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4. 19:36ㆍ율려 이야기
"작아"가 특집호와 공책을 내는 동안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는 가장 바쁘고 힘든 모내기와 논매기를 너무나 쉽게 건너 뛰었다. 옛 농민들도 가끔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여름 하루 쉬어 놓으면 겨울 석달 배고프다’는 제주도 민요의 한 구절처럼 농사는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일이다.
양력 8월이면 논농사는 논매기라는 중요한 고비를 넘기고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다. 8월 초순의 입추(立秋)와 하순의 처서(處暑) 무렵이면 마지막 논매기를 마치고 한바탕 일꾼들 잔치를 벌이는 시절인 것이다. 하지만 여름내 일도 안하고 잔치부터 벌이기가 뭣하니, 미처 하지 못한 논매기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자.
논매기는 세번 정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벌매기는 우리말로 ‘아시매기’, ‘아이매기’, 또는 ‘애벌매기’라 해서 호미로 벼포기 사이의 잡초를 파엎는 작업이다. 매우 힘든 일이어서 여럿이 모여 조직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들판이 넓을 수록 작업집단의 규모가 커져, 3-40명이 훨씬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 많은 일꾼들을 규율있게 통제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논매는소리였다. 논매는소리는 일꾼들을 지휘하는 한편 노동의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얼카뎅이 / 넘어간다
안산 까그메 / 골수박 파듯이
재강아지 / 눈감은 듯
눈먼 장대 / 깔대밭 허위듯
허우적 허우적 / 잘들두 맵니다
얼카댕이 / 잘 넘어간다
양허리 쭉 빼어 / 앞가슴 더듬어
어덕 밑으로 / 살살 기어가
우잇배미로 / 올라들 가시오
얼카댕이 / 넘구 넘네
멧돼지 한 철도 / 유월이 한 때라
우리네 농부들 / 이 때가 한 땔세
얼카뎅이 / 잘 넘어간다
(1993 / 서산군 대산읍 운산리 / 앞소리: 한경희)
‘안산 까그매 골수박 파듯이…’ 까치만 과일을 망치는 줄 알았더니 옛날에 까마귀도 수박을 파 먹었던 모양이다. 새가 과일 파먹는 걸 보면 정말 열심히 폭폭 잘도 판다. ‘재강아지 눈 감은 듯…’ 잿빛 나는 강아지가 눈을 감으면 눈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디를 팠는지 모를 정도로 논을 감쪽같이 파엎으라는 뜻이다. ‘눈먼 장대 깔대밭 허위듯…’ ‘장대’란 바닷 고기가 물 얕은 갈대밭에 들어와 몸부림을 치면 온통 구정물이 일어난다. 일꾼들이 논매는 모습을 까마귀, 강아지, 물고기 따위에 비유하는 품이 사뭇 능청스럽다. 하지만 유월 한 철 고생하면 되는 일이니 힘들다 말고 열심히 김을 매자고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초벌맨 후 15일쯤 뒤에 하는 두벌매기는 대개 손으로 잡초를 뽑아 흙 속에 묻어주는 작업으로, ‘이듬매기’라고도 한다. 논바닥을 반반하게 한 뒤 물을 빼고 하루 이틀 말리면 잡초가 완전히 죽는다. 이렇게 두 벌을 매고 또 한 보름쯤 지나면 마지막 논매기, 즉 ‘만드레’ 또는 ‘만드리’ 때가 된다. 이 때쯤이면 벼에 ‘장잎’이 나오고 이어 벼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장잎이란 이삭이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잎을 말한다. 농민들이 봄에 모를 심으면서 ‘이 논에다 모를 심어 / 장잎이 훨훨 영화로다’ 라고 노래하던 그 장잎이다. 만드레는 슬슬 돌아다니며 피사리나 해 주는 정도의 일이지만 농민들은 결코 논매기를 거르지 않고 노래도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만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드레 때 부르는 노래 중에 매우 특이한 노래가 있다. 전라북도 서북부 평야지대의 ‘산야’라는 노래다. 과부 신세타령처럼 구슬픈 곡조에 익살맞은 노랫말이 담겨져 나온다.
어디로 갈꺼나 어디로 갈꺼나 갈 곳은 없는디 어디로 갈꺼나아
허어허어 어허허 어디로 갈꺼나아
작년 팔월 보름날 저녁에 보리쇵편 일곱 개만 먹으란게로
곱집어서 열네 개 먹고 죽은 영감아
날 다려가소 날 다려가소
(1991 / 전북 김제군 광활면 옥포리 / 유판선)
영감이 송편을 너무 많이 집어먹다가 죽었단다. 노랫말도 그렇지만 곡조를 들어보면 더욱 청승맞고 애절한 노래다. 남자들이 다른 노래도 아니고 과부 신세타령을 부르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옛사람들은 가을에 식물이 시들어 가는 것을 식물이 죽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비록 씨앗을 남긴다 하더라도 죽는 것은 죽는 것이고, 이것은 슬픈 일이다. 살아있는 자는 죽어가는 생명을 위로할 의무가 있다. 죽어가는 산천초목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 농민들은 슬픈 노래의 대명사인 과부신세타령을 부른다. 이것이 ‘산야’에 대한 내 해석이다.
이 노래는 처서(處暑) 전에는 부를 수 없는 노래였다. 이 노래를 무심코 불렀다가는 어른들로부터 모진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이 노래를 부르면 산천초목이 추워서 벌벌 떨기 때문에 봄이나 여름에 부르면 곡식이 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다. 말하자면 이 노래는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부르는 노래인 셈이다. 옛 사람들은 노래 한 곡을 부르더라도 이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불렀다.
마지막 논매기가 끝나면 농민들은 해방감에 젖어 한바탕 잔치판을 벌인다. 논두렁에서부터 소를 타고 풍물을 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그날 논맨 주인집으로 들어가 술과 안주를 청해 먹고 신나게 노는 곳이 있는가 하면, 따로 날을 잡아 ‘호미씻이’를 하는 곳도 있다. 칠석(음력 7월 7일)이나 백중(음력 7월 보름)날 집집마다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나와 일꾼들을 잘 먹이고 신나게 노는 것이 호미씻이다. 무형문화재 ‘밀양 백중놀이’가 바로 호미씻이 풍습을 재현한 것이다.
옛 농민들은 흔히 ‘유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는 말을 했다. 고된 논매기가 끝나면 신선처럼 여유를 부리는 때도 있는 것이다. 하긴, 농삿일이 일년 내내 모내기나 논매기처럼 고되기만 하다면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하지만 이것도 벼농사만 잘 되면 걱정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대체 무슨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해야만 하는 요즘 농민들은 음력 팔월이 되어도 신선놀음할 처지가 못되니 말이다.
(녹색연합 '작은 것이 아름답다' / 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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