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산을 오르다 2

2015. 7. 28. 18:40여행 이야기

 

 

 

 

 

      

태기산을 오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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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왕의 한이 서린 태기산성

 

   신대리에서 태기산을 오르는 길은 큰 성골 경유해서 낙수대 방향으로 가는 코스와, 작은 성골 거쳐 가는 코스가 있다. 태기산성 보기 위해선 작은성골로 가야한다. 신대리 버스종점에서 송덕사 방향인 오른쪽 길로 향하다가  두 계곡이 만나는 곳에서 곧바로 가면 큰 성골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성골이다. 시내를 끼고 자리 잡은 펜션을 지나면 바로 사방댐이 나온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된다. 오솔길은 계곡물 소리를 바로 옆에 두고 한동안 지속된다. 새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들리는가 싶더니 바로 공포의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한여름이라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땀이 떨어진다. 몇 번 중간에 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물통이 반쯤 비위지자 계단이 끝난다. 능선을 따라 산죽이 무성하다. 안석경태기을 오를 때도 산죽이 주변에 빽빽했던 것 같다.

       

  " 다음날 산에 올라 태기왕고성(泰歧王古城)을 지났다. 가는 대나무와 큰 나무만 있고 인적은 없다. 태기왕(泰歧王)은 역사에서 볼 수 없으니, 산에서 도적질하며 의거하는 자이다. 바위의 다람쥐와 계곡의 너구리와 어찌 다르겠는가? 정륜(晶倫)만 못할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려는데 바람은 불고 날은 저물려고 하여 오르지 못했다. 많은 나무들을 보니 모두 붉게 단풍이 들었고, 잎에서 소리가 나며 비가 내린다. 큰 산과 깊은 계곡 사방을 둘러봐도 날짐승이 없으니, 유람하는 사람을 두렵게 근심하고 허전하게 한다. 특별히 안개 낀 수면의 아득함과 꽃과 버들이 밝고 고운 구경거리 같지 않다. " ( 「덕고산천진사구유기」 중)

 

  안석경태기왕고성(泰歧王古城)이라 하지만 예전의 공식적인 기록은 ‘덕고산석성’ 또는  ‘덕고산성’으로 적고 있다. 현재는 ‘태기산성’으로 부르고 있는데, 안석경도 ‘태기왕고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다양한 이름으로 부렸음을 알 수 있다. 태기산이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대동지지』이다. 덕고산태기산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는데 공식명칭은 덕고산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태기산으로 불렀던 것이다. 안석경은 태기산을 덕고산으로 불렀다.


  태기산진한(辰韓)태기왕신라박혁거세에 쫓겨 태기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방어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주변에 이와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태기왕 이야기의 경우 채록 시기와 제보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전해진다. 그러나 싸움에서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태기산으로 도피한 후, 성을 쌓고 후일을 도모하지만, 적군에 의해 멸망한다는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태기왕과 관련된 이야기를 사회적 혼란기에 민중의 추앙을 받던 민중봉기 세력의 실패담을 바탕으로 한 설화나, 조선후기 유랑광대패들 혹은 의적의 정착과정에서 발생한 설화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안석은 산에서 도적질하는 사람으로 폄하하고 있지만, 태기산을 둘러싼 횡성평창, 그리고 홍천지역까지 태기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좌우로 낭떠러지다. 이러한 구간은 줄을 설치해놓았다. 이젠 계곡물소리도 아련하게 들린다. 잠시 동안의 평탄했던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지면서 돌무더기가 보인다. 직감적으로 태기산성임을 느꼈다. 돌무더기는 숲속에서 좌우로 길게 이어진다. 
  태기산성『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되고 있으며,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여지도서』에는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 성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축성연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나 고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보다는 몽고 침입 이후 설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성에 들어서자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다. 여기저기 넓은 평지도 보인다. 커다란 나무 앞에 돌을 쌓아놓은 곳도 있다. 성황당터라고 한다. 이 길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안녕을 빌었던 공간이다. 주변에 석축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다. 높은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흐르는 곳이 보인다.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식수원이었을 것이다. 태기산성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려주는 표시판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자 태기산성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보인다. 주변엔 무너진 성의 흔적이 또렷하다. 성의 ‘동문(東門)’에 해당되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을 ‘동문밖’이라고 부른다. 이 일대는 마을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산양바위 앞에 거주하시는 할머니도 예전에 태기산에서 당귀와 천궁 등을 재배하며 살았노라고 말씀하신다. 학교가 있을 정도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산성은 태기산 정상 서쪽 중턱 해발 800~950m되는 곳에 있다. 정상 쪽을 제외하고 모두 절벽이거나 급경사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활동하던 주인공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주변 지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다. 태기왕으로 알려진 그를 생각하며 산성비 앞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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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성 표지석> <산성터>

 

 

 

태기산에 오르는 이유는

 

  안석경1765년, 그의 나이 48세태기산 자락인 둔내면 삽교리 거처를 옮긴다. 그는 삽교리로 들어가면서 태기산에게 자신의 은거를 허락해달라는 글을 쓴다. “저는 얕은 학문과 못난 꾀로 세상에 스스로를 내버려두지 않고 유명한 산들을 떠돌아다니며 유람하고 집터를 보면서 늙었습니다. 지금 이 산을 만나 귀의하려고 합니다. 부모와 책과 형제를 안고 은거하려고 합니다. 집안과 이웃을 이끌고 이 계곡에서 모여 개간하고 밭을 갈며 낫질하고 집을 지으며 경전을 열심히 익혀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합니다.(중략) 밝은 신은 굽어 살피소서.” 태기산에 맹세한 안석경은 이후 삽교를 떠나지 않고 태기산의 품에 안겨 인생의 후반기를 보내게 된다.

 

   " 덕고산은 구불구불 백리에 서려있고 높이는 만여 길이다. 언덕과 산은 넓고 두터우며 계곡은 깊고 구름 낀 나무숲은 울창하다. 안과 바깥에서 최고봉을 볼 수 없다.  " (덕고산천진사구유기」중)

 

  안석경태기산의 본래 이름인 덕고산의 의미에 대해서 나름대로 풀이를 한다. 주변의 산들보다 높고 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높이지 않아 자신을 볼 수 없게 한 것에 주목한다. 그러한 것에서 그는 덕이 높은 군자의 모습 발견한다. 높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품격을 지닌 산. 그 산이 덕고산이고 태기산인 것이다.
  자기 홍보의 시대에 ‘덕고(德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태기산 같은 품격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칭송을 하지만, 자신이 삶의 방식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내실 없이 겉으로만 포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일깨워준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정상을 향해 갔다. 한참을 가니 태기산 풍력발전단지 사무실 보인다. 태기산 일대에 위치한 풍력발전기는 20기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멀리서도 보이던 바람개비를 가까이서 보니 엄청난 크기이다. 신재생에너지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기산을 따라 줄지어선 풍력발전기는 태기산의 풍광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을 또 하나의 장관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산 속에서 보이지 않던 주변 산들과 그 사이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가의 꽃들도 하늘거린다. 정상이 보이는가 싶더니 철조망과 바리케이트가 길을 막는다. 정상에는 송전탑과 군 시설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접근을 못하게 한다. 입구에 전화번호가 있어 연락을 했지만 딱딱한 군인의 목소리는 냉정하다. 안석경처럼 나도 정상에 이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했다.
  정상에 이르지 못한 안석경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 나는 매번 산을 유람할 때면 반드시 최고봉에 오르는데, 이 산만은 유독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한가한 날을 기다려 다시 유람하며 오르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산을 오를 때 반드시 높은 봉우리를 오르려 하다니 호고(好高)의 뜻이 덕고(德高)라 이르는 것과는 다른 것이 아닌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산에 올라 산의 모습과 골짜기의 의취(意趣)를 모두 보고 느끼고자 한다면 최고봉에 오른 뒤에야 얻을 수 있소. 고봉(高峰)이라는 명성만으로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높은 봉우리라는 것도 곤륜산과 비교해 보면 다만 낮을 뿐만이 아니니, 어디 이것을 높다 하겠소?” (덕고산천진사구유기」중)

 

 주말마다 유명한 산을 뒤덮는 수많은 등산객들에게 안석경은 왜 산에 오르는지 생각하게 한다.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 사람들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건강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이 주된 동인이 되기도 한다. 안석경은 산의 의취(意趣)를 알기 위해서 최고봉에 오르기를 고집한다. 오직 산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산을 오르는 것이다.
  나중에 안석경태기산을 다시 찾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찾았으면 정상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오를 수 없다.  송전탑과 군 시설물이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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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기산 정상> <정상 부근의 풍력발전기>

 

 

 

 

《참고문헌》  

 

안석경, 『삽교집』 |  『동국여지승람』 | 『세종실록』 | 『여지도서』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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