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종류] 정리 - 2

2016. 1. 5. 14:16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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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종류] 정리 - 2 

 

 

          [7] 진경산수화와 실경산수화

 

   진경산수화와 실경산수화가 진짜 경치를 그리는,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경산수화는 말 그대로 실제 눈앞에 보이는 경치를 대상으로 그린 산수화를 말합니다.
진경산수화 역시 실제 경치를 그렸다는 점에서 실경산수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경산수"는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사실적인 경치를 그린 것을 넘어 그 경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관점에 의해 붙여진, 조금 다른 개념의 명칭입니다. 

18세기 들어 조선은 자국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강한 자주 정신이 싹텄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산과 강이야말로 (오랑캐가 지배하는) 중국과 다른, 이상적인 경치라는 의식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금강산을 비롯해 국내의 명승지와 유명 사적지를 그린 그림은 과거의 산수화와는 다른 ‘참 경치’(진경)를 그린 그림이라고 해석하며 이를 진경산수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겸재 정선 <단발령망금강>

견본담채, 32.2x24.4cm 간송미술관



   진경산수화가 당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문학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무렵 혁신적인 시 운동으로 중국의 유명 시를 염두에 둔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슴속에서 진정으로 일어나는 느낌과 감정에 충실해 시를 짓자는 진시(眞詩) 운동 있었습니다. 진시운동을 주도한 삼연 김창흡 겸재 정선 스승입니다.  따라서 진경산수화란 용어 역시 이 시 운동 그룹에서 먼저 사용된 것입니다. 이와 연관지어 진경산수화는 실제 경치 가운데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극적으로 과장해 집중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진경산수'라는 말 속에는 그런 시적 의미 또한 포함됩니다. 따라서 실제 경치와 어느 만큼 일치하느냐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8] 시의도

 

   시의도(詩意圖)라는 말 그대로 유명한 시를 대상으로 그 내용이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린 것을 뜻합니다.
북송시대에 처음 그려졌으나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명나라 중기 이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방운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지본담채 49.5x34cm 개인


조선 영조 때의 문인화가인 기야 이방운(箕野 李昉運)(1761~?)은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를 화제로 쓰고 그 주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낙구천

 햇빛 비친 향로봉에 푸르스름한 안개 자욱하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긴 강물을 걸쳐 놓은 듯 
 날듯이 흘러 떨어지는 삼천 척 
 은하가 구천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조선에서는 17세기 중반에 처음 전해지기 시작해 18세기 들어 크게 유행했습니다. 
시의도에 사용된 시는 감상자 대부분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야 하므로 유명한 시인들의 시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당시의 왕유, 두보, 이백의 시가 많이 나타납니다.
송나라 시로는 소식, 육유 등의 시가 적힌 시의도가 유명합니다. 간간이 유명한 조선의 시를 대상으로 한 시의도도 볼 수 있습니다. 

 

 

 

    [9] 세화

 

   연말 연초에 삿된 것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기원하기 위해, 소위 "벽사진경(辟邪進慶)"을 위해 제작된 그림을 세화(歲畵)라고 합니다.

 

   세화가 그려진 것은 조선시대 초부터입니다. 당시의 기록에는 조정에서 도화서 화원들로 하여금 가을부터 세화를 제작토록 해 연말 연초에 문무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이 기록에는 ‘세화’란 용어 외에 ‘문배(門排)’ 라는 말도 쓰였습니다. 

 

 

 



까치호랑이(국립중앙박물관)


 

 

   문배라고 불렸던 것은, "문" 앞에 무언가를 걸어두거나 그려서 사악하고 부정한 것을 물리쳤던 고대의 벽사신앙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이외에 중국의 문신(門神) 사상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세화는 닭과 호랑이와 같은 주술성이 강한 동물 그림이 주로 그려졌고, 이 외에 금갑(金甲) 장군, 위지공, 진숙보와 같은 수호 신장들도 많이 그렸습니다. 
여기서 금갑 장군이란 중국에서 섣달그믐날 대문에 붙여 벽사를 기원하는 전설의 인물 '울루(鬱壘)' 가 무장을 한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위지공은 당나라때 무장이며 진숙보는 남조 진(晉)의 마지막 황제입니다. 
 

 

 

 


수성노인도(국립중앙박물관)



   세화는 이후 재액예방 보다는 행복에 대한 기원쪽이 더욱 강조되면서 길상(吉祥), 진경(進慶) 의미로 바뀌어갔고, 아울러 새해를 맞이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축원하며 주고받는 이른바 증답용(贈答用) 그림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10] 길상화(吉祥畵)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세구복(現世救福)적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회화를 '길상화'라고 부릅니다.

즉 좋은 인연이나 운(運)을 상징하는 사물 또는 동물을 그려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는 그림입니다.
 
   길상화는 고대부터 사용돼온 길상 문양이 회화로 발전한 것과 교훈적 의미나 좋은 뜻을 지닌 고사나 일화가 회화화되어 정착한 것 등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길상화를 통해 바랐던 세속적 행복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복(福), 둘째, 높은 관직 그리고 셋째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른바 복록수(福祿壽)를 테마로 한 길상화가 회화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북송시대이다.
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게 경제와 사회가 발전한 18세기 들어서 비로소 다수 제작됩니다.

 

 



김득신 <노안도> 국립중앙박물관

  

   길상화를 그 내용으로 구분하자면, 자연이나 동식물에 담긴 길상적 상징의미를 그대로 활용한 것과 문자의 뜻이나 발음에 연유해 길상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말기에 다수 제작된 갈대와 기러기그림, 즉 노안도(蘆雁圖)는 문자의 발음에 연유해 길상 의미가 부여된 대표적인 예입니다.
노안도의 갈대 노(蘆)자를 늙을 노(老)자로 보고 기러기 안(雁)자는 편안할 안(安)자로 보아, 늙어서도 평안하게 지내는 것을 기원하거는 혹은 축하한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11] 민화(民畵)

  

    일반적으로 이름 없는 민간 직업화가가 그린 장식적인 그림을 가리키는 '민화' 라는 용어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용됐습니다. 이와 같은 정의에는 다분히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이론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즉 19세기 후반 일본의 수공업품에 보이는 특징인 무명성, 소박한 장식성, 일회적 소비성 등의 특징을 가진 물건을 민예품(民藝品)이라고 부르면서 그림에서도 그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장르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모란꽃과 기린이 그려진 그림, 조선시대, 계명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와 같은 범주 설정으로 한때 당연히 작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색 궁중장식화도 민화에 포함시키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근래 들어 민화는 1) 18세기 이후 그림 수요의 확대를 배경으로 2) 일반 서민사회에서 고급 문화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3) 민간의 직업화가 그린 장식용 소비성 그림이라는 내용으로 그 개념이 재정리되고 있습니다.    

 

 민화는 기본적으로 기존 회화를 모방해 탄생한 때문에 화조화, 산수화, 고사인물화와 같이 장르가 겹치는게 보통입니다.

물론 기존의 회화장르에는 포함되지 않는 민화만의 영역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문자도,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등이 그 대표적인 장르입니다.

이들은 조선시대 후기에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회화 장르가 민간에 곧장 흘러들며 양식화(樣式化)된 것입니다.  

 

 

 

 


문자도 <효>




감모여재도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85.0×103.0cm 일본민예관

 

 

 

 

    [12] 문자도(文字圖)

 

    민화 중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자도는 유교의 도덕 철학을 대표하는 여덟 글자-즉 팔덕(八德)-를 장식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17세기 후반 두 전란 이후 사회를 재건하면서 가정과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가치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등의 팔덕을 강조했고, 이 과정에서 널리 일반화되었습니다.

 

 

 

 

 


    문자도의 양식적 뿌리는 중국 강남지방의 연말연초 세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연초에 '수'(壽)자나 '복'(福)자를 장식적으로 꾸민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하여 서로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조선에 전해진 뒤 팔덕과 결합하며 문자도로 정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자도는 이처럼 애초부터 회화적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작자와 제작시기가 밝혀진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기 곤란한 가운데 문자의 획 속에 중국 고사를 그려 넣은 초기의 것에서 획 자체가 회화적으로 변모해 가는 쪽으로 흐름을 잡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문자도는 19세기후반 이후 크게 유행하며 지방별 특색까지 보입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 문자도는 산수화와 결합된 형태를 보이고 제주도 문자도는 획 속이나 주변에 물결무늬가 그려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강원문자도, 조선민화박물관

 

 

 


제주 문자도, 개인


 

 

 

한국미술정보개발원 <EDUCATION> 회화이야기 중에서 발췌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