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한충(韓忠, 1486~1521)이 옥중에서 임종 전에 아들에게 준 유언

2015. 8. 12. 16:25잡주머니

 

 

 

 

 

       

3. 저절로 이르는 것도 가려서 받아라 가훈과 유언 / 옛사람 내면풍경

 

2011.10.2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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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충(韓忠, 1486~1521)이 옥중에서 임종 전에 아들에게 준 유언
[戒子書. 辛巳十二月二十七日, 獄中臨終時]

 


  무릇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그런 뒤에 이 이치를 강구하고 밝혀 삼가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한 구절 한 글자의 뜻도 흐트러진 마음으로 대충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오늘 한 가지 뜻을 이해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실천한다. 이것을 서두르고 이것에 힘을 쏟아 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해나간다면 저절로 성현의 지위를 향해 가게 된다. 몸 밖의 영화와 몰락, 기쁨과 근심 같은 것은 마땅히 모두 하늘이 하는 바에 귀 기울이되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절로 이르는 것은 또한 옳은 것을 가려서 받고, 이르지 않는 것은 이를 구할 까닭이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을 때까지 발을 붙이고 서있을 자리다. 조금이라도 옮기거나 바꿔서는 안 된다.


   예로부터 성현들은 이것으로 스스로를 권면하였고, 또한 감히 이것으로 남을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서로 전해온 가르침이 해나 별처럼 환하다. 하지만 돌아보건대 지금은 적막하게 온 세상에 이 뜻을 아는 자가 많지가 않다. 부귀나 이로움과 영달의 영역에만 들락거리며 분주하게 내닫다가, 요행으로 얻게 되면 스스로 천하에 일 잘하기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고, 한 몸의 사업이 이보다 더 낫지는 못하리라 여긴다. 어둡고도 아득하게 몸이 죽도록 깨닫지 못한다. 이는 실로 견문과 물든 습관의 비루함이나 빈곤과 곤액에 얽매여 이렇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너희가 앎이나 생각에 줏대가 없고, 발꿈치를 붙이지 않고서 진실로 먼저 작록을 구하고 이익을 추구함에 마음을 둔다면, 마침내 사람된 이치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낮고 더러운 데 빠져서야 어찌 성인께서 후학을 위해 문을 열어 이끌어주실 길이 있겠느냐? 대저 세상에서 과거 시험 공부로 작록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어버이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들 말하곤 한다. 진실로 어버이의 마음이 되어, 자기 아들이 과거시험을 보아 작록을 구하기를 원치 않고, 옛 것을 배워 어진이가 되기를 원한다면, 다시 어찌 능히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다고 말함이 있겠는가?


   나는 일찍 부모님이 세상을 뜨셔서, 배움은 정밀하지 않으면서 나아감을 구했고, 덕이 서지 않았는데도 가려고 했다. 바람 먼지는 자옥하고 해와 달은 빛을 잃어 위로는 임금을 요순의 경지로 능히 이끌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나 자신을 고요(皐陶)나 기(夔)와 같은 어진 신하의 반열에 능히 두지 못하였다. 맹수의 어금니와 살모사의 독이 좌우에서 달려들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둠 속에 내버려짐이 심하고 후회함이 오래되었으나 어찌 족히 말하겠느냐? 이는 내가 나 자신을 징계하고 너희에게 바라는 것이니, 밖에서 이르는 것을 나의 영화로 삼으려 들지 말아라. 이제 형장의 칼날이 문에 이른 것을 보고 종이를 빌어 겨우 쓴다. 너희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凡爲學者, 先正其心, 然後可以講明此理, 而謹守之. 一句之旨, 一字之義, 不可放心看過, 今日解一義, 明日踐一事. 造次於是, 顚沛於是, 一心慥慥, 則自然向聖賢地位去, 若乃身外之榮悴休戚, 卽當一切聽天所爲, 而無容心焉. 其自至者, 亦擇其可而受之, 其不至者, 則無求之之理也. 此是終身立脚地位, 不可分寸移易.
從古聖賢, 嘗以此自勉, 亦不敢不以此待人. 其相傳指訣, 炳如日星, 而顧今寥寥一世間, 人知此義者無多. 頭出頭沒於富貴利達之場, 奔走顚倒, 僥倖得之, 則自以爲天下之能事無過於是, 一身之事業無踰於此. 冥冥悠悠, 滅身無寤, 此實見聞染習之陋, 貧窶困厄之累, 不得不如此也.
後生小子知思無主, 脚跟不定, 苟先以干祿蹈利爲意, 則卒無以識夫爲人之理, 而淪於汚下, 烏在其聖人爲後學開牖之道哉. 夫世之擧業干祿者, 莫不曰爲親也非爲己也. 苟爲人親之心, 不願其子擧業干祿, 而惟願學古希賢, 則不知更有何說以能捨此而取彼乎.
余則早忝不幸, 學未精而求進, 德未立而欲行. 風埃汩汩, 日失月亡, 上未能導其君於堯舜, 下未能置其身於皐夔. 獍牙虺毒, 左侵右觸, 致有此境, 昏棄之甚, 悔懊之久, 尙何足言乎. 是余懲於己, 望於汝, 不欲以自外至者爲吾榮也. 見今鋒鏑臨門, 借紙艱草, 汝等沒身不忘, 可也.



   아비는 나라의 죄를 입어 이제 곧 형장으로 끌려간다. 다시는 너희를 만나 얘기할 수 없겠고, 나 살던 집에 살아서는 내 발길을 들일 수 없겠구나. 이 아니 안타까우냐.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긴다.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겨 평생 잊지 않도록 해라.


   공부하는 사람은 심지를 바로 세워야 한다. 마음이 바로 서야 이치를 밝게 궁구할 수가 있다. 한 구절 한 글자도 꼼꼼히 따져 이해하고, 이해한 것은 곧바로 실천에 옮기도록 해라. 성현이란 아득히 먼 존재가 아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실천한 것이 쌓여 자연스런 호흡처럼 되면 그것이 바로 성현인 게다. 부귀영화에 마음 팔지 마라. 얻으려고 아등바등 애쓸 것 없고, 잃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릴 것도 없다. 내게 절로 오는 것은 받되, 옳은 것만 가려서 받아야 한다. 덮어 놓고 덥석 받으면 뒷감당이 어렵다. 내게 오지 않는 것을 일부러 끌어오려 하지도 마라. 이런 마음으로 대지 위에 두 발을 딱 버티고 서서 꿈쩍도 하지 말아라.


   옛 성현의 공부란 것도 다 이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초지일관 옳은 길을 떠나지 않고, 부귀빈천에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간 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세상에는 그런 사람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부귀와 이익뿐이다. 이것을 얻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요행히 손에 쥐면 다 제가 잘나 그런 것으로 안다.


   생각에 줏대가 없다면 작록을 구하고 이익을 얻는다 해도 이것은 재앙일 뿐이다. 우리가 과거 공부를 하는 것은 내 임금을 요순의 반열에 세우고, 나 자신 또한 요순의 신하가 되어 그 보람을 천하와 함께 나누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명예와 작록을 위해 과거 공부를 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공부를 한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없다.


   이 애비는 배움은 정밀치가 않고 덕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보다 먼저 나아가 더 많이 이루려 했다. 이제 아무 이룬 것 없는 죄인의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를 세우지 못하고, 발 붙이고 있어야 할 곳에 뒤꿈치를 눌러 붙이지 못했다. 이룬 것 없이 여기 저기 기웃대다 맹수와 독사에 물려 초주검이 되었다. 그 까닭이 어디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이 심지를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 이제 떠날 때가 된 모양이로구나. 날을 잔뜩 벼린 칼날을 들고 옥리들이 들어오는구나. 더 길게 쓰지 못한다. 죽음 앞에서 회한을 담아 적는 아비의 말을 너희는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라. 아비의 전철을 되밟아서는 안 된다.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13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 이조정랑, 응교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18년 가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 남곤(南袞)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지만, 남곤과 의견이 충돌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그래서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임 중이던 1520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는 이유 거제로 유배되었고,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났을 때에도 남곤의 무고로 투옥되었다. 중종의 친국으로 무고임이 밝혀졌지만 옥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의 문집에는 무인년(1518) 가을에 종계변무의 일로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점쟁이가 지어준 장두시(藏頭詩) 한 편이 남아 전한다. 장두시는 각 구의 맨 끝자를 파자하여 그 아래 토막을 그 다음 구의 첫 자로 사용하여 완성한 시로, 각 구절의 첫 글자에 비밀을 감춰두는 일종의 잡체시다. 예를 들어 첫 구 끝자인 ‘마(摩)’자에서 아래 쪽 절반을 떼어 ‘수(手)’자로 제 2구의 첫 자로 쓰는 방식이다.

젊은 날 장한 기운 천마산도 뽑을러니 少年壯氣拔天摩
용천검 손에 쥐고 몇 해를 갈았던가. 手把龍泉幾歲磨
섬돌 위 오동잎은 가을 소리 내는데 石上梧桐將發響
그 소리 율려에 맞고 때와 부합하도다 音中律呂有時和
입으로는 삼대 시서의 가르침 전하였고 口傳三代詩書敎
그 글은 천추의 도덕 물결 일으켰네 文起千秋道德波
폐백으로 이미 현사의 이름 이뤘거늘 皮幣已成賢士價
가의는 어찌 홀로 장사를 원망했나 賈生何獨怨長沙

  《대동야승》에 실린 〈기묘록보유․한충전(己卯錄補遺․韓忠傳)〉에는 그가 기개가 호방하고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으며, 음률을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조정대신의 모함으로 장사로 유배되었던 가의처럼, 한충 또한 무고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제로 유배되었고, 결국에는 옥사하고 말았다. 한충의 이른 현달과 무고의 의한 죽음을 이 시가 그대로 예견한 셈이다.


   연보에 따르면 1521년 11월 21일에 중종이 친국하여 무고임을 밝히고 석방을 명하였지만, 다음날인 22일에 옥중에서 해를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조선왕조실록》에는 한충이 1521년 11월 3일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계자서〉에는 1521년 12월 27일에 직접 쓴 것으로 되어 있어 한충이 죽은 정확한 날짜를 산정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충이 남곤의 무고로 투옥되고 그 와중에 피해(被害)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 세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다른 어떤 글보다 절박하게 다가온다. 마음을 바로잡아라. 줏대 있는 생각을 가져라. 밖에서 이른 것을 자신의 영화로 삼지 말라.

 

 

[출처] 3. 저절로 이르는 것도 가려서 받아라|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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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미 <다산을 찾아서> 새오늘 님의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