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정사(谷雲精舍)를 찾아서②

2015. 7. 22. 15:21여행 이야기

 

 

 

 

 

      

곡운정사(谷雲精舍)를 찾아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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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구곡

 

제1곡 방화계

제2곡 청옥협

제4곡 백운담

제3곡 신녀협

제5곡 명옥뢰

제6곡 와룡담

제7곡 명월계

제8곡 용의연

제9곡 첩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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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운계와 명옥뢰, 그리고 조운기(釣雲磯)와 설운계

 

   골짜기의 물중에 큰 것은 대여섯 갈래이다. 모두 서북쪽 수 십리 안에서 발원하여 청람산 서쪽 치우친 곳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또 하나의 시내는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다가 그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이 시내는 화악산에서 나온 것이다. 골짜기 물이 흐르다가 합쳐져 큰 시내가 된다. (「곡운기」)

 

    곡운구곡의 고장인 사창리는 산의 형세에 따라 흐르는 물들이 합쳐져서 큰 물줄기를 만들며 구불구불 흘러간다. 사창리 일대를 흐르는 물의 공식 명칭은 ‘지촌천’이다. 큰물줄기는 공식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에서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김구(金構;1649~1704)는 그의 문집인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에 남긴 「동행일기(東行日記)」 에서 곡운정사를 끼고 도는 시내를 ‘보살피천(菩薩陂川)’이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산수심원기』에서 ‘저오수(齟齬水)’라 적고 있고, ‘사탄천(史呑川)’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밝힌다. 곡운정사 주변의 시내는 두 곳에서 합쳐진다. 먼저 9곡 첩석대 위쪽 고삽교 부근에서 합쳐져 흐르다가, 7곡인 명월계 아래인 영당교를 자나자마자 화악산에서 출발한 물과 만나면서 큰 흐름을 만든다. 김수증은 시내 곳곳의 특징을 세심하게 관찰한 후 각각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먼저 벽운계(擘雲溪)가 있다. 1673년 지은 「산중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걸어 나가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백여 보 갔다. 소나무 숲 사이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는데 물이 그 가운데에서 쏟아지니 매우 맑아서 벽운계(擘雲溪)라 하였다. 그 위에 또 뛰어난 곳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융의연(隆義淵)이라 한다.”

 

  위 기록에 의하면 벽운계융의연 아래에 위치한 곳이 틀림없다.  김수증「곡운기」에서 “북쪽 모퉁이로 수백 보를 가면 너럭바위가 있어 이리저리 거닐만하다.”고 말하며 그곳을 명월계(明月溪)라 부르고 있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동일한 곳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곳을 처음에는 벽운계라고 하다가 나중에 명월계로 바꾼 것 같다.
  곡운구곡5곡인 명옥뢰(鳴玉瀨)는 원래 곡운정사 주변에 있었다. 김수증「산중일기」에서 명옥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냇가로 걸어 나갔다. 수석(水石)이 아름답고 뛰어나다. 이곳은 앞서 아직 찾지 않았던 곳이다. 바로 곡운정사 앞에 있다. 와룡담은 아래에 있다. 위아래의 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눈  앞으로 들어온다. 새로 명옥뢰(鳴玉瀨)라고 하였다."

 

  1673년 4월 14일 기록이다, 3일 후 4월 17일 오후에 김수증명옥뢰(鳴玉瀨)로 나가서 농수정의 형세를 두루 보고, 물가의 버드나무와 잡풀을 베어내니 넓고 조용하며 깨끗하게 탁 트였다고 하였다. 「산중일기」에 의하면 명옥뢰와룡담 위에 있는 여울을 가리킨다. 그러나 곡운구곡이 확정될 때 현재의 5곡에게 명옥뢰란 이름을 넘겨주었고, 지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원조(?) 명옥뢰는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주옥같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외룡담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곡운정사 인근 시내에 낚시터인 ‘조운기(釣雲磯)’가 있다. 지금은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김수증 곡운제영 「조운기」란 제목으로 한 곳을 차지하고 있다.

 

 

늙은이 날마다 일 없어
차가운 곡운의 시내에 낚시 드리우네.
낚시질 스스로 멋 있으니
푸성귀 밥상 싫어해서가 아니네.


山翁日無事。垂釣雲溪寒
此間自有趣。非關嫌菜盤

 

 

    답사 때문에 용담리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쳐지나간 적이 더 많았다. 주차할 곳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6곡와룡담을 보기 위해서 군부대 입구 조그만 공터에 세워놓아야 했다. 곡운구곡 대부분이 이렇다. 
  와룡담 볼 때마다 그 주변에서 늘 낚시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는 그늘막을 설치하고 앉아 있곤 했다. 「조운기」를 읽을 때 불현 듯 그 광경이 생각났다. 김수증이 말한 낚시터와룡담 주변이 아닐까?
 

 

벽운계.gif

원조 명옥뢰.gif

 <벽운계>

<원조 명옥뢰>


                             

                  

곡운정사(谷雲精舍)와 비석

 

    내가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집을 지었다. 경술년(庚戌年;1670년) 가을에 시작하여 몇 년 사이에 겨우 일곱 칸의 띠집을 지었다. 을묘년(乙卯年;1675년) 겨울에 온 집안이 와서 살았다. 띠집을 지은 후에 또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편액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했다. 또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좌우에 아이들의 방을 짓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의 부속 건물을 간략하게 구비했다. (「곡운기)」)

 

  김수증은 1670년에 곡운에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여 몇 년 걸려 일곱 칸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1675년 온 집안이 이사를 온다. 일곱 칸의 띠집을 지은 후,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곡운정사(谷雲精舍)라고 편액을 걸었다. 그런데 김수증을 소개하는 몇몇 자료들에서 1차 거주지를 농수정사(籠水精舍)라고 일컫는 것은 왜일까? 농수정사라고 표현된 기록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곡운정사를 나중에 농수정사라고 바꾸었다고 소개하는 글도 있지만, 이것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김수증 송시열에게 편지를 써서 곡운정사에 대한 기문(記文)을 요청하였고, 송시열 1671년 6월에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짓는다. 송시열의  「곡운정사기」 중 일부분을 살펴보도록 한다.

 

    《 매월당의 시가 매우 많은데 미궐(薇蕨)이란 글자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그 골짜기 이름을 채미곡(採薇谷)로 고쳤다. 그리고 한 칸의 정사(精舍)를 지어서 이름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하고는 매월당의 화상을 봉안한 뒤에 마을 사람들과 맑은 샘물을 떠서 제향(祭享)할 계획이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몇 칸 띠집을 짓고 조만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휴식할 곳으로 삼았으니, 이는 장차 차례로 실현될 일이다.
  연지(延之;김수증의 자)가 크게 탄식하면서, “우리나라의 산수는 봉래산(蓬萊山) 만폭동(萬瀑洞)을 첫째로 친다. 그러나 수석(水石)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노닐며 서성거리고, 살면서 농사지을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 곳보다 못하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내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하고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記)를 청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것은 이치이고, 늦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는 것은 시세(時勢)이다. 지금 이 사탄(史呑, 사창리)은 산이 우뚝하고 물이 흐른 지 몇 천만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매월당의 유람하던 곳이 되었다. 또 매월당과 함께 파묻혀 버린지 다시 몇 해 만에 연지(延之)에게 발견되었다. 지금부터 장차 나타남은 있어도 영원히 숨겨짐은 없을 것을 나는 기대한다. 대개 발견이 더딘 것은 항상 오래 전하게 된다.
  나는 이어서 연지에게 고할 것이 있다. 연지가 이미 못 이름을 ‘와룡담(臥龍潭)’이라 했으니, 주희가 여산(廬山) 와룡담에 암자를 지어 제갈무후(諸葛武侯)를 봉안하던 고사를 모방하지 않을 참인가? 나는 연지의 서원(西原)의 자허(子虛)가 되고 싶지만 이미 늙어서 그럴 수 없다. 주희의 와룡암시(臥龍庵詩)를 적어서 보내니, 이후에라도 완성하게 되거든 이것을 벽에 걸어 두기 바란다.”

 

  곡운정사가 자리 잡은 귀운동에 대해 김수증은 금강산의 만폭동보다 더 낫다고 송시열에게 말한다. 소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사지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한다면 매월당의 자취가 있는 것이다. 매월당에 대한 그의 숭모를 엿볼 수 있다.
  송시열곡운정사 뿐만 아니라 주희의 고사처럼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사당 지을 것을 부탁한다. 중국 여산(廬山)의 와룡담(臥龍潭) 곁에 와룡암(臥龍庵)이란 암자가 있었으나, 무너져 버리고 터만 남게 되었다. 이에 주희는 사재를 들여 서원(西原)에 살고 있는 은자(隱者)인  최가언(崔嘉彦)을 시켜 중수하게 한 후, 제갈량의 화상(畫像)을 안치하게 했다. 주희의 이러한 일을 상기한 것이다.
  송시열「곡운정사기」를 지을 당시 농수정도에 그려진 것처럼 곡운정사가 완비된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일곱 칸의 띠집을 지은 후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방을 만들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도 지었다. 조세걸1682년에 그린 농수정도(籠水亭圖)에 건물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곡운정사에는 이밖에도 비석이 있었다. 이하곤1714년 뜰 가운데 조그만 돌 비석이 서있는데, 송시열의 기문과 주자의 와룡담(卧龍潭) 시를 새겼는데, 김수증 예서체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유봉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기록하였다. 뜰 옆에 조그만 비석이 있는데 우암의 기문을 새겨놓았으나 글자가 마모되어 흐릿해져 읽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남유용도 비에 새긴 우암이 지은 글을 읽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곡운정사가 있던 자리는 현재 개인 소유의 집과 밭, 그리고 비닐하우스가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대체적인 추정일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 조사되지 않았다. 

 

 

곡운정사터.gif

<곡운정사터>

 

 

 

농수정에서 시비를 잊고 싶구나

 

  곡운정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농수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수증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가 곡운에 온 이유가 농수정에 오롯이 담겨있다. 「농수정소서(籠水亭小序)」에서 그는 속마음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 "거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사람들이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하여/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 이 시는 최치원시로 가야산 홍류동에 새겨져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시를 애송하였다. 어쩌다 물이 돌에 부딪쳐 솟구치는 곳을 만나면 높은 풍모를 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뜰에 난 풀을 보면서 풀을 뽑지 않은 주렴계의 뜻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경술년(庚戌年) 봄에 강원도의 곡운을 차지해 이미 정사(精舍)를 짓고 시내 구비치는 곳으로 나가 농수정을 지었다. 아! 고운(孤雲)이 이 시를 지은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 뜻을 취한 것은 시비를 가리는 천성을 없애려는데 가깝지 않겠는가? 아아! 혼돈(混沌)이 죽자 온갖 거짓이 날로 번성하여, 사람이 처음에 받은 것이 녹아 없어져 얻을 수 없다. 세상은 뜨겁고 말 많으니 참된 것을 얻기 어렵다. 불행히도 말세에 태어나 잘잘못이 빈번하니 말썽이 많은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고운(孤雲)이 일찍이 “속세의 요로와 교통하는 데는 눈길을 준 일이 없고(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물외의 청산과 녹수에 돌아갈 때만 꿈꾸었다(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라고 했다. 높이 날아 멀리 갈 수 있으나 오히려 알려질까 두려워했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을 잊는 것에 과감하여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높은 산 우러르고자 하나 그 사람 멀리 갔구나. 세상 밖의 구름 산, 살고 있는 이곳이네. 수많은 갈래 맑은 물, 산을 두르고 계곡을 떨치니, 시끄러움 이르지 못해, 시비(是非)를 다 잊는구나. 편안하고 한가롭게 노님이여, 내 장차 그 사이에서 늙으리.》

 

  농수정 겸재 정선이 그린 해악전신첩 30점 그림 중에 곡운농수정(谷雲籠水亭)이란 화제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김창흡‘시끄러움으로 시끄러움을 보내려고 했으니 각각 묘한 이치가 있다’ 그림에 적었다. 정선의 그림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세걸의 곡운구곡도 중 6곡 와룡담도와 농수정도 남아 있어 농수정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농수정은 언제 지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673년 4월 이전에는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수증계축년(癸丑年;1673년) 4월 17일의 일을 「산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673년 4월 17일 오후. 명옥뢰(鳴玉瀨)로 나가서 농수정의 형세를 두루 보고, 물가의 버드나무와 잡풀을 베어내니 넓고 조용하며 깨끗하게 탁 트였다.”

 

  1673년 4월 이전에 세워진 농수정어유봉1721년 찾았을 때, 편액(扁額)과 제판(題板)은 예전처럼 완연하였으나, 처마와 서까래는 많이 퇴락하였다. 100여년 뒤 1820년 정약용이 찾았을 때는 정자터만 남아 있었다.
  조세걸그림농수정의 모습과 주변의 풍광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문헌으로 전하는 농수정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수증‘남쪽 물가의 소나무 숲이 푸르고 울창하여 정자를 둘만하였다. 그래서 최고운(崔孤雲)의 시어(詩語)를 취하여 농수정(籠水亭)이라고 이름하였다.’고 묘사를 시작했다. 오원(吳瑗:1700~1740)“계곡 옆에 산을 기대고 있는데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유달리 그윽하면서도 훤하다.” 고 적고 있다. 이하곤“2리 쯤 앞으로 가면 정자가 날개를 편 듯 있다. 바로 곡운의 농수정(籠水亭)이다. 바로 화악산을 마주하고 있다. 아래로 와룡담을 내려다보고 있다. 매우 맑고 그윽하다. 정자 앞에 노송 수십 그루가 푸르고 울창하니 더욱 좋다.”라고 기록한다. 정약용은 “(와룡담) 서쪽으로 농수정을 바라보면 은연히 소나무 숲 사이에 비친다.”, “와룡담은 정자 터의 남쪽 아래에 있다.”고 전해준다. 농수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김창흡 「농수정기」이다.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 시내 가에 정자를 짓고 농수정이라 하였다. 농수(籠水)는 물로 산을 에워싸는 것이다. 물로 에워싸는 것은 시비가 귀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도 한두 번 그 곳에 가서 보는 것을 다였다. 대체로 깊은 골짜기로 사방이 막혀있고 뒤에 청람산이 있는데, 남쪽의 화악산과 마주하며 서로 묶여있다. 물은 그 사이로 흐르며 한번은 구비쳤다가 한번은 곧게 흐른다. 큰 돌과 흰 돌이 물가에 있다. 물이 부딪치곤 세차게 흐르며 산의 안과 밖을 돌아가니 끝이 없다. 동쪽으로 보아도 물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없고, 서쪽을 보아도 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다."

 

농수정도.gif

<농수정도>

 


    농수정 주변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에워싸고 있고, 물가에 있어서 와룡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정확한 위치는 김창흡의 묘사와 ‘물소리로 에워싸다’ 정자의 이름에 걸맞는 곳이리라. 그렇다면 김수증이 처음 명옥뢰라고 이름을 붙인 곳에서 직선거리에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농수정에 대한 기록은 풍성하다. 송시열「농수정기」를 지었고, 이민서가 뒤를 이어 글을 지었다. 동생 김수항(金壽恒:1629~1689)「농수정상량문」을 지어 농수정의 의미를 되짚었다.
    농수정에 대한 시는 산문보다 더 많다. 그 중 송시열의 시는 농수정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대 세상 피해 숲 속에 있으면서,
이름을 천지 사이에 없애려 하네.
손님도 자못 주인의 뜻 알고,
세상 일 이야기 않고 청산만 대하누나.


夫君逃世在林巒   名姓將無天地間
客至頗知主人意   不談時事對靑山

 

 

와룡담도.gif

<와룡담도>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참고문헌≫
『곡운집』『기원집』『뇌연집』『의암집』『월곡집』 『문곡집』『주자대전』『삼연집』『운석유고(雲石遺稿)』『강원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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