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 박태보의 한시

2015. 12. 13. 23:00

 

 

 

 

 

      홍세태, 박태보의 한시 낙서장

2015.03.1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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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태(洪世泰,1653,효종41725,영조1)는 조선후기의 위항시인이다. 자는 도장(道長)이고 호는 창랑(滄浪), 또는 유하(柳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675(숙종1) 역과에 급제하여 한학관이 되고, 1681년 김창흡의 낙송루 시사에 참여하고, 이듬해 통신사 윤지완(尹趾完)의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688년 청풍부사 김창협을 따라 김창흡과 함께 단양에 갔고, 소양강, 청평사를 유람했다. 1690년 평안도 염성부사 최석정(崔錫鼎)을 따라가 그 아들 최창대(崔昌大)와 문주회를 즐겼다. 1698년 청나라 호부시랑 박화약(博和諾)이 중강(中江)에 와서, 원접사 제술관으로 시를 지었고, 이문(吏文)학관이 되었다. 1700년 원접사 제술관으로 의주에 다녀오고, 1702년 김석주(金錫冑)와 동평군 이항(李杭)의 도움으로 속량되었다. 1705년 황해도 옹진 대기둔(大機屯)의 둔전장, 1710년 통례원 인의, 1713년 병조주부, 이듬해 송라도 찰방, 의영고 주부, 1719년 울산 감목관, 1723년 원접사 제술관을 지냈다.

 

 분상에서 한식을 맞아 (汾上遇寒食)

 

작년 한식은 해서(海西)에서 맞고 올해 한식은 여기에 머무네.

세월은 돌아서 어찌 바쁜지 인생살이가 쉴 틈이 없구나.

동풍 부는 가게에 불 꺼지고 새벽 비 뽕나무에 비둘기 있네.

보이는 봄 경치 고향은 아니지만, 가련하다, 누구랑 함께 봄놀이 할까.

 

去年寒食海西頭 寒食今年此地留

歲月回環何太促 人生行役不曾休

東風野店無烟火 曉雨桑林有鵓鳩

觸目韶華非故國 可憐誰與作春遊 (柳下集 卷1)


 이 시는 1688(숙종14)에 지은 칠언율시로 우()운이다. 홍만종(洪萬宗)시재(詩才)가 자주 당나라 시인에 가깝다.(洪萬宗, 詩評補遺. 洪世泰海上遇寒食詩詩才甚往往逼唐.)라고 평했던 작품이다. 그가 1686년과 1687년에 강화에 다녀왔는데 신정(申晸,16281687)이 그 때 강화유수로 있었고, 지기였던 김창흡과도 오갔던 듯하다. 분상은 통진(通津)의 옛 이름인 분진(汾津)을 말한다. 이 시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한식날의 봄 경치를 보는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수련은 강화와 통진을 오가며 두 해를 보냈던 지난 시간을 회고한 것인데, 해서(海西)라고 한 것은 강화를 말한 것으로 1687년에 황해도에 간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함련은 일상에 매달려 사느라 세월의 빠름을 이제야 실감한다는 정서적 깨우침이다. 경련은 풍경의 사실적 묘사로 한식날의 을씨년스러운 감회를 표현한 것이고, 미련은 이른 봄의 경치에서 객지의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왕산 백련봉 아래 필운동 집에서라면 친구들과 어울려 한식날의 봄놀이라도 갔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시는 사실적 경치묘사로 일관하거나 논리나 전고에 치우치지 않고, 서경과 서정이 잘 어우러지게 하여 당시풍(唐詩風)을 이루어냈다고 하겠다.

 

 홍중성을 여강으로 보내며 (送洪君則之驪江)

 

광릉의 봄 물결이 외로운 배를 끌어서

삼월의 강 안개는 뱃길 앞에 가득 피리라.

골짜기 트인 곳 지나 언덕 돌면 두미포(斗尾浦)이고

강이 맑고 들이 넓어지면 거기가 여주라네.

동쪽 대()의 흰 탑은 멀리서도 신륵사(神勒寺)인 줄 알고

북쪽 물가와 푸른 산은 모두 청심루(淸心樓)를 향하고 있겠지.

그대가 가는 곳의 풍광은 참으로 이 같으리니

때가 되면 나 또한 거기 가서 놀겠소.

 

廣陵春水引孤舟 三月烟花滿上頭

峽坼岸回爲斗尾 江淸野濶是驪州

東臺白塔遙知寺 北渚靑山盡向樓

君去風光正如許 當時我亦此中遊 (柳下集 卷1)

 

 그가 1690(숙종16) 시우(詩友)였던 홍중성(洪重聖,16681735)을 여주로 전송하면서 지은 칠언율시로 우()운이다.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로 가는 과정과 여주의 경치를 여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수련은 봄날에 배를 타고 여강을 올라가는 상황 묘사다. 봄 물결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면 3월의 강 안개가 피어오르리라는 사실적인 풍경의 제시다. 그는 여러 번 이 뱃길을 다녔기에 단순한 상상적 풍경이 아니라 본 대로를 생각해서 재현한 것이다. 함련은 여주까지 가는 과정을 풍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골짜기가 트이고 언덕을 돌아서 지나는 곳이 두미포이고, 맑은 강물과 너른 들판이 나타나면 여주에 도착하게 된다는 노정의 풍경 묘사다. ‘협탁(峽坼)’이나 청강(淸江)’은 경치에 대하여 막히고 답답한느낌이나 트이고 상쾌한느낌을 음운으로 표현해 낸 것인데, 이는 그의 당시적 취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安大會, 洪世泰論, 조선시대 한시작가론, 이회문화사, 1996, 582쪽 참조.) 경련은 배에서 보게 되는 여주의 경치다. 동쪽 대()의 흰 탑이 먼저 보이는 신륵사, 북쪽의 물가와 산, 그리고 청심루 이들 모두가 여주의 경치 묘사다. 비록 그가 당시적 취향을 지녔지만 여기까지는 풍광의 사실적 묘사에 주력하고 있다. 미련은 마치 안내하듯 제시한 풍광을 마무리하면서 자신도 곧 여주에 가서 함께 놀겠다는 말로 헤어지는 아쉬움을 만남의 기약으로 달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보았던 조선의 산수를 사실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슬픔을 풀어씀 (述哀)

 

나는 사나운 운수를 만나서 사는 것이 마른 나무 같아도

너를 의지하여 입을 열었고 오로지 마음에 위로가 되었는데

, 너마저 오늘 가버렸으니 이제 나만 홀로 남았구나.

방에 들면 목소리 들리고 문을 나서면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일마다 생각이 나서 마치 누에고치 실처럼 마음속에 있어

슬프다 저기 한줌 흙이 되어 혼과 뼈가 산기슭에 누웠구나.

평생토록 멀리 가지 않았는데 오늘밤은 누구랑 함께 자는지

가만히 글쓰기를 멈추니 예쁜 얼굴을 대한 것 같아

상자를 여니 차마 볼 수가 없어 다만 눈물만 이어질 뿐

아득히 먼 저승에서 네가 어찌 내 울음을 듣겠느냐.

 

自我罹窮阨 生趣若枯木

賴爾得開口 聊以慰心曲

嗟汝今已矣 今我日幽獨

入室如有聞 出門如有矚

觸物每抽思 如繭絲在腹

哀彼一抔土 魂骨寄山足

平生不我遠 今夜與誰宿

空留絶筆書 婉孌當面目

開箱不忍視 但有淚相續

冥漠九原下 爾豈聞我哭 (柳下集 卷2)

 

 그가 1692(숙종18)에 딸을 잃고 그 슬픔을 표현한 오언배율로 옥(), ()운을 통운했다. 그는 팔남삼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어려서 다 죽었고, 그가 40, 62, 66살에 세 딸들도 각각 먼저 죽었다. 마음을 의지하고 살았던 딸들이 죽었을 때의 슬픔과 자신의 신세를 슬픈 어조로 읊어낸 같은 제목의 작품이 두 편 더 있다. 그는 딸들과 외손자 뿐 아니라 두 동생도 자신보다 먼저 죽었는데 이러한 가정적 불행을 슬픔의 정한이 흘러넘치게 표현하였다. 이 시는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처음 석 줄은 자신의 사나운 운명에서도 딸을 의지해 살았는데 그 딸이 죽어 고절감(孤絶感)에 빠졌음을 읊었다. 가운데 넉 줄은 죽은 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으로 누에고치 실처럼 풀리는 사연과 한 줌 흙이 된 딸에 대한 허망감과 격절감(隔絶感)을 표현하였다. 마지막 석 줄은 딸의 환상과 유품으로 새삼 상기되는 슬픔, 그리고 저승과의 거리감을 드러내었다. 요컨대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내포하는 외로움과 아쉬움, 허망함과 격절감 등이 뒤섞여서 나타나고 있다. 격정적 감정의 분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의 절제가 강조되어 있지도 않다. 이 시는 딸을 잃은 슬픔을 자연스럽게 표출하여 약간의 감상성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가난한 선비를 노래함 (詠貧士)

 

거친 서리 아래 대나무는 한 해가 저물어도 익은 열매 드물구나.

그 위에 앉은 외로운 봉황의 새끼는 아름다운 무늬의 옷을 입었네.

어찌하여 티끌세상에 왔는지, 말하기를 임금의 덕이 빛나서라고 하네.

북풍은 깃털에 불어오고 지저귀며 아침에 배고픈 것을 참는데

솔개는 썩은 쥐를 얻어서 올려다보며 꾸짖고 충고한다.

적게 먹으면 마음이 맑고 많이 먹으면 몸이 뚱뚱해지니

뜻을 정한 바가 이미 다르고 운명을 알았으니 또 무엇을 바라리오.

영원한 하늘 길 잃어버리고 천 길을 솟구쳐 높이 나네.

 

荒荒霜下竹 歲暮練實稀

上有孤鳳雛 文章被其衣

何如步塵區 謂言君德輝

北風吹羽翼 啾啾忍朝饑

鴟鳶得腐鼠 仰視嚇且譏

少心則潔 食多身則肥

秉志旣不同 知命復何希

去矣天路永 千仞起高飛 (柳下集 卷3)

 

 그가 1698(숙종24) 가을에 유하정(柳下亭)을 짓고 친구 김부현(金富賢)과 시를 주고받을 때 지은 오언배율로 미()운이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아 비록 어렵더라도 시인으로서 기품과 지향은 바꾸지 않을 것임을 봉황의 새끼에 비겨 노래하였다. 처음 두 줄은 대나무에 내려앉은 봉황의 새끼가 옷은 아름다운데 먹을 것이 없음을 말하여 자신의 처지를 암유하였다. 가운데 석 줄은 봉황이 속세에 떨어져서 배고픔을 참고 속된 무리로부터 모욕을 당한다는 내용으로 자신이 바로 춥고 배고프며 모욕을 당하는 현실적 고난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석 줄은 세속적 부귀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신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봉황새가 비록 땅에 떨어지긴 했으나 하늘 높이 솟구쳐 날듯이 자신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시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현실적 처지가 보잘 것 없지만 시인으로서 뜻은 높이 지닐 것임을 다짐하여 꿋꿋하고 오기에 찬 자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칼에 비유하여 부러져 쓸모없이 자갈에 섞여 있거나, 쓰지 못하고 칼집에 꽂혀 녹슬어 간다고 한탄하기도 했는데 이는 위항시인의 의식 속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김부현(金富賢)과 함께 임준원(林俊元)의 무덤 아래서 지음 (和禮卿西翁墓下作)

 

거친 봉분에 풀은 자리를 잡았는데 이것이 임준원의 무덤이라네.

말을 세워도 누가 손님을 맞으리. 잔 잡아 홀로 그대에게 권하네.

평생에 남은 것은 작은 비석이요 모든 것이 한갓 뜬구름일세.

두견새 산 나무에서 우니 가슴 아파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荒原草已宿 是謂子昭墳

駐馬誰迎客 持杯獨勸君

平生餘短碣 萬事一浮雲

杜宇啼山木 傷心不忍聞 (柳下集 卷2)

 

 이 시는 1698년 낙사(洛社)의 중심인물이었던 임준원이 죽은 지 일년이 지난 후 김부현과 함께 그의 무덤을 찾아 지은 오언율시로 문()운이다. 임준원은 홍세태가 생계가 어려우면 양식을 대어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선배였기에 그의 무덤을 찾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수련은 이제 막 잔디가 자리 잡은 임준원의 무덤을 제시한 것이고, 함련은 죽던 그해까지도 함께 자며 시를 지었던 임준원이 지금은 반가이 맞지도 않은 채 무덤 속에 누웠으니 다만 잔을 권할 뿐이라는 지극한 슬픔의 절제다. 경련에서 그처럼 의협심 있고 시를 즐기던 그도 작은 비석 하나로 남았다고 하여 무덤도 초라한 위항인의 처지를 다시금 되새기고 그래서 더욱 세상사가 허무하다는 깊은 좌절감을 드러내었다. 미련에는 두견새에다 보잘것없이 죽은 위항인의 한과 친했던 사람을 잃은 자신의 슬픔을 투사하여 마치 나라 잃고 슬피 우는 두우(杜宇)의 혼이 울부짖는 것 같아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했다. 임준원을 잃은 슬픔과 위항인의 신분적 한계에서 오는 한스러움이 슬픔을 고조시킨 것이다. 이렇게 그는 같은 처지의 위항인의 실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만월대의 노래 (滿月臺歌)

 

만월대에 낙엽지는 가을, 갈바람 지는 해가 시름 젖게 하는구나.

산하에 강감찬의 기상은 사라지고 정몽주의 이름만 일월같이 걸려 있네.

 

滿月臺前落木秋 西風殘照使人愁

山河氣盡姜邯贊 日月名懸鄭夢周 (柳下集 卷4)

 

 이 시는 그가 1705(숙종31)에 황해도 옹진 대기둔(大機屯)의 둔전장이 되어 옹진으로 가는 길에 송도에 들러 지은 칠언절구로 우()운이다. 서경과 서정이 잘 어울려서 왕양(汪洋)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그가 사실적인 서경을 수용하는 한편, 선배 정두경(鄭斗卿)이 경도되었던 성당 이전의 웅건한 기상도 물려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객관적 묘사의 사실성과 주관적 정서의 핍진함도 모두 참다운 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기구와 승구는 객관적 묘사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낙엽지는 만월대의 정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망해버린 왕조에 대한 주관적 정서를 불러일으켜서 시름에 젖게 하였다. 전구와 결구는 고유명사를 나열하여 웅건한 기상과 가락의 유려함을 표현하였는데, 서경적 묘사보다는 명장의 기상은 사라지고 충신의 이름만 남았다는 주관적 정서가 주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사실성은 객관적 서경의 묘사뿐만 아니라 주관적 정감의 핍진성이나 절실함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저 청원(淸圓)한 사경(寫景)은 봄날의 새와 같고 비절(悲切)한 서정은 가을의 벌레와 같다. 오직 느낌에 따라 표현한 것이라 천기(天機)에서 자연히 유출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진시(眞詩)인 것이다.(洪世泰, 海東遺珠序, 柳下集 卷9. 若夫寫景之淸圓者其春鳥乎 而抒情之悲切者其秋虫乎 惟其所以爲感而鳴之者 無非天機中自然流出 則此所謂眞詩也)라고 하여 청원한 사경과 비절한 서정이 오직 느낌에 따라 표현된 것이라면 천기에서 자연히 유출된 것이고, 따라서 절실한 주관적 느낌도 당연히 진시(眞詩)를 이루는 사실성의 한 부분이라고 하였다.

 

 가을의 감회 (秋懷)

 

베개에 엎드리니 산은 길게 내려왔고 거친 뜨락에 가을이 왔구나.

잎은 드리워 이슬방울 떨어지고 담 무너진 곳에 반딧불이 난다.

옛날부터 이 세상살이에서 처자식은 온갖 근심 덩어리일세.

처지가 곤궁하나 힘이 없으니 전에 애썼던 이 길이 부끄럽구나.

 

伏枕山長近 荒園又得秋

葉垂聞露滴 墻缺見螢流

天地橫千古 妻孥繞百憂

處窮無定力 吾道愧前修 (柳下集 卷5)

 

 그가 1714(숙종40)에 병조주부 겸 찬수랑을 그만두고 나서 지은 오언율시로 우()운이다. 그는 뒷날에 왕명을 받들어 서호십경(西湖十景)’ 시를 지어 송라도(松羅道) 찰방이 되고, 다시 의영고 주부가 되지만 이 작품을 쓸 때는 서부주부에서 해직된 바로 다음이다. 또한 그 해 4월에 사랑하던 둘째 딸이 죽어서 몹시 마음 아파하던 때다. 그의 시가 만년에 들어 두보를 배워 침울한 분위기를 띠었는데 이 시가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수련부터 실의에 젖은 사람의 자세와 쓸쓸한 분위기가 서경 묘사로 드러난다. 함련은 초가을의 풍경으로 잎은 수그러지고 밤이슬이 내리며 반딧불이가 별같이 흐르는 사실적 서경이다. 경련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옛날부터 처자식을 부양하느라 근심 떠날 날이 없었다면서 자신의 현실적 근심을 드러내었고, 미련에는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직서하여 글공부를 해서 하급관리로 살아온 자신의 처지를 후회하였다. 두보는 곤궁한 처지와 전란의 체험으로 현실의 고난을 작품으로 표현한 현실주의적 경향을 띠었는데, 만년에 두시를 열심히 익힌 홍세태의 이 시에도 가을날에 느끼는 자신의 현실적 곤궁함에 대한 감상성이 배어나온다. 곤궁함을 탄식하는 이런 감상성 때문에 병도 없이 신음한다.(申靖夏, 恕菴集, 記放翁集序語. 近世學杜者 多用悲愁困苦之語 殆亦無病而呻吟者 僕亦少時不免此病爾.)라는 평을 받았고, 두시를 배운 것이 당시(唐詩)를 배운 것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머무는 집 벽에 쓰다 (題寓居屋壁)

 

아득히 요순시절은 먼데, 덩굴에 달린 박처럼 해동에 나서

포부는 천리를 잊지 않았으나 눈뜨고 헛되이 백년을 보냈네.

쓸쓸히 문 닫은 가난한 동네 유유한 행적은 여러 사람들의 변두리였네.

머리 숙여 애들의 비웃음을 듣고, 머리칼은 눈썹같이 짧아 정수리를 덮지 못하네.

 

邈矣唐虞萬古天 匏瓜一繫海東偏

雄心獨未忘千里 雙眼空敎送百年

寂寂閉門窮巷裏 悠悠行跡衆人邊

低頭且聽兒童笑 短髮如眉不滿顚 (柳下集 卷6)

 

 그가 1718(숙종44)에 외손자와 큰딸이 죽어 슬픔을 잊으려고 집을 나서 충주로 여행했는데, 이 시는 그때 지은 칠언율시로 선()운이다. 큰 불행을 당하여 운명의 기박함이 원망스러웠을 때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감상적으로 토로한 것이다. 수련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시간적으로는 요순시절과는 멀리 떨어진 지금이고, 공간적으로는 동쪽에 치우친 조선에 태어나 신분적 제한을 받으며 사는 것이 자기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꼭 덩굴에 달린 박 같다는 것이다. 함련은 자신의 포부가 천리를 덮을 만한 것이었으나 신분적 제한 때문에 그 꿈을 펼칠 수가 없었기에 두 눈을 번히 뜬 채 헛되이 일생을 보내고 말았다는 울분이요 한탄이다. 경련은 자신이 살아온 위항인의 실상을 말하여 가난한 동네 쓸쓸한 집에서 살며 뭇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구경이나 하는, 출세와는 거리가 먼 행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련에서 애들의 웃음거리나 되고 초라한 행색의 늙은이가 되었다고 자기멸시의 감상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감상성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는 대단했지만 현실적 처지는 보잘 것 없었던 데서 기인한 좌절감에 다름 아니다. 그가 임란 중에 이항복의 지우를 입어 공을 세우고 금남군에 봉해졌던 정충신(鄭忠信)에 대하여 감회를 느끼거나, 심하지역(深河之役)에서 전사한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를 추모한 것은 미천한 신분이나 어려운 처지에서 지우를 입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거나 장렬히 전사하여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부러워한 연유이다. 그의 처지에 대한 울분이나 감상성은 이런 좌절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신정하(申靖夏)가 지적한 병 없이 신음한다.(無病而呻吟)’는 말은 그들의 처지를 실감하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박태보((朴泰輔,1654,효종51689,숙종15)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1677(숙종3)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예조좌랑으로 시관이 되어 <좌씨춘추>에 있는 아름다운 병은 나쁜 약보다 못하다.’라는 구절을 시제로 내었다가 남인들로부터 차자(次子)인 효종이 즉위한 것을 풍자한 것이라고 탄핵을 받아 선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홍문록에 들고, 이듬해 수찬, 지평, 정언, 교리가 되어, 이조판서 이단하가 미봉한 일이 많다며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다. 1682년 사가독서하고, 송시열을 비난하고 자신의 외조부인 윤선거가 강화에서 죽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여 노론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1686년 부수찬, 이듬해 이조좌랑, 호남 암행어사, 부응교, 파주목사를 지내고, 1689년 기사환국에 오두인(吳斗寅)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을 망각하고 절의를 세운다며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에 죽었다.

 

 외삼촌 대사성 약천 남구만이 해직되어 결성 집으로 돌아감

 (舅氏大司成藥泉南公解職還結城莊)

 

온 나라가 살찌는 봄이 와 물길이 잔잔하니 가는 길 멀리 저녁 구름 사이네.

순채와 농어 먹을 흥이 일어 돛배는 멀고 강호의 맹세 있어 옛집에 돌아가네.

세상살이 오랑캐 난리 몇 번인고 신선 자취 한번 가니 바다와 산이 한가하네.

무단히 골육이 흩어져서 이별에 임해 소리를 삼키니 눈물이 이미 흐르네.


澤國春生水路寬 行旌遙指暮雲間

蓴鱸興發孤帆遠 鷗鷺盟存盡室還

世事幾多蠻觸閙 仙蹤一去海山閑

無端骨肉成離散 臨別呑聲淚已潸 (大東詩選 卷5)

 

 이 시는 1675(숙종1) 1월에 임금이 송시열을 귀양 보내자 남구만이 자신은 송준길의 문인이었다며 대사성을 사직하고 물러났는데, 이 때 외숙인 남구만을 전송하며 지은 칠언율시로 산()운이다. <정재집(定齋集)>에는 제목이 외숙 대사성 약천 남공이 언사로 해직되어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의 집으로 돌아감에 강가에까지 배웅하고 써서 자문형에게 보임(舅氏大司成藥泉南公 言事解職 奉大夫人還結城莊 陪到江上 書示子聞兄)’으로 되었고, 수련 하구의 ()”()”으로 되었다. 외삼촌과 헤어지는 정을 읊었다. 수련은 이별하는 장면이다. 초봄이라 강물이 풀리고 저녁 구름 사이로 외삼촌이 멀리 고향으로 돌아간다. 함련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이다. 순채와 농어를 못 잊어서 고향 강동으로 돌아간 동진의 장한(張翰)처럼 외숙의 심정도 강호로 돌아가는 기쁨에 차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련은 현실과 전원귀의의 대비다. 현실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으로 시끄러운데 전원으로 돌아가면 신선처럼 편안하게 지낼 것이라는 말이다. 미련은 이별의 아쉬움이다. 송시열이 물러나자 그와 가까웠던 송준길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으니, 무단히 외숙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하였고, 강가에서 이별하며 눈물짓는다고 했다.

 

 상원암에 제하다 (題上院庵)

 

나그네 마음이 의지할 데 없어 문을 나서 가는 대로 맡겨두네.

우연히 빈 산중에 이르러 애오라지 고승을 벗하여 자네.


客心無依着 出門任所適

偶到空山中 聊伴高僧宿 (大東詩選 卷5)

 

 이 시는 1678(숙종4) 선천 귀양 중에 묘향산 상원암에서 지은 오언절구로 맥()운과 옥()운을 통운했다. 그는 1677년 예조좌랑으로 시관(試官)이 되어 <좌전(左傳)>에서 아름다운 병은 나쁜 약만 못하다[美恢不如惡石]”라는 말로 장자(長子)를 버리고 차자(次子)를 세운 것을 비유한 구절을 따와 시제로 내었다가, 효종이 왕위에 오른 것을 비난한 것이라고 탄핵을 받아 가을에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 시는 제목 뒤에 무오(戊午)라고 지은 연대를 밝혔으므로 이듬해 묘향산 상원암을 찾았을 즈음에 지은 것으로 그때의 적적한 심정을 읊었다. 그가 주동하여 시제를 굳이 그렇게 낸 것은 서인 과격파가 주도하는 정국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는 올곧은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의 기구는 귀양 온 나그네의 부칠 곳 없는 마음이다. 장원급제한 자부심과 젊은 호기로 조금 지나친 돌발사를 일으켰다가 가혹한 처벌을 받은 울울한 심정을 담았다. 승구는 방황이다. 문을 나서서 발길 가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어 다니는 모습이다. 전구는 묘향산 상원암에 이른 것이다. 우연히 가까이 있는 묘향산에 올라 상원암에 묵게 된 것이다. 결구는 스님과의 동숙이다. 상원암 주지 스님과 하룻밤 자게 된 인연이다. 귀양객이 고승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절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버지 박세당이 주자학을 비판하고 노장사상을 도입하여 사상적 자주와 사회적 개혁을 주장하였으므로, 그도 경직된 주자학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스님과 대화했는지도 모른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서 (放還途中)

 

서울을 떠날 때는 세 강이 멀더니 집을 떠난 지 아홉 달 만에 돌아오네.

갈 때 시름은 산의 눈같이 어두웠고 올 때 기쁨은 보리 바람처럼 살랑이네.

붉은 과일은 숲을 나누어 익어가고 누런 꾀꼬리는 길을 끼고 나는구나.

조화옹의 그 뜻을 다시금 알겠거니 하나도 그릇되게 가르치지 않았네.

 

去國三河遠 離家九月歸

往愁山雪暗 來喜麥風微

朱果分林熟 黃鶯夾路飛

重知化翁意 一物不敎非 (大東詩選 卷5)

 

 이 시는 16785월에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면서 지은 오언율시로 미()운이다. <정재집(定齋集)>에는 같은 제목의 두 수 중에 첫 수로 실려 있다. 귀양에서 풀려난 기쁨을 표현하였다. 수련은 귀양의 고난이다. 세 강을 건너 멀리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서 아홉 달 만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여, 공간적 시간적 격절감에 시달렸던 감회를 읊었다. 함련은 갈 때와 올 때의 심정을 대비한 대구다. 귀양길에 오를 때는 심정이 마치 산 위의 눈같이 참담했으나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올 때는 마음이 보리밭에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기쁨에 넘친다고 하였다. 경련은 돌아오는 도중의 정경이다. 길가의 숲에는 붉은 과일이 익어가고 누런 꾀꼬리가 난다고 하여 색채감과 동정(動靜)의 대조를 대구로 나타내었다. 미련은 귀양살이의 뜻이다. 자신이 겪은 귀양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말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만물이 자라나듯이 조화옹이 자신에게 고난을 겪게 하고 이제 풀려나오게 하니 삶의 가치를 실현하라는 깊은 뜻을 깨우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성쇠도 우주자연이 소장(消長)하는 이치와 같다는 뜻으로 유교뿐만 아니라 노장사상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형님이 초원에서 병에 걸려, 그를 붙들고 재를 넘으며 (舍兄在草原被疾扶護踰嶺)


날마다 하루 삼십 리씩 가는데 앉아서 앞길을 생각하면 더욱 아득하구나.

백년을 가만히 생각하면 원래 나그네라 길에 있는 것이 바로 집이니 바쁠 것 없네.

 

日日日行三十里 坐思前道更茫茫

百年細筭元行客 在道如家不用忙 (大東詩選 卷5)

 

 이 시는 1685(숙종11)에 형 박태유(朴泰維,16481746)와 수창한 칠언절구로 양()운이다. <정재집>에는 제목이 형님이 초원에서 병에 걸려, 그를 붙들고 재를 넘으며 길에서 수창하였다.(舍兄在草原被疾扶護踰嶺在途酬唱)’로 되었고, 승구의 ()”()”로 되었다. 같은 제목으로 자신이 지은 열 한 수 중 여섯째 수인데, 형이 병들어 부축하고 가는 힘든 길에서 인생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을 얻고 있다. 기구는 행정이다. 병든 형을 부축해 가느라 하루에 삼십 리씩 간다는 사정이다. 이 말은 형 박태유와 자신이 집권세력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벼슬길이 순조롭지 못한 사정을 중의법으로 암시하고도 있다. 승구는 갈 길의 아득함이다. 병자를 모시고 가야할 길이 멀고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형과 자신의 환로가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을 숨기고 있다고도 하겠다. 전구는 거시적 조망이다. 인생 백년을 헤아려보면 나그네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달관을 말한 것이다. 결구는 깨달음이다. 인생은 본디 길가는 나그네이므로 집에 있으나 길에 있으나 나그네임은 다를 게 없으니 길에 있다고 해서 집으로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부질없다는 말이다. 노장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달관의 경지라고 하겠다.

 

 변방 성의 이른 가을 (邊城早秋)

 

막다른 길에 기후는 쓸쓸히 맑은데 해지는 하늘 끝에 큰 사막은 평평하다.

풍상에 변방 버드나무 시듦을 이미 보았거니 정히 오랑캐 말 변성 범해 근심되네.

제후로 봉해질 뜻에 머리 허옇고 고향 그리는 정 깊어 꿈속에서 놀라네.

달 보고 옷깃 적셔 마음 절로 어지럽고 어디서 슬픈 날라리소리 다시 나는고.


窮途氣候日悽淸 落日鵬盤大漠平

已見霜風凋塞柳 正愁胡馬犯關城

封侯意在頭空白 懷土情深夢屢驚

望月沾衣心自亂 哀笳何處更飛聲 (大東詩選 卷5)

 

 이 시는 <정재집>의 편차로 보아 1686(숙종12) 그가 부수찬으로 재등용 되기 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칠언율시로 경()운이다. <정재집>에는 수련 상구의 ()”()”으로, 하구의 ()”()”로 되어 있다. 변방에서 가을을 맞이한 쓸쓸한 심회를 노래하였다. 수련은 변방의 가을이다. 변방까지 흘러와 막다른 처지에 이르렀는데 가을이라 하늘은 맑고 서늘하며, 큰 사막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함련은 자신과 국가에 대한 근심이다. 변방 버드나무가 풍상에 시들었다는 말은 자신이 겪었던 변방의 귀양살이에 대한 회상이고, 변방을 오랑캐 말이 침범한다는 것은 청나라의 위협을 뜻하는 것이다. 경련은 공을 세우려는 포부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이다. 변방에서 공을 세워 제후로 봉해지고 싶은 생각에 머리가 희어지도록 고난을 무릅쓰지만, 꿈속에서는 언제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가 겪은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고생하며 무공을 세우고자 하는 무장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미련은 쓸쓸한 심정이다. 달을 쳐다보고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며 마음 상해 할 때 어디선가 변방의 날라리 소리가 더욱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