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마골피 성씨들은 왜 천한 성으로 불리나??

2015. 8. 15. 16:30잡주머니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들은 왜 천한 성으로 불리나??

주변에 신기한성 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데요

그럴때마다 천방지축 마골피라고 장난으로 놀리고...

또 놀림을 당하면 무지 기분나빠 하더군요...

왜  그 성들이 나쁘게 생각 되었을까요?

catchme156 | 2014.03.07 22:46 수정됨 | 조회 7,872 |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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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천씨, 방씨, 지씨, 축(추)씨, 마씨, 골(고)씨, 피씨 등을 가르켜 천한 성씨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나도 잘못된 통설임을 현대인이 알고 개선해나가야합니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난 뒤에도 대충읽으셨는지 증거를 대라시길래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각각의 성씨들이 언제,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벼슬을 하였는지를 위주로 적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벼슬이라 하였는데 여러분도 알다싶이 천민은 절대로 벼슬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조선말에는 돈으로 관직을 샀다하지만 '천방지축마골피' 대부분의 성씨는 고려시대 때 생겼으므로 절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되겠습니다.

    밑에서 더욱 자세한 설명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지씨의 경우
    고려 초, 4대 임금인 광종에게 성을 하사받아(약 951년) 그 후로 고려 때에만
    무려 36번의 최상급 벼슬(문하시랑 평장사)를 역임하게됩니다.

    천민이 과연 그런 최고의 벼슬을 그렇게 많이 할 수 있습니까?

    그럼 이런 점들을 생각하시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선 천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천민이란 양인 밑의 신분, 즉 노비 등의 사람을 말했으며 실제로 천민은 성씨 자체가 없었으며 과거(문과)에 응시마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천민이 아니였다는 것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지씨를 보겠습니다.

    지가(池家)는 고려 때에  平章事(수상급) 36명을 배출한 명문 거족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0명 이상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해 내었습니다.
    여기서 '고려 때에 수상급 36명을 배출한 가문이 왜 조선시대에는 10명 대의
    급제자만 나왔을까' 하시는 분이 계실텝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가(池家)는 고려 때 번영했던 가문이었던 만큼,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켜(이조혁명)왕조가 바뀌고나서도 충심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모두 정권에 손도 대지 않고 다만 무신의 길로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예로 17代 池 湧奇 공은 고려왕조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이성계와 지극히 가까운 사이시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시다가 밀려나게 되셨으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참살됨을 통분하게 생각하시고, 말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잠자지 않으시고, 13일 만에 앉아서 절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무과에서도 매우 훌륭한 공신들이 대거 나오게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천씨를 보겠습니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습니다.
    천(天)씨는 5개의 본관에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닙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닙니다.

    다음으로 방씨를 보겠습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닙니다.

    이상으로 대표적인 성씨 3개를 예로 보여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통설이 생겨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간 일제하에서 일제 고등경찰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근거없이 지어내 주민들에게 퍼트린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자 일부 유식한듯한 몰지각한 식자층에서 인용한 말이 천방지축 마골피 등등입니다.

    다시말해 이런 말은 듣고 말할 가치조차 없으며 일본인들이 한민족 이간책으로 지어낸 말임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민족의 단결을 해치려는 술책에 현대에 와서까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 2006.03.08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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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지씨의 유래
    池氏의 연원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지씨(池氏)는 충주(忠州) 단일본(單一本)으로 일부는 단양(丹陽) 광주(廣州) 등을 쓰고 있으나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다

    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또 본래는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1천여년 동안 47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11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40여 파로 분파된다. 11대파는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주서공파(注書公派)·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판형공파(判形公派)·주서명천공파(注書明川公派)·봉사영흥공파(奉事靈興公派)·낭장공파(左營公派) 등이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이들 3파가 사실상 충주지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충주지씨는 고려초(光宗 11年:960)부터 중앙(中央)의 지배계급(支配階級)으로 정착(定着)하여 대대(代代)로 많은 人物을 배출하고 고려말(高麗末)까지 세록구신(世祿舊臣)으로 벼슬이 끊이지 않아 고려조(高麗朝)에만 36평장사(平章事)와 24대장군(大將軍)을 배출한 명문(名門)으로 특히 지씨려말사걸(池氏麗末四傑)이라 일컬는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李成桂의 長男 鎭安大君의 丈人)과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의 아들 상원수(上元帥) 지용도(池龍圖-忠懿公), 상원수 지용수(池龍壽-忠武公) 형제 그리고, 판호조사(判戶曺事) 지복룡(池福龍)의 아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장군 등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지윤(池奫)은 우왕때 찬성사(贊成事)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가 되어 북원(北元)을 방비하였고 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심왕(瀋王) 모자의 반역을 방비하였으며 중앙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정방제조(政房提調)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판 판도사사(判 版圖司事)의 직무를 겸하면서 재상에 올랐다.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는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다.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공민왕 12년(1363)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안우(安祐)와 같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경성(京城)을 수복한 1等공신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임명되였고, 순무사(巡撫使)로 덕흥군(德興君) 최유(崔濡) 등 반적(叛賊)을 토벌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이 되고 밀직사(密直事) 지도첨의(知都僉議), 상원수(上元帥) 겸 평양윤(平壤尹)을 역임하고 공민왕 19년(1370) 서북면 상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 양백안(楊伯顔) 등과 원(元)의 동령부(東寧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충의군 지용기(池湧奇)는 공민왕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렀고 우왕(禑王)때 예의판서(禮儀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후 양광도 부원수(楊廣道 副元帥),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 都巡問使) 도원수(都元帥) 등을 역임(歷任)하면서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왜적(倭賊)을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특히 장흥(長興), 보성(寶城) 정읍(井邑) 나주(羅州) 등지의 전투에서 적 수십급(數十級)을 베고, 우리 백성 수백명을 포로에서 구출하였고, 응령역(應嶺驛)전투에서 적의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때는 안주도 도원수(安州道 都元帥)로 이성계의 회군에 공을 세우고 찬성사(贊成事)로서 이성계 등과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 흥국사(興國寺) 모임에 참가한 9功臣의 한분으로 중흥공신(中興功臣)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에 봉(封)하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나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 당으로 지목, 탄핵을 받아 삼척(三陟)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충남 면천(沔川)에서 졸(卒)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의 아들 충주지씨 중시조 지유용(池有容)은 세종(世宗)때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와 충청안무사(忠淸按撫使), 판경성부사(判鏡城府事),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능력과 용맹을 갖추어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로 卒하니 왕이 부의를 보냈다.

    지유용(池有容)의 아들 지개(池開)는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官職에 나아갔으며, 이어 그 자손이 8代에 걸쳐 연속(連續)하여 進士, 生員에 급제 함으로서 무려 일문에 사마(司馬)가 22명이 배출되는 명문(名門)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도 좌승지(左承旨) 지세함(池世涵:進士)과 그 아들 교관(敎官) 지달해(池達海) 도사(都事) 지달문(池達汶)형제, 그리고 지달해의 아들 왕자사부(王子師傅) 지봉휘(池鳳輝:進士) 부처(夫妻) 등이 삼세(三世)에 오효(五孝)로 정려(旌閭)와 사복십결(賜復十結)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지달해(池達海)는 생원(生員)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나서 中國에서까지 詩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때 시학교수(詩學敎授)로 추천되였으나 폐모론(癈母論)이 일자 일체의 관직을 멀리하고 충청도로 숨어버려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뿐만 아니라 孝行으로 세상에서 추앙을 받았고,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이항복(李恒福), 유근(柳根) 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다.

    지덕해(池德海)도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강직한 인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충청도 소모관(忠淸道 召募官)으로 의병(義兵)과 군량미(軍糧米) 모집에 공이 컸으며 용강(龍岡) 령해부사(寧海府使) 등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지여해(池汝海)는 덕해(德海)의 재종제(再從弟)로 지용(智勇)이 뛰어난 무관(武官)으로 용천(龍川), 철산부사(鐵山府使) 등을 지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위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별장(別將)으로 300명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城을 나아가 싸우다 순절(殉節)하니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 되었다.

    지봉수(池鳳遂)는 효자(孝子) 증참판(贈叅判) 지달문(池達汶)의 아들로 진사(進士)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종묘봉사(宗廟奉事)로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가 亂中에 풍류를 갖추고 술을 권하니 公이 정색(正色)을 하고 제찰사를 꾸짓었으며, 신주(神主)를 안전히 모실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더니 마침내 강화가 적에게 함락 되여서는 모든 관원(官員)이 다 도망하되 혼자 묘주(廟主)를 지킨 의리로 적도 감히 해(害)하지 못하였다. 후에 회덕현감(懷德縣監)을 지내고 인조의 항복을 憤하게 여기고 槐山에 落鄕하여서 다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충성군(忠城君) 지계최(池繼漼)는 인조(仁祖) 때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都元帥)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으로서 이괄(李适)의 반란군(叛亂軍)을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이수일(李守一) 등과 같이 맞아 섬멸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정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했다. 그 후 남해현감(南海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서흥부사(瑞興府使), 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며 치적을 남기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적과 싸우다 신계(新溪)에서 순절(殉節)하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추증하였다.

    또한 지경철(池景澈)은 문장(文章) 도의(道義)가 훌륭하여 교관(敎官)으로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에 호가(扈駕)하여서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더니 화친이 성립되자 관대(冠帶)를 찢고 귀향(歸鄕)하였으며, 그 아들 兄弟는 남한(南漢) 근친(覲親)中에 적에게 살해되니 충효양전(忠孝兩全)이라 하였다.

    이렇듯 지씨(池氏)는 조선조에서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까지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하였으나 청(淸)의 지배를 받은 인조(仁祖) 이후 출사(出仕)를 멀리하고 각지(各地)로 낙향(落鄕)하여 지조(志操)를 지키며 학문(學文)에만 힘을 썼다. 조선조(朝鮮朝) 중옆(中葉)에는 池門八鳳八海라하여 鳳字, 海字 항열(行列) 각 8名씩이 그 중에도 출중(出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敎官 지경철(池景澈)의 後孫으로 지우성(池友星 : 武科 同樞 五衛將), 지우두(池友斗 : 通德郞), 지우규(池友奎 : 兄友星과 武科 聯璧宣傳官), 지우삼(池友三 : 贈戶叅), 지우익(池友翼 : 武科 三陟營將陞資憲) 五兄弟와 지일휘(池日輝 : 武科 同樞 五衛將, 友三의 子), 지일호(池日浩 : 武科 沃溝縣監, 友奎의 子) 등 兩代에 五名이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이름이 났는데 특히 방어사(防禦使) 지우익(池友翼)은 사천(泗川),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善治稱頌이 있었고, 부인 全州 李氏는 享年 九十四世(1694~1789)로 正祖로부터 貞敬夫人의 老典을 받았으며, 아들 沃溝縣監 지일호(池日浩) 역시 善治와 孝子로 이름나서 縣民追頌者가 甚多했다.

    그 외에도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池淨:寧越 莊陵 配食壇 配享),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신립(申砬)의 별장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순절(殉節)한 판결사(判決事) 지하복(池河福), 관북(關北)에서 의병장(義兵將) 정문부(鄭文孚)와 같이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물리치고, 토적(土賊)을 목베인 좌승지 지달원(池達源:鏡城 彰烈祠 配享),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江華)에서 절개를 지킨 지평(持平), 지달원(池達遠), 문한(文翰)으로 이름난 이조정랑(吏曹正郞) 지달하(池達河), 지씨홍사(池氏鴻史)를 편찬한 지광한(池光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 청구자(靑丘子) 지광진(池光晉), 그리고 성리학자(性理學者) 주하(柱下) 지운호(池運浩)의 오형제(五兄弟) 등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당대의 명사(名士)가 많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우리나라에 우두법(牛痘法:種痘法)을 처음 보급한 의학자(醫學者)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뛰어났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종두법(種痘法)을 배워 온 박영선(朴永善)에게 종두법을 익혔으며,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종두법(種痘法)을 배우고 돌아와서는 전주(全州) 등지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의 전국 보급을 시작하였고,「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여 국민보건에 위대한 업적(業績)을 남겼으며, 그의 형인 백연(白蓮) 지운영(池運永)은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 불려졌다.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지청천(池靑天)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군(獨立軍) 간부를 양성하였고 청산리(靑山里) 전투 후에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피해 흑룡강(黑龍江)으로 이동하여,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항일전(抗日戰)을 수행하였으며 광복군(光復軍)을 통합(統合)한 후 광복군총사령관(光復軍總司令官)에 취임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건국초에 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이 수여되었다.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충주지씨(忠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또한 한말(韓末) 의병장(義兵將으)로 강원도일대(江原道一帶)에서 13년간 왜적(倭賊)과 격렬(激烈)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지용기(池龍起) 의병장이 있다. 그는 1867년 춘천(春川)에서 역시 의병활동을 한 지명재(池明在)의 외아들로 1895년 乙未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으로 전국(全國)에서 의병(義兵)이 붕기할 때 춘천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진응(李晋應) 휘하에서 약사원(藥司院) 전투에 참여하였고 관동9군(關東九郡)의 의병진과 合流하여 원산(元山)을 습격하고 뒤에 호좌 창의대장(湖左 倡義大將) 유인석(柳麟錫) 의병진과 제천(堤川), 충주(忠州), 청주(淸州) 등지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1908년 춘천(春川) 전투에서 순국(殉國)하니 나이 42歲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서훈(敍勳)되었다.

    한국어문학회장(韓國語文學會長)과 어문연구회장(語文硏究會長)을 역임한 장암 지헌영(藏庵 池憲英)은 지씨홍사(池氏鴻史)를 펴낸 설악 지광한(雪嶽 池光瀚)의 七代孫으로 1931년 연희전문 재학중 항일운동(抗日運動)에 가담하여 옥고(獄苦)를 치르고 퇴학하였다가 광복후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대전일보(大田日報) 사장으로 언론과 어문학계에서 활동하였고, 호중(湖中=忠淸道)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은 취송당(翠松堂) 지재우(池載鄅)는 뇌봉(雷峰) 지덕해(池德海)의 후예로 성품이 고결(高潔)하고 문장이 출중(出衆)하여 당대의 이름난 문인학자(文人學者) ,시인(詩人),묵객(墨客)과 교류(交流)가 많았고 특히 흩어진 지씨문헌(池氏文獻)을 재정비하여 중간(重刊), 복원(復元)에 힘써서 지문의 보배(池門의 寶貝)라 일컬는다.
    | 2006.09.13 | 의견 쓰기 |신고
  • 답변

     천방지축마골피 상놈 성 맞구요 천: 무당 방: 목수 나 마장 지: 지관등 지금의 장의사 축: 소백정 말: 말백정 골: 뼈(고리)백정 피: 가죽백정(갓받치)였습니다. 이들 모두 성을 가짐으로써 양반이 되었고 그후에 양반들이 할수있는 모든것을 할수있었기에 무과 에 시험을 볼수도 있었고, 그로인해 알아주는 인물들이 생긴걸로 알고있습니다. 축 씨는 현재의 추 씨 이고, 골 씨는 현재의 고씨로 사용되고있습니다. 흔하지 않은 성씨 입니다만, 옛날 양반들은 상놈성으로 기억하고있습니다. 그 성을 가진분들은 상놈성이 아니라고 근거를 대고있지만, 상놈들에게 성을 주면서 양반이 되었기에 양반들이라고 말해야겠지요

    | 2010.10.16 | 의견 쓰기 |신고
  • 답변

    축씨와 골씨는 모르겠으나

    상기 성씨는  양반성씨 맞습니다.

    만약 상놈 성씨라면 일제시대에 충분히 흔한성으로 바꿨어야 하는데

    일본의 창씨개명 명목하에 성도 없던 인구의 70%에 달하는

    노비나 머슴  천민들이 흔한 성으로 ........

    그당시에 갑자기 집성촌이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일제가 처음 호적 조사 했을때는 전국민의 30%정도 밖에 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후에 재 조사 실시하니 갑자기 동일성씨  집성촌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 났다고  합니다.

    거의 100%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된거지요

    저놈은 근본이 없는 놈이라는 말이 그때에 생겼다고 하지요

    같은 집성촌이지만 할수없이 동일 성과 본관을 써야 했기에

    기존 진퉁 양반들이 현실을 개탄해서 나온 말 이라고 합니다

    지금 주변에서도 동일 본관 성씨이지만

    말 못하는 어색함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는걸 봅니다.

    그러나 과거를 아는 분들중 대다수가 하늘 나라로 가셨지요.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저놈은 근본없는 우리성씨라며 은연중에 배척했지요

    지금도 알면서도 묵인하는 흔한성씨에 묻어가는 ......

    그렇다면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충분하게 성을 갈아 탈수 있었는데

    천하에도 없는 좋은 기회를 일본이 주었는데 왜 성을 안 바꿨을까요?

    대대로 양반 집안이기에 바꿀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상기 제목은 천한성씨가 아니라 천한직업을 한자로 표현하여 부른것이

    와전되어 잘못 인식된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이 말 합니다.

    힘내십시요

     

     

     

    | 2012.01.27 | 의견 쓰기 |신고
  • 답변

    마씨(馬氏)

     

    1. 시조지(始祖誌 : 시조에 관한 기록)

    馬氏의 시조(始祖)는 마완(馬浣)이시다. 은(殷)나라 양성인(陽城人)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君子)이다. 은(殷)나라 말기에 마완(馬浣)⋅마장(馬莊) 부자(父子)는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인(因)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은거(隱居)하다가 은(殷)나라가 멸망(滅亡)한 뒤에 마장(馬莊)이 기자(箕子)와 더불어 조선에 처음으로 동래(東來)하셨다고 한다. 인(因)하여 우리 馬氏는 동래조(東來祖) 마장(馬莊)으로부터 비롯하였으나, 옛 법도(法度)에 따라 동래조(東來祖) 마장(馬莊)의 부(父) 마완(馬浣)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통칭(通稱) 은(殷)나라를 중국(中國)의 고대왕조(古代王朝)라고 하나 근래(1928~1936) 은허(殷墟 : 殷나라의 옛터)가 발굴되면서 당시의 은족(殷族)은 전형적인 동방조선족(東邦朝鮮族) 계열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이 현대의 중국학자들의 통설(通說)이 되고 있다.(중국학자(中國學者)⋅서양지(徐亮之)⋅임혜상(林惠祥))

    따라서 우리 馬氏는 고조선(古朝鮮)에 뿌리를 둔 가장 전통적인 고성(古姓)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은족(殷族)의 계보(系譜)에 대하여는 삼가 후일의 더 정확한 고증을 기다리기로 한다.(중국사기(中國史記)⋅한서(漢書)⋅기자본전(箕子本傳))

    2. 본관지(本貫誌 : 본관에 관한 기록)

    漢城帝鴻嘉三年百濟左輔馬黎與烏干全聶等十人從溫祚王南行開國以十濟元勳受封於馬斯良縣世食其邑後孫入鄕及高麗改馬斯良爲會寧仍貫會寧我 太宗朝會寧屬長興遂貫長興

    해설 : 서기원전(西紀元前) 18년에 마려(馬黎)⋅오간(烏干)⋅전섭(全攝) 등 10인이 온조(溫祚)를 잘 도와서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경기도 남한산)에 도읍(都邑)하여 십제(十濟)를 건국하고 온조(溫祚)를 왕(王)으로 받드니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馬黎)에게 좌보(左輔 : 대신)의 벼슬을 내리시고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리니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초(高麗初)에 회령(會寧)으로 고쳐 불렀는바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회령으로 하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長興)에 속하게 되니 다시 본관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1) 상고문헌(詳考文獻 : 자세히 검토할 전거자료)

    ① 백제본기(百濟本紀 : 삼국사기 중의 제23권, 백제본기 제1편)

    百濟始祖溫祚王其父鄒牟或云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扶餘王無子只有三女子見朱蒙知非常人以弟二女妻之未幾扶餘王薨朱蒙嗣位生二子長曰沸流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娶越郡女生二子)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百姓從之者多遂至漢山登負兒嶽望可居之地沸流欲居海濱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高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宜乎沸流不聽分其民歸彌鄒忽以居之溫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國號十濟是前漢 成帝鴻嘉三年也沸流以彌鄒忽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後以來時百姓樂從改號百濟

    해설 : 백제를 건국한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으로 그 부친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피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이 딸 셋만 있어 근심하던 중 주몽을 만나보고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둘째사위로 삼았다.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졸본부여왕이 죽으므로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으니 장자가 비류(沸流)이고 둘째는 온조(溫祚)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 유리(琉璃)로 태자(太子)를 삼으니 비류와 온조는 태자(太子)가 못된 두려움에 마려(馬黎)⋅오간(烏干) 등 10신(臣)과 더불어 남쪽으로 피해 오니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한산(漢山)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 살만한 곳을 찾는데 비류는 해변으로 가서 살고자 하므로 10신(臣)이 말하기를 이곳 하남(河南)땅은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있고 남으로는 기름진 옥토가 있으며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 막았으니 이 자연적인 형세는 얻기 어려운 곳이라 하여 여기에 도읍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인천)로 가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10신(臣)과 더불어 10제국(濟國)을 세웠다. 이때가 서기원전 18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으므로 위례성에 와보니 도읍을 정하고 백성이 편하게 살고 있으므로 드디어 참회하고 별세(別世)하니 그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 살았다. 그 뒤로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이름을 백제라 고쳤다.

    ② 회령연혁지(會寧沿革誌 : 회령현이 변천하여 온 내역)

    本百濟馬斯良縣新羅景德王改爲代勞爲寶城郡領縣高麗改令名仍屬我太宗朝來屬長興

    해설 :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신라 경덕왕이 대로현(代勞縣)으로 고쳐 보성(寶城)의 영현(領縣)으로 하다가 고려 때에 회령(會寧)으로 고쳤고 이조(李朝) 태종조(太宗朝)에 장흥(長興)에 속(屬)하게 되었다.

    ③ 장흥연혁지(長興沿革誌 : 장흥이 변천하여 온 내역)

    百濟烏次縣新羅烏兒高麗定安仁宗朝改長興元宗朝改懷州忠宣朝復爲長興我 太宗元年從之中寧太宗十三年又徙遂寧古墟爲都護府別號冠山按輿地圖姓氏以馬氏系之會寧馬氏舊乘亦以會寧爲貫矣會寧今屬長興而是爲受封之鄕故仍爲長興馬氏又按舊乘戶長公以上三代墓云在遂寧白南山(卽今治所右崗世傳馬政丞墓所)戶長公之孫(平章事諱壽孫)退居山下之汭陽江號東江隱士東江公之曾孫忠靖公生于會寧鳳林山下茅原村(卽今治東五十里)眞泉上中歲移居于谷城梧枝面堂山村次子釣隱公景泰丙子退居汭江仍號釣隱由是推之兩寧彊界相連戶長公上下累代自會而遂東江公以後自遂而會釣隱公復居于遂寧無疑矣

    해설 : 백제 때 오차현(烏次縣)⋅신라 때 오아현(烏兒縣)⋅고려 초의 정안현(定安縣)을 인종조(仁宗朝)에 장흥(長興)으로 고쳤다가 원종조(元宗朝)에 회주(懷州)로 다시 고치고 충선조(忠宣朝)에 다시 장흥(長興)으로 하다가 조선조 태종원년(太宗元年)에 치소(治所)를 중령(中寧)에 옮기고 13년에 다시 수령(遂寧) 옛터에 옮기니 별호(別號)를 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니 성씨에 회령마씨(會寧馬氏)가 있으며 구 족보도 회령으로 본을 삼았다가 그 후 회령이 장흥으로 개칭됨으로 장흥을 본관으로 하였다.

    또 구 족보를 보니 호장공(戶長公 : 휘 작룡(諱作龍)) 이상 3世의 묘가 수령백남산(遂寧白南山)에 있다고 전하며(장흥읍 오른쪽 산등성이에 마정승(馬政丞) 묘소가 있었다고 전함) 호장공의 손자 동강공(東江公 : 휘 수손(諱壽孫))이 평장사 벼슬에서 물러나 예양강 위에 사시니 호(號)를 동강은사(東江隱士)라 하고 公의 증손 충정공(휘 천목(諱天牧))이 회령의 봉림산 밑 모원촌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곡성군 오지면 당산촌(현곡성읍)에 이사하고 충정공의 둘째아들 조은공(휘 전(諱腆))은 병자(丙子) 1456년에 내양강 위에 사시니 호(號)를 조은(釣隱)이라 하시다.

    미루어 보건대 회령(會寧)과 수령(遂寧)이 서로 접경(接境)으로 호장공 상하(上下) 여러 代가 회령과 수령에 살고 조은공이 다시 수령에 살았다 함은 의심이 없다.

    도선산도(都先山圖)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용두산

     

     

    동래조 마장(東來祖 馬莊) : 은나라 양성으로부터 고조선에 처음 오신 조상

    公은 경서(經書)에 정통한 학자(學者)다. 은(殷)나라 말기에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을 피하여 경서를 품고 종적을 감춘 바 있는 公은 복희씨(伏羲氏)의 팔괘(八卦)와 경서의 아홉가지 정치도덕의 원칙(홍범구주(洪範九疇))에 밝은 학자로서 주무왕(周武王) 13년 기자(箕子)와 더불어 조선에 동래(東來)하여 새로운 분야를 발전시키고 심오한 섭리와 지극한 정성으로 잘 다스려 인성(人性)이 덕(德)스럽고 선(善)하게 기르고 문물제도(文物制度)와 인륜(人倫)의 질서(秩序)를 세우고 팔조금법(八條禁法)을 힘써 가르치고 옛날의 전답제도(정전법(井田法))를 은나라 제도에 따라 시행하였다.(기자본전에 근거함)

    관조 백제좌보 마려(貫祖 百濟左輔 馬黎) : 성씨의 본관을 장흥으로 하게 한 조상

    백제 온조왕 때 좌보(左輔 : 大臣)다. 서기원전(西紀元前) 18년 마려(馬黎) 오간(烏干) 전섭(全攝) 등 10인이 온조를 잘 도와 인도하고 병사(兵使)를 다스려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하여 南으로 내려와 위례성(慰禮城)에 도읍(都邑)하여 십제(十濟 : 백제)를 개국하니 그 공훈으로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봉(封)하다. 마사량현(馬斯良縣)은 그 뒤에 장흥(長興)에 영속(領屬)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으므로 후손이 관조(貫祖)로 모시고 있다.(백제기에 근거함)

    1세조 중시조 판개성윤 마혁인(中始祖 判開城尹 馬赫仁) :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어나게 한 조상

    고려 선종(宣宗) 때(1085년) 문과(文科 : 옛 문관을 뽑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특진(特進 : 정2품)에 이르고 판개성윤(判開城尹 : 수도시장)을 지냄으로써 가문에 중흥(中興)의 전기(転機)를 마련하여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였으므로 公을 1世祖(中始祖)로 모시며 이때부터 가첩이 기록되어 전해 오고 있다.

    2세조 휘 엽(諱 曄)께서는 고려조(高麗朝)에 문과에 급제(文科及第)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내셨다

    3세조 휘 의유(諱 義裕)께서는 문과에 급제(文科 及第)하여 홍주목사(洪州牧使)를 歷任하셨다

    4세조 명신 문하시중 마희원(名臣 門下侍中 馬希援) : 고려 때 이름난 대신

    고려 명종(明宗) 때(119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개부의동삼사(開府議同三司 : 종1품) 문하시중(大臣)에 이르다. 계미(癸未) 1223년에 몽고사신 탑고야(嗒古也) 등이 와서 거년의 접대사에 불만을 품고 거리에서 만나는 장사치의 수달피, 명주 등을 번번이 빼앗을 뿐만 아니라 불응한 사람은 사살하는 등 야만적 행패가 심하던 차에 공이 글로써 달래어 뉘우치고 복종하게 하였다 한다. 왕이 공의 권위와 신망이 현저함에 감탄하여 다음 해 몽고사신 찰고야(札古也)가 돌아갈 때에는 왕명에 따라 공이 서경(평양)가지 호송하여 탈이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1) 유문 문의공휘희원효몽고사모살가인첩(遺文 文毅公諱希援曉蒙古使母殺賈人牒)

    ▶ 상인들을 무턱대고 죽인 몽고사신을 타일러 깨닫게 한 글

    君子令名之難而無無賄之難賈人之物非官府之守則固無與於國贐之多少而况國贐禮物歲有常制者乎 按高麗高宗癸未蒙使嗒古也等來以去年國贐不滿其意道遇賈人之持獺皮紬布者則輒奪之不與者彎弓射殺公時爲門下侍中移牒曉之蒙使慚服翌年後使者札古也等歸王以公威信素著於蒙人命公送至西京(事載麗史及家乘)

    군자(君子)라는 명예를 얻으려면 학식과 덕행을 높이 쌓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상인의 상품에 대하여는 관에서 간섭하는 법이 아니고 또 사신의 노자(國贐)는 관계에 따르고 있는바 국신예물의 다소를 논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바가 아니다.

    살피건대 고려 고종 계미(癸未)(1223년)년에 몽고사신 탑고야(嗒古也) 등이 와서 거년 국신에 불만을 품고 거리에서 만나는 상인의 수달피와 명주 등 상품을 강탈하고 주지 않는 자는 사살하는 등 행패가 심한지라 당시 문하시중(나라의 모든 정사를 도맡아 보살피는 大臣)인 공이 문서(글)로써 깨우치니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더라.

    그 다음해 사신 찰고야(札古也) 등은 트집 없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公의 권위와 신망이 몽고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고 칭찬하고 돌아가는 몽고사신을 서경(西京 : 평양)까지 호송하라고 명하시다.

    5세조 시 문강공(諡 文剛公) 휘 중기(諱 仲奇)께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셨다

    6세조 휘 작룡(諱 作龍)께서는 회령현(會寧縣) 호장(戶長)을 歷任하시고

    7세조 휘 지백(諱 知伯)께서는 호부상서(戶部尙書)를 歷任하셨다

    8세조 휘 수손(諱 壽孫)께서는 예빈정(禮賓正)을 지내시고

    9세조 휘 치원(諱 致遠)께서는 종부령(宗簿令)숭정대부(崇政大夫)로 관산군(冠山君)에 봉(封)하셨다

    10세조 휘 영(諱 榮)께서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회령군(會寧君)에 증직(贈職)되셨다

    11세조 시 충정공(諡 忠靖公) 휘 천목(諱 天牧)께서는 朝鮮朝(1399)(定宗)元年에 (正三品) 절충장군(折衝將軍)상장군(上將軍) 정종(定宗) 2年(1400)年에 太宗(芳遠)을 도와 王子의 亂을 平定하여 太宗元年(1401)年에 좌명 공신 (佐命功臣)에 추대(推戴)되시고 (正二品) 동지총제(同知摠制)에 부임(赴任)하셨다

    (1402)年 회령군(會寧君)에 봉(封)하시고 (1404)年에 개국.정사.좌명공신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1406)年에 행 영변대도호부사 行 (寧邊大都護府事)를 歷任하셨다

    (1412)年 전라 병마도절제사(全羅 兵馬都節制使) 겸(兼) 판 나주목사 (判 羅州牧使)로 부임(赴任)하셨고

    (1413)年 (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昇進)하셨다

    (1414)年 君號인 會寧君이 읍호(邑號)를 회령(會寧)에서 장흥(長興)으로 개칭(改稱)됨으로 장흥군(長興君)으로 군호(君號)가 개칭(改稱)되시고

    (1416)年 도총관(都摠官)으로 전라 병마도절제사(全羅 兵馬都節制使) 재임(再任)되셨다

    (1417)年 전라 병마도절제사(전라 兵馬都節制使)로 재임 시(再任 時) 현광주(現光州)에 있는 전라병영(全羅兵營)을 강진병영(康津兵營) 수인산(受仁山) 아래 옮겨 축성(築城)한 성(城)이 병영성(兵營城)으로 국가사적(國家史蹟)1397號로 現在 復元中이다

    (1420)年 (正二品) 정헌대부(政憲大夫)병조판서(兵曹判書)를 歷任하신 후

    (1423)年 판 우군부사(判 右軍府使)에 전임(轉任)되셨다

    (1428)年 집현전대제학 (集賢殿大提學) 겸(兼) 삼군부사(三軍府使)를 지내시고

    (1429)年 (正一品) 보국 숭록대부 장흥부원군(輔國 崇祿大夫 長興府院君)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 겸(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내셨다

    (1431)年 正月二十五日 享年 七十四歲로 別世하시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부음(訃音)을 듣고 슬퍼하시며 예조(禮曹)에 명(命)하여 장례(葬禮)를 예장(禮葬) 현 국장(現 國葬)으로 법도(法度)에 따라 정성(精誠)껏 뫼시게 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兼) 영경연(領經筵)에 추증(追贈)되셨다

    시호(諡號)를 충정(忠靖)이라 내리고 풍수(風水)에 命하여 좋은 묏자리를 잡게 하니 곡성 통명산(谷城 通明山) 방주동 계좌(芳州洞 癸坐)에 예장(禮葬)으로 뫼시니 사방 십리의 땅 사패지지(賜牌之地)를 하사(下賜) 하여 봉사(奉祀)케 하고 부조지전(不조之典)을 내리시니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상곡(上谷)에 묘우(廟宇) 충정묘(忠靖廟)를 창건(創建)하여 별세후(別世後) 每年 陰 正月 二十四日 밤 종문(宗門)에서 부조묘제 (不조廟祭)를 봉행 (奉行)하며 시제(時祭)는 음 10월 9일 奉行한다

    以外 公의 사우 (祠宇)는 의성崇節祠. 장흥忠顯祠. 강진忠靖祠. 청원 忠靖祠에 影幀을 뫼시고 每年節氣 따라 配享하고있다

    忠靖公의 功勳이 건원능(健元陵)현 동구릉 (現 東九陵)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비(碑)에 陰記되고 헌릉(獻陵)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비(碑)에도 陰記되어있다

    12세조 시 문간공(諡 文簡公) 휘 승 (諱 勝)께서는 조선 태종조(朝鮮 太宗朝) (1415)年 (從四品) 조봉대부(朝奉大夫) 춘추관편수관(春秋館 編修官)을 歷任하시고

    (1417)年 태종17 개국.정사.좌명.공신의 적장자(嫡長子)회맹(會盟)에 참여(參與)하셨다

    (1420)年 (正四品) 봉정대부(奉正大夫) 호군(護軍)에 오르시고

    (1423)年 (從三品) 중훈대부(中訓大夫) 대호군(大護軍)을 歷任하시고

    (1426)年 (正三品) 통훈대부(通訓大夫) 상호군(上護軍)으로 오르신 후

    (1434)年 (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상호군 (行 上護軍)에 歷任하셨다

    (1452)年 (從二品) 개성 유후사유수(開城 留後司 留守)를 지내시고

    (1454)年 (從二品) 가정대부(嘉政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赴任하셨다

    (1455)年 (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행 경주부윤(行 慶州府尹)에 재임(再任)되시고

    (1457)年 (從一品) 숭정대부(崇政大夫)로 長興君에 봉(封)하셨다

    公이 관직(官職)에 계실 때는 청백리(靑白吏)라 불리셨다

    (1463)年 享年 七十一歲로 別世하시니 시호(諡號)를 문간(文簡)이라 내리셨다

    公의 幽宅은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통명산) 아버지 國葬墓 下에 뫼시고 神主를 경북 의성군 단촌면 하화리 숭절사(崇節祠) 화산서원 (禾山書院)에 봉안(奉安)하고 每年 陰 三月 初 丁日에 아버지 충정공과 같이 儒林에서 奉祀하고 시제(時祭) 每年 陰 10月九日 谷城에서 奉行한다

     

     

    천방지축 마골피.. 호사가들이 말 맞춰서 지어낸 이야기 일 뿐입니다. ㅎㅎ

     

    | 2014.03.07 | 의견 쓰기 |신고
  • 답변

    [1] 천( 千 )씨 - 정유재란때 귀화한 중국계성씨
    우리 나라 족보를 보면 70%가 자신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귀화한 중국계는 많지 않습니다. 대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기 직전 혼란한 시기( 이 시기가 무협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강호의 세계입니다. ), 명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주로 많이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 충장공 천만리 "라는 분은 바로 정유재란후 조선에 귀화하여 오늘날 한국의 천씨의 시조가 되신 분입니다.

    [2] 방( 房 )씨 - 고구려에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 or 고구려인의 후예(?)
    시조 방준( 房俊 )이 당나라에서 고구려( 말기 )에 귀하하였다고 전해지며, 실제 시조( 중시조 )는 고려시대 벽상공신의 작위를 받은 방계홍부터라고 합니다. 실제 중국계인지, 아니면 망국( 고구려 )의 백성임을 숨기기위해서 그런 것인지는 저도 의문이 생깁니다. 저는 고구려인의 후예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 외 통일신라시대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방( 方 )씨가 있으나 이도 신라인으로서 중국의 성을 빌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극소수이지만 방( 龐 )씨와 방( 邦 )씨도 있는데 모두 각각 명나라 건국기와 멸망기에 귀화한 중국계라고 합니다.

    [3] 지( 池 )씨 - 천년 무인( 武人 ) 명문세족인 이중( 二重 )성씨
    태조왕건시대에 시조 지중익이 어( 魚 )씨성을 하사받아 지씨와 어씨 두 개성씨로 고려, 조선을 이어온 성씨입니다. 지씨와 어씨는 문반보다는 무관쪽으로 고려와 조선을 이어 천년세도를 누린 성씨입니다. 특히 세조시대 만주의 호랑이로 불린 어유소장군이 유명하지요.

    [4] 마( 馬 )씨 - 고구려 동명성왕의 후손
    물론 동명성왕의 직계손이 아니라 동명성왕과 같이 남하한 신하 마려( 馬黎 )의 직계손입니다. 마려는 후에 온조왕과 함께 서울로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릅니다. 아마 고구려,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이며, 이 두나라의 " 정도전 "인 셈이지요.
    물론 중국 한대( 漢代 ) 전설적인 명장인 복파장군 마원( 馬援 )의 후손임을 자체하는 성씨도 소수이지만 있다고 합니다.

    [5] 피( 皮 )씨 - 춘추시대 유명한 협객 번중피의 후손
    협객하면 무협지의 섬뜩한 무사를 연상하는데 실제 협객의 시조는 " 공자 "나 손자병법의 " 손자 "처럼 춘추각국을 돌아다니며 사상과 지혜를 파는 국가를 초월한 전략가들입니다. "번중피"도 당시 " 손자 "만큼이나 유명한 전략가였습니다. 그 분의 이름 맨 뒷글자를 따서 성을 만들었는데 족보에는 송나라 시대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나 아마 " 번중피 "가 워낙 유명한 분이기에 고려의 호족( 귀족 )이 그분의 이름을 빌려와 성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축씨와 골씨는 현재 한국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6] " 천방지축마골피 "가 천한 성으로 오인받는 이유
    아마 중국에서부터 이런 말이 생기지 않았나 사료됩니다. 한자도 우리나라 성씨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성씨의 " 千-房-池-馬-皮 "가 아니라 " 天邦支竺馬骨皮 "로서,

    천( 天 )씨와 축( 竺 )씨는 과거 천축국( 天竺國:인도 )에서 온 승려들이나 귀화한 인도인이 쓴 성씨입니다. 지( 支 )씨는 과거 월지족( 月支族 )의 후예이지요. 삼국지의 손권도 " 월지족 "이라고 합니다. 오늘 날 " 타슈켄트( 우즈베키스탄 ) "와 " 키르키즈키스탄 " 등 중앙아시아 투르케스탄 민족과 같은 계열의 서역인이지요. 골( 骨 )씨도 위구르인을 한자로 음역한 " 회홀 "또는 " 회골  "의 그 " 골 "입니다. 바로 서역인의 후예이지요.
    마( 馬 )씨는 중국에 귀화한 아랍계 후예가 마호멧의 후손임을 주장하여 스스로를 마( 馬 )씨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마원의 후손 마씨와 아랍계 마씨가 있지요. 한국에서도 아랍계 " 덕수장( 張 )씨 "와 회홀계 설( 卨 )씨가 있지요. 피씨와 방씨는 저도 그 근원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오랭캐성씨인 것 같습니다. 
    천방지축마골피가 오랑캐성씨로 중국에서 멸시를 받다가 조선에 와서도 

    천한 성씨로여겨진 것 같습니다.

    | 2005.10.06 | 의견 쓰기 |신고
  • 답변

    조선초만해도 성씨있는 양반은 10%도 안되었는데 나머지 90%는 어디로 갔을까요 ?

     

     

     

    원래 천민은 성씨없이 돌쇠,떡쇠, 끝세, 개똥이, 향단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후기 족보를 위조하거나, 1909년 일제가 민적법 시행시 성씨가 없던 상,천민들에게 원하는 성씨의 호적을 다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이박 등등"이였습니다. 그래서 유명성씨가 더욱 흔해지게 된 것입니다.

     

     

     

    일제가 성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그들이 신청하는 대로 유명성씨의 호적을 준것은 조선의 양반성씨들이 씨족별로 단결하는 것을 방해하고, 노비를 양민화 시켜서 수탈의 대상을 늘이기 위한 식민통치정책의 일환이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재 품성과 생김새가 천한데~ 성씨로 양반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였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으니, 그 사람의 품행으로 양천을 판단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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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은

     

    일제의 1909년 민적법이란은 민족분열정책에 편승하여 흔한성씨로 위장할 수 있던 종놈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성씨 千方池秋馬高皮는 소수이지만 고려때부터 있던 귀한 양반성씨일 뿐입니다....조선말과 일제시대에 대다수 성씨도 없던 상,천민층들이 숨어도 들키지 않을만한 흔한 양반성씨로 호적을 신청해 가지면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양반들이 되었는데....혹 양반으로 숨어든 것이 들키기도 할까봐 비교적 숫자가 적은 양반가문이 천민이였다라는 역사왜곡의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으로 보여집니다.

     

     

     

    일례로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는 고려때부터 역사서에 기록된 명문가로써 36명 문화평장사, 전공판서 상원수 지용수장군, 충의군 지용기 장군,조선조는 병조참판 지여해, 충정절제사 지정, 도승지 지덕해,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장군 등 천년을 이어온 무반 명문세족으로 유명하구요. 태조대왕의 첫째사돈(진안대군 장인)은 찬성사 지윤, 인조대왕의 사돈(여동생 남편)은 한성판윤 지계최 로 충주지씨 였군요. 왕의 사돈이 천민이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또한 이순신 장군의 처가 방씨이고요. 장인은 방진으로 당시의 현감. 그리고 천씨의 중시조는 천만리 장군으로 화산군 책봉을 받았군요...((((이들의 공통점은 전부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지킨 호국충신들이지요))) 왜 이런 말이 일제시대에 생겼는지 잘 생각해 보시지요. ^^

     

     

     

    * 상기성씨 주요인물

     

    천만리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화산군 책봉

     

    방현령 : 조선후기 대사헌

     

    지용수 : 고려의 일등공신, 충무공 시호

     

    마천목 : 조선의 개국공신 영의정

     

    피득창 :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성관별 과거급제자 찾아보세요.

     

    천민은 과거에 응시조차 할수 없었으나 상기성씨들은 벼슬아치 및 고위관료들이 있는 귀한성씨일뿐이군요.

     

    재미있는 점은 연못지(池)자를 쓰는 충주지씨의 경우는 무반계열에서는 조선의 유명명문가문들(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등등) 보다도 인구비례대비 2~3배나 급제자가 많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지요.. 아마도 충주지씨의 무과급제자가 많은 사유는 천년간 이어온 호국충신의 전통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참고로 저는 꽤나 문반양반이라는 청송심씨이지만 ~ 흔한성씨로 숨어든 노비 백정 후손들이 입지보전책으로 퍼트린 유언비어가 "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성씨"라는 것이죠..^^

     

     

     

    요새 돈잇음 양반이져^**

    | 2014.12.13 | 의견 쓰기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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