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경산수화는 말 그대로 실제 눈앞에 보이는 경치를 대상으로 그린 산수화를 말합니다.
진경산수화 역시 실제 경치를 그렸다는 점에서 실경산수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경산수"는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사실적인 경치를 그린 것을 넘어 그 경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관점에 의해 붙여진, 조금 다른 개념의 명칭입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산과 강이야말로 (오랑캐가 지배하는) 중국과 다른, 이상적인 경치라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금강산을 비롯해 국내의 명승지와 유명 사적지를 그린 그림은 과거의 산수화와는 다른 ‘참 경치’(진경)를 그린 그림이라고 해석하며 이를 진경산수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겸재 정선 <단발령망금강>
견본담채, 32.2x24.4cm 간송미술관
이 무렵 혁신적인 시 운동으로 중국의 유명 시를 염두에 둔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진정으로 일어나는 느낌과 감정에 충실해 시를 짓자는 진시(眞詩) 운동이 있었습니다. 진시운동을 주도한 삼연 김창흡은 겸재 정선의 스승입니다. 따라서 진경산수화란 용어 역시 이 시 운동 그룹에서 먼저 사용된 것입니다. 이와 연관지어 진경산수화는 실제 경치 가운데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극적으로 과장해 집중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진경산수'라는 말 속에는 그런 시적 의미 또한 포함됩니다. 따라서 실제 경치와 어느 만큼 일치하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8] 시의도
북송시대에 처음 그려졌으나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명나라 중기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운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지본담채 49.5x34cm 개인
조선 영조 때의 문인화가인 기야 이방운(箕野 李昉運)(1761~?)은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를 화제로 쓰고 그 주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낙구천
햇빛 비친 향로봉에 푸르스름한 안개 자욱하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긴 강물을 걸쳐 놓은 듯
날듯이 흘러 떨어지는 삼천 척
은하가 구천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조선에서는 17세기 중반에 처음 전해지기 시작해 18세기 들어 크게 유행했습니다.
특히 당시의 왕유, 두보, 이백의 시가 많이 나타납니다.
송나라 시로는 소식, 육유 등의 시가 적힌 시의도가 유명합니다. 간간이 유명한 조선의 시를 대상으로 한 시의도도 볼 수 있습니다.
[9] 세화
까치호랑이(국립중앙박물관)
그 이외에 중국의 문신(門神)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위지공은 당나라때 무장이며 진숙보는 남조 진(晉)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수성노인도(국립중앙박물관)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세구복(現世救福)적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회화를 '길상화'라고 부릅니다.
즉 좋은 인연이나 운(運)을 상징하는 사물 또는 동물을 그려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는 그림입니다.
이 세 가지 이른바 복록수(福祿壽)를 테마로 한 길상화가 회화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북송시대이다.
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게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 18세기 들어서 비로소 다수 제작됩니다.
김득신 <노안도> 국립중앙박물관
노안도의 갈대 노(蘆)자를 늙을 노(老)자로 보고 기러기 안(雁)자는 편안할 안(安)자로 보아, 늙어서도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기원하거는 혹은 축하한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11] 민화(民畵)
일반적으로 이름 없는 민간 직업화가가 그린 장식적인 그림을 가리키는 '민화' 라는 용어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용됐습니다. 이와 같은 정의에는 다분히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이론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즉 19세기 후반 일본의 수공업품에 보이는 특징인 무명성, 소박한 장식성, 일회적 소비성 등의 특징을 가진 물건을 민예품(民藝品)이라고 부르면서 그림에서도 그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장르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모란꽃과 기린이 그려진 그림, 조선시대, 계명대학교 박물관 소장.
민화는 기본적으로 기존 회화를 모방해 탄생한 때문에 화조화, 산수화, 고사인물화와 같이 장르가 겹치는게 보통입니다.
물론 기존의 회화장르에는 포함되지 않는 민화만의 영역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문자도,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등이 그 대표적인 장르입니다.이들은 조선시대 후기에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회화 장르가 민간에 곧장 흘러들며 양식화(樣式化)된 것입니다.
문자도 <효>
감모여재도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85.0×103.0cm 일본민예관
[12] 문자도(文字圖)
민화 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자도는 유교의 도덕 철학을 대표하는 여덟 글자-즉 팔덕(八德)-를 장식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17세기 후반 두 전란 이후 사회를 재건하면서 가정과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가치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등의 팔덕을 강조했고, 이 과정에서 널리 일반화되었습니다.
문자도의 양식적 뿌리는 중국 강남지방의 연말연초 세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연초에 '수'(壽)자나 '복'(福)자를 장식적으로 꾸민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하여 서로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조선에 전해진 뒤 팔덕과 결합하며 문자도로 정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강원문자도, 조선민화박물관
제주 문자도, 개인
한국미술정보개발원 <EDUCATION> 회화이야기 중에서 발췌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