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십훈(十訓)〉

2015. 8. 12. 16:42잡주머니

 

 

 

 

 

        5. 아버님의 열 가지 가르침을 너에게 전해 준다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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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십훈(十訓)〉

 

   이조참판에 추증되신 돌아가신 아버님 성은공(城隱公)의 언행과 문장은 순수하여 흠이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고아로 일찍 가르침을 잃어 항상 어버이를 여읜 슬픔을 품고 살았다. 또 불초하여 세상에 부모를 드러내지도 못했다. 지금 적어 두지 않으면 다 없어질까 염려되어,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님께서 집안 생활에서 보여주신 도타운 행실 10조목을 기록한다. 날마다 경계하고 반성하여 집안의 가훈으로 삼도록 해라.


   첫째는 기상(氣像)이다. 선군께서 말씀하셨다. “무릇 사람의 기상은 단정하고 무거워야지 경박하면 못 쓴다. 깊이 가라앉혀야지 얄팍하면 못 쓴다. 종일 삼가서 때가 된 뒤에야 말하도록 해라. 이렇게 하면 덕을 이룰 수가 있다. 당나라 때 배행검(裵行儉)이 ‘왕발(王勃) 같은 사람은 비록 글재주가 있지만 경솔하고 천박하니 어찌 작록을 누릴 그릇이겠는가? 양자초(楊子稍)는 침착하고 조용하니 영장(令長)이 됨이 옳다.’고 했는데, 나중에 그 말대로 되었다. 이 격언을 너는 마땅히 늘 마음에 새겨 깊이 살피도록 해라.”


둘째는 질욕(窒慾), 욕심을 막는 것이다. 선군께서는 성품이 고요하고 차분하셔서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음탕한 소리는 듣지 않으셨고, 여색을 몹시 멀리하셨다. 일찍이 말씀이 음탕함에 미친 적이 없으셨다. 분수 밖의 재물 보기를 흙덩이처럼 보셨고, 일체의 번화한 세상 맛에 대해서도 담박하여 좋아하는 바가 없으셨다.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물과 여색, 노래나 춤, 장난이나 놀이를 탐하면 마침내 잘못된 사람이 되고 만다. 너는 마땅히 깊이 경계하도록 해라. 후한 사람

노식(盧植)마융(馬融)을 스승으로 섬겼다. 창기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데도 노식은 여러 해를 모시고 공부하며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마융이 이 때문에 그를 공경하였다. 너는 마땅히 이를 본받도록 해라.”


셋째는 사친(事親)이다. 선군께서는 23세 되시던 경신년에 할아버님의 상을 당해 순천에서 여막을 지키시며 애모함을 극진히 하셨다. 소상이 지난 뒤에 무슨 일 때문에 부득이 해남을 다녀오셨는데, 어머님과 한 방에서 13일간 주무시면서도 예로써 멀리하셨다. 떠나실 때 어머님께서 구슬피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비록 열흘 넘게 머무셨다고는 하나 따뜻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한 것이 더 슬픕니다.” 아버님 또한 안스러이 여기며 떠나셨다. 여종 납비가 그때 방안을 지키며 잤었다. 늙어서도 매번 이 일을 말하면서, “앞뒤로 듣고 보아도 모두 우리 주인님만큼 공경할만한 분은 없었답니다.”라고 하며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 뒤 돌아가신 형님께서 이를 듣더니 또한 “남들이 미칠 수 없는 바다.”라고 말씀하셨다. 선군의 예를 지키시는 엄격함은 부부 사이에서도 삼가심이 이와 같았으니, 다른 것도 알 수가 있다. 평상시에 어버이를 섬기심도 친애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넘쳐났다. 매번 해남에서 맛난 음식을 한 가지라도 얻으면 문득 싸서 보낸 뒤라야 마음을 편히 가지셨다.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편지는 수습해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니라.”


넷째는 제가(齊家)다. 선군께서는 부부간에도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셨지만, 애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셨다. 무릇 35년간 한번도 첩실에게 총애를 나눠 주시는 것을 본적이 없다. 대개 정다우면서도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옛 사람의 뜻에 부합한다. 다만 하나 뿐인 아우 계근(桂近)은 서로 아끼셔서 동한강굉(姜肱)이 아우와 우애로워 한 이불을 덮고 잤던 것처럼 좋아하셨고, 올벼가 나는 논을 다 그에게 주었다. 두 누이가 있었는데, 어머님이 몹시 사랑하셨으므로, 재물을 나눌 적에 좋은 전토와 힘센 노비를 모두 그들에게 양보하였다. 스스로는 거친 땅과 어리석은 하인을 취하시고는 인하여 문서에다 직접 써서 확실히 하기를 청하셨다. 여러 자식을 사랑하심은 고르게 하여 치우침이 없었으니, 새끼에게 먹이를 고르게 나눠주는 뻐꾸기의 사랑이 있었다. 남녀를 가르침은 반드시 예로써 하셨다. 노비에 있어서도 아끼더라도 나쁜 점을 파악하셨고, 미워해도 그 장점은 알고 계셨다. 자상하셔서 안스러워 하는 마음을 깊이 지니셨다. 때문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날에는 모든 노비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실성하여 호곡하며 마치 자기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밖으로 마을에 사는 백성 중에 문하를 출입하던 자들까지도 또한 모두 한숨 쉬고 크게 탄식하며 “덕스런 분이 돌아가셨다.”고들 하였다. 선군께서는 세 아들 가운데 나를 특별히 아끼셔서, 매번 몸소 업고 걸으시며 말씀하시곤 하셨다. “우리 집안을 이룰 사람은 이 아들이다.” 인하여 경계하셨다. “한 집안 안에서는 마땅히 마음을 공평하게 해야 한다. 진실로 한번이라도 치우치게 되면 일이 어그러지고 윤리가 밝아지지 않는다.”


다섯째는 수신(守身)이다. 선군께서는 나이 30 때부터 숨어서 바르게 사는 것을 즐겁게 여기셔서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으셨다. 손님이 오면 접대만 할 뿐이었다. 대개 세상의 경박한 풍조를 미워하셔서 남에게 절개를 굽히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장례에 조문을 가거나 재난을 구하는 일처럼 아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고는 1년 내내 한 번도 문을 나서지 않으셨다. 한 태수가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이 큰 은자는 성시(城市)에 숨는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말함이다.” 일찍이 자식을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어깨를 움츠리고 아첨하여 웃는 것은 여름철 밭두둑에서 일하는 것보다 괴롭다. 노닐고 거처함에 법도가 있으면 반드시 덕 있는 데로 나아간다. 네가 훗날 벼슬길에 나가더라도 또한 마땅히 바름을 지키는 것을 편히 여겨야지, 남에게 절개를 굽혀서는 안 된다.”


여섯 번째는 처사(處事)다. 선군께서는 매번 일을 처리하실 때 이해(利害)를 묻지 않고, 순리에 맞는지만 살피셨다. 만일 순리가 아닐 것 같으면 문득 “이 일은 순리가 아니니,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또 일찍이 자식을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무릇 사군자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다만 마땅히 순리를 따라야지, 이해를 가지고 나아가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또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에게 아첨해서 복과 이익을 구하고, 세상에 아부하여 작록을 견고하게 하므로, 대부분 호연지기를 알지 못한다. 옛날 당나라 때 부혁(傅奕)은 일찍이 불교를 배척하였다. 호승(胡僧)이 주문으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데도 부혁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자, 호승이 제 스스로 죽고 말았다. 한유(韓愈)는 불교가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현혹함을 미워하여 극력 배척하였다. 장강(張綱)은 양기(梁冀)의 권세가 지극하게 되자, 홀로 능히 수레를 땅에 파묻으며 그의 죄를 탄핵하였다. 대사헌 유운(柳雲)이 기묘사화 때 간하여도 듣지 않자, 곧장 글을 올려 말했다. ‘신의 머리를 베어 간흉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소서.’ 이 같은 분들은 진실로 대장부라 할 만 하다.”


일곱 번째는 지인(知人)이다. 선군께서는 거처에서 조용히 지내신 지 오래 되고 보니, 묵묵히 사물의 이치를 살피셔서 깨달은 바가 아주 많았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은 세상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두터운 외모와 깊은 정을 지녔거나, 양 같이 온순한 자질에 범의 거죽을 둘러쓴 자도 그 눈길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훈계하셨다. “사람을 살피는 방법은 이렇다. 편벽되고 곁에서 아첨하며, 진퇴가 빠르고 면전에서 기리는 자는 삿되다. 질박하고 곧으며 순박하고 진실하여 변함이 없고 신의가 있는 자는 바르다. 너희는 마땅히 기억하여 살피도록 해라.”


여덟 번째는 접물(接物)이다. 선군께서는 사물과 접할 적에 언제나 자상함과 성실 신의를 위주로 하셨다. 하지만 마땅히 결단해야 할 곳에서는 용감하게 하셔서 그 뜻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일찍이 자식에게 훈계하여 말씀하셨다. “사람을 아끼지 않을 수 없지만, 구차하게 부합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저만을 위하는 양주(揚朱)의 ‘위아(爲我)’는 잘못이고, 남에게도 똑같이 한다는 묵적(墨翟)의 ‘겸애(兼愛)’ 또한 틀렸다. 무릇 교제함에 있어서는 사람을 가리는 것을 우선해야 하고, 가르침은 지성(持誠)을 귀하게 친다. 옳은 사람이 아닌데도 이를 기뻐한다면 이는 아첨하여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다. 성의 없이 가르치는 것은 유익함은 없고 해로움만 있다. 너는 마땅히 이를 기억해 두었다가 사물과 접할 때에 살피는 것이 좋겠다.”


아홉 번째는 계사회천(戒仕誨遷),벼슬을 경계하고,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선군께서 말씀하셨다. “벼슬길의 어려움은 산보다 어렵고 물보다 험하다. 사람이 능히 작록을 사양하고 스스로 숨지 못하는 것은 다만 열 이랑의 좋은 밭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먹고 마실만한 전원이 있는데도, 도도한 벼슬 바다에서 나아가기만 하고 그칠 줄 모르다가 마침내 풍파를 맞는 것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인하여 자식을 경계하셨다. “네 운명은 범위의 숫자가 하반(下半)이요 정괘(井卦)의 구오(九五)에 해당한다. 《주역》의 풀이에 ‘한번 고개 숙이고 한번 하늘 우러르니, 초수(楚水)와 회산(淮山) 땅에 한이 더욱 길고나.’라고 하였으니, 이는 멀리 귀양 갈 조짐이다. 벼슬길은 꼭대기까지 가면 안 되고, 중도에 몸을 거두어 전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또 말씀하셨다. “순욱(荀彧)은 영천(穎川)이 틀림없이 병화를 입을 것을 알고서, 먼저 가솔들을 이끌고 기주(冀州) 땅으로 갔다. 고을 사람 중에 땅을 편안히 여겨 이사하지 않은 자는 대부분 해를 입었다. 해남 땅은 바다 오랑캐가 처음 닿는 곳이다. 네가 만약 집안을 이루게 되면 마땅히 내륙으로 거처를 옮겨 근심을 멀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열 번째는 문학(文學)이다. 선군께서는 남보다 총명하시고 문리가 투철하셨다. 젊은 시절 과거시험 장에서 시험 보는 사람들이 지은 것을 한번만 보고도 줄줄 외우셨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기억하셨다. 여러 서책도 한번 외우시기만 하면 평생 잊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책을 자주 읽지 않으셨지만, 고문 중에 뻑뻑하여 읽기 어려운 곳이나 의미가 맺혀 어려운 부분도 파죽지세로 읽으시곤 하셨다. 일찍이 스스로에 대해 ‘나는 책을 봐도 시는 잘 알지 못하고, 글 짓는 것은 의론을 세우는 데 능하다’고 하셨다. 사서와 《시경》과 《서경》, 《예기》와 《소미통감》은 정밀하고 꼼꼼하게 연구하여 외우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중국 산천의 도리(道里)나 역대 치란흥망의 자취도 손바닥을 가리키듯 하였다. 매번 옛날 일을 살피실 때면 충성스런 신하를 감개하시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미워하셨다. 문자를 가려 씀도 모두 삿됨을 누르고 바름을 허여하기에 힘쓰셨다. 송나라진덕수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대해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이요, 배우는 자의 지극한 보배이니, 구준(丘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보다 훨씬 낫다.’고 하셨다. 일찍이 《강목》을 읽다가 윤씨가 밝힌 견해를 보고는 저도 몰래 손발이 춤을 추었다. 인하여 몸소 그 더욱 정확한 것을 초록하셨다. 한유와 유종원, 소식의 문장 중에 웅위하면서도 명쾌한 것을 다 취하셨다. 《문장궤범》과 《고문진보》, 《동래박의》와 《전등신화》도 그 맥락을 샅샅이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갈량의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호담암의 〈상고종봉사(上高宗封事)〉, 장문잠의 〈약계(藥戒)〉, 김일손의 〈중흥대책(中興對策)〉 등은 매번 읊조려 외우시며 음미하시곤 하였다. 마을의 자제들이 좇아서 수업하니, 십 수년간 이들을 이끌어 가르치셨으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아동에게 글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핵심 내용을 먼저 제시하시고, 그 문맥과 이치를 펼치셨다. 그런 까닭에 돌아가신 형님께서도 어려서부터 문의(文義)에 밝으셨고, 또 글을 잘 지으셨다. 나는 아홉 살부터 《통감절요》를 배워, 11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장의 기세와 말의 맥락을 알았다. 여러 책을 두루 보았지만 막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가르쳐 이끌어주신 보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일찍이 부사 이나(李那)가 지은 〈훈자시(訓子詩)〉를 손수 써서 내게 내려 주시니, 그 일깨워주심이 지극하셨다.

先君贈吏曹參判城隱公言行文章, 爲粹無玷. 而孤早失敎訓, 常抱終天之慟. 又不肖無以顯父母於世, 今不記載, 恐至湮没. 謹泣血而記得居家篤行十條, 日加警省, 庸作庭訓.
氣像第一
先君曰: “凡爲人氣像, 要端重而不輕, 深沈而不淺. 終日儼然, 時然後言. 如此乃可以成德. 唐裵行儉曰: ‘王勃等雖有文藻, 浮躁淺露, 豈享爵祿之器耶. 楊子稍沈靜, 應得令長.’ 後悉如其言. 此格言, 汝宜佩䏜而深省之.”
窒慾第二
先君性恬虛安靜, 自少至老, 不聽鄭衛之音, 深遠女色, 而未嘗言及於淫媟. 分外之財, 視如土塊, 於一切䌓華世味, 淡然無所好. 嘗曰: “殉乎貨色歌舞嬉游, 卒爲非人, 汝宜深戒之. 後漢盧植, 師事馬融. 女娼歌舞於前, 植侍講積年, 未嘗轉眄. 融以是敬之, 汝宜法之.”
事親第三
先君年二十三庚申歲, 丁外艱, 守廬于順天, 哀慕備至. 小祥後爲事故, 不得已而往返海南, 與我母氏同宿一房者十三日, 而以禮遠之. 臨別, 我母氏泫然垂淚曰: “雖留逾旬, 不得穩話, 尤可悵也.” 先君亦愍然而去. 婢訥非其時直宿房內, 至老每言此事曰: “前後見聞, 皆無如我主之可敬者.” 歎息不已. 厥後先兄聞之, 亦曰: “人所不可及也.” 先君守禮之嚴, 伉儷之間, 愼獨如此, 他可知矣. 平時事親, 愛敬洋溢. 每於海南, 得一佳味, 輒封送然後, 心乃安. 嘗曰: “父母書簡, 收拾而勿失, 人子之道也.”
齊家第四
先君夫婦相敬如賓, 而情愛自初至終如一日. 凡三十五年, 未嘗一見姬妾之分寵. 蓋合於古人摯而有別之義. 唯一弟名桂近, 與之相愛, 怡怡若古人姜被然, 至將己早稻田, 擧而與之. 有二妹, 爲萱堂所鍾愛, 分財之時, 田土奴婢之美者, 悉以讓之, 自取荒且愚者, 因請自書其券以堅之. 於諸子慈恤, 均而不偏, 有鳲鳩之仁. 敎男女必以禮. 於奴婢, 亦愛而知其惡, 憎而知其善, 慈詳惻怛之意, 浹于骨髄. 故其損館也, 奴婢無老幼, 莫不失聲號哭, 如喪考妣. 外至村落小民之出入門下者, 亦皆歔欷太息曰: “德人亡矣.” 先君於三男中, 奇愛希春, 每親負以步. 嘗曰: “成吾家者, 此子也.” 仍戒之曰: “一家之內, 當公其心. 苟一有偏倚, 則事不順而倫不明矣.”
守身第五
先君自年三十, 卽樂幽貞, 杜門不出, 客來則接之而已. 蓋厭世風之澆薄, 而不欲屈節於人. 非有弔喪救災甚不得已之事, 終歲未嘗一出門. 有一太守曰: “古人稱大隱隱城巿, 此之謂也.” 嘗戒子曰: “脅肩諂笑, 病于夏畦, 遊居有常, 必就有德. 汝他日筮仕, 亦當安於守正, 不可屈節於人也.”
處事第六
先君每處事, 不問其利害, 但視順理與否. 如不順理, 則輒曰: “是事不順理, 何可爲也.” 又嘗戒子曰: “凡士君子處事, 但當順理, 不可以利害爲趨避.” 又曰: “世人佞佛, 以求福利, 阿世以固爵祿, 多不知浩然之氣. 昔傅奕嘗闢佛, 及胡僧呪人致死, 奕不動心, 而胡僧自殞. 韓退之惡佛氏蠹財惑衆而力排之. 張綱當梁冀熏灼之極, 獨能埋輪劾罪. 柳大憲雲當己卯士禍之際, 諫之不從, 卽啓曰: ‘乞斬臣頭, 以快姦兇之心.’ 如此等輩, 眞可謂大丈夫矣.”
知人第七
先君幽居靜處旣久, 默視物理, 多有所覺. 知人之明, 迥出世人, 厚貌深情, 羊質虎皮者, 無所逃遁. 嘗訓子曰: “觀人之法, 便僻側媚, 進銳面譽者, 邪也. 質直樸實, 有恒有信者. 正也. 汝宜誌而察之.”
接物第八
先君接物, 常以慈詳誠信爲主, 而遇當斷處, 勇不可奪. 嘗訓子曰: “人不可不愛, 而不可苟合.楊之爲我固非, 而墨之兼愛亦倒. 凡交際以擇人爲先, 敎誨以持誠爲貴, 非其人而悅之, 是爲諂爲瀆, 無其誠而誨之, 是無益有害. 汝當誌之, 審於接物, 可也.”
戒仕誨遷第九
先君曰: “仕宦之難, 難於山, 險於水. 人之所以不能辭爵祿而自隱者, 只爲無十頃良田而已. 苟有田園可喫著, 則滔滔宦海, 進不知止, 卒犯風波, 是何心也.” 仍戒子曰: “汝之命, 範圍數下半, 井之九五. 其辭曰: ‘一回低首一回仰, 楚水淮山恨更長.’ 此乃投竄之兆也. 仕宦不宜到頭, 中途而收身歸田, 可也.” 又曰: “荀彧知穎川必被兵, 先將家屬詣冀州, 鄕人安土不遷者, 多爲所害. 海南乃海寇初程之地, 汝若成立, 當遷居于中土, 以爲遠慮, 可也.”
文學第十
先君聰明過人, 文理透徹, 少年場屋中, 見擧子之作, 觸目成誦, 數十年之後猶記. 於諸書一誦, 則終身不忘. 故罕讀書, 古文聱牙肯綮處, 讀之如破竹然. 嘗自言, ‘吾看書則短於知詩, 屬文則長於立論’云. 四書及詩書禮記少微通鑑, 精硏熟究, 無行不誦. 中國山川道里, 歷代治亂興廢, 如指諸掌. 每覽前古, 感慨忠良, 憤疾姦諛, 而揀擇文字, 皆務抑邪與正. 謂大學衍義者, 治國之元龜, 學者之至寶也, 丘濬衍義遠矣. 嘗讀綱目, 見尹氏發明, 不覺手舞足蹈, 而因自抄錄其尤精確者. 韓柳蘇文, 悉取其雄偉明快者, 文章軌範古文眞寶東萊博議剪燈新話, 莫不洞究脈絡, 諸葛武侯出師二表, 胡澹庵上高宗封事, 張文潛藥戒, 濯纓子中興對策, 每諷誦而玩味之. 鄕子弟從而受業, 提誨十數年, 亹亹不倦. 其敎兒書也, 必先振其綱領, 暢其脈理. 故先兄少曉文義, 又善屬文. 希春自九歲, 受通鑑節要, 至十一歲, 始知文勢語脈, 泛觀諸書, 罕有窒礙, 非才性然也, 敎導之功使然也. 又嘗手書李府使那訓子詩以賜兒, 其啓迪至矣.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자식을 위해 쓴 훈계다. 특이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가르침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열 가지 가르침을 베풀었다. 아버지 유계린(柳桂麟)은 벼슬 하지 않은 재야의 선비였다. 유희춘이 16세 때 아버님이 세상을 떴다.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자기 자식을 위해 이를 꺼내 폈다.


열 가지 가르침은 1. 기상(氣像), 2. 질욕(窒慾), 3. 사친(事親), 4. 제가(齊家), 5. 수신(守身), 6. 처사(處事), 7. 지인(知人), 8. 접물(接物), 9. 계사회천(戒仕誨遷), 10. 문학(文學) 등이다. 매 항목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인용하고, 일생의 자취를 서술하였다. 어려서 등에 업고 자신에게 들려준 말부터 집안의 일상 속에서 듣고 본 아버지의 언행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남김없이 마음에 곱씹고 새긴 오롯한 내용들이다. 아버지를 향한 자식의 존경이 그대로 묻어난다.


   유희춘은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가 문절(文節)이다. 부인은 여류문인으로 이름 높은 송덕봉(宋德奉)이었다. 김인후(金麟厚)와는 사돈간이며, 김안국(金安國)·최산두(崔山斗)의 문인이다. 153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46년 을사사화 때 김광준(金光準)·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 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이후 장령·집의·사인·전한·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1575년에는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경전과 역사에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 강론에 종사하였다. 이에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말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經書)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였고, 《논어》의 주해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외할아버지 최보(崔溥)의 학통을 계승하여 이항(李恒)·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조성에 기여하였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충현사(忠賢祠), 종성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남긴 저서에《미암일기》·《역대요록(歷代要錄)》·《속휘변(續諱辨)》·《천해록(川海錄)》·《헌근록(獻芹錄)》·《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시서석의(詩書釋義)》 등이 있으며, 편서로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이 있다. 부인 송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고, 측실부인에게서 다섯 딸을 두었다. 외아들 유경렴(柳景濂)은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하서 김인후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이 글은 문집 권4에 실려 있다. 〈십훈(十訓)〉 외에도 〈정훈내편(庭訓內篇)〉〈정훈외편(庭訓外篇)〉이 더 있다. 〈정훈내편〉은 ‘존비장유(尊卑長幼)’ 등 집안에서 지켜야 할 예절 5조목을 적었고, 〈정훈외편〉은 상하로 나눠 조정에서 벼슬할 때 알아야 할 예절 즉 몸가짐․일 처리․교유 등 8조목과 지방관으로 나갔을 때 알아야 할 일 8조목을 실었다.


끝부분에 아버지가 친히 써서 내려 주셨다는 이나(李那)의 〈훈자시(訓子詩)〉《동문선》에 실려 있는 〈아들 안명에게 부침(寄子安命)〉이란 시를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 흩날릴 제 朔風號怒雪飄揚
너의 기한(飢寒) 생각하며 길게 탄식 하노라. 念汝飢寒感歎長
여색 필히 몸 망치니 경계하고 삼가며 色必敗身須戒愼
말은 몸을 해치나니 세세하게 가늠하라. 言能害己更詳量
광망한 자 벗 삼으면 끝내 유익함이 없고 狂荒結友終無益
교만하여 남을 경시하면 외려 해를 입느니라. 驕慢輕人反有傷
만사에 오로지 충효만을 추구하면 萬事不求忠孝外
하루아침 그 이름이 내 임금께 이르리라. 一朝名譽達吾王

   위의 아홉 번째 항목에 보면 아버지가 《주역》의 점괘로 자식의 운명을 경계하면서 벼슬길은 끝까지 가지 말고 중도에 그만두고 물러나라고 주문한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 경계를 소홀히 해서 멀리 함경도 땅에서 19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그 긴 귀양살이 동안 마음을 다잡아 학문에 몰두 할 수 있었던 힘도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나왔노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때 그는 아버지의 훈계를 유념치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해서는 전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중도에 물러나 몸을 온전히 마쳤다.


   그가 쓴 방대한 일기는 그 험난한 시절을 살아온 지식인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일상의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알차게 담겨 있어, 오늘날 당시 사회사를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출처] 5. 아버님의 열 가지 가르침을 너에게 전해 준다|작성자 새오늘

http://sambolove.blog.me/150122665393

-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