게 하는 금, 은, 동 등의 환(環)류와 보옥, 마노, 진주, 산호 등과 금, 은, 동의 전화(錢貨) 등 각종의 공양물이 함께 납입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용기에의 봉납수법과 그 재질이다. 불사리는 단독으로 봉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유리나 수정, 황금제의 병, 호, 통형의 용기에 직접 봉납되며, 이를 가장 안의 용기로 하여 다시 은, 동, 철, 돌, 토기로 된 외용기 여러 겹으로 보호한다. 이 때는 재질이 귀한 것일수록 안으로 한다.

 

   석존의 열반 전후의 사정이 상세하게 기술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마하마야경」에는 석존의 보관이 금, 은 동, 철의 4중관이였다고 하였다. 사실 쿠시나가라의 열반탑(涅槃塔)에서는 금, 은, 동, 철의 금속기만의 4중용기가 출토되어 경전과 관련된 사례로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사리용기는 시대를 따라 세공도 차츰 정치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기원후의 유품으로서는 간다라(Gandhāra)의 비마란 제2탑에서 출토된 화려한 황금제의 옥(玉) 박은 사리용기와 2세기의 카니슈카(Kaniska)탑 발견의 동제사리용기가 특출하다. 카니슈카탑 용기는 뚜껑 위에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을 거느린 부처님이 앉아있어 특이하며, 두 용기 모두 불상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Ⅱ. 印度 · 中國 · 韓國의 舍利裝置

 

1. 印度

 

   불사리를 봉안하는 불탑을 옛 인도에서는 반구형(半球形)의 복발탑(覆鉢塔)으로 조영하는 것을 통례로 하며, 중국과 그 이동에서는 층탑(層塔)형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 阿育王의 八萬四千塔과 舍利容器

 

   불타의 입멸 후 다비된 불사리 마투라족(말라족)이 정중히 모시고 있었는데, 주변의 여덟 나라가 불사리의 분여(分與)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그들은 무력에 호소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로나(범어-Drona, 파리어-Dōna, 漢譯-秀城婆羅門)비구의 중재로 균등히 나누어(사리8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탑을 세우니, 이를 근본팔탑(根本八塔)이라 한다. 불사리신앙은 여기서 싹트게 되며 탑의 기원도 여기서 찾아야 하겠다. 이때 중재역을 맡은 도로나 비구 분사리(分舍利) 때 사용한 용기인 병(甁:안에 꿀을 발라 묻게 하였다고 함)을 가져다 봉안하고 탑을 세우니 이를 병탑(甁塔)이라 한다. 또 분사리 때 늦게 와서 참여하지 못한 모리야족은 다비 뒤에 남은 숯을 모아 탑을 세웠는데 이를 탄(회)탑(炭(灰)塔)이라 하여 모두 10탑이 세워졌다고도 한다. 인도학자들의 연구결과의 발표로는 재(灰)는 없었고 숯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아육왕은 나아가(蛇)족이 저항하는 탑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7탑에서 사리를 꺼내어 전국에 8만 4천의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를 ‘아육왕(아쇼카)의 8만 4천 탑’이라 한다. 8만 4천이란 숫자는 정확한 숫자는 아닐지 몰라도, 오늘날 남아있는 탑지들로 미루어 당시 탑이 많이 세워졌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8만 4천이라는 숫자를 가끔 쓰는데 젝켈(Dietrich Seckel)은 그의 저서 佛敎美術에서 부처님의 수인(手印)이 8만 4천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팔탑 중 7기의 탑에서 사리를 꺼낸 것은 아쇼카왕이 아니고, 마가타국의 아사세왕(阿闍世王)이라는 설도 있다. 즉 특별히 제조한 지하실에 보관 중이던 것을 아쇼카왕은 지하실에서 사리를 꺼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이 인도학자들 사이에서의 통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도의 불전(佛典)에서는 아쇼카왕의 8만 4천 사리탑 건설에서 탑(Stūpa)이라 하지 않고 비하라(Vihara)라고 하여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탑’과는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비하라는 일반적으로 승원(僧院) 또는 정사(精舍)라고 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8만 4천 비하라’라는 것은 한 종류의 건축물로만 국한시킬 것은 아니라 사당이나 스투파도 있었으며, 건축표현 방법은 비록 다를지라도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불사리를 봉안한 것을 일괄하여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육왕 8만 4천 탑’의 고사는 후에 동양의 불교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국 수대(隋代)의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 오대(五代)의 전홍숙탑(錢弘俶塔), 일본의 백만탑(百萬塔)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卷二에는 유라성(硫羅城)의 각(閣) 안에 칠보의 작은 스투파 3기가 있어 여래의 정골(頂骨), 촉루골(髑髏骨), 안청(眼晴)이 각각 보함(寶函)에 넣어져 그 안에 안치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인도의 한 보고서에는 택실라(Taxila) 다르마라지카(Dharmararajika)대탑 사당(祠堂)으로 보이는 일군의 건물터가 있는데 그 중에는 작은 스투파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는 큰돌이 있고 그 돌 아래에 돌로 만든 항아리모양의 사리용기가 있었다. 사리용기 안에서는 은항아리와 은잎, 또 은항아리 속에 불사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리가 발견되었으니 이는 곧 여느 스투파에서의 사리를 봉안하는 방법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불사리는 탑뿐 아니라 사당에도 봉안되고, 안치되는 장소로서는 수미단뿐 아니라 지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리가 반드시 탑 안에만 장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2) 塔內에서의 舍利裝置 位置

 

   옛 복발탑(覆鉢塔)에서는 평두부(平頭部), 기저부(基底部), 기부(基部) 등 사리장치가 납치되는 위치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탑의 중심선, 또는 그 근처의 장소에 작은 실(室)을 마련하고 안치하던가 그렇지 않고 작은 실(室)을 마련하지 않을 때는 그대로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가장 오래된 사리용기의 형식을 보면, 피프라봐(Piprahwa)탑 바이샤리(Vaisali)의 옛 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용기인데 이 두 탑지는 근본팔탑의 하나로 추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느 것이나 사리용기는 둥근 공모양의 합(盒)이며 뚜껑의 꼭대기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피프라봐탑의 사리용기는 영국인 펫페(W.Peppe)가 1898년 발굴조사한 탑지에서 발견된 것과 1972년 인도 고고국(考古局)이 발굴한 2개의 사리용기를 더하여 탑 안의 상, 중, 하 3단에서 물고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사리용기까지 합쳐 총 8개의 사리용기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중단의 것은 큰 석관(石棺) 속에 5개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개에는 석가족의 불(세존)의 유골임을 새긴 브라후미(Brahmi)문자 된 각명(刻銘)이 있으며, 이들은 불사리용기의 원조형(元祖形)을 고찰하는데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3) 文獻上의 造塔法

 

   <광율(廣律)> 같은 데서 조탑법(造塔法)을 기술한 것은 몇 있다. 그러나 이는 탑의 원형이나 구축재료를 말할 정도이지 구축방법이나 내부의 상태 등 기술적인 부분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사리안치의 장소에 대해서도 분명하였던지 또는 비밀이었던지 암시마저도 하지 않았다. 아육왕의 전설을 기록하는 가운데나 입축승(入竺僧)들의 기록에도 거의가 다만 탑 속에 납입하였다는 정도의 막연한 기술이 있는데 불과하다. 전(甎)으로 방(方) 3척의 안치실을 만들고, 바로 그 중앙에 금항아리에 넣은 사리를 놓고, 그 위에 불탑을 조립하였다고 하는 것이 그 드문 예가 될 것이다. 한편 스리랑카(SRILANKA)탑에 관해서는 마하밤사(大史:Mahavamsa)에 대탑 건립의 상세한 기사가 있어 탑의 구축방법이나 사리장치의 방법 등에 대하여 다소 적고 있어 인도의 조탑법을 파악하는데 참고가 된다. 필요한 부분만 뽑아 적어 보면 「사리장치실은 6매의 큰돌로 되었는데 1매를 밑(底)으로 하고, 4매를 4변으로 하여 나머지 1매로 뚜껑을 하는 상자모양의 석함(石函)이다」라고 하였으며, 그 가운데에 보석으로 만든 보리수, 향수의 병, 황금불상 등을 납치하고 사리를 안치하는 자리(座)를 마련한다. 또 이 소위 사리장치실에 불전(佛傳) 기타의 그림을 그리거나 상(像)을 세우고, 등불(燈火)을 켜고 네 귀퉁이에 금, 마노, 진주, 금강석의 사리함을 보좌(寶座)위에 안치한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2. 中國

 

 

1) 舍利受容

 

   불교가 인도의 서북지방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진(東進)하여 중국의 수도에 도달한 것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A.D 58-75) 경이었다. 그것이 곧 낙양(洛陽)의 백마사(白馬寺)에 관한 백마부경(白馬負經)의 설화가 되지만, 수도 이외의 지방에까지 불교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모제(異母弟)인 초왕영(楚王英)의 만년 즉, 1세기의 중엽 경이라고 짐작된다. 이로써 불교의 사원건축도 함께 발생한 것 같으나, 불사리를 봉안하는 스투파의 의미를 지닌 불탑이 동시에 건립되며 발달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이는 훨씬 후세의 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중국에는 화장(火葬)을 이민족(異民族)의 풍습으로 보아 혐오하며 법률로 금지하였다. 때문에 화장에 의한 유골을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삼는다는 것은 당장에 모방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아마 불교의 전래 후 송(宋), 원(元), 명(明)대에 불교신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간 화장을 채용한 일이 있기도 했겠지만, 청조(淸朝)의 경우만 해도 법률로서 엄격히 화장을 금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승려 이외의 중국인들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 과거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고대 설화에 따르면 오(吳)의 적오(赤烏) 10년(247)에 강국인(康國人)인 사문(沙門) 강승회(康僧會)가 건업(建鄴-지금의 南京)에 와서 오왕 손권(孫權)에게 불사리의 영험함을 아뢰고, 그 앞에서 불사리는 빛을 낼뿐만 아니라 불로 태워도 타지 않고, 금강저(金剛杵)라 하여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니 손권이 크게 감동하여 곧 불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건업에 처음으로 세워진 불사였으므로 건초사(建初寺)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특히 사리의 기적을 가장 많이 기재한 것이 수문제(隋文帝)의 인수사리탑(仁壽舍利塔)이다. 이와 같이 불사리가 현실에 기서(奇瑞)를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화장한 유골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은 불사리를 독실히 신앙하고 불탑을 전국 각지에 널리 세우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2) 六朝時代(265-587)

 

   탑의 형식이 중국 독자적인 것으로 태어난 것처럼 불사리의 봉안법이나 장엄의 방식도 중국식으로 변했다. 이 시대의 상황은 문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정사(正史)로서 신빙성이 있는 남사(南史) 「부남전」(扶南傳)에는 양(梁)의 무제(武帝)가 대동년간(大同年間:535-545)의 아육왕탑 개조 때에 발표한 혜달(慧達)이 조립한 탑자리에서 동진(東晋:317-419)의 것으로 전하는 사리구 발견하였다한다. 또한 혜달탑을 대신하여 새로 세운 장간사(長干寺)탑에서도 혜달탑과 같이 탑 아래 땅 속 깊이 불사리를 봉안하였는데, 금을 박은 항아리를 중핵용기로 하여 은감(銀坩), 철호(鐵壺), 석함 차례로 겹친 4중용기 하였다. 양의 무제가 조립한 전탑(塼塔)에서도 금항아리, 옥항아리, 칠보탑, 석함의 순으로 재료나 형태의 다름은 있더라도 모두 4중용기로 하였다. 더욱이 가락지와 팔지, 비녀 등 공양의 진보(珍寶)들이 함께 납입되어 있었다. 이는 틀림없이 인도의 옛 방식을 따른 것이지만, 가장 밖의 용기를 석함으로 하고 그것에 연유를 밝힌 명기(銘記)를 새긴 것은 참으로 중국적인 것이며, 관(棺)에 묘지명(墓誌銘)을 하는 것을 관례로 하는 중국 고래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목탑에서는 불사리를 탑기(塔基) 안에 매납하고, 그 위에 굴립주(堀立柱:건축에서 토대 없이 지면을 파고 세운 기둥)를 세워 중층의 누각을 구축하고, 옥개 위에는 인도불탑을 본 딴 복발과 상륜으로 장식하는 것이 통례이다. 목탑 뿐 아니라 전탑, 석탑에서도 이같이 탑 아래 불사리를 안치하는 것이 인도의 방식과는 다른 중국의 사리장치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불사리도 죽은 사람의 유골이니 사리장치를 망자(亡者)의 장례법식이라고 중국식으로 사고하여 지하에 장치하게 된 것이다.

 

육조시대 사리장치의 특징을 추려보면,

 

① 사리를 탑 아래의 땅 속 깊이 매장한다.

② 외용기로서 석함을 사용한다.

③ 사리탑명(舍利塔銘)을 석함과 함께 매장한다.

 

   다시 말하여 이는 석함관곽(棺廓)의 형식을, 탑명묘지(墓誌)를, 탑 아래의 땅속에 매장하는 것은 분묘의 아래로 매장하는 것의 답습이라 본 것 같다.

 

 

3) 隋代(581-618)

 

   중국에서 불사리 신앙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수문제(隋文帝) 치세인 인수(仁壽 : 601-604) 연간인데, 그것은 수문제가 인도의 아육왕 8만 4천탑 조립의 고사를 따라 동년 동일 동시에 동일 설계로 전국 100여 주에 일제히 5층목탑을 건립하니, 세간에서 ‘인수사리탑’으로 부른다. 수문제는 자기를 ‘중국의 아육왕’으로 자처하고 믿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광홍명집(廣弘明集)에 기록되어 있다. 1969년 하북성(河北省) 정지사진신사리탑(靜志寺眞身舍利塔) 탑기에서 발견된 인수 3년(603)명의 사리함 비록 내용물은 유실되었으나, 각명(刻銘)으로 중수 때 새로 만든 불사리의 외용기였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형식이라 하겠다.

 

 

4) 唐代(618-906)

 

   중국문화의 황금시대였던 이 시대 또한 입자식용기(入子式容器:같은 꼴의 것을 크기의 차례로 겹쳐 넣게 만든 한 벌의 그릇이나 상자, 또는 그런 장치)가 주류이며, 수대와 같이 중핵용기유리제사리병으로 하고, 이것을 새로운 발상의 관형용기2중 내지 3중으로 보호하고 동합에 납입하여 다시 석함에 납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봉납한 불사리는 대부분의 경우 황폐한 옛 탑을 재수, 개수할 때 그 탑기에서 꺼내어 새로 조제한 용기에 다시 납입된 것이며, 그 옛 탑지의 거의가 수대의 인수탑이었던 것이 석함의 명기로서 분명하지만 그것은 또 이 시대의 사리신앙의 왕성하였던 상황을 말하여 주고 있다. 이들 유품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전형적인 사례가 1966년 감숙성(甘肅省) 경천현(涇川縣)의 대운사(大雲寺) 탑기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흰 유리병, 금관(金棺), 은관(銀棺), 금동함, 석함으로 된 5중용기석함의 뚜껑 뒷면에는 대주(大周)의 국명과 경천 대운사의 사리라는 내용을, 측면에는 봉납한 사리의 유래 및 연재원년(延載元年:694)의 연기와 시주명을 새겼다. 또 1987년 ‘대발견’이라고 하는 협서성(陜西省) 부풍현(扶風縣) 법문사(法門寺) 13층탑의 개수 때 그 지하궁전(塔基)에서 발견된 4중의 사리구가 있는데 여기에선 벌써 당대 사리용기의 전형이었던 관형용기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불탑이나 궁전을 본 딴 용기의 출현은 새로운 양식의 도래를 시사하고 있다.

 

 

Ⅲ. 韓國의 舍利裝置와 關聯 文化財

   불사리 전래 기록은 三國史記卷四 眞興王條‘진흥왕 10년(549) 봄에 양(梁)나라에서 신라의 입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불사리를 보내옴으로 왕은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의 앞길에 나가 이를 맞아들였다’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는 三國遺事 卷三 前後所將舍利條 정관(貞觀) 17년(643) 계묘(癸卯)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으로부터 불두골(佛頭骨), 불아(佛牙), 불사리 100알과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비라금점(緋羅金點) 1벌 가져왔고, 그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탑(太和寺塔)에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의 계단(戒壇)에 두었다. 나머지 다른 것들은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사리장래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고구려의 경우 평양 청암리(淸岩里)의 절터 초기의 사원인 금강사(金剛寺)로 추정되고 있는데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로 8각의 탑파가 중심에 놓여있고, 백제군수리(軍守里)사지에 탑지(塔址)의 유구가 남아있다.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서는 유승니다사탑(有僧尼多寺塔)이라는 기사가 있으며, 또는 위덕왕(威德王) 35년 불사리를 일본에 전한 내용 보아 직접 사리전래의 기록은 없으나 탑파 건립이란 것은 사리전래의 인연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이 두 나라에도 사리의 전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삼국 중 불교가 가장 늦게 전래된 신라만이 진한(辰韓) 이래의 고도로 발달한 공예기술을 구사하여 정교하고 다양한 사리구를 많이 남겼다. 신라의 사리신앙은 자장법사선덕여왕때 당에서 사리를 장래(將來:외국에서 불상이나 사리를 들여오는 일)함으로서 신라왕실과 신라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사리신앙은 요원의 불처럼 퍼져나가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하기에 이르렀고, 국도를 중심으로 활발한 건탑사업이 전개되었다. 사리가 전래된 곳에는 탑이 세워지게 마련이니, 건탑은 필연적으로 사리구의 수요를 촉진시켜 많은 사리구의 제작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1. 古新羅

   고신라 탑 중 사리장치가 발견된 것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뿐이다. 1915년 탑을 수리할 때 제2층 탑신에서 석함이 발견되었다. 석함은 자연석을 다듬어 방형공을 마련하고, 그 안에 사리합, 녹유리병(破), 고려대의 중수 때 납입된 것으로 여겨지는 은합과 금·은제 바늘, 가위, 곡옥(曲玉), 상평오수(常平五銖), 숭녕중보(崇寧重寶), 방울(鈴) 등이 발견되는 등 불교와 직접 관계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고, 여성용품이 많은 것, 금바늘, 은바늘의 사용은 왕실밖에는 생각할 수 없으니, 선덕여왕과 관련지어 볼만도 하다.

 

   이 탑 사리장치의 성격을 다시 살펴본다면,

 

① 토속적인 면에서, 종래의 후장(厚葬) 풍습이 이어졌고(고분의 부장품과 같은 물품이 많음에서)

② 부장품은 공덕을 얻기 위한 희사품(喜捨品)이 많은 것

③ 무구정광다리니경이 전래되기 전이여서, 불교적인 장치방식이 확립되기 전의 방식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예가 중국에도 있는데, 사리와 함께 납입되는 부장품이라 하여도 공양품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2. 統一新羅時代

 

   신라는 삼국통일로 전통문화 위에 고구려와 백제의 미술문화를 흡수, 통합하는 한편 성당문화(盛唐文化)와 다양한 외래문화를 섭취, 소화하여 700년 이후는 신라미술이 급격히 발전하여 불교문화의 꽃이 활짝 피게 된다.

 

1) 慶州 感恩寺 西三層石塔 舍利具

   신라의 독창적이고 화려한 전각형 사리기 나타난다. 금동방형외함 안에 전각형사리기를 넣었다. 이 사리기 기단 위에 화염보주로 장식한 복발형 뚜껑이 있고 수정제 사리병은 그 속에 안치되었다. 외함 4면에 조각하여 붙인 사천왕상들은 조각이 정치하고 서역적(西域的)인 풍모를 하고 있다. 지국천(持國天)이 밟고 있는 짐승을 감은사보고서(感恩寺報告書)에서는 소(牛)로 보고 있으나, 뿔(角)이 심하게 굽은 모습과 짧은 꼬리(尾) 등으로 미루어 양(羊)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리기의 기단에 안상을 투각하고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따로 만들어 안치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도 일찍부터 국내 일부학자들과 외국학자들 사이에서는 신장상과 공양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동탑에서도 1996년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2)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舍利具

   1943년 탑을 해체 복원할 때 제2층 탑신 윗면의 방형사리공에서 금동외함, 녹유리사리병(破), 은합, 금합, 금제불상 2구, 대나무조각(竹棒片) 등이 발견되었다. 사리용기는 녹색유리사리병을 중핵용기로 하고, 이것을 금, 은 2중의 합모양의 용기로 보호하고 각종 공양물과 함께 금동외함에 납입한 입자식(入子式) 4중용기 하였다. 외함 뚜껑의 뒷면에는 명문이 있어, 신문왕, 효소왕, 신목대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건탑임을 알 수 있으며, 외함 4면에는 무구정광경에 의한 99기의 탑 만들어 넣는 대신 단층탑을 점각(點刻)으로 새겼다. 그리고 명문에는 불상 1구라 하였으나, 현재 좌상과 입상 2구가 있는 것이 명문과 다르다. 또 대나무조각은 무구정광경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었는데 명문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이 제2층에 안치되어 있다고 하여 국내 학계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이 탑 해체 때 관여한 인사들이 전후 귀국하여 발표한 보고문과 최근 학술지에 발표한 기사를 보면, 대나무조각은 원래 15㎝정도의 균일한 길이로, 그 위에 묵서의 흔적이 보여 무구정광경과 관련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무구정광경은 신라에서는 신라탑의 소의경전으로 활용되었으나, 중국에서는 그다지 이용되지 못하였고, 일본에서는 망자(亡者)의 위령에 주로 이용되었음이 우리와 다르다.

 

3) 慶州 皇龍寺 木塔址 遺物

   황룡사 9층목탑 삼국통일을 염원한 신라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오다가, 고려 고종 16년(1229)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964년 심초석 안의 사리보(舍利寶)가 도굴되었다가 후에 수습되었는데 그 유물 중 탑지(塔誌)의 발견은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금동내함은 탑지를 안팎 양면에 새긴 정방형 금동판 3매와 앞면을 이루는 금동판 2매의 총 5매로 4면함을 이루었다. 74행 905자가 판독되었는데 명문내용을 통하여 이 탑의 처음 건립과 중수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리구의 후납을 위하여 경문왕 대에 이 금동외함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도굴된 뒤의 수습품이어서 유물 중에 타탑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혼재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4) 山淸 石南寺址 佛臺座 永泰二年銘 舍利壺

   호(壺) 표면에 음각된 명문으로 불상을 조성할 때 그 대좌의 중대석의 원형공에 납입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호 밑에는 청동사각합이 있었고, 부서진 한지 뭉치도 있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안치되었다고 명문에 있어, 9세기말의 새로운 사리기의 양식과 장치법을 보이고 있다. 영태 2년은 767년이다.

 

5) 漆谷 松林寺 五層塼塔 舍利具

   1959년 전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탑신 적심석 속에서 거북모양의 석함이, 5층 옥개석 상면에서는 청자상감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석함 안에는 전각형 사리기봉안되었고, 기단 위에 사리병좌를 마련하고 녹색유리잔 안에 사리병을 넣어 안치하였다. 기단 네 귀퉁이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보개를 씌웠다. 유리잔 표면에는 12개의 유리고리가 붙어있다. 이 사리기와 함께 석함 안에는 갖가지 구슬들이 들어 있었다. 또한 청자상감사리합이 발견되어 고려 때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1층 탑신 안의 감(龕)형태의 공간에서 조선 초 작으로 보이는 목불, 석불, 청동불이 각각 2구씩 발견되었다. 특히 녹색유리잔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6) 慶州 佛國寺 三層石塔 舍利具

   1966년 제2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금동사리외함(金銅舍利外函)은 기단 위에 방형함(方形函)을 얹고, 사주형(四柱形)의 뚜껑을 씌웠다. 외함 속에는 중앙에 연화좌(蓮華坐)를 마련하고 난형(卵形) 2중 사리합 속에 녹유리사리병을 안치하였는데 파손되었다가 그 후 수리를 거쳤다. 이와 같이 신라의 전각형 사리외함에서는 내부 중앙에 연화좌를 마련하고 사리병을 안치하는 것이 하나의 방식인데, 특히 탑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리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석가탑 건립연대인 751년을 하한으로 삼더라도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이다. 또 이 탑에서는 무구정광경에 의한 99기 또는 77기의 공양소탑이 아닌 12기의 소목탑이 발견되어 이례적(異例的)이다.

 

7) 大邱 桐華寺 毘盧庵 敏哀大王 石壺

   1966년 도난 되었다가 후에 회수되었으며 금동판 4매가 연결되어 사방불(四方佛)의 상자 이루도록 되어있다. 이 금동판 안에 안치되었던 납석제 사리호 물레를 써서 만들었으며 도굴될 때 파손되고 뚜껑도 결실되었다. 표면에 검은 칠을 하고 정간을 긋고 함통(咸通) 4년(863) 경문왕(景文王)이 민애대왕을 위하여 탑을 건립한 것 기각하였으며 소형목탑 3기도 발견되었다. 함통연간에 한때 유행하던 납석제 사리호의 한 예이다.

 

8) 安東 臨河寺 塼塔址 舍利具

   심초석 원형사리공 안에서 집모양의 은제외함, 방형내함, 청색유리사리병 등이 발견되었는데, 사리병은 은제병의 표면에 청색유리를 씌운 칠보병임을 알 수 있고, 집모양의 외함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형식으로 눈길을 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라 사리용기의 특징으로는

 

1) 입자식용기(入子式容器)전각형용기(殿閣形容器)의 2종류가 있는데, 전각형 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으로 주류를 이룬다.

2) 초기에는 금속제 사리기가 사용되었으나, 후기에는 납석제 용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3) 사리병은 녹색유리제사리병이 쓰인다.

 

3. 高麗

 

   국가의 불교보호와 국민의 깊은 신앙심으로 신라의 꽃피웠던 불교미술을 이어받았지만, 전대와는 모습을 달리하면서 번성을 계속하였다. 선종(禪宗)의 유행과 풍수지리설에 대한 신앙은 자연히 불교미술의 형태에도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건국 초에는 신라의 여운이 짙었으나 차츰 전반에 걸쳐 독자적인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1) 益山 王宮里 五層石塔 舍利具

   1965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제1층 옥개석 상면의 적심부에 있는 방형석과 찰주(刹柱) 하부의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의 사리공은 방형공을 나란히 2개 마련하고 동공(東孔)에서는 녹유리사리병, 금제방형합, 금동외함을 서공(西孔)에는 순금금강경판(純金金剛經板) 19매, 금동장방형합, 금동외함 겹쳐 넣었다. 목탑의 심초석에 해당하는 찰주방형석에 마련된 品자형 사리공은 동공에 금동여래입상, 동령(銅鈴)을 북공에는 향(香)같은 물건과 철조각이 발견되었으나, 서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사리병은 녹색인데 목이 길고, 8엽의 연꽃봉오리 모양의 금제 마개가 있다. 사리병의 안치(安置)를 위해 병좌(甁座)가 마련되어있다. 송림사 전탑 사리병과 함께 우리나라 유리사리병의 대표가 될 만하다. 사리장치에 있어서 석탑식과 목탑식이 함께 쓰였고, 더욱이 방울이 발견되는 일은 드문 예로 거울(鏡)과 함께 제액적(除厄的) 성격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 탑을 고찰하는데 유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분황사의 탑에서도 방울이 발견되었다.)

 

2) 平昌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舍利具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다각다층탑이다. 1974년 해체 복원할 때 1층과 5층 옥신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모두 원공(円孔)이며 원형동판의 뚜껑이 덮여있었다. 5층에는 은제도금여래입상이 있었고, 1층에서는 비단보자기에 싼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보자기 안에는 4개의 동경(銅鏡)이 사리구의 밑면과 주변을 감싼 채 들어있었으며, 다시 동합 안에 은제사리합과 금동제방형향합이, 은제사리합 안에는 다홍색 사리 14알이 든 호로병모양의 수정사리병과 전신사리경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탑 속에서 동경이 4매 발견된 것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이다.

 

3) 金剛山 月出峰 李成桂 發願 舍利具

   1932년 금강산 월출봉 석함 속에서 홍무(洪武) 24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승속(僧俗) 만 여명의 발원을 담은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백자대발, 은제도금탑형사리기(銀製鍍金塔形舍利器), 팔각원당형감 등으로 짜여졌는데, 백자대발을 외함으로 사용하였고, 사리기를 안치한 은제팔각원당형감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백자대발 2개와 은제도금탑형사리기와 팔각원당형감, 청동완에는 각각 1390, 1391년의 연기(年記)가 있어, 정확한 편년을 할 수 있다. 은제도금탑형사리기는 원(元)의 라마(Lama)탑형 사리기로 안에 유리를 사용한 은제원통형사리용기가 세워져있고, 가장 중요한 곳임을 상징이라도 하듯 이성계와 강씨부인(姜氏夫人) 만이 음각된 시주 발원기가 있다.

 

4) 扶餘 長蝦里 三層石塔 舍利具

   일정 때인 1931년 기단부에서 금칠목제소탑 3기와 상아불상 출토되었다. 1962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도 제2층 탑신에서 또 사리구가 발견되었는데, 원형(円形) 사리공 속에 직물(布)에 싼 사리기가 들어있었다. 사리기는 금동외병 은제내병으로 되어있는데 금동병은 표면에 산수(山水), 비조(飛鳥), 연판(蓮瓣)을 선각하였고, 바탕에는 어자문(魚子紋:물고기 알 같은 작고 둥근 문양)이 채워졌다. 은병은 문양이 없고 생김새는 금동병과 비슷하다. 이 안에 종이에 싼 작은 진주 7알 들어 있었으며, 이 은병을 금동병에 넣었다. 목제소탑은 신라시대의 99기나 77기가 아닌 목제금칠소탑(木製金漆小塔) 3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특징으로는

 

1) 유리제사리병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며 수정제가 많이 나타난다.

2) 동합(銅盒) 같은 간략화된 용기를 사용하고 자기(磁器)가 쓰여지기도 한다.

3) 불상이 소형이기는 하지만 납입이 많아진다. 불경(佛經)은 초기를 지나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4) 지본묵서(紙本墨書)의 형지기(形址記) 등을 납치하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5) 공양소탑은 적은 수가 기단부에 납입된다.

6) 말기에는 라마(Lama)탑의 영향이 짙은 용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4. 朝鮮時代

 

   국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위축되며, 건탑 사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더욱이 중기엔 임진왜란이라는 사회적인 큰 변동이 일어나서 불교미술은 더욱 힘을 잃게 되면서 겨우 명맥을 이어왔으니 사리구의 제작도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1) 楊州 水鍾寺 八角五層石塔 舍利具

   1957, 1970년 두 차례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1957년 제1층 옥신에서는 3구의 금동불이 들어있는 동제불감(銅製佛龕)과 3구의 목조불상이 안치됐던 목조불감이 발견되었으며, 기단 중대석에서는 8구의 불상이, 1층 옥개석에서는 4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복장품과 명문 등으로 살펴보면, 두 차례의 왕실발원으로 봉납된 것을 알 수 있다. 즉 1층 옥개석의 발견품은 조상양식과 불감내의 석가여래복장 묵서로 보아 1493년의 불상으로 여겨진다. 다른 1군은 기단 중대석 발견 불상들로서 여래상의 대좌명으로 보아 인조(仁祖) 6년(1628)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발원으로 시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970년 3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에서 발견된 12구의 불상들은 거의 허리가 구부정하고, 두부는 앞으로 숙이는 등 둔중한 느낌을 주며, 조선시대 불상의 전형양식을 하고 있다. 탑에의 사리구 봉납방식이 번잡한 감이 있으며, 시대의 내려옴에 따른 신앙의 변천을 느끼게 한다. (고려부도에서도 일정시대의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한다.)

 

2) 報恩 法住寺 捌相殿 舍利具

   1968년 팔상전을 해체 복원할 때 심초석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사리공은 심초석 중앙의 방형 2단 구조로 되어 있는데, 상단부는 하단의 사리장치를 보호하는 개석의 구실을 한다. 사리구는 하단 사리공에 있었다. 그 곳에는 4방벽과 천장을 이루는 5매의 동판이 방형사리합을 이룬다. 이 동판마다 발원문과 시주자 명단이 가득 새겨져 있어 탑지로서의 의의도 크다. 명문 중에 유정비구(裕淨比丘) 사명당(泗溟堂)의 임진왜란 이후 법주사 중건의 기록이 있어, 사적(史的) 가치가 높다. 이 안의 사리합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뚜껑이 열린 채 있던 청동합이고, 다른 하나는 청동합의 밑바닥에 놓인 금단보 안에 있던 사리합이다. 앞의 청동합은 깨진 사리병과 함께 1602년 중수 때에 다시 납입한 합 모양의 옛 사리기이다. 청동합 밑바닥 금단보 안에 있던 사리합은 물테로 깎은 대리석제 사리합인데, 8중의 겹보자기로 싸여 있었으며, 보자기마다 비단 뒷면에 묵서가 있다. 이 대리석제 사리함 속에는 능단(綾緞) 겹보자기로 다시 2중으로 싸여진 은제 사리호가 들어 있었고 이 사리호 안에 사리 8알이 봉장되어 있었다. 황룡사 9층목탑의 사리장치 방식의 전통이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3) 奉印寺 世尊浮屠 舍利具

   탑신 중앙 사리공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감색(藍色) 바탕 보자기로 싸여진 8중의 사리기인데, 그 중 6개의 내합은 유제합(鍮製盒)이고, 맨 바깥의 합은 대리석제로 뚜껑이 결실되었다. 은제합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유제합은 전부 주조된 것이며, 기면(器面)은 녹로로 깎아서 면을 고르게 한 흔적이 있다. 이들은 은제합보다 매우 두껍고 투박하여 탑을 중수한 영조(英祖)때의 봉납품으로 보인다. 안쪽의 유제합 안에는 은제원통형합이 있고 그 안에 수정제사리호가 있다. 이 사리호는 왕실 발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순금제 연판형 뚜껑이 있고, 그 안에 사리 1알이 봉안되었다. 바깥에서 두 번째 유제합에는 왕실 상징의 용(龍)을 새긴 능화문(菱花紋)이 보인다. 대리석제사리합의 표면에는 꽃봉오리가 홍색으로 채색되고 덩굴은 흑색으로 그려진 꽃이 등간격으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은제사리합의 밑에는 1620년에 당시 국왕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수복창성(壽福昌盛)을 기원하는 발원문과 연기(年記)가 있어, 편년에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의 사리구는 대체로 간결한 원통합이나 원합으로 이루어지는 형식으로 된다. 원통형 사리기는 고려말부터 나타나는데 조선시대에도 사리외기로 사용되며, 합자형도 함께 쓰인다. 외용기로는 동합, 백자합도 보이는데 모두 납작한 원합형식이다.

 

 

Ⅳ. 맺음말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처님 열반 후 탑을 예배 대상으로 삼았다가 기원후 1세기경에 불상이 출현하면서 예배대상이 불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또 우리나라도 처음 불교를 수용하면서 가람배치에 있어서 탑이 중심이 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 이래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예배대상이 불상으로 기울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불탑은 사리를 봉안했으므로 언제나 예배의 대상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리의 개념은 단지 유골의 의미를 뛰어넘어 경전과 불상까지 그 안에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전개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사리 신앙 우선 탑에 대한 예배 나타난다. 그것은 석가의 유골을 봉안한 무덤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점차 변화하여 인도에서는 궁륭(穹窿) 모양의 건축물로 되고, 중국에 와서는 여러 층의 목조 건축물로 변하고 다시 목조 건물을 흉내 내어 전(塼)으로 쌓아올려 전탑을 성립시켰다. 그것이 우리나라로 와서 처음에 목탑과 전탑이 성행했지만 백제에서 목조구조를 모방한 석탑 형식이 창안되었으며 통일신라 초에 그 형식이 정형화되었다. 이러한 탑의 변화와 탑에 대한 예배의 원인은 바로 사리에 있다. 웅장한 탑이건 정교하고 화려한 사리구이건 그것은 사리를 장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리병, 사리호, 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갖은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사리장엄구는 우리나라 금속공예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형태의 사리 용기가 끊임없이 새롭게 고안되어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똑같은 형식이 없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예배대상으로서 탑과 像은 반드시 함께 조성되어 왔다. 그런데 탑에는 진신사리(석가의 유골)와 법신사리(경전-부처님 말씀)를 함께 봉안했다. 이에 비해 불상은 진신사리와 법신사리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상화하여 원만한 모습으로 구상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신사리는 곧 여래이며 법신사리는 곧 정각과 해탈이니 탑과 像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상의 몸 안에도 腹臧物로 진신사리와 법신사리 봉안하게 되니 사리가 신앙대상의 핵심이 되어 왔음을 알 수 있으며 탑과 像을 예배대상이 되게끔 하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리인 만큼 사리 용기를 만들 때 온갖 정성과 기술을 기울였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이 사리를 중심으로 불탑과 불상과 불경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서 불교의 본질을 보다 입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사리를 대할 때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대하고, 석가의 유일한 가시적 흔적이며 여래의 유일한 가시적 자취라는 걸 잊지 말고 중생들은 사리를 통해서 구원을 바라면서 불교를 중생들이 형성해 갔듯이 불교가 근본을 잃지 않고 온 우주가 불국정토가 되고 정각을 이루는 그날까지 수행정진해야 할 것이다. 

 

 

- 다음 카페 <경산선광사> 팔공산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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