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북구 무등산 가는 길에 충장사에서 광주호 가는 길에 금곡동이 나온다. 500여 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마을 일대는 금곡동은 법정동이나 행정동은 석곡동(石谷洞)으로 동 이름은 쇠가 난 데서 유래한다. 무등산 ‘역사길’에서 가사문학권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금곡동 입구 삼거리 길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도로 옆 하천변에는 삼괴정(三愧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연녹색의 잡초들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정자에서 지은 각헌(覺軒) 박홍규(朴興圭)의 시에서 세 정자의 그 모습이 넓으면서 고요하나 / 맑은 임천(林泉) 사랑하여 흐른 물에 불타(不唾:침을 뱉지 않음)했네"하는 싯글로 보아 정자 앞을 흐르는 계곡 이름을 알 수 있다.
초라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삼괴정(三愧亭)이라는 이름은 부친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지만 깊은 사연을 담고 있어 옷깃을 여물게 한다.
이곳은 한말에 1900(광무4)년에 남평문씨 문병일(文炳日)이 부친 문유식(文愉植)의 뜻을 받들어 건립되어 꽤 오랜된 정자였다. 물론 지금의 건물은 아니었겠지만.... 윗골(금감마을) 꾀꼬리 당산에 지리하고 있다.
이 정자의 명에서 삼괴三愧란 세가지 뜻을 세우지 못한 삼미립(未立 )을 뜻한다. 그것은 자신이 못나 뜻을 세우지 못해 미립(未立), 아버지의 명예를 높이지 못함하고 제대로 모시지 못해 미현친(未縣親),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함 미교자(未敎子)의 세 가지 부끄러움을 의미로 겸손하고 자책하는 마음을 정자에 담아 후손들에게 좋은 교훈적 메세지를 남기고 있다.
‘오괴’(五愧)라 하여 예기(禮記)에서는 군자의 다섯 가지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과 父不言子之德하며 子不談父之過니라. (아버지는 자식의 덕을 말하지 아니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말하지 아니한다.)는 문구가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나 정자의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문병일(文炳日)의 삼괴(三愧)는 누구나 후회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삼괴는
평생동안 느낀 삼괴(三愧) 귀신에게 물어보며/깊은 산에 홀로 사니 바른 세월 흘러가네. 이른 나이 풍진 세상 예날 자학(子鶴) 그리었고/늦은 만년 천석(泉石)속에 사구(沙鷗)처럼 지냈도다.
선세유업 못다하니 남은 여감(餘憾) 한이 없고/자손교육 그르치니 내 스스로 반성하네. 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 마음이 답답하니/하늘가의 흰구름과 짝을 지어 놀았도다.
4대 임금을 섬면서 한시대 절대적인 권력을 소유했던 우암 송시열( 宋時烈1607~1689)도 그의 나이 80에도 오괴를 후회를 시로 토로했다.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 평생의 일을 추억하니 뉘우침 산처럼 쌓여/붓으로 기록하기 어렵구나.
어버이 섬김에 내 소견대로 하여 / 그 뜻을 따르지 못함 많았고 형님을 따름에도 사욕에 가려 / 강강하게 스스로 하기 좋아했으며
집에서도 홀로를 삼감에 어두워 옥루에 부끄럽지 않음 없었고 벗을 사귐에도 충후하지 못해 / 능히 그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네 더구나 군신의 즈음에는 / 감히 의리에 가까웠다 하겠는가.
이어지는 그의 시는 후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자질구레한 행실 삼가지 않으면 / 마침내 큰 덕의 누가 되는 것 외면의 거친 기운 / 한 점이라도 사용해서야 되겠는가
주야로 부지런히 노력하면 / 동식에 반드시 할 일 있으니 밝음과 정성을 양면으로 증진하고 / 공경과 의리도 함께 세워서 삼가 좌우에 써 놓고 / 험난에도 급박에도 이에 의거하리라
송시열은 그의 성품 마냥 좀처럼 길게 짓지 않은 인물이지만 회후하는 시에서는 장문을 쓴 것으로 보면 누구나가 자신을 돌아보는 후회는 다감하리라 여겨진 대목이다.
정자가 있는 자리는 구한말의 부농이었던 문유식이 생전에 즐겨 찾았던 곳이라 한다. 무등산 줄기가 좌우로 뻗어 있고, 넓은 평야가 앞뒤로 펼쳐진 곳에 있으며, 정자 왼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주변이 소나무와 잣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삼괴정은 도리기둥을 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작은 건물로,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중앙 1칸에는 방을 들였고, 좌우 칸에는 벽이 없으며 마루가 깔려 있다. 건립 이후 1985년에 기와교체 작업을 한 번 했을 뿐 더 이상의 보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내부에 정내에는 설주 송운해의 글씨인 정명이 현액되어 있고, 기노장(奇老章 기정진)의 기문(記文), 화순 이양면 추신 일제강점기 유학자 양회갑(梁會甲 1884년(고종 21)∼1961)의 상량문을 비롯해 김희준, 기세구, 박흥규, 정안석, 김희숙, 정운영, 이재풍, 여창현 등이 쓴 시문(詩文)이 걸려 있다.
정이름의 현판은 보성출신으로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雪舟)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 1965년 임종때 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설주 송운회(雪舟 宋運會 1874~1965)가 썼다.
정내에 현액된 시 중에 정자주인 문병일(文炳日)이 지은 '삼괴정 원운'의 내용은 이 정자를 지은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평생동안 느낀 삼괴(三愧) 귀신에게 물어보며 / 깊은 산에 홀로 사니 빠른 세월 흘러 가네 이른 나이 풍진 세상 옛날 자학(子學) 그리었고 / 늦은 만년 천석(泉石)속에 사구(沙鳩)처럼 지냈도다.
선세유업 못다하니 남은 여감(餘憾) 한이 없고 / 자식교육 그릇치니 내 스스로 반성(反省)하네 이 세상이 어지러워 이 마음이 답답하니 / 하늘가에 휜구름과 짝을 지어 놀았도다.
|
|
일대는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과 풍암정이 자리하고 있고 뛰엄바우와 시검바우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술을 연마한 곳이었다고 하며, 금곡마을에서는 8·15광복 이전까지 당산제와 기우제를 지냈다.
정자 앞에 모퉁이에는 153cm의 ‘꾀꼬리 당산’ ‘작은 당상‘이라 부르는 다산을 장려하는 남근석이 있어 정월 대보름 저녁에 제를 올리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이곳에서 100m위쪽에는 무등산 분청사기 전시실은 고려말에서 조선초 사이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에 1998년 세운 전시관이다. 여기서 3분쯤 가면 무등산수박마을에 이르러 무등산 수박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무등산 ‘역사길’ 사이사이 선비들의 삶이 스민 곳이다. 그런 선조들의 정신을 담고자했던 향리의 의식있는 지식이 세운 정자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그 운치를 경암 김희숙(敬庵 金熙淑)은 이곳에 들려 정자주인을 칭송하며 알리고 있다.
시내 언덕 깊은 곳에 적은 집이 고요하니 / 덕을 닦는 어진 주인 풍속 흐름 멀리하네 아침에는 구름따라 우는 사슴 달래주고 / 석양에는 낚시하며 백구(白鷗)따라 자울으네
밝은 세상 들어와도 부끄러움 없는지라 / 그의 마음 편하 여겨 다른 욕구 아니 갖네 이 사이에 높은 뜻을 다소라도 알려거든 / 하루라도 빠짐없이 이 정자에 놀아보소
'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무등산(無等山) 일대에는 우리들의 삶의 흔적들이 많이 산재해 마음을 다스리는데 귀감이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요 문신으로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났으며 시문을 창작해 조선 전기 제일의 시인으로 칭송됐던 사림ㅍ파의 저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은 전라도관찰사로 순시차 광주의 무등산을 보며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이렇게 읊었다.
푸르고 푸른 서석산 가을 하늘에 솟았는데 / 보통 십 일 동안을 안중에 들어온다네 희경루 앞에서 다시 머리 돌려 바라보니 / 구름 연기 잠깐 걷히자 영궁(仙人)의 궁전宮殿)이 보이누나
이슬비 자욱이 내려 산 기운 차갑더니 /오늘 아침에 해 돋으니 봉우리를 드러내네 우뚝한 것이 끝내 여러 산의 어른이라 / 두류산 꼭대기를 보는 것과 방불하구나
참고문헌=누정제영 광주광역시 1992 290P
문화.김은희/ nox9109@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