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의 문향] 43, 44, 45, 46, 47 / 긴내 김태준

2015. 12. 26. 02:24잡주머니

 

 

[김태준의 문향] 43, 44, 45, 46, 47 / 긴내 김태준

 

行雲流水 2010.08.19 19:00

      

 

 

<43> 박제가의 '소전(小傳)'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1750~1805)는 북학파학의 동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자전적 글을 남겼다. 27살 때에 쓴 길지 않은 글은 첫머리부터 그 사람됨을 진하게 압박한다.

  "조선이 개국한 지 384년,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천여리 떨어진 곳에서 그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신라의 옛 땅이요, 그의 관향(貫鄕)은 밀양(密陽)이다…. 그의 사람됨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하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궁핍한 날의 벗>, 안대회 옮김, 태학사, 참조)

  스스로 태어난 나이를 조선 개국으로부터 센 이 글은 압록강으로부터 사는 곳의 거리를 헤아리는 역사의식과, 북학(北學)의 의지로 자의식에 넘친다. "물소[伏犀] 이마에 칼날 눈썹과 검은 눈동자에 흰 귀"라 하여 귀인의 자부를 감추지 않고, 이런 인상은 연행(燕行) 때 청나라 문인 화가 나빙(羅聘)이 그린 군관 모습의 그의 초상화를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백 세대 이전 인물에게나 흉금을 터놓고, 만 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고 한 교우도(交友道)는 '소전'을 쓴 다음 해에 동인시집(<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홍대용의 중국 친구에게 보내고, 스스로 4차례나 연행길에 오르게 한 북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소전'의 묘처(妙處)는 스스로의 성취를 요약한 찬(贊)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완연히 그 사람이라서 천만 명의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 다음이라야 천애(天涯)의 다른 땅에서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는 사람마다 분명히 그인 줄 알 것이다."

  뚜렷이 천만 사람과 다른 '그 사람'이란 자각은 개체로서 존재의 철학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고 뜻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되는 것[莫之爲而然者]"이란 말은 주자(朱子)의 '소이연(所以然)'인 이(理)인데, 초정은 이것을 '자연[天]'이라 하고, 다시 '사람(人)'과 대비하여 그 사이에 나뉨이 있다고 한 곳에 주자학에 대한 그의 대결의식이 있었을 터이다. 이렇게 '이'를 '천'이라 하고 이것을 사람과 관계항으로 세우는 뜻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로 말할 수도 있고, 이런 점에서 초정이 1801년 신유사옥에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귀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초정의 네 번에 걸친 연행은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과 함께, 그의 뛰어난 제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게서 북학(北學)으로 꽃피었다.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엄의<호저집(縞紵集)>에는 청조 문인이 무려 172명이 나왔을 정도였다.(<완당평전> 유홍준,학고재, 권 1,참조)

 

<44> 이옥의 '흰옷 이야기'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경금자(絅錦子) 이옥(1760~1812)은 정조(正祖) 시대의 문체파동(文體波動)에 연루될 만큼, 시속의 변화나 개인의 서정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소품(小品) 문으로 이름난 문인이었다. 30살 전후에 성균관의 유생이었으나 '괴이한 문체'로 임금에게 벌을 받고, 36살 때는 충청도 청양과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합천군)으로 유배되면서도, 동문 강이천(姜彛天))이 "붓 끝에 혀가 달렸다"고 평한 자기식의 글쓰기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특히 40살을 넘어가는 네 달 동안은 유배지의 토속과 세상물정과 속담[俚言]과 같은 지방문화에 세밀한 보고의 글들을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흰옷 이야기(白衣裳)는 그가 머물렀던 경상우도(慶尙右道)의 백의(白衣) 풍속을 다룬 글이어서 관심을 끈다.

  "우리나라는 푸른색을 숭상하여 백성들이 대부분 푸른 옷을 입는다…. 여자는 치마를 소중히 여기는데, 더욱 흰색을 꺼려, 붉은 색과 남색 이외에 모두 푸른 치마를 둘렀으며,…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으면 또한 일찍이 이유 없이 흰 옷을 입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영남의 우도(右道)만은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으며,… 오직 기녀와 무녀(巫女)만이 푸른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대개 푸른색을 천시하고, 흰색을 숭상하기 때문이다."(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완역 이옥전집>2. 휴머니스트, 51쪽)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의민족으로 일러왔으나, 고려 후기와 현종ㆍ숙종 대 이후에는 동방의 색으로 푸른 옷 입기를 장려했다. 특히 치마를 소중히 여기는 여자는 더욱 흰 색을 꺼려, 붉은 색과 남색 이외에 모두 푸른 치마를 입는다고 했고, 삼년복이 아니라면 까닭 없이 흰옷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붉은 색' 치마는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이른바 '홍색짜리', 남색 치마를 입는 '남색짜리'로, 지금껏 이어지는 새색시 옷차림이다. 또 합천의 객점에서 쓴 '늙은 여종의 붉은 치마(老婢紅裙)'라는 글에서는 신행(新行) 가마를 따라가는 늙은 여종까지도 붉은 치마를 입었던 풍속을 전하여, 이 영남 우도의 백의 풍속을 강조했다. 이옥은 이렇게 스스로 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그 땅의 풍속을 그려 주었다.

  이렇게 영남의 우도만은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으며, 갓 시집 온 새색시까지도 흰 저고리와 치마를 입는다고 했다. 이것은 흰옷을 존중하는 영남 풍속을 평가하는 뜻을 담았다고 할 터이고, 또한 빈주(賓主)의 예로 맞아준 어느 초당(草堂)의 선비풍속(<노생(盧生)>)과도 이어지는 지역평가일 터이다. 또한 이것은 그의 이종사촌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동인이었던 이덕무((1741-93)의 <사소절(士小節)>에서 "여자들의 저고리는 너무 짧고 치마는 너무 길고 넓어 요사스럽다"고 한 동시대의 영남 풍속이어서 더욱 대조가 된다. 이 시대에는 기생의 짧은 저고리 길이가 12㎝까지 짧아졌다는데, 200년이 흐른 지금은 젊은 여자의 치마 길이가 이에 육박하니, 지방문학의 역사는 사회사이며 풍속사이기도 하다.

 

 

 

<45>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는 조선 시대에 나온 여성 백과전서이다. 17, 18세기 이후에는 서양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총서류의 백과전서가 활발하게 지어졌지만, 여성 백과전서는 빙허각의 이 책이 유일하며, 의식주(衣食住) 등 여성의 일과 구실은 물론,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의 일상생활백과를 망라했다.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羹)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醬)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 하니, 밥은 따뜻한 것이 옳고, 국은 더운 것이 옳고, 장은 서늘한 것이 옳고, 술은 찬 것이 옳음을 말한 것이다.

  무릇 봄에는 신 것이 많고, 여름에는 쓴 것이 많고, 가을에는 매운 것이 많고, 겨울에는 짠 것이 많으니, 맛을 고르게 하면 미끄럽고 달다 하였으니, 이 네 가지는 목ㆍ화ㆍ금ㆍ수(木火金水)에 다치는 바라. 그 때 맛으로써 기운을 기르는 것이니, 사시(四時)를 다 고르게 한즉 비위를 열게 함이라."(정양완 역주;《규합총서(閨閤叢書)》권 1,<술과 음식[酒食議]>)

  이 책은 권 1 머리에서 <(주사의(酒食議)> 곧 술과 음식부터 다루었는데, 밥과 국은 한국 사람의 음식을 대표하며, 장은 반찬의 바탕으로 우리 식생활에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고 조미료이며, 술은 문화 음료다. 이런 음식들을 따뜻하고 덥고 서늘하고 찬 기운으로 말하는 것은 한의약리(韓醫藥理)의 바탕이론으로 기미론(氣味論)이다. '기'는 약의 성질을 뜨겁고 따뜻하고 서늘하고 찬 기운으로 나누며, 이것은 모두 체온에 영향을 주는 약 성분의 작용을 이른다. '미'는 맵고 달고 시고, 짠 것으로, '맛'이며, 매운 맛은 폐에, 쓴 맛은 심(心)에, 단 맛은 비(肥)에, 신 맛은 간에, 짠 맛은 신(腎)에 관계된다고 해석한다. (조헌영;《통속한의학원론》윤구병 주해, 참조)

 

  밥에서 무슨 약리론이냐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음식은 본디 식약동원(食藥同源), 밥이 곧 약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실제로 오장(五臟)에는 각각 81개의 병이 있다고 하며, 이 405가지 질병 가운데 404종류는 음식과 연관하여 식이요법으로 예방할 수 있고, 405번째 병으로 죽음만이 피할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규합총서》8쪽) 그러니 수저를 들면 늘 약을 먹는 것 같이 하라는 가르침이 크며, 지금 우리 먹거리 환경이 사뭇 걱정스럽다.

  북학파 명문자제로 서유본(徐有本)의 아내인 빙허각은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徐有榘)의 형수이며,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지은 외숙모 사주당(師朱堂)과 《언문지(諺文誌)》를 지은 조카 유희(柳僖) 등 실학파의 가학(家學)을 이었다. 빙허각은 머리말에서 고금에 통하는 식견과 재주가 있더라도 글로 남에게 보이는 것은 아름다움을 속에 간직하는 이의 도리가 아니라고 겸사했다. 책의 역주자인 정양완 교수 또한 그 선고장(先考丈)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 선생을 회고하며, "네 앎이 두어 섬 되거든 두어 되만 비치라" 하신 말씀을 들어, "뜸도 채 폭 못들인 이 알량한 책자를 내어놓는 마음이 거듭 무겁다"고 겸사하였다. 그 아름다운 문향(文香)이 함께 도탑다.

 

 

<46> 정약용과 신작의 한강 문화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석천(石泉) 신작(申綽, 1760-1828)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2년 차이의 동년배로 다산이 귀양에서 돌아온 말년에 두물 머리[兩水]에서 이웃으로 지기(知己)로 교유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옛날 광주(廣州) 마현리[마재]로, 천마산을 배경으로 남ㆍ북 한강과 초내[苕川]가 합류하는 경승이다. 다산이 태어나고 묻힌 고향이며, 석천은 강화도에서 정제두(鄭齊斗)의 강화학(江華學)을 이은 그 사위 신대우(申大羽)의 아들로, 50살 때 광주 사촌(社村)으로 이사하여 선영(先塋)을 지키며 크게 이룬 경학자(經學者)였다.

  마침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반생의 원고뭉치를) 안고 온 지 3년인데 함께 읽어줄 사람 하나 없다(抱歸三年 無人共讀)"고 읊은 때 석천과 만나, 두 사람의 만남이 조선 후기 한강의 문명을 함께 이루어 갔던 모습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속세의 생활 반평생에 바라는 것 없으나
유독 맑고 그윽한 그대의 거처를 좋아하네.
집에 전하는 옛 사업은 천 권의 경서이고
늘그막의 생애는 한 언덕의 보리밭일세.
짙은 그늘 꽃다운 나무엔 지나는 새를 보겠고
고요한 푸른 못에는 고기 노는 걸 알겠네.
아무 일 없이 흉금을 헤치고 서로 마주하니
저 강호에 둥둥 뜬 배와 서로 같네.
[半世塵寰無所求 喜君居止獨淸幽 傳家舊業經千卷 晩境生涯麥一邱 芳樹陰濃看鳥過 碧潭風靜識魚游 披襟共對虛無事 等是江湖泛泛舟]

                                                                                         [정약용,『다산시문집』 제7권, 시(詩)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다산의 이 시집에는 두 사람의 사귐의 모습들을 전해 주는데, 사촌은 지금의 초월읍 서하리(西霞里)로, 이곳 사마루 마을의 석천의 서재에는 4,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천권의 경서"라고 한 석천의 가학(家學)은 이른바 강화학으로, 그의 경학은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신석천과 정다산을 경학자[經師]와 경세가로 지목하여 그 학문적 지향을 함께 말한 뜻을 짐작케 한다. 이들의 사귐은 학문과 우의로 두 가문의 세교(世交)로 이어졌고, 세교로 이어진 정경은 석천의 아들 명연(命淵)이 다산을 따라 수종사(水鐘寺)를 유람하고 강 건너 천진암에 이르러 차운한 시에, "좋은 때에 어른들을 시종하여 조용한 놀음으로 운림(雲林)을 찾았다"고 한 글(<次韻上天眞寺>《의유당전서》1 <천진소요집>)에서도 뚜렷하다.

  그러나 이런 한강의 문화환경이 난개발 속에 크게 훼손되고 있다. 근기(近畿) 실학과 양근(陽根)의 서학(西學)과 여주ㆍ광주의 문학이며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실학 전통은 조선 후기의 학문과 문예와 사상의 한 중심이었다. 이 두물 머리 문화권의 문화와 사상을 뛰어난 자연 경관과 함께 총체적으로 보존 연구 발전시킬 한강 문화유산 특별계획이 절실한 시점이다. (2010. 8.22)

 

 

<47>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효전(孝田) 심노숭(1762-1837)은 <눈물이란 무엇인가(淚原)>라는 소품으로 요사이 많이 알려졌지만, 방대한 야사집의 편자로, 다채로운 시문과 문예론을 남긴 조선 한문학의 마지막 시대 인물이다. 76세까지 장수하며 《대동패림(大東稗林)》 136책을 편찬하고, 유배일기 20책을 포함한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 58책을 남겼다. 명(明) 나라 말기의 소품가들에게는 "기쁨과 웃음, 노함과 꾸짖음이 다 훌륭한 문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심노숭이 아내의 죽음에 흘린 눈물의 진정성이 특히 감동을 준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듯한 것인가? 마음에 있다면 마치 피가 맥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에 있지 않다면,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눈만이 주관하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이 움직임 없이 눈 그 자체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치 오줌이 방광으로부터 그곳으로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마음으로부터 눈으로 나온다면 저것은 다 같은 물의 유(類)로써 아래로 흐른다는 성질을 잃지 않고 있으되 왜 유독 눈물만은 그렇지 않은가? 마음은 아래에 있고 눈은 위에 있는데 어찌 물인데도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이치가 있단 말인가?" (김영진 옮김,《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사)

 

  일찍이 당대의 대표적 패사소품 작가, 김려(金鑢)ㆍ이옥(李鈺)ㆍ강이천(姜彝天) 등과 성균관에서 가까이 사귀었고, 문학의 경향에도 공통되는 성격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심노숭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5월에는 네 살 된 딸을 잃고, 한 달이 채 못 되어 동갑내기 아내 전주 이씨를 잃었다고 했다. 이런 청천벽력 앞에 흘린 눈물의 문학은 그 후 2년 남짓 동안에 26제(題)의 시와 산문 23편의 도망시문(悼亡詩文)을 남긴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울린다. 그런 정성스런 아내 사랑의 마음을 가진 이였기에 이런 유례없는 눈물의 시문집이 책을 이루었을 터이다.

 

  그는 스스로 "정이 여리기(情弱)가 꼭 아녀자(兒女子) 같아서", 아내의 병이 심해진 뒤에는 곁에서 머뭇거렸고,(<아내 영전에>), "삶과 죽음 사이에서 때로 슬픔이 지나쳐 상(傷)함에 이르렀다"(<베개 맡에서 지은 글>)고 했다. 이옥과 김려처럼 절친한 친구도 없었다. 그런 여린 성격이었기에 제사를 지내면, "곡(哭)하여 눈물을 흘리면 제사를 지냈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여겼다"고 했다. 이렇게 '여기의 느꺼움'으로 '저곳의 응함'을 알 수 있으니, 눈물이 나면 아내의 혼령이 내 곁에 왔구나 라고 여겼다고 했다.

 
  이 시대에는 담헌 홍대용이 북경의 유리창에서 중원의 선비들과 남자의 눈물을 논한 바 있고, 연암 박지원은 연행 중에 <호곡장(好哭場)>을 말하고 또 "영웅과 미인은 눈물이 많다"고 한 말로 화제를 뿌린 바 있었다. 이런 뒷시대에 나온 심노숭의 <눈물>은 우리 문학이 낳은 감성적 사랑 문학의 한 기념비라 할 터이다.

 


 
 blog.daum.net/gbbae56/11806715   배기봉의 '구름 가듯 물 흐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