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깃 칸 전략에 대한 분석 - 하나

2013. 7. 6. 08:25병법 이야기

 

 

 


(1)서언

    1995년 말에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세계사에서 지난 1천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징기스칸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님이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따라서 징기스칸의 기록은 위 구르(Ug-urs), 중국,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역사 문서와 유럽인 여행자들의 기록에 드문드문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징키스칸의 반대편 사람들이어서 징기스칸을 침략자로 보고 기록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정복자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2)서아시아 지역 전투

    징기스칸이 중도를 점령할 즈음인 서기 1216년 호라즘(하레즘 또는 코라즘 : Khwarezm)왕의 사신과 이슬람 대상을 접하고 서역과 교역하기 위해 사신과 함께 많은 물건을 실은 대상들을 보냈으나 호라즘 동방 총독(오트라르 성주) 이날추크(Inalchug 또는 Inaljuk)에 의해 대상들이 습격 당하여 죽고 물건은 약탈당하고 말았다. 평소 징기스칸은 동서양을 오가며 장사하는 대상들을 중요시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부족간 약탈에 넌더리가 났으므로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약탈하는 처사는 용서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사신을 호라즘왕에게 보내 범인인 총독을 인도해 주면 우호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전언했으나 호라즘왕은 이를 거절하고 몽골 사신마저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서기 1219년에서 1225년에 이르는 징기스칸의 7년서정(西征)이 시작되었다.

    서기 1219년 여름 징기스칸은 알타이산 남쪽과 발하쉬(Balkhash)호의 동쪽 이르티시강 연안에 병력 15만에서 20만을 집결시켰다. 먼저 장자 주치(求赤)에게 1개 부대를 주어 선발대로 시르다리아강 하류와 북쪽으로 알라타우(Ala tau)산맥사이를 약탈하여 약탈한 말과 마초를 후송하고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불태워 버렸다. 몽골군은 초원에 불을 질러 화염을 일으켜 자기들의 기동을 적이 간파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수개월간 기동하지 않고 적의 동정을 살펴 적이 방어계획을 수립하여 20만의 병력을 소집하고 광정면(廣正面)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사실을 탐지했다.

    호라즘왕 알라드 딘 모하메드(Alaud Din Mohammed)는 몽골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르다리아(Syr Darya)강을 연하여 오트라르(Otrar), 코젠(Khojend)에 이르는 주요 요새에 예하 병력을 배치하고 별도로 사마르칸트(Samarcant), 부하라(Bochara), 우르겐지(Urgench)등 주요 도시에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이렇게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몽골군이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르다리아강은 호라즘국 북동쪽으로 국경선을 이루는 무려 2,800킬로미터나 되는 큰 강이다.


(3)호라즘지역 전투

    서기 1220년초 징기스칸은 4개군 1개 별동대로 나누어 전면 공격을 실시했다. 1개군(우익)은 장자 주치(求赤)가 이끌고 시르 다리아(Syr Darya)강 하류쪽으로 나아가 시크나크(Sighnaq)을 7일간 공격하여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리고 계속 강하류로 내려가 공성용 사다리를 타고 잔드(Jend:현재 페로프스크 부근)성을 공격하자 사령관은 도주하고 주민들이 항전했으나 결국 몽골에 점령당했다. 주치는 시내를 약탈하고 부하라인 알리 호자를 시총독으로 남겨 두었다. 이라크 노얀(阿里海), 수케츠 체르비, 타카이(塔海拔都兒) 등이 지휘하는 5천명의 별동대는 강상류로 가서 타쉬켄트(Tashikent) 서쪽에 있는 베나케트(Benaket)를 공격했다. 그리고 강상류로 올라가 코젠드(Khojend)를 포위했다.

    차자(次子) 차카타이와 삼남 오고타이(좌익) 역시 병력 50,000명을 인솔하여 발하쉬(Balkash)를 지나 시르다리아(Syr Darya)강가에 있는 오트라르(Otrar)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런 후 대상(隊商)을 죽여 몽골군 원정의 원인을 제공한 이날추크(Inalchug)를 포로로 잡고, 남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시르다리아강 지역에 있는 수개 요새를 탈취했다.

    별동대는 체베(Chepe)가 병력 20,000명을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지나 아무다리아(Amu Darya)강을 따라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로 접근했다 체베 뒤를 수부타이 부대가 그대로 따라가고 그 뒤에 토쿠차르(Tokhuchar)가 도시 주변을 약탈하면서 치중 부대를 이끌고 따랐다. 별동대는 카쉬가르(Kashgar)에서 남쪽 경로를 따라 페르가나(Ferghana) 골짜기를 통과하여 코칸트를 점령하고 코젠드(Khojend)를 포위했다. 이때 체베 분견대는 북동쪽으로 나아가 차카타이와 오고타이군과 만났다.

    징기스칸(중군)은 역시 병력 50,000명을 인솔하여 주치와 차가타이가 통과한 뒤를 따라 발하쉬호 남쪽을 지나 시르다리아강이 아랄해(Aral sea)에 이르는 어구에 접근했다. 징기스칸은 넷째 아들 투루이를 데리고 시르다리아강을 건넌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징기스칸군은 전위(前衛) 다이르 바아투루를 따라 광대한 키질쿰(Kizyl Kum:붉은 모래땅)사막을 동남쪽으로 통과하여 첫 새벽에 누라타(Nurata)에 나타났다. 이때 주민들은 몽골군의 척후를 보고 자기편 대상으로 오인하고 대비하기는커녕 성문을 활짝 열었다. 징기스칸은 주민을 가축과 함께 몰아낸 후 마음껏 약탈한 후 배상금을 물었는데 그것은 호라즘국의 세금 정도에 불과했다.

    서기 1220년 2월에 징기스칸군은 갑자기 부하라(Bokhara) 근교에 나타났다. 부하라 수비대는 2만 내지 3만으로 터키 용병이었다. 몽골군은 사흘 동안 쉴새없이 공격하여 수비 대장은 도주하고 수비병들은 흩어졌다. 그래서 2월 중순에 부하라는 점령되었다. 그러나 성내 성채에서 400여명의 터키병이 농성을 하자 주민들을 모두 동원하여 해자(垓子)를 메우게 하고 노포(弩砲)를 쏘아 성채를 파괴했다.

    몽골군은 기마병의 특성을 살려 신속하게 기동했다. 또한 수마일 씩 간격을 두고 산개하여 접근해 옴으로 호라즘왕은 몽골군의 병력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오인하였다. 징기스칸은 갑자기 부하라 배후에 나타나 적의 허를 찔러 단번에 무너뜨렸다. 호라즘왕은 자기의 병력을 모두 부하라, 사마르칸트 및 기타 요새에서 방어하도록 하고 자기는 가족과 친위대를 이끌고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도주했다. 전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흩어져 있는 성안을 지키고 있던 호라즘군은 몽골군에 당할 수 없었다. 대상을 약탈했던 오트라르 성주 이날추크는 붙잡혀 은을 녹여 눈과 코에 붓는 형벌을 당하였다. 징기스칸이 약탈자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나타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부하라시는 약탈 와중에 불길이 솟구치어 목조 건물은 대부분 소실되고 대성당, 궁전 등 벽돌 건물만 남았다. 징기스칸은 폐허가 된 부하라를 뒤에 두고 자라후샨(Zarafshan)강 골짜기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서 서기 1220년 3월에 사마르칸트(Samarkand)에 나타났다. 이때 체베군과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군도 사마르칸트에 집결했다. 징기스칸은 사마르칸트 포위 작전을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성내는 호라즘왕의 숙부 투카이 칸이 터키용병 약 5만명을 거느리고 수비하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성을 공격할 많은 포로를 거느리고 포로로 하여금 많은 깃발을 들게하여 부대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포위 공격이 계속되어 제3일째 되는 날 몽골군은 처음 공격하다가 서서히 후퇴하여 성밖으로 공격해 오는 사마르칸트군을 기병으로 습격하여 적을 무찔러 성내 사람들을 공포에 떨도록 했다. 제4일째 이슬람교 성직자와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어 성문이 열리고 제5일째 몽골군이 성내로 들어와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고 시내를 약탈했다.

    그러나 성내 성채에서 터키용병들은 계속 완강하게 저항했다. 징기스칸은 먼저 성벽, 성루(城壘) 및 성문 등을 조사하고 성내로 흘러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수공법(水攻法)을 사용하도록 했다. 성채를 지키던 호라즘병사 약 1천명이 야음을 타서 성을 빠져나가 달아났고 나머지 병사들은 이슬람 대성당 모스크에서 결사 항쟁했다. 그러나 결국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처음 항복했던 투가이 등을 비롯하여 이전에 항복했던 병사까지 모두 살육했다. 징기스칸은 배신행위를 지극히 싫어했던 것이다.

    저항에 참여한 시민을 모두 학살하고 내성을 파괴했다. 사마르칸트를 완전히 점령하고 수공업자 3만명을 그의 자손과 부하에게 분배해 주었다. 몽골군은 성을 점령하고 나면 마음껏 약탈하기 위해 시민을 시외로 몰아냈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이슬람교 장로, 성직자, 법률 박사, 법관 등 수천명에 대해 보호령을 내리고 엄중히 지켰다.


(4)호라산, 코카사스 및 러시아 지역 전투

    호라즘 수도 우르겐지는 아무 다리아강이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주에 위치한 도시이고 방어가 견고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보올추, 토룬 체르비(脫忍蘭兒必), 카다안 등 노련한 장군을 보내 세 아들을 보좌하도록 했다. 주치는 아버지로부터 호라즘 본토를 영지로 약속 받았으므로 회유책으로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몽골병은 포로를 시켜 성의 해자(垓字)를 묻게 하고, 공성장비를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도시는 아무 다리아강으로 양분되어 있어서 두 지구를 연결시키는 다리로 3천명의 몽골병들이 돌격해 나아 가다가 모두 몰살당했다. 이 때문에 온건책을 주장하는 주치와 강경책을 주장하는 차가타이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징기스칸은 화를 내며 두 형제는 오고타이 지시를 따르도록 지휘권을 일원화해 주었다.

     공격은 다시 재개되어 몽골병은 집 하나 하나가 성체구실을 하는 집에 석유를 항아리에 넣어 던저 불지르면서 파상공격을 하면서 시가지를 한 지역 한 지역 점령해 나갔다. 7일후 수비군은 막다른 지역에 몰려 어쩔 수 없게 되자 사신을 보내 항복할 터이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되었다. 1221년 4월에 성이 완전히 점령되자 주치는 주민을 모두 들로 내보내고 기술자들을 몽골로 보내고 사내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끝으로 아무 다리아 둑을 터트려 우르게지(Urgench) 전 시가지를 수장해 버렸다.

    징기스칸의 사위 토쿠차르는 네사(Nessa) 점령하고, 1220년 11월에 니샤프르(Nisapur)를 공격하다가 화살 맞아 사망했다. 몽골군은 곧 철수했다. 투루이는 점령지에서 장정을 모집하여 부대를 재정비한 후 다시 7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서기 1220년 가을에 지금 이란의 동부 호라산으로 진격하여 셀주크왕조의 수도 메르브(Merv)를 서기 1221년 2월에 점령하고 12일간 행군하여 니샤프트에 나타나 매부의 복수전을 시작했다.

     이때 몽골군의 공성술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창을 던지는 장치 3천, 노포(弩砲) 300,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 돌던지는 장치 2천5백, 그리고 사다리 4천을 동원하였다. 몽골군은 서기 1221년 4월 10일에 니샤프르를 완전히 점령하고 니샤프르 공격 중에 전사한 징기스칸의 사위 토크차르의 복수를 위해 시민들을 사흘간이나 살해하고 도시 파괴는 10일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육한 사람의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러나 솜씨가 훌륭한 기능인 400명은 살려 주었다. 다음에 헤라토를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이때 헤라토 총독이 죽은 이후여서 헤라토 주민들이 시민의 안전을 조건으로 순순히 항복하자 투루이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후 투루이는 징기스칸에 합류했다.

    그 동안 제베와 수부타이는 메르브성을 지나 1220년 6월 견고한 니샤프르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지나 투우스를 점령하고 호라즘 술탄 모하메드(Mohammed)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수부타이는 호라산 지방북쪽에 있는 길을 따라 세부제바르(Sabzevar), 샤루드(Shahrud), 담칸(Damghan) 등을 거쳐 아라크(Arak)의 아제미로 들어간 다음에 셈난(Semnan)을 지나 테헤란(Tehran) 근교에 있는 레이시(Rey:테헤란 동남쪽 8킬로에 위치)에 도달했다. 제베는 카스피해 연안 마잔데란(Mazandaran)지방으로 들어가 아모르(Amol)시를 점령하고 레이시로 내려와 두 부대는 다시 만났다. 술탄 무하메드는 레시뜨(Rasht)에서 다시 카즈빈(Qazvin)으로 가서 그의 아들이 병력 3만을 모아 왔으나 몽골군에 대한 공포심으로 이성을 잃고 도주하는 생각만 했다.

   술탄 무하메드는 바그다드로 도주할까 생각하다가 하마단(Hamadan)에서 몽골군이 바짝 따라 오자 생각을 바꾸어 카스피해 연안으로 도주했다. 그가 마잔데란에 이르렀을 때 몽골군이 알고 선발대가 추격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그루칸강하구에 있는 조그만 섬 아베스쿤(abaskun)에 몸을 숨겼으나 공포와 피로가 겹쳐서 1221년 1월에 사망했다. 대상을 살해하고 물건을 탈취한 죄 값은 이렇게 치루어졌다.

    술탄 무하메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징기스칸은 카스피해 동쪽과 북쪽을 정찰하고 돌아오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아제르바이젠 지방으로 들어가 타브리즈(Tabriz)를 점령하고 카스피해 연안으로 나아가 쿠라강 부근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루지아로 침입하여 수도 티프리스(Tiflis, 지금 Tbilis)에서 그루지아군을 무찔렀다. 다시 남으로 내려와 하마단을 잿더미로 만들고 1221년 가을에 그루지아로 다시 진입하여 카스피해 연안 저지대의 좁은 통로 데르벤트(Derbent)의 협로를 통과하여, 1222년 아스족(아란인)과 깁착족을 무찌르고 러시아로 진출하여 키에프공, 체르니고프공, 가리치공 세영주가 이끄는 8만의 연합군을 1222년 5월 31일 드네프르(Dnieper)강 골짜기에서 만나 거짓 퇴각하여 적을 유인한 다음 복병으로 격파하는 전법으로 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징기스칸은 호라즘의 중심 도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자 바로 무하메드 술탄을 추격하는 일면 전과 확대 작전을 실행하여 큰 전과를 올린 그 배후에는 몽골 특유의 정보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하메드 출탄을 추격할 때 몽골군의 정보활동은 주도면밀했다. 이 추격전에서 제베와 수부타이는 그 지역 청년들을 모집하여 활용하였고, 현지인으로부터 술탄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고 집요하게 추격하면서 잠제도를 활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징기스칸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고 지시를 받았다. 술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징기스칸은 제베와 수부타이로 하여금 카스피해를 멀리돌아 귀환하도록 했던 것은 몽골군이 현지 적응능력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먼거리 보고 체계가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몽골군은 얼마나 정으로 단단히 단결되어 있나를 니샤푸르전투에서 알 수 있다. 매부 도크차르가 전사하자 투루이는 철저히 준비하여 복수전을 처절하게 했다. 몽골군이 성을 공격하여 전사자가 많으면 점령후 철저하게 복수했다. 그러나 피해가 없다면 주민들을 보호해 주었다. 니샤푸루성과 헤라트성이 좋은 예이다.

    몽골군은 전사하면 반드시 그 시체를 찾아 낙타에 싣고 왔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모듬 소유물을 자루에 넣어 땅속에 묻는다. 서정(徐霆)이 보고 기록한 내용을 보면 군대에서 사망할 경우 만약 노비가 낙타로 죽은 주인의 목을 낙타에 싣고온다면 주인의 가축과 재산을 지급하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온다면 처와 노예 그리고 가축과 재산을 주었다. 그래서 몽골군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일념에서 더욱 용감하게 싸웠다.


(5)파르완(Parwan) 및 인다스(Indas)강변 전투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킨 후 징기스칸은 1220년 여름 사미르칸트 남쪽 나사프(지금 Karshi)에서 더위를 피하고 가을에 아무 다리아강으로 나가 발흐(Balkh)맞은편 도시 테르메르(Termez)를 공격하여 11일만에 함락시켰다. 1221년 봄 아무 다리아강을 건너 발흐시를 점령하여 고대 박트리아 지역(현재 아프카니스탄령 투르게스탄)을 정복했다. 징기스칸은 무하메드 술탄의 아들 자랄 웃딘이 호라산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아들을 보내어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몽골군은 자랄 웃딘의 경로를 조사하여 사막을 넘어 추격했다. 몽골군은 네사(Nassa 호라산 서쪽에 있는 도시)부근에 있는 카란다르(Kharandar)성에서 술탄의 아들이며 자랄웃딘의 두 동생 우즈라그 샤(Uzlagh Shah)와 아쿠샤(Akhu Shah)를 만나 교전중에 패주하는 척하여 그들이 승리했다고 방심하는 틈에 급습하여 두 왕자를 죽였다.

    징기스칸은 발흐와 타레칸(Talecan) 함락 후 1221년 여름 박트리아 산지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로포미사스(Paropamisus)산맥이 힌두쿠시(Hindukusi)산맥과 이어지는 지점에 위치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바미얀(Bamijan)을 공격했다. 바미얀공격시 차카타이 아들 무츠겐이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징기스칸이 직접 독려하여 바미얀시를 점령하고 전리품을 생각하지 않고 모구 파괴하고 모두 살육했다.

    호라즘 황태자 자랄 웃딘은 바미얀 동남쪽 500㎞에 있는 가즈니(Ghazni)에 몸을 피했다. 자랄 웃딘은 그곳에서 터키 용병과 아프가니스탄 토민들을 모아 7만명의 기병을 구성했다. 징기스칸은 4만5천명의 군사를 주어 시기 쿠두크(忽都忽)로 하여금 정벌토록 했다. 시기 쿠두크는 징기스칸이 자랄 웃딘을 감시하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카불(Kabul)과 자부리스탄(Zabulistan) 사이 힌두쿠시 산악지역에 3만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분견대가 파르완(Parwan)에서 자랄 웃딘군을 만나 패했다는 소속을 접수받고 시키 쿠두크는 전군을 이끌고 파르완 평원으로 나아가 자랄 웃딘군과 대치했다.

    자랄 웃딘은 중앙을, 우익은 아민 아루 마리크(Amin Al Malik), 그리고 좌익은 아그라크(Seit-ud-din-Agrac)를 배치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자랄 웃딘군의 우익은 1만 정도의 몽골군을 돌파했다. 급히 시기 쿠두크는 중군으로 좌익을 도와 전열을 간신히 회복했다. 이후 자랄 웃딘군과 시기 쿠두크군은 파르완 평원에서 서로 돌격하면서 싸웠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래서 밤이 되어 각각의 진지로 돌아갔다. 시기 쿠두크는 몽골군의 수가 적보다 적었으므로 밤사이에 예비 말에 인형을 태우고 다음날 아침 전투대형을 갖추고 지원병이 도착한 것처럼 꾸몄다. 자랄 웃딘은 기병들에게 허리띠에 말고삐를 묶도록하여 전투대형을 갖추고 몽골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