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쉼 없이 불어오는데/흰 해는 선가(禪家)에 머물고 있네. 땅에는 천년 바위 우뚝 솟았고 /산에는 2월 꽃이 여태 남았다. 春風吹不盡 白日駐禪家 地高千年石 山餘二月花
먼 돛단배 나무 사이 얼핏 보이고/가파른 길 구름 잠겨 기울어졌다. 꼭대기에 올라 가보려 하여 / 동자에게 한낮 차를 재촉한다네. 遠帆穿樹見 危磴入雲斜 欲上高峰去 催僮午點茶
조선말기의 문인 추당(秋堂) 백파(白波) 신헌구(申獻求, 1823-1902)가 해남 두륜산 대둔사의 암자로 지금은 사라진 만일암(晩日庵)에 들렀다가 다산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이 지은 시를 보고 차운한 시이다.
만일암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암자여서 먼 돛이 보인다 했고, 정상으로 가는 길이 구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곳은 다산 정약용이 자주들렸고 이곳에서 만일암기를 비롯하여 만일암사적 등 여러 편의 글을 남겼던 이름난 암자다. 만일암은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려시대 중반기(12∼13세기)에 조성된 5층석탑 만 지키고 있다.
대둔산은 천연기념물 왕벚나무자생지를 비롯하여 후박나무, 동백나무, 비자나무등의 온대림을 구성하는 상록활엽수와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등 온대림을 구성하는 많은 양의 낙엽활엽수로 구성되어 잘 보존된 삼림지역이므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신헌구는 중년에 1875~1880년 까지 5년간 해남에 쫓겨나 머물면서 대둔사 승려들과 폭넓은 사귐을 맺었고, 초의차와의 인연을 갖은 인사중에 한사람이었다.
초의 스님 일찍이 초록 향연(香煙) 시험하니/곡우 전에 갓 나온 새 혀 같은 여린 싹일세. 단산(丹山)의 운간월(雲澗月)은 아예 꼽지 말지니/한 잔의 뇌소차(雷笑茶)가 수명을 늘여주네. 艸衣曾試綠香煙 禽舌初纖穀雨前 莫數丹山雲澗月 一鍾雷笑可延年
이번에는 낙서암에 올라(登樂棲菴)에도 차를 마시며 편안한 시간을 갖고 가시나무(迷陽) 같은 삶이 이곳에서는 달다고 여유를 부리며 시를 남긴다.
쇠락한 마을 작은 기슭 선당(禪堂)이 숨었는데/ 규모도 자그마해 초동목부(樵童牧夫) 찾아올 뿐. 명천(茗泉)을 길어와서 무화(武火)를 재촉하니 /담백한 밥 풀 반찬에 미양(迷陽)의 삶이 달다. 殘村小麓隱禪堂 樵牧侵尋少棟樑 活引茗泉催武火 澹飡草具甘迷陽
향초 덮힌 산길은 평지 비탈 어지럽고 /대나무는 울을 이뤄 제멋대로 길고 짧다. 산밖의 이름난 절 멈춰 지냄 오래거니/붉은 나무 석양 비침 앉아서 바라본다. 徑莎冪磴迷平側 野竹成籬任短長 山外鳴籃停處久 坐看紅樹入曛黃
그 모습 살펴보면 연화(烟火) 낀 대그릇이요 / 그 속을 맡아보면 향기가 자욱하다. 속이 깊어 두드리자 쟁그렁 소리 나니 / 아 너는 백번 단련한 꽃다움로세相其䫉烟火籠 罩見其心芬郁 沈深敲之而鏗 繄爾百鍊之英 .....그가 지은 다당(茶鐺)이라는 시이다. 산거시(山居詩)에 “동기(動機)에 맞추어 눈금 없는 저울만을 사용하고, 골동품이 좋아서 다리 부러진 다당(茶鐺)만 남겨 두었네.[酬機但用無星稱 娛老惟留折脚鐺]" 한 글귀가 있다. 그는 차를 무척 즐겨 마셨던 것 같다.
그가 남긴 시에서 차에 관련 시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에는 보련각에서 지내며 월여상인께 드림(贈月如上人)이라는 시를 남긴다.
고승의 거처라 대나무로 숲을 삼고/ 밤에 자며 재 지내니 달빛 옷에 가득하다. 흐르는 물 깊은 산은 나를 오래 붙들고/엷은 구름 성근 비에 그대 함께 찾는도다. 高僧居處竹爲林 夜宿經齋月滿襟 流水深山留我久 淡雲疎雨共君尋
초의의 옛 바릿대는 전신(傳神)의 게송이요 /보련각(寶蓮閣)의 찬 종소리 성심(省心)을 일깨운다. 좋은 차 끓여내어 막힌 체증 해소하니/육근(六根)에 세상 티끌 침입하지 않게 하리. 草衣古鉢傳神偈 蓮閣寒鍾發省心 煮取茗香消碧痞 六根不敎世塵侵
자는 계문(季文), 호는 백파(白波)이며 귀래정 신말주의 14세손으로 태어났다. 철종 13년(1862)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간원정언, 홍문관 부수찬에 이어 지평에 올랐으며 186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다 대원군의 견제로 급제동이 걸려 원치 않게 유배 아닌 유배길에 오르게 된 그는 멀리 해남으로 내려왔다.
장자진경(莊子眞經) 인간세 편(人間世 篇) 접여지가(接輿之歌) 중에 이러한 싯구가 있다.
앞으로 올 세상 기대하기 어렵고, 지나간 좋은 세상 돌이킬 수 없네. 성인은 천하에 도가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하고, 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홀로 그것을 지키며 살아간다네.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天下有道聖人成焉 天下無道聖人生焉
지금의 세상, 형벌이나 면하고(죄나 짓지 않고) 겨우 살아가면 그만, 행복은 가볍기가 깃털 같아 잡을 길이 막막하고, 화근은 무겁기가 땅과 같아 피할 길이 아득하네 方今之時僅免 刑焉 福輕乎 羽莫之知載 禍重乎地莫之知避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 내가 가는 길 막지 말아라. 물러서고 돌아가 다시 길을 잡으면, 그런 데로 발 상하지 않고 나아 갈 수 있으리 迷陽迷陽無傷吾行 吾行 曲無傷吾足
그는 해남에서의 5년은 자신을 되돌아 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 나쁜 기운을 씻어내 주는 것은 오직 차뿐이라며 육우의 다경을 열심히 읽어 차에 대한 공부를 더 못함을 아쉬워 하는 대목이 견한(遣閒) 12수 가운데 9수에 이를 나타내는 시가 남아 있다.
푸른 연기 그윽하다 대 마루에 서리었고/새로 길은 차 샘물로 물병이 푸르도다. 장기(瘴氣) 남기(嵐氣) 씻어냄은 다만 차에 힘입으니/육우(陸羽) 다경(茶經) 대충 봄을 이제와 후회하네. 碧篆淸幽繚竹欞 茗泉新汲甔甁靑 瘴嵐消滌惟渠賴 却悔疎看陸羽經
그래서 였을까? 그는 1880년 해남에서 상경해 관동어사를 거쳐 호조참의를 지냈으며 두차례의 호조판서의 역임과 예조판서와 이조 판서를 거쳐 대사성가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문화.김은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