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송순(宋純, 1493-1583)이 자식에게 준 훈계[訓子]

2015. 8. 12. 16:38잡주머니

 

 

 

 

 

      

4. 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구나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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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宋純, 1493-1583)이 자식에게 준 훈계[訓子]

 

   나는 너희들이 일찍 어미를 잃은 것을 불쌍히 여겼다. 게다가 너희의 타고난 기질이 잔약한 것을 안쓰럽게 여겨 너희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구속하지 않았다. 실로 늘 어미소가 송아지 핥아주듯 사랑하였다.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자애로운 어미가 자식을 망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하지만 너희를 그르친 것이 바로 나이고 보니 또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아주 어리석은 자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큰 멍청이는 종신토록 깨닫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너희는 원래 큰 바보나 멍청이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변하고 깨닫는 것에 어찌 기회가 없겠느냐?


   돌아보건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고아한 문장과 유학의 바탕을 이어받아, 가풍과 세덕(世德)이 예로부터 아름다운 소문이 있었음을 대개 떠올려 볼 수 있다. 어찌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실마리를 실추시키고 저러한 무리의 미친 행태를 사모한단 말이냐? 귤이 장강을 건너면 탱자로 변하고, 위수(渭水)가 경수(涇水)로 들어가면 흐려진다고 했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집을 옮긴 것인 진실로 까닭이 있었다.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하겠느냐’던 공자의 가르침이 이 고장과 너희들에게 능히 부끄럽지 않으냐?
아아! 집안이 쇠락하여 너희가 입신양명하는 것을 아직 못 보았는데, 다만 너희가 제멋대로 함부로 구는 망령됨만 보게 되었다. 범과 표범의 가죽과 개나 양의 가죽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듣자니 네가 지난 번 너와 같은 무리와 더불어 학동(鶴洞)에서 신나게 놀았다더구나. 또 이달 13일에는 취암(鷲巖)에서 크게 술잔치를 벌여, 온 경내가 다 모여 갖은 악기를 다 갖춰 한정 없이 즐겨 놀 계획이라 하더구나. 어찌 그럴 수가 있더란 말이냐?


   바야흐로 지금은 천재지변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어나, 춘추 적의 세 배나 되어 사서(史書)에 글이 끊이지 않는다. 신선의 베개는 화서(華胥)의 꿈을 깨고, 옥 술잔은 향기로운 술 맛을 잊었다. 무릇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왕의 교화를 입어왔다. 비록 초야와 산택의 사이에 있다고는 해도 마땅히 시절을 상심하고 세상을 근심하여, 눈썹을 태우고 눈을 부빌 틈도 없어야 하거늘, 어찌 진나라의 등 뒤에서 기국(杞國)을 엿보듯 멋대로 담소하고 함부로 노래하며 춤출 수 있겠느냐? 무지렁이 백성조차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을 너희가 하고 있으니 그러고도 네 마음이 편안하단 말이냐? 이미 한 차례 잘못을 해놓고 다시 되풀이 할 수 있느냐? 어찌 자주 되풀이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단 말이냐?


   저 광망하고 문자도 알지 못해 마셨다 하면 취하기나 하는 붉은 치마 입은 자들은 진실로 죄줄 것도 없다. 너희는 옛글을 읽고 유관(儒冠)을 썼으면서도 인의예지의 성품을 포기하고서 무지하여 망령된 짓을 하는 잘못을 스스로 받아들였으니, 네가 군자다운 선비가 되는 것은 바랄 수가 없겠고, 행동을 삼가는 바른 선비 또한 될 수가 없겠구나. 산 사람은 비난하고 저승의 귀신은 나무랄 것이니 장차 면할 곳이 없겠구나. 또 하물며 예로써 술을 마시는 자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 처음에 상도(常道)에 힘쓰다가 끝내 어지럽게 되기보다는 차라리 처음에 어지러웠지만 마침내 능히 다스려지는 것만 못하니, 내가 반드시 잘못될 것을 알겠다. 지난 번 너는 저들이 무리지어 함께 몸을 더럽히며 어지러이 뒤쫓는 것을 비웃었었다. 하지만 이제 네가 그 지경 속으로 점차 내달려 들어가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앞서는 대체 무슨 마음이었더냐?


   아! 이는 머리에 있으면서 검게 변하고, 사향노루는 잣을 먹고서 향기로워진다고 했다. 시종일관 함께함을 삼가라 하였으니, 선현께서 어찌 사람을 속이겠느냐? 네가 능히 유익한 세 가지 벗을 취하지 않고, 젖은 바로 인하여 물들었으니, 이는 도깨비나 귀신 무리의 일이다. 장차 누구를 좇아 덕성을 훈도하고, 장차 누구를 좇아 선행을 이루겠느냐? 손해만 있고 이익이 없는데도 능히 끊어 버리지 못하여 내 마음을 아프게 하니 불효가 크구나. 서경(徐卿)이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다던 두 아들에 견준다면 어떻겠느냐?


   네 죄가 매질을 받아 마땅함을 모르지 않으나, 너 또한 사람인지라 떳떳한 양심을 품어 절로 지각하여 깨닫는 이치를 지녔으니 매질을 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이제부터라도 능히 네 마음을 물리쳐서 그 허물을 면할 것을 생각하도록 해라. 네 덕을 환히 밝히고, 사귐을 끊어버려 부모의 마음을 네 마음으로 삼고, 선조의 사업을 네 사업으로 여기도록 해라. 어짊이 아니면 하지를 말고, 의리가 아니면 취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아라. 이렇게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의 능한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집에서는 아름다운 자제가 되고, 나라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 안으로 스스로 돌아봄에 부족함이 없고 밖으로 아름다운 소문이 성대함이 있어, 쇠미한 풍속을 그 맑은 향기로 일으켜서 훌륭한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게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느냐? 그리하면 내가 죽는 날에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놀고 즐기고, 게으르고 거만하게 굴면서 음악으로 창화하며 이같은 버릇을 깨끗이 고치지 않는다면 너를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실로 이 몸에 있게 되어, 내가 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아아!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오늘로부터 시작하고, 지난 날을 뉘우치고 미래를 향하는 것 또한 오늘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오늘은 무슨 날이냐? 임진년 동짓달 초이틀이다. 말로 논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얼굴을 맞대고 명령하는 것으로도 부족한지라, 붓으로 글을 써서 자식을 위한 계책으로 준다. 벽에다 붙여놓고 좌우명으로 삼아, 눈으로 읽고, 쓰든 버리든 품 속에 써서 지녀, 고해(苦海) 사이의 방편을 붙좇지 말도록 해라. 다시금 고하여 말한다. “주공(周公)께서는 보고 안일에 빠지고 놀고 사냥하는 음탕함을 경계하셨고, 공자께서는 도덕과 인예(仁藝)의 가르침을 내리셨다. 나 또한 이렇게 말한다.”

吾憐汝曹早失所恃. 且愍汝曹之稟生孱弱, 任汝所爲, 不加拘束. 固一時舐犢之愛也. 其流之弊至此, 慈母有敗子, 此之謂也. 而誤却汝者我也, 又誰咎也. 吾聞下愚終身不移, 大惑終身不解. 汝曹元非下愚大惑之比, 則其移也其解也, 豈無其機.
顧我家世, 簪纓相襲, 而以文雅儒素爲箕裘. 則家風世德, 舊有令聞, 槩可想矣. 奚以之墜落先祖之休緖, 傾慕彼輩之狂態乎? 橘渡江而化枳, 渭入涇而爲濁. 孟母之所以三遷, 良有以也. 而魯無君子斯焉取斯之聖訓, 能無愧於此鄕及汝曹乎?
噫. 門戶衰替, 未見汝曹之立揚, 只見汝曹橫騖之妄. 虎豹之鞹, 犬羊之鞹, 奚擇焉. 聞汝間者與乃如人, 旣遊衍於鶴洞, 又以是月初旬之越三日, 起大醵於鷲巖, 而一境畢至, 八音咸集, 爲窮歡極娛計, 其然豈其然. 方今天災地變, 層生疊出, 三倍春秋, 史不絶書. 而仙枕失華胥之夢, 玉觴忘馨香之味. 凡我世荷國恩, 獲沾王化者, 雖在草野山澤之間, 所宜傷時憂世, 燒眉蒿目之不閒, 豈可視杞國於秦脊, 而縱談笑恣歌舞哉. 至無知之邱氓, 尙不忍爲, 汝曹乃爲之, 於汝心安乎. 一之已非, 其可再乎. 何數數不憚煩也. 彼猖被不解文字, 飮徒能醉紅裙者, 固不足誅. 汝曹則讀古書戴儒冠, 而抛棄仁義禮智之性, 自納於無知妄作之孼. 汝爲君子儒, 非所可望, 而謹勑之士, 亦不得爲也耶. 明之人非, 幽之鬼責, 將無處蘄免. 又況以禮飮酒者, 始乎治常, 卒乎亂, 寧有其始之亂而其卒之能治乎. 吾知其必敗也. 曩汝姍笑彼輩之同流合汚而紛紛馳逐, 今汝駸駸然漸入其域而恬不爲恥, 前何心也.
噫. 蝨處頭而黑, 麝食柏而香, 終始愼厥與. 前哲豈欺人哉. 汝不能取友益三耳. 所染因所濡, 是魍魎怪鬼輩事也. 將孰從而薰陶德性, 將孰從而激成善行. 有損無益, 不能斷棄, 使我心惻, 不孝爲大. 比比徐卿百不憂之二兒, 何如也. 非不知汝罪當笞, 而汝亦人也. 秉彝之良性, 自有知覺感悟之理, 何用橽爲. 繼自今克黜乃心, 思免厥愆. 缺昭乃德, 爰絶厥交, 以父母之心爲心, 以先祖之業爲業, 非仁勿爲, 非義勿取, 非禮勿動, 則智者之能事畢矣. 在家爲佳子弟, 在邦爲好底人, 而內無自視之歉然, 外有令聞之蔚若, 使衰俗挹其淸芬, 而佳朋來自遠方, 豈不韙哉. 吾死之日, 亦嘗瞑目矣. 若或盤樂怠傲, 塤箎唱和, 而不幡然改此度, 則不能敎汝之責, 實在此身, 吾無以見汝母於地下也.
嗚呼. 杜漸防微, 自今日始, 悔往追來, 亦自今日始, 今日何夕. 壬辰之冬至月旁死魄也. 口論之不足, 面命之不足, 筆之書, 貽如燕謨, 膠壁以爲座右銘, 接乎目, 用替懷中簡, 勿付苦海間筌蹄. 重爲告曰, 周公戒于觀于逸于遊于田之淫, 孔子有於道於德於仁於藝之訓, 吾亦云云.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이 거듭된 천재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 벗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마련해 논 자식들을 따끔하게 나무라며 써준 훈계의 글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어 오직 사랑으로 보듬어 길렀지만, 결국 버릇만 나빠지고 말았으니 다 내 탓이라고 스스로를 나무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안쓰럽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다잡아 분발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검은 머리 속에 살다 보니 검은 빛을 띤다. 사향 노루는 잣열매를 따먹는 동안 배꼽에 잣의 향내가 스민다. 이렇듯 사람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물이 든다. 물은 들게 마련인데 어떤 물을 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어물전의 생선 비린내를 함께 묻히고 다녀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인지, 은은한 군자의 향기를 풍겨 절로 눈길이 그리로 향하게끔 할 것인지는 오롯이 내 하기에 달렸다.


   너희가 행실을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내가 지하에 가서 네 어미를 무슨 낯으로 만나 보겠느냐는 말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이 매운 훈계를 듣고 어떤 표정들을 지었을까?


   송순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이다. 1519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다시 벼슬길에 올라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50년에는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사론(邪論)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에 들고, 1568년에 한성부좌윤이 되어《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송순은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송세림(宋世琳)을 사사했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盧禛)·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때 담양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는데 이후 호남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송순은 우후(虞侯) 설남중(薛南仲)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의 이름을 관(寬)과 용(容)이라 지어 자신이 자식들에게 바랐던 바를 담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이 〈명이자설(名二子說)〉에 남아 전한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관아! 네 이름을 관(寬)이라 지었다. 관(寬)이란 관대하고 인자함을 말한다. 옛날 중궁(仲弓)은 관대하면서도 무게가 있어 후덕한 도량이 있었으니 너는 힘쓰도록 해라. 관아! 나는 네가 관대함으로 사람들을 부리기 바란다. 용아! 네 이름을 용(容)이라 지었다. 용(容)이란 포용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옛날 자장(子張)은 현자를 높이고 무리를 포용하여 곧장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너는 이를 경계하도록 해라. 용아! 나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염려한다.


寬乎, 名汝以寬, 寬者, 寬仁之謂也. 昔仲弓寬洪簡重, 有厚德之量. 汝勉之哉. 寬乎, 吾願其寬以御人也. 容乎, 名汝以容, 容者, 容受之義也. 昔子張尊賢容衆, 無直拒之道, 汝警之哉. 容乎, 吾恐其不容於世也.

   적장자인 송해관(宋海寬)은 병오년(丙午年, 공의 나이 54세)에 생원이 되고 이후 참봉이 되었지만 자녀 없이 죽었다. 현감을 지낸 둘째 아들 송해용(宋海容)도 역시 자녀 없이 죽었다. 이에 현감 최세윤(崔世胤, 송순의 사위이다)의 사위이자 종실인 순흥군 몽우(夢禹)의 둘째 아들인 정의 이름을 고쳐 해관의 아들로 삼았고, 서장자(庶長子) 송해청(宋海淸)의 큰 아들인 송덕미(宋德美)를 송해용의 아들로 삼았다. 이후 덕미가 면앙정의 종사를 이었다.


   송순의 부인 설씨는 계축년 12월(공의 나이 61세)에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순이〈훈자(訓子)〉에서 “일찍 어머니를 잃었다 早失所恃”고 한 것으로 보아 두 아들은 늦은 나이에 태어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보에 서장자(庶長子) 송해청(宋海淸)을 나이 마흔(壬辰 6월)에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아마도 처음 얻은 아들이라 서자임에도 부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공의 나이가 여든 하나가 되던 해에 차례로 죽고 말았다. 송순은 아들 잃은 슬픔을 사언시(四言詩)인 〈곡자문(哭子文)〉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네 곡을 내가 하니 汝哭我哭
내 곡은 누가 할꼬. 我哭誰哭
네 장사 내 치르니 汝葬我葬
내 장사는 누가 하나. 我葬誰葬
흰 머리로 통곡하니 白首痛哭
푸른 산도 저무는 듯. 靑山欲暮

아! 슬프다.

 

 

4. 지하에서 네 어미를 볼 낯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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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