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날

2015. 8. 19. 15:04잡주머니

 

 

 

 

 

      

백중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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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날
공식이름 백중날
다른이름 백중, 백종, 망혼일, 중원
장소 아시아
형태 조상의 혼을 위로하는 제사
날짜 음력 7월 15일
2014년 8월 10일 (일)
2015년 8월 28일 (금)
2016년 8월 17일 (수)
2017년 9월 5일 (화)
행사 벌초, 우란분회
관련 오본

   백중날, 백중(百中 또는 百衆)백종(百種), 망혼일(亡魂日), 중원(中元)이라고도 하며, 음력 7월 15일이다.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음력 7월 14일)

   이 무렵에 갖가지 과일채소가 많아 100가지 곡식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한 돌아가신 조상을 위로하기 위하여 음식·과일·술을 차려놓고 천신(薦新)[1]을 하였으므로 “망혼일”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승려들은 이날 각 사찰에서 (齋)를 올리며 농촌에서는 백중날을 전후하여 백중장(百中場)이라고 하는 장이 섰다. 머슴이 있는 집에서는 이날 하루를 쉬게 하였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찾아 벌초와 성묘를 한다. 백중날은 대부분 일손을 놓고 하루 쉬지만 제주도 지방에서는 오히려 바다에 나가 일을 많이 한다. 백중날에 살찐 해산물이 많이 잡힌다고 믿기 때문으로, 이날 잡힌 해산물을 가지고 한라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내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지옥과 아귀보를 받은 중생을 구제하는 우란분회(盂蘭盆會, 우라본)라는 법회를 연다.

 

역사[편집]

   백중은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 고려 시대에는 일반인까지 참석하여 우란분회를 열었으나, 조선 시대 이후로는 사찰에서만 행해져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그 풍습이 많이 소멸되었다. 반면 중국일본 그리고 베트남에서는 아직도 비교적 백중날을 성대하게 지내는 관습이 있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음력을 쓰지 않아 오늘날에는 양력 8월 15일 경, 오본과 결합하여 제사를 지내고 절에 참배하는 사람이 많다. 중국에서는 악귀를 쫓는 제사를 크게 지내는데, 추석 한 달 전의 행사로 유명하며, 이는 서양에까지 소개되어 영어권에서도 “Ghost Festival” 등의 이름으로 차이나 타운 등지에서 행해져 상당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 및 참고자료[편집]

  1. 이동 철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처음으로 신위에 올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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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 임진(1412) 1월 15일 (경자) 상원일에 태일을 제사지내기 위한 연등을 대궐안에 설치하다

 

 
12-01-15[01] 상원일에 태일을 제사지내기 위한 연등을 대궐안에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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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5일 (경자)
12-01-15[01] 상원일에 태일을 제사지내기 위한 연등을 대궐안에 설치하다

   금중(禁中)에 등(燈)을 매달았으니, 상원일(上元日)에 태일(太一)을 제사지내기 때문이었다.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에서 각각 종이 등(燈) 5백 개를 바치고, 또 용봉(龍鳳)·호표(虎豹)의 모양으로 섞어서 만든 것이 또한 많았다. 처음에 등(燈)을 달고자 임금이 15일에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調)를 불러서 고전(古典)에 상고하고 하윤(河崙)에게 물어서 아뢰도록 하였다. 허조(許調)가 아뢰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상고하여도 없고, 오직 전조(前朝) 때 상정례(詳定禮)에만 나와 있는데, 그 기원(起原)은 한(漢)나라에서 태일(太一)을 제사지냄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윤(河崙)도 또한 성인(聖人)의 법이 아니라고 말하니,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
임금이 말하였다.
“삼대(三代) 이후로는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와 같은 것이 없다. 경은 한나라 제도를 법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허조가 대답하였다.
“신은 원컨대, 전하는 반드시 삼대(三代)를 법받고 한나라·당나라를 법받을 것이 족히 못됩니다.”
임금이,
“그렇다면 예조에서 반드시 상정(詳定)하여서 아뢸 것이 없다. 내가 궁중에서 또한 행하겠다.”
하고, 내자시·내섬시에서 각각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삼원일(三元日)에 연등(燃燈)하는 것을 대략 사림광기(事林廣記)에 모방하여 되도록 간이(簡易)한 데 따르고, 용봉(龍鳳)·호표(虎豹)의 괴이(怪異)한 모양을 만들어서 천물(天物)을 지나치게 허비하지 말라.”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윤회종(尹會宗)이 나와서,
“궁중에서 연등하는 것이 성인의 제도가 아니니, 원컨대 파하소서.”
하니, 임금이
“내가 연등의 행사를 크게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궁중에서 잠깐 시험하는 것 뿐이다.”
하였다. 하루 앞서 임금이,
“상원(上元)에 연등하는 것이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폐할 수는 없다.”
하고, 비로소 북쪽 궁원(宮苑)에서 연등하는 것을 구경하고, 등(燈)을 만든 장인(匠人) 26인에게 사람마다 쌀 1석을 내려 주었다.
【원전】 1 집 621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출판-서책(書冊) / *역사-고사(故事)


[주D-001]삼원일(三元日) : 상원(上元)·중원(中元)·하원(下元)을 가리킴. 상원은 음력 정월 보름날, 중원은 음력 7월 보름날, 곧 백중(百中)날, 하원은 음력 10월 보름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병신 10년(1056), 김종서 등(金宗瑞 等)

 

고려사절요 제4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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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병신 10년(1056), 송 가우(嘉祐) 원년ㆍ거란 청녕 2년

 


○ 봄 정월에 예관(禮官)이 아뢰기를, “태묘의 제기가 너무 오래되어 깨지고 이지러져, 차마 벌여 놓을 수 없습니다. 〈곡례(曲禮 《예기(禮記)》의 편명)〉에, '제복(祭服)이 해지면 불사르고, 제기가 못 쓰게 되면, 땅에 파묻는다.' 하였으니, 변비(籩篚)ㆍ현의(玄衣) ㆍ적석(赤舃)을 어사대에게 불사르고 파묻도록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阿加主) 등 50명이 와서 말을 바쳤다.
○ 영덕진(寧德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영덕성(寧德城)으로 고치니, 북조(北朝 거란) 흥종(興宗)의 휘를 피한 것이니, 영덕진의 진(鎭)에 휘인 진(眞)이 붙었기 때문이다.
○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에게 붙잡혔던 사람인 염가칭(廉可偁)은 삼한공신(三韓功臣) 형명(邢明)의 손자로서 경술년에 거란 군사가 경성에 밀어닥치자 가칭이 부모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가 청녕 원년(1055) 정월에 그 자식을 데리고 도망해 왔으니, 그 아비와 할아비의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모두 돌려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 처음으로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德水縣)에 짓고, 그 현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다. 지중추원사 최유선(崔惟善)이 간하기를,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은 신성(神聖)하고 영무(英武)하여 비할 데가 없었는데, 백성이 도첩(度牒)을 받아 중이 되는 것과 사관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그의 아버지인 고조(高祖)의 뜻을 따랐으므로 사전(史傳)이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태조의 《훈요(訓要)》에, '국사(國師) 도선(道詵)이 국내 산천 지세의 순역(順逆)을 살펴서 절을 세울 만한 곳이면 짓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후세의 사왕(嗣王) 및 공후ㆍ귀척ㆍ후비(后妃)ㆍ신료는 앞다투어 원찰(願刹)을 지어 지덕을 손상시키지 말라.'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조종의 오랜 터전을 계승하여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절용(節用)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가득찬 복을 유지하고 이루어 놓은 왕업을 지켜서 후사에게 물려주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물을 없애고 백성의 힘을 다해서 급하지 않은 비용에 이바지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 하십니까. 신은 이에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겨 답하였다. 그 뒤 어느 날 한가한 자리에 들어가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조용히 위로하고 장려하기를, “간쟁하는 것은 충성이며, 임금이 좋아하는 대로 따르는 것은 아첨이다." 하니, 유선이 대답하기를, “창업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수성(守成)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였다.
○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 3월에 왕자 증(蒸)을 책봉하여 국원후(國原侯)로 삼았다.
○ 윤달에 수사공(守司空) 상서우복야로 치사한 고열(高烈)이 졸하였다. 열은 흑수(黑水)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아 여러 번 군공(軍功)을 세워서 당시의 명장이었으므로, 죽으니 듣는 사람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 여름 4월에 이간방(李幹方) 등 13명과 은사 2명,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밀성(密城) 관내(管內) 창녕군(昌寧郡) 등 17곳에 큰물이 나서 벼를 손상시켰다.
○ 6월에 제하기를, “이제 곡식이 다 무르익어가는데 장마가 그치지 않으니 앞으로가 염려스럽다. 천지의 신기에게 날씨가 개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였다.
○ 예사가 아뢰기를, “왕태자 행차 의장대의 고취(鼓吹)를 대가(大駕 임금의 행차)의 절반으로 줄여야 하니, 위위시(衛尉寺)를 첨사부(詹事府)에 나눠 예속시켜 주소서." 하니, 따랐다.
○ 가을 7월에 동번적이 자주 변방을 침범하니, 동로마병이사 시어사(東路馬兵貳師侍御史) 김단(金旦)을 보내어 가서 토벌하였다. 단이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적을 앞에 두고는 집을 생각하지 않고 제 몸을 나라에 바치는 것은 나의 직분이니, 나의 생사는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하니, 삼군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용기가 곱절이 되어 적이 진을 친 부락 20여 곳을 깨뜨렸다. 이에 적이 크게 무너져서 병기ㆍ양ㆍ말을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노획하였다.
○ 8월에 사형수를 판결하므로, 정전을 피하고 소선(素膳)을 들었으며 음악을 철폐하였다.
○ 서경 유수사가 아뢰기를, “서경 안에 진사ㆍ명경 등 여러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공부하는 서적이 거의 다 손으로 베껴 써서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비서각(祕書閣)에 간직한 구경(九經)ㆍ《한서(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논어》ㆍ《효경》과 자(子)ㆍ사(史)ㆍ제가문집(諸家文集)ㆍ의(醫)ㆍ복(卜)ㆍ지리ㆍ율(律)ㆍ산(算)의 모든 책을 나눠 내려주어, 여러 학원에 비치하게 해 주소서." 하니, 유사에게 명령하여 인쇄한 책 각각 한 질씩을 보내주었다.
○ 중 3만 명을 대접하였다.
○ 9월에 제하기를, “여러 주ㆍ목의 자사(刺史)와 통판(通判)ㆍ현령ㆍ위(尉) 및 장리(長吏)가 행한 치적의 근면성과 청탁, 백성의 빈부와 고락을 사신을 보내 샅샅이 조사해야 하겠다." 하니, 유사가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백성과 관리들이 영접하고 보내는 데 피로하다고 하며 정지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짐이 생각해 보니, 선대에 자주 사신을 보내 백성의 고통을 캐물었기 때문에 여러 도의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 청렴하기를 힘써서 백성을 편안히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기강이 해이하고 문란한데다가 또 징계하고 개혁하는 일이 없어서 공사(公事)는 부지런히 안 하고 사리(私利)만을 꾀하며, 권호(權豪)와 결탁하여 마을에서는 제 주머니 거둬들이는 것이 많고 들에서는 뽕나무와 삼을 심도록 권하는 일이 드물며, 땅에서 물고기[魚]나 소금ㆍ좋은 재목이 나거나 민가에 축산이나 재물이 있으면 모두 빼앗기고 만일 주지 않으려 하는 자는 곧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엄하게 매질을 하여 목숨을 잃게 되니 아무리 억울하고 원통하여도 하소연할 곳이 없으며, 간혹 그런 일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있다가도 또 권력 있는 이의 청탁을 받아 마침내 능히 시행하지 못하여 백성을 좀먹는 해독이 날로 더하고 달로 불어나니, 관리들이 이미 이러한데 백성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랴. 짐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애를 써가며 어떻게 하면 그 많은 폐단을 없애줄까 하는데, 국정을 맡은 이들이 옳다고 하지는 않고 이런 말 저런 말이 분분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제 겸시어사 형부언외랑(兼侍御史刑部員外郞) 이유적(李攸績)을 산동남충 경상주삼도무문사(山東南忠慶尙州三道撫問使)로, 겸어사 잡단병부낭중 김약진(金若珍)과 예부낭중 최상(崔尙)을 아울러 산남(山南)의 진주(晉州)ㆍ나주(羅州)ㆍ전주(全州)ㆍ청주(淸州)ㆍ광주(廣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 7도무문사(七道撫問使)로, 겸감찰어사 시전중 내급사(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關西)ㆍ관북(關北)ㆍ관내(關內)ㆍ3도무문사로, 감찰어사 민창수(閔昌壽)를 관내 동도무문사(關內東道撫問使)로 삼아서 길을 나누어 떠나 보내서 행여라도 지체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왕씨들과 더불어 동지루(東池樓)에 술자리를 벌이고, 수재(秀才) 최응(崔應)ㆍ이서(李曙)ㆍ어실충(御室忠)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각각 비단을 내려 주었다.
○ 제하기를, “요사이 일관이 아뢴 것을 보건대 자주 천변(天變)이 있다 하니, 이것은 모두가 과인의 덕이 박하고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못한 소치다. 걱정이 되어 밤낮으로 편안할 새가 없으니 이달부터는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줄이어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려 한다. 모든 관리들은 각각 제 직책을 신중히 하고, 나의 잘못을 바로 말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제하기를, “석가(釋迦)가 가르침을 밝힌 것은 청정(淸淨)을 우선으로 삼아서 더러운 것을 멀리 하며 탐욕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요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사문(沙門)에 이름을 붙이고 돈을 벌어 생활을 하며, 농사짓고 가축 기르기를 직업으로 삼고 장사가 풍습이 되었으니, 나아가서는 계율의 법문을 어기고 물러나서는 청정의 규약이 없다. 어깨에 걸치는 가사(袈裟)는 함부로 술 항아리 덮개로 삼고 범패(梵唄)를 부르는 마당은 갈라서 파ㆍ마늘 밭이 되었으며 장사꾼과 통하여 사고 팔고 손님과 어울려 술 먹고 즐기며, 절간이 떠들썩하고 난분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며, 속인(俗人)의 갓을 쓰고 속인의 옷을 입고서 절을 짓는다 핑계하고 기와 북ㆍ악사를 갖추고서 마을을 드나들고 시정(市井)에 함부로 왔다갔다 하며, 남과 싸워 피흘리며 다치기까지 한다. 짐은 선악을 구분하고 기강을 맑게 하려 하니, 중외의 사원을 가려서, 계행(戒行)을 알뜰히 닦은 자는 모두 편안히 머물러 있게 하고 계행을 범한 자는 법으로 다스리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 정상위(正上位) 권예등원(權隷滕原)과 조신 뇌충(賴忠) 등 30명이 금주(金州)에 와서 관(館)에 머물러 있었다.
○ 왕태자가 태묘를 알현하였다.
○ 왕이 친히 태묘에 협제를 지내고 구묘(九廟)에 존호를 더 높여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다.
○ 11월에 송 나라 상인 황증(黃拯) 등 2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동여진 야사로(耶賜老) 등 5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시중 이자연이 아뢰기를, “요사이 흥왕사(興王寺)를 짓는 일 때문에 덕수현(德水縣)을 양천(楊川)으로 옮겼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집을 짓느라고 편안히 살 겨를이 없어 남자는 지고 여자는 끌며 길에 늘어섰으니, 가난한 사람은 구렁에 떨어져 죽을까 걱정이 되고 넉넉한 사람도 편히 살 곳이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소서." 하니, 제하기를, “특별히 두 해를 면제하라." 하였다.
○ 12월에 거란이 영주 자사(永州刺史) 소유신(蕭惟新)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 중외가 전(箋)을 올려 왕태자의 장흥절(長興節)을 하례하였다.
○ 동여진 유원장군 사지하(沙支何) 등 2명을 목 베니, 일찍이 삭주(朔州)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 장원정(長源亭)을 서강(西江)ㆍ병악(餠嶽) 남쪽에 지으니,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 가에 군자가 말을 탄 형국인 명당 자리가 있으니, 태조가 통일한 병신년(936)으로부터 120년이 되거든 여기다 집을 지으면 국업이 연장된다." 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태사령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하여 터를 보아 짓게 한 것이다.


 

[주D-001]원찰(願刹) : 불교 신도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짓는 절
[주D-002]나라의 근본 :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다.
[주D-003]수성(守成) : 선대가 이루어 놓은 왕업을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다.
[주D-004]난분 : 7월 백중날의 불공을 우란분(盂蘭盆)이라 하는데, 번역하면 해도현(解倒縣)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찬유 (역) ┃ 1968

 

 

 

 

 

 

구사당집(九思堂集) 구사당집 제2권 서(書) 권강좌께 답함〔答權江左〕 김낙행(金樂行)

 

 

 

             

 

 

 

 

구사당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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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書)
권강좌께 답함〔答權江左〕

 


   답장을 받고서 삼가 존체(尊體)가 편치 않으심을 알게 되니, 놀라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일간에 삼가 신명의 도움으로 불편한 몸이 회복되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아드님이 몇 해 동안 독한 병을 앓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이 병환에서 벗어난다면 천행일 터이고,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끝내 병세가 심해져 큰일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또 다행일 것입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이니 벌써 완쾌되었을 줄로 생각됩니다.
저는 어제 남쪽에서 온 부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친이 앓고 계신 병이 가을 들어 더 심하게 발병하였으니, 저의 다급하고 애끊는 심정이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집사께서는 넘치는 기력을 갖고 평탄한 길을 가면서 집안에 들어오면 색동옷을 입고 춤추며 이불을 함께 덮는 기쁨과 처자식과 자손의 봉양이 있고, 밖에 나가면 정지(亭池)와 천석(泉石)의 기쁨과 붕우들과 종유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를 편안히 하고 소원을 시원스레 이룬 것이 이와 같이 완전하시니, 구구한 질환(疾患) 따위가 침범하는 것은 근심할 것이 못될 듯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이가 노쇠하고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탄식하시니, 지금 저의 아버님께서 겪고 있는 질병과 노쇠함을 생각할 때에 어찌 이렇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초한 저는 정성이 모자라서 이미 치료 약을 구하는 데에 힘을 다하지 못하였고, 또 차마 노모(老母) 홀로 고향 집을 지키시게 둘 수 없어 두 아들이 나누어 항상 각각 한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식을 서로 듣는 때가 늘 일이 지나간 뒤입니다. 부친이 자리에 누워서 신음하는 날이 바로 아들이 노닐며 웃고 농담하던 날이니, 매사에 도무지 사람의 도리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괴롭고 괴롭습니다.

 


   집의 아우와 노복이 모두 병 들어 일을 맡을 수 없으니, 더욱 급히 달려가서 교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렇지만 이 한 몸뚱이 밖에는 모두 제 힘을 기다리는 터라 이 때문에 길 떠날 기약을 늦춰 뒤로 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24일이나 25일 쯤 되어야 비로소 출발할 수 있을 터이니, 하루를 보내는 게 마치 한 해를 보내는 것만 같습니다. 몹시 괴롭고 괴롭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반년이 되었으나 날마다 어수선하게 수응(酬應)할 일이 있었고 또 앓고 있는 눈병이 조금 잦아들었다가 곧바로 재발하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상난(喪難)을 만난 이후로 부친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길이 없었고, 오직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한 가지 일만이 혹 부친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차 아무 소득 없이 가게 되어 응대할 말이 없을 듯하니, 탄식하고 탄식할 뿐입니다.
전날 올렸던 말씀은 감히 겸양한 것이 아니었고 재주와 역량을 스스로 헤아려 보아 진실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편지로 이미 말씀드리고 난 뒤에 그 말을 다시 되짚어보니, 집사께서 면려하여 가르쳐 주신 본뜻을 알지 못했던 듯합니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세상에 떠도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린 사람이 있기에 어떤 사람이 일러주기를, “너는 돌아가서 입고 먹을 방법을 모색해보라.”라고 하니, 추위에 떨고 굶주린 사람이 엉금엉금 기면서 사양하기를, “나는 재주가 짧고 힘이 모자라서 동쪽 집 젊은이의 귀한 비단옷과 서쪽 집 늙은이의 고량진미를 만들 수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일러주던 사람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너에게 귀한 비단옷과 고량진미를 만들라고 했던가. 나는 너에게 신발을 짜서 팔고 산전(山田)을 개간하여 콩과 조를 심어 솜옷으로 몸을 가리고 묽은 죽으로 입에 풀칠하라 했을 뿐이다. 네가 또 어찌 단번에 귀한 비단옷과 고량진미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추위에 떨고 굶주리던 사람이 몹시 부끄러워하였고 길가에서 보던 사람이 모두 크게 비웃었다고 합니다. 지금 저의 일은 실로 이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편지를 올린 지 반년이 되었으나 아득히 답장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필시 장자(長者)가 노여워하고 길가에서 보던 사람이 크게 비웃었던 것과 같아서가 아니겠습니까. 곧 제 마음속으로 송구하고 부끄러워한 것이 장차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내버려두지 않고 답장을 보내어 깨우쳐 주시는 뜻이 더욱 지극하니, 감사하고 다행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회암(晦庵)과 퇴계(退溪) 두 선생의 글을 갖고 비유하신 말씀은 더욱 제가 감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송구하여 숨을 죽이게 될 뿐입니다.
도학과 문장이 두 가지 일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주자가 〈독당지(讀唐志)〉에서 말한 뜻을 깊이 얻은 것이니, 제가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감히 평생토록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으며 또 같은 부류의 동지를 위하여 일러주지 않겠습니까.
이경문(李景文)이 긴 편지에서 논한 내용은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 강건한 곳은 어떤 말이며 집사께서 병통에 절실히 들어맞았다고 인정하신 것은 또한 어떤 일입니까. 양측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삼가 조만간에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석천(石泉)에서 있었던 몇 달 동안의 강회를 생각하면 풍모를 그리워 흠모하는 나머지 이 몸이 연분이 없어 그 강석에 참여하여 말씀을 들으며 붓을 씻고 먹을 갈아 드리지 못한 것이 매우 부끄럽습니다.
그 당시 주고받았던 시문 전편을 또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내 주신 두어 편은 삼가 잘 받아보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을 언급한 곳을 읽어보노라니, 감동하여 절로 눈물이 납니다.
7월 기망(旣望)에는 과연 어느 강에서 배를 띄웠으며, 함께 유람한 사람은 어떤 손님이며,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화답했습니까. 아니면 도산(陶山)의 시에 차운했습니까. 중원(中元) 전날에 우레가 진동하고 비가 씻어내어 순식간에 하늘에 한 점 구름도 없고 달빛이 그림처럼 고왔는데, 이 밤에 이 풍광을 즐긴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시로 읊조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풍광에 감동하여 회포를 일으킨 것을 인간사에 되돌려서 표현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한번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니, 암천(巖泉)을 바라보면서 서글픈 심정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부친이 계신 남쪽으로 간 뒤로는 응당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니, 더욱더 자애(自愛)하시어 먼 곳에 있는 제 마음에 부응해주시기를 오직 바랄 뿐입니다.


 

[주D-001]색동옷을 …… 기쁨 : 부모를 모시며 형제와 함께 지내는 기쁨을 말한다. ‘색동옷을 입고 춤추다.’라는 것은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고, ‘이불을 함께 덮다.’라는 것은 강굉(姜肱)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노래자는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4 稽古》 또 후한의 강굉은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여 두 아우인 중해(仲海)ㆍ계강(季江)과 항상 이불을 함께 덮고 잤다고 한다. 《後漢書 卷53 姜肱列傳》
[주D-002]덕을 …… 닦는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나니, 충과 신이 덕을 진전시키는 것이고, 말을 함에 있어 그 성실함을 세우는 것이 학업을 보유하는 것이다.〔君子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라고 하였다. 《周易 乾卦 文言》
[주D-003]회암(晦庵)과 …… 말씀 :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이고, 퇴계는 이황(李滉)의 호이다. 권만이 보낸 편지에 “도학과 문장은 비록 본말의 차례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또한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퇴보는 주자와 퇴계 두 선생의 글을 익혔으니, 그 문장이 어떠하겠으며, 또한 어찌 일찍이 여러 문체가 갖추어지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江左集 卷5 答金退甫》
[주D-004]주자가 …… 뜻 : 주자가 〈당지를 읽고〔讀唐志〕〉라는 글에서 말하기를, “구양자가 ‘하은주 삼대 이상의 시대에는 정치가 하나에서 나와서 예악이 천하에 통하였으나, 삼대 이하의 시대에는 정치가 둘에서 나와서 예악이 공허한 이름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고금에 바뀌지 않을 지극한 의론이다. 그러나 저 사람은 정치와 예악이 하나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으나 도덕과 문장은 더욱 두 갈래에서 나오도록 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70 讀唐志》
[주D-005]강건한 …… 것 : 권만이 김낙행에게 보낸 편지에 “이경문이 또한 봄철 끝에 긴 편지를 보내어 주서(朱書)의 일을 논하였으니, 그의 말이 나의 병통에 절실히 들어맞았습니다. 문장 또한 단아하고 세련되어 사랑할 만하나 종종 말뜻이 강건한 곳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江左集 卷5 答金退甫》
[주D-006]석천(石泉) : 석천정(石泉亭)을 가리킨다. 권벌(權橃)의 맏아들 권동보(權東輔)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의 석천 계곡에 세운 정자이다.
[주D-007]7월 기망(旣望) : 7월 16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적벽부〉에 “임술년 가을 7월 기망에 소자(蘇子)가 배를 띄워 적벽강 아래에서 노닐었다.”라고 하였다.
[주D-008]도산(陶山)의 시 : 《퇴계집》 권3에 실려 있는 〈7월 기망에 조사경ㆍ김언우ㆍ신중ㆍ돈서ㆍ금협지ㆍ문원 등과 함께 풍월담에서 배를 띄우고 유람하기를 약속했으나 하루 전날 크게 비가 내려서 결국 모이지 못했다. 장난삼아 절구 두 수를 지어 여러 벗에게 드리며 한번 웃기를 바란다.〔七月旣望 期與趙士敬 金彦遇 愼仲 惇敍 琴夾之 聞遠諸人 泛舟風月潭 前一日大雨水 不果會 戲吟二絶 呈諸友一笑〕〉라는 시를 가리킨다.
[주D-009]중원(中元) : 중원절(中元節)로, 음력 7월 15일인 백중일을 가리킨다.
[주D-010]암천(巖泉) : 청암정(靑巖亭)과 석천정(石泉亭)을 가리킨다. 청암정은 권만의 6대조 권벌이 세운 정자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고, 석천정은 권벌의 맏아들 권동보(權東輔)가 유곡리의 석천 계곡에 세운 정자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박대현 (역) ┃ 2013

 

 

 

 

 

 

기언(記言) 기언 제37권 척주 기사(陟州記事) 동도(東都)의 어린아이를 땅에 묻고 쓰는 글 허목(許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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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주 기사(陟州記事)
동도(東都)의 어린아이를 땅에 묻고 쓰는 글

 


   3년(1662) 봄에 대기근이 들었다. 동쪽 끝 삼척부의 남쪽 몇 고을이 더욱 심하였는데, 게다가 남방에서 온 기민(飢民)이 또 600명이었다. 한 어린아이가 경주(慶州)에서 왔는데, 초췌하고 헐벗은 모습으로 부조(父祖)의 족도(族圖)를 지니고 있었으며 종의 신분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불쌍히 여겨 어루만져 머무르게 하고 밥을 먹였으나, 진휼한 지 한 달여 만에 죽었다. 죽은 까닭을 물으니, 혀 아래에 작은 혀가 생겨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불쌍하구나, 불쌍하구나. 그의 굶주림은 구제할 수 있었으나 그의 죽음은 구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운명이로구나. 그를 위해 관을 갖추어 남산 옆, 관도(官道) 곁에 묻어 주고 그 위에 표지를 세웠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서책과 족도를 거두어 관직노(官直奴) 승택(勝擇)에게 주면서 표지를 찾아 묻는 자가 오거든 그에게 주라고 하였다. 이어 밥을 지어서 그 혼백을 위로하였다.
아아, 돌아갈 곳이 없는 귀신을 여귀(厲鬼)라고 한다. 본부에서는 여귀에게 북진(北津)의 해상에서 매년 청명일(淸明日)과 중원일(中元日)과 겨울 상삭일(上朔日)에 소사(小祀)로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제사 받을 곳이 없는 귀신들은 길이 흠향 받음이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죽은 뒤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본래 합천(陜川) 사람이다.”
하였는데, 이 사람은 처음에 어린아이가 올 때 수종(隨從)했던 종이라고 한다. 지금 죽은 뒤에 수종했던 자가 자칭 동행한 사람이라고 하여 마침내 자기가 종이었다는 사실을 숨겼는데, 아울러 그의 고향까지도 숨기는 것인가.


 

[주D-001]중원일(中元日) : 음력 7월 15일을 말하는데, 백중(百中)이라고도 하고 백종(百種)이라고도 한다. 《국역 해행총재》 동사록(東槎錄) 〈택당이 왜인의 문목에 답함〔澤堂答倭人問目〕〉에 “7월 15일을 중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디 선가(禪家), 불가(佛家)의 글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승니(僧尼), 도속(道俗)이 다 이를 숭상하여 우란분공(盂蘭盆供), 초제(醮祭), 송경(誦經)의 행사를 치른다. 우리나라의 승가(僧家)에서는 모두 이날 재를 올리고 선사(先師)의 혼령에게 음식을 바친다.” 하였고, 또 “신라의 옛 풍속에 왕녀(王女)가 6부의 여자를 거느리고 7월 16일부터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고, 8월 15일에 이르러 성적을 매겨서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한 다음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하고 헤어진다. 그러므로 7월 15일을 백종절(百種節)이라 하고, 8월 15일을 가배절(嘉俳節)이라 한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선종순 (역) ┃ 2008

 

 

 

 

 

 

 

 

 

86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35권 여흥음(驪興吟) 7월 보름 백중날의 일을 기록하며 감회에 젖다.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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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흥음(驪興吟)
7월 보름 백중날의 일을 기록하며 감회에 젖다.

 


우란분의 법회는 서역에서 나왔나니 / 盂蘭盆法出西天
진단의 번역은 해도현이라 하나니라 / 震旦翻爲解倒懸

온 나라가 뒤질세라 분주히 치달리는 때에 / 擧國奔馳唯恐後
아직도 이 몸은 여전히 떠돌이라 부끄럽네 / 愧吾流落尙如前
두 병에 꽂힌 꽃은 참으로 볼품없다마는 / 兩甁花蘂眞無幾
한 가닥 향 연기는 대천 세계에 퍼지리라 / 一穟香烟徧大千
다행히 조사당에 천신할 멥쌀을 얻어 와서 / 幸得祖堂新粳米
나도 한낮에 백의선에게 절하고 올렸노라 / 日中拜獻白衣仙


 

[주D-001]우란분(盂蘭盆)의 …… 하나니라 : 우란분은 ullambana라는 산스크리트 어의 음역(音譯)으로, 중국에서 해도현(解倒懸) 혹은 구도현(救倒懸)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뜻은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에서 구원해 준다는 의미이다. 옛날 목련 존자(目蓮尊者)가 부처의 말에 따라 음력 7월 보름 백중날에 백미(百味)와 오과(五果)를 장만하여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공양함으로써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진 망모(亡母)의 고통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뒤에는 각 사찰에서 이날에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승려들을 공양하고 조상의 명복을 비는 행사로 바뀌었다. 진단(震旦)은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준말로, 인도에서 중국을 높여 일컬은 칭호이다.
[주D-002]천신(薦新) : 계절마다 새로 나오는 먹을 것을 먼저 신위(神位)에 올리는 일을 말한다.
[주D-003]백의선(白衣仙) : 백의선인(白衣仙人)의 준말로, 불교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가리킨다. 항상 흰옷을 걸치고 흰 연꽃 가운데에 앉아 있는 데에서 유래한 것인데, 백의대사(白衣大士) 혹은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고도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사가집(四佳集)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중원(中元)

서거정(徐居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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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류(詩類)

 

 

중원(中元) 2수


 

비 개고 막 서늘해져 가을 해를 보내어라 / 雨霽新涼斷送秋

일 년의 계절 차서가 몹시도 아득하구려 / 一年時序劇悠悠
중원절 놀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더니 / 無人解賞中元節
천고의 풍류는 역시 적벽의 놀이였었네 / 千古風流赤壁遊

사물 보고 감회 일으키니 자못 상심되어라 / 感物興懷頗自傷
우란으로 공불한다는 게 가장 황당하구려 / 盂蘭供佛最荒唐
지관이 내려오는 걸 어떤 사람이 보았는고 / 地官下降何人見
내가 그를 만나서 술 한잔을 대접하고 싶네 / 我欲相逢侑一觴


 

[주C-001]중원(中元) : 음력 7월 15일인 백중일(百中日)을 가리킨다.
[주D-001]천고(千古)의 …… 놀이였었네 : 소식(蘇軾)이 임술년(1082) 초가을 중원절(中元節)의 다음 날인 7월 16일과 같은 해 10월 보름, 두 차례에 걸쳐 적벽(赤壁) 아래 강(江)에서 객(客)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풍류를 만끽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다.
[주D-002]우란(盂蘭)으로 공불(供佛)한다 : 우란은 우란분회(盂蘭盆會)의 약칭으로, 불가에서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선조와 생존한 부모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해서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주D-003]지관(地官) : 천관(天官), 수관(水官)과 함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세 천신(天神) 중의 하나이다. 전설에 의하면, 천관은 복을 내리고, 지관은 죄를 용서해 주고, 수관은 액(厄)을 풀어 준다 하였고, 또 《송사(宋史)》 권461 〈묘훈열전(苗訓列傳)〉에 “상원에는 천관이, 중원에는 지관이, 하원에는 수관이 각각 사람의 선악을 기록하는 일을 주관한다.[上元天官 中元地官 下元水官 各主錄人之善惡]”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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