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한의《해유록》 다시보기

2015. 8. 2. 00:57여행 이야기

 

 

 

 

 

신유한의《해유록》 다시보기 | 아시아=조선

 

      


   신유한(申維翰: 1691-1752)의 일본 기행일기가《해유록(海遊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번역문도 많고, 알려진 정보도 많다.

   그가 1719년 4월 11일 서울을 떠나 6월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했고, 9월 27일에 일본 수도 에도[江戶]에 갔다가, 이듬해 1720년 1월 24일에 한강을 건너 복명하기까지 261일간의 일기이다.

   원문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김태준(金泰俊)씨가 번역한 것(다락원, 1985)의 것을 보자. 원문대로 제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일단 믿고 싶다.

이런 내용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인식으로 지금까지 읽어봤는지를 비판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

이 글은 한결같이 한반도가 조선이고, 일본렬도가 일본인 것으로 엮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무런 의심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의심없이 읽어갈 수 있는 글인지를 번역된 글로써 다시 확인해보자.


(1) 1719년 4월 11일 국왕에게 작별인사하고 떠나 양재역에서 잤다.

(2) 5월 13일 일찍 떠나 부산에 이르렀다.


이 두 가지 사실에서 보면, 국왕이 계신 궁월에서 양재역까지가 1일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양재역에서 일찍(아마도 아침)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한 것도 1일 거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서울 궁궐에서 부산까지는 2일거리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일기의 문장에서 문가 빠져 있음을 추정케 한다. 그것은 1달 이상이나 적힌 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실제로 1달 정도 걸리는 거리가 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3) 5월 18일 남풍이 또 뱃길을 막는다. ... 멀리 대마도의 산들이 역력히 눈에 보였다. ... 사신은 자리를 옮겨 갯가로 내가고, ... 나는 배 위에서 시를 지었다.

(4) 6월 1일 동래부(東萊府)에서 기풍제(祈風祭) 지내기 위한 제물과 의폐(儀幣)를 준비했다.

(5) 6월 6일 부산성 서쪽 바닷 위에 있는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지냈다.

(6) 6월 20일 해뜨자, 6척의 배(앞엔 왜선 3척)가 닻줄을 풀고 항구를 나섰다. ... 해질무렵에 대마도 서북쪽 끝 좌수포(佐須浦), 일명 사사포(沙沙浦) 가까이에 이르렀다.

(7) 6월 21일 좌수포에서 서쪽으로 부산까지는 480리이고, 동쪽으로 도주(島主)가 있는 부중(府中)까지는 260리이다.

(8) 6월 23일 아침 늦게 좌수포를 떠났다. ... 30리쯤에 악포(鰐浦)를 지났다. ... 좌수포로부터 40리 떨어진 풍기(豊崎)에 정박했다.

(9) 6월 24일 닭이 울자, 빠른 조수가 밀려와서, ... 노를 저어 30리를 나가 서박포(西泊浦)에 이르렀다.

(10) 6월 25일 오후에 서박포에서 돛을 달고 동쪽으로 갔으며, ...날이 저물어 금포(金浦)에 이르렀다. 밤에 배안에서 잤다.

(11) 6월 26일 점심때 서포에서 120리 떨어진 선두항(船頭港)에 도착했다.

(12) 6월 27일 새벽에 선두항을 떠나,... 반나절쯤에 대마도주가 살고 있는 부중(府中)이 보였다. ... 잠시후에 선창에 대었다.


신유한 일행이 부산을 떠난 날은 6월 20일이며, 그날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대마도 서북쪽 끝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480리(=187.44km)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실제 한반도에서 대마도에서 부산까지는 49.5km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뭔가 다른 의미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4일 동안 곧장 일본본토로 갔어야 마땅하지만, 조수도 빠르고 날씨도 좋은데, 계속 이 항구 저 항구에 들린다. 더구나 빠른 조수라면 일상적인 넓은 바다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시 강에 잇닿은 바다가 아닐까?


(13) “이 섬(대마도)는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는 우리나라에서 도장(圖章)을 받았고, 우리 조정의 녹을 받아먹으며,  대소간의 우리나라의 명을 청하니, 이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번신(藩臣)의 의리인 것이다. ... 나로 하여금 조정과 국가의 부끄럼움을 사지 않게 하라.”


신유한은 매우 당당하게 호통을 쳤다. 역시 대마도는 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소리친 날이 1719년 6월 30일이었다.


(14) 7월 19일 돛을 달자 동편에 해가 떠올랐다. ... 드디어 대양 어귀에 이르자 바람머리가 점점 사나와져 눈깜짝할 사이에 수백 리를 달렸다. ... 일기주(壹岐州) 풍본포(風本浦)에 대었다. 풍본포는 땅이 기름지고 또한 곡식이 모든 지방 중에서 가장 많이 난다. 태수 원독신은 연봉이 50만 섬이다. 여기서 100여리에 평호도(平戶島)에 있으면서 이곳까지 봉행을 보내 접대했다. ... 부산에서 출발하여 창파를 건너 대마도에서 10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15) 조선 술은 독하여 도저히 더 마실 수가 없다.


7월 1일부터 18일까지 날씨 관계는 언급이 없음에도 떠나지 않다가 19일에야 대마도를 출발했다. 게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일기주에 대었다고 했다. 과연 그럴만한 거리인가?

그런데 대마도는 매우 척박하기로 소문난 곳인데, 이곳 대마도 풍본포는 무척 비옥하다고 했다. 그것도 일본에서 가장 곡식이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이곳이 과연 일본렬도 대마도를 말한 것이겠는가?


(16) 8월 1일 새벽에 비가 뿌렸다. ... 늦게야 개고 서남풍이 불므로 돛을 달고 출발했다. 대마도 일기주의 크고 작은 배가 수십리에 뻗쳐있고, 일기도의 흰 돛들이 역력히 눈에 들어와 참으로 장관이다. 한참 뒤에 바람이 점점 느려져 배의 속도가 아주 드디었다. ... 삼경이 되어서 람도(藍島)에 대었다. ... 여기에서 동남으로 50리에 있는 우쿠오카(福岡)를 다스리고 있다. 후쿠오카 10리 밖에 박다진(博多津), 일본말로 화가다(和家多)가 있다.

(17) 8월 3일 람도에 머물렀다.


이것은 마치 일본렬도에서 서남풍을 받아 항해하는 듯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러나 정말 그런 표현으로 맞아떨어지는지를 다음부터의 내용을 보자.


(18) 9월 3일 두시쯤에 출항하여 저물녘에 효고현(兵庫縣)에 대었다. ... 내일에는 대판성(大阪城)에 들어갈 것이다.

(19) 9월 4일 하구(河口)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는 모두 섬진(攝津) 땅이다. ... 큰 강이 동쪽으로 흘러와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다는 끝나고 물이 얕았다. 우리 배가 무거워서 댈 수 없었으므로, 전례대로 우리배는 만 가운데 세워두고 일본 루선(樓船)으로 옮겨 탔다.


이것은 일본렬도 효고현에서 오오사카현까지의 사이에 있다. 게다가 그곳은 경위도로 보면 북위 34도 30분, 동경 135도 부근인데, 여기에는 큰 강이 없을뿐더러, 더더욱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없다. 비파호에서 흐르는 강은 서남쪽 방향이다.

이 지형 강의 흐름을 설명한 것은 전혀 일본렬도의 것이 아니다. 다음의 것을 보면 아마도 양자강을 말한 것이거나 그 근처의 것일 것이다.


(20) 하구로부터 오사카까지는 30리(=11.34km)였다. ... 오사카는 섭진주(攝津州)가 있는데 수길(秀吉)의 옛 도읍이다. 강의 이름을 랑화(浪華), 또는 난파(難波)라고 하므로, 그 땅을 랑화니, 난파라고 부른다. ... 섭진주는 가장 크고 기름진 땅이다. 북쪽으로 산성주(山城州)에 접했고, 서쪽으로는 파마주(播摩州)에 이르고 동남쪽은 큰 바다이다.

(21) 9월 9일 왜경(倭京)에 들어갔다.

(22) 세 사신, 세 당상역관, 상통사 등이 탄 배들이 연달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은 랑화강 상류로서 별명을 전강(淀江)이라 한다.


여기서 “랑화(浪華), 또는 난파(難波)”라는 말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 발음의 어감이 “녕파(寧波: 닝보)같다. 이곳은 절강성, 아니 절동성의 동부에 있다.

그리고 일본렬도에서는 거슬러 올라갈 강도 없다. 비파호로 거슬러 올라갔단 말이겠는가?

그것은 “전강(淀江)”을 보자. 이것은 “淀: 얕은 물 ‘전’자”이다. 항주만에 “전강(錢江)”, 즉 전당강(錢塘江)이 있다. 이곳은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큰 강이다.


(23) 10월 13일 우리 서울에서 여기[에도(江戶)]까지 수륙 5500리(=2079km)이다.

(24) 12월 8일 해가 저물기 전인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이나 밤낮으로 크게 비가 쏟아졌다.

(25) 1720년 1월 6일 오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문득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 절영도 80리를 남겨놓고 해가 저물었다. ... 선래군관은 ...초7일에 다시 부산에 와서 사신을 뵙고 갔다.


음력 12월 8일과 1월 6일이라면 늦은 겨울인데, 이런 겨울에 비가 사흘 동안이나 내린다면 일본렬도는 아닌 것이다. 제주도와 비슷한 위도에 있는 일본렬도에서는 겨울이면 눈이 쏟아진다. 차라리 진눈깨비라면 모르지만, 눈이 쏟아진다는 말은 지리적으로 어디를 가리킬까?

적어도 절강성과 그 이남 쪽이라야 마땅할 것이다.


(26) 1월 9일 밀양에서 잤다.

(27) 1월 11일 창년에서 조반을 먹고 저녁에 현풍에 닿았다.

(28) 1월 15일 고령(高靈)을 떠났다.

(29) 1월 20일 숭선(崇善)에서 잤다.

(30) 1월 21일 무극역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죽산에 이르렀다.

(31) 1월 24일 아침에 한강을 건넜다. ... 서울에 들어가 복명했다.


여기서는 신유한 일행이 일본에 갔다왔는데,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17일간(7일-24일) 걸렸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들이 부산에서 한성까지 진격하는데 19일이 걸린 것과 흡사하다.

그런데 전체적인 소요일수는 그렇다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부산에서 고령까지는 겨우 90km인데, 그 나머지 고령에서 서울까지는 무려 350km나 된다. 90km를 8일간(7일-14일) 걸렸으니, 고령에서 서울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9일만에 도착될 수 있을까? 4배나 더 걸릴 거리라면 그 지명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양자강 유역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일 것이다.

맨 앞에서 말했듯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1달 정도 걸렸으니 말이다.

이 신유한의《해유록》은 지리적으로 일본렬도의 지명을 설명한 것이 결코 아니다. 게다가 대마도의 많은 포구를 지나온 것을 보면 결코 현재 지도상의 대마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도 그 대마도가 1719년 그 당시에도 조선의 땅이라고 큰소리쳤고, 그 대마도 관리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지금의 한반도와 일본렬도와의 사이에 있는 관계에서 대마도를 가리키는 것 또한 아님을 알 수 있다.

많은 내용이 일본렬도의 지리적 설명과 흡사하게 그려졌지만, 결코 동일한 지리적 설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대륙 속의 일본을 현재의 일본렬도로 각색한 글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 신유한이 지었다는 한문 원문을 찾아서 다시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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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록 -신유한-| 독서토론(열려라 독서팡팡!)

 

 

이형국(제부리) | 조회 52 |추천 0 | 2014.10.20. 08:34

  해유록(海遊錄)                                  - 신유한 -

● 본문

9월 4일(계유) 맑음

강어귀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도 다 섭진주(일본 혼슈 긴키 지방 오사카 부에 있는 도시) 땅인데 땅이 넓어 시원하며 마을이 매우 번성하다. 앞에 줄룩줄룩한 산줄기들이 물을 휘돌아 섬으로 된 데마다 민가들이 있어서 종옥(鍾屋, )이니 점포니 하는데 동서로 놓여 바둑돌을 벌여 놓은 것 같다. 아름다운 나무와 참대들이 서 있으며 갈꽃과 억새풀이 얼씬거리는 등 가을 풍경이 더욱 기이하다. 갈매기와 학들이 물가에서 놀다 너울거려 날다 하니, 강호의 풍경이 문득 바다 밖 3천 리 파도에 시달려 온 객의 시름을 잊게 하여 누구나 얼굴에 유쾌한 빛을 띠었다.

큰 강이 동쪽으로 내려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바닷가가 되어 물이 얕으니 우리 배가 더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 배는 강기슭 뒤쪽 끝자락에 돌려 대 두고 일본 다락배에 옮겨 탔다.

이윽고 뭇 왜인들이 배들을 갖추어 가지고 왔는데 화려하게 꾸며 아주 찬란하였다. 배에 이층 다락을 짓고 지붕은 나무를 기와처럼 새겨 파랗게 옻칠을 하였고 지붕 아래는 전체가 검고 다 번들번들 거울같이 빛나며 서까래, 난간, 지붕마루는 황금을 입혔다. 또 창문 중방과 천장까지도 그렇게 하여 사람이 배 안에 앉았거나 누웠을 때 옷이 모두 금빛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주색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어 사방에 둘러쳤는데 거기에 군데군데 커다란 붉은색 술을 달아 늘인 것이 네다섯 척씩 늘어져 봉황의 꼬리 같았다. 또 난간 위에는 생사(가는 무영 올로 폭이 넓고 설되게 짠 피륙)같이 가늘고 무늬가 알씬거리는 붉은 발을 쳐서 강물에 한 자쯤 못 미치게 늘였다. 배꼬리에는 오색이 아롱아롱한 한 발 남짓한 끈에 황금 방울 둘을 달아 그 소리로 키(배의 방향을 조종하는 장치)가 노는 완급(느림과 빠름)을 알게 하였다. 또 물에 잠기는 배의 거죽에는 금빛 나는 쇠를 씌워 금빛과 물결이 서로 그림자를 얼씬거리고 있다.

노를 젓는 자가 배마다 스무 명씩인데 빨갛고 노랗고 파란 옷으로 구별되게 입혔다. 또 그 옷에다가 옷 빛깔과는 다른 빛으로 수를 놓아 거북 무늬를 만들었는데 노란 옷에는 검정 무늬, 파란 옷에는 빨간 무늬로 수놓아 색깔을 따라 각 배에 들여 서로 섞갈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옷의 등허리에는 반드시 검은 전자(篆字, 전서체, 한자 서체의 하나)로 '과(過)' 자가 박혀 있었다. 또 노는 다 진홍빛으로 빛난다.

국서(國書, 국가의 원수가 국가의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받들 때는 맨 앞에 있었으며 정사(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부사, 종사관(통신사를 수행하던 임시 벼슬) 이하 당상 역관(통신사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과 왜의 상급 통역과 군관 등 사신 일행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아홉 척에 타게 하였다. 배가 모두 각각 표식(무엇을 나타내 보이는 일정한 방식)이 있으며 화려하고 사치한 모습은 그리 차이가 없었다.

정사 공이 대마도주에게 말을 전하기를,

"누선이 이렇듯 사치한 것으로 보아 관백(일본 역사에서 성인이 된 왕의 최고 보좌관 또는 섭정)이 타는 배로 생각되니 우리가 타는 것은 예가 아닌가 합니다." / 하였다. 대마도주는 놀라 사례(상대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냄)하였다.

"이는 사신을 위하여 새로 지은 배입니다. 관백의 배가 아니오니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나중에 다른 왜인한테 물어보니 국서를 받든 배 말고 사신 이하가 탄 모든 배들은 다 각 주의 태수들의 배와 같았다.

밥 먹고 곧 떠나게 되었을 때 왜관이 전례(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일 처리의 관습)라 하여 나에게 국서를 받는 배로 먼저 가게 하였고 세 사신은 그 뒤를 따라 떠났다. 사신의 깃발과 군악을 실은 작은 배가 대열을 이루고, 군관과 역관은 또 그 다음으로 떠났으며 중하급 관리와 행장 등 온갖 물건을 실은 수십 척의 정묘한 채색 배가 또 각각 배속되었다. 나와 같이 배에 탄 자는 강진 현감 최필번과 사자관(문서를 정서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두 사람, 내가 데리고 간 동자 김세만, 악공 일여덟 명, 왜 금도(禁徒, 통신사를 호위하는 무리) 두 명, 통역 한 명이다. 배 안에는 차 끓이는 노구솥, 술병, 베개, 요들이 다 있고 앉는 자리는 다 두툼한 금빛 돗자리에 그림으로 선을 둘렀다.

국서를 넣은 용정(龍亭, 나라의 옥책이나 금은보배, 국서 등 귀중한 물건을 운반할 때 사용한 가마와 수레)을 받들어 뱃간의 중앙에 있는 방에 안전하게 잘 둔 뒤 악공에게 명하여 거문고, 저, 비파, 북, 장구, 피리를 갖추어 아악의 느린 곡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노 젓는 왜인이 또 뱃노래를 하여 그 목청이 높고도 맑게 잘 넘어가 마치 우리나라 절에서 큰 재를 올릴 적에 중이 목청을 높여 축원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같으니 이 또한 매우 유쾌하였다.

강어귀에서 대판(大阪, 오사카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까지 30리 사이 강물이 넓었다 좁았다 하며 수심이 한두 길밖에 안 되는데 배가 크고 가벼워서 거침없이 가운데로 떠서 천천히 가고 있었다. 두 언덕은 다 돌을 쌓아 둑을 만들었는데 돌을 깎은 것 같았다. 물이 동서에서 흘러들어 못도 되고 소용돌이도 된 것이 많다. 지류 가운데 큰 것은 따로 잔잔한 호수가 되어 비단 띠처럼 마을을 싸고 돌아 흐르니 이렇게 된 데마다 무지개 같은 다리를 놓고 그림 같은 난간을 붙였다. 다리 기둥이 수십 척이나 되는 것도 있는데, 다리 아래로 배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다리의 높이가 이러하니 그 길이도 짐작할 수 있다.

언덕 위 산기슭은 굽틀굽틀 뻗어나가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층집과 날개를 편 듯한 누대가 구름 속에 빛나며 수많은 인가의 담장과 벽들도 다 깨끗하다. 작은 땅이라도 그저 내 버려 둔 데가 없다. 낮고 습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데면 푸른 잔디 언덕을 만들어 깨끗하게 해 놓아 어지러운 데라고는 없다. 그 중에서도 돌을 다듬고 쌓고 터를 닦아 집을 날아갈 듯이 지어 아득하게 강물을 굽어보게 하였고, 뜰과 우물가에는 노송과 가을 해당(해당화)을 심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초들을 심어 깃발처럼, 양산처럼 별의별 형태를 만들었다. 비단 휘장을 치고 오색등을 달아 놓은 것들은 다 각 주 태수들의 별장이다. 그 아래 강기슭 수문에는 나무 울짱을 세우고 황금으로 장식한 배를 매어 두었는데 거기에는 사신이 탄 배 같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는 부호와 귀족들이 노는 곳이다. 또 강을 끼고 떠 있는 어선들과 상선(삯을 받고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데에 쓰는 배)들이 꼬리를 물고 잇달아 있다.

남녀 구경꾼들이 양쪽 언덕 위에 담을 이루고 서 있는데 다 비단과 무늬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 여자는 새까만 머리에 기름을 발라 윤기가 흐르는데 꽃 비녀와 대모(玳瑁, 바다 거북의 하나. 등껍질은 공예품과 장식품에 쓰임) 빗을 꽂았으며 얼굴에는 분을 발랐다. 그리고 빨갛고 파란 그림을 그린 장삼을 입은 데다가 화려한 띠로 허리를 동여 허리가 가느다랗고 기름하게 차렸으니 마치 절간에서 볼 수 있는 불화(불교의 내용을 그린 종교 그림)를 보는 듯하였다. 사내아이들 가운데 고운 아이는 복색과 차림이 여자보다도 더 아름답고 여덟 살 넘으면 왼쪽 옷자락에 진기한 칼을 꽂지 않은 아이가 없으며 강보에 싸여 있는 어린것까지도 알쏭달쏭 아기자기하게 차려 무릎 위에 앉히기도 하고 등에 업기도 하였으니 그 번화한 광경이 오색이 무르녹은 꽃동산을 이루었다.

앉을 수 있는 데는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차지하였으니 강 좌우에 배를 대어 놓고 어깨를 비비면서 들어앉았으며 언덕에는 빈틈이 없어 멀리 담장이나 다리 난간을 의지하여 앉았다. 더러는 자리를 펴고 더러는 풀을 깔고 앉았고, 평상을 놓고는 비단 장막을 치고 술과 차도 갖추어 놓고 이것저것 먹고 마시기도 하였다. 알고 보니 장소마다 자리를 만들어 놓은 임자가 있어서 음식을 준비해 놓고 팔기도 하며 자릿세로 한 사람 앞에 2전씩 받는데, 거리가 멀고 가까움과 자리가 좋고 나쁜 데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때때로 어린애가 우는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도 들리는데, 여자가 웃을 적에는 반드시 그림 무늬를 놓은 수건을 가지고 있다가 입을 가리곤 하며 맑고 간드러지게 웃을 때에는 새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길로 내닫거나 떠드는 자가 없었다. 가을볕이 내려쬐기 때문에 채색 수건으로 머리를 덮었거나 흰색 둥근 삿갓을 썼으며 모두 단정히 앉아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지형을 따라 구경꾼들의 대열도 높낮이와 폭의 변화가 있었다. 이렇게 20리 사이를 갈수록 더욱 번화하니 이를 보내고 맞는 우리의 눈동자 또한 분주하였다.

산천과 누대와 사람들의 차림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참대숲과 꽃떨기가 또한 제각기 내로라고 나서며 샘을 내는 듯 다투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왼쪽만 바라보다가는 바른쪽 풍경을 잃을까 싶어서 바른쪽에 눈을 팔 때에는 왼쪽이 문득 더 기이해지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배가 한나절을 가는 동안 두 눈시울이 다 붉어지도록 눈을 팔았으니 마치 츱츱스러운(보기에 너절하고 염치 없는 데가 있는) 사람이 진기한 음식을 보고 자꾸 먹어서 배가 부른데도 입에서는 싫지 않음과 같았다.

대마도주는 강어귀에서 먼저 대판으로 들어가더니 해가 질 무렵에 다시 금빛이 찬란한 배를 타고 나와 맞았다. 멀리 바라보니 술을 늘인 휘장 속에 아렴풋이 보이는 민대머리 녀석이 우뚝이 앉았고 그 옆의 기물들은 다 금으로 장식하였으니, 아까울손 번화와 부귀가 허수아비에게 태어났구나!  내 배에 있던 금도와 통역은 이를 바라보자 곧 꿇어 엎드려 감히 일어나지 못한다.

긴 다리 일곱을 지나서야 비로소 대판에 도착하였다. 배를 언덕에 대니 연안에다 판자를 깔아 부교(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다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높이가 뱃전과 가지런하고 좌우에는 참대 난간이 있어 그 아담하고 빈틈없음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그 위에 뭇 왜인들이 가마와 말을 갖추어 가지고 둘러서서 바른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드디어 부교에 내렸다. 사신은 큰 가마를 타고 나와 당상 역관은 현교(가마의 하나. 긴 나무 하나를 위에 가로지르고, 두 명 또는 네 명이서 어깨로 멤)를 탔으며 나머지는 말을 탔는데, 말이 모두 준마로 늠름하며 금으로 장식한 안장에, 비단 다래에, 은 등자에 또 자주색 실과 녹색 실로 노끈을 꼬아 그물처럼 만들어 안장 뒤에서 말 궁둥이까지 덮어 오물을 막도록 늘어뜨렸으니 오색이 찬란하였다. 마부와 가마꾼, 그 밖에 딸린 사람들의 수가 우리 사신 일행의 관직 위계를 따라 각각 다른데 적어도 대여섯 명씩은 되었다.

국서를 받들고 군악을 연주하면서 6~7리쯤 가서 숙소에 이르렀다. 그 사이 한길 좌우에 서 있는 긴 행랑은 다 층집으로 일용 잡화를 파는 가게들이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길 양쪽을 메웠는데 화려하고 사치함에 어지럼증이 날 지경이었다. 부두에서 사관까지 거리를 몇몇이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길이 내내 평탄하고 곧으며 티끌이 없었다. 양쪽에 주렴과 그림 휘장을 쳐 치장한 층집에는 위층 아래층 할 것 없이 푸른빛, 붉은빛, 보랏빛, 자줏빛, 초록빛, 누런빛 등으로 무늬 놓은 옷을 입은 남녀노소들이 가득 차 있었다.

● 감상 및 이해

조선 숙종 때 제술관 신유한이 조선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시대에는 '일본은 우리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유한은 직접 그들의 나라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발전된 문화와 풍속, 제도를 보며 놀라워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하면서 글로 기록했다.

제술관은 주로 사신 행차의 글에 관한 직무를 담당합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사신들을 학사대인(學士大人)이라 부르면서 시문과 학문토론을 청하였으므로, 그런 일본인들을 맞이하는 것 또한 제술관의 중요한 임무였다. <해유록>은 1719년(숙종45)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0개월간의 일기가 3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끝에 <문견잡록(聞見雜錄)>이 수록되어 있다. 상권은 사명을 받은 날로부터 일본 우시마도에 이르기까지의 6개월 간으로, 그 내용은 의식적 행사와 영물(詠物)에 관한 시문으로 되어 있다. 지리 · 인습 · 풍속 · 제도뿐 아니라 초목에 관하여도 기술되어 있다. 중권은 일본에 체류 중인 주로 승려들과 필담한 내용과 문집에 서문을 써 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담의 내용은 조선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에 화답한 것으로, 이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권은 귀국하여 복명할 때까지의 기록이며, <문견잡록>은 일본에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으로, 풍속에 관한 것이 많고 몇 사람의 인물평과 일본의 주자학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 정리하기

성격 및 갈래 → 고전수필, 기행문, 록(錄)

구성 → 여정에 따른 추보식 구성

1) 강어귀

2) 다락배

3) 대판

4) 숙소까지 가는 여정

특성

1) 묘사적, 사실적, 비유적, 주관적 성격

2) 제목 → '바다를 여행한(일본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임.

3) 여행하면서 본 마을 묘사, 사람들의 복장 및 자연경관 묘사, 타고 간 배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구성

주제일본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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