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 칸 전략에 대한 분석 - 둘

2013. 7. 6. 08:23병법 이야기

 

 

 

    몽골기병은 적진으로 돌격했으나 빗발치는 화살로 사상자가 속출하여 진영을 재정비하려고 일단 뒤로 물러섰다가 재차 공격하자 자랄 웃딘의 진영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때 자랄 웃딘은 나팔을 불게 했다. 그러자 호라즘군은 대형을 넓히면서 몽골군을 양익으로 포위할 듯이 덤벼들었다. 시기 쿠두크는 군기를 잡고 지휘했으나 몽골병은 군기를 보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다가 평지에 패인 홈에 말발굽이 빠져 말과 사람이 같이 나둥그러지면서 추격하는 적의 휘두르는 칼에 맞아 태반이 죽음을 당했다.

    파르완 전투는 몽골군이 패한 최초의 전투였다. 징기스칸은 파르완의 패배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시기 쿠두크는 너무 승리만 하여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실패의 교훈을 잘 살려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리고는 징기스칸은 2일간에 걸쳐 병사들이 식사를 끓여 먹을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파르완으로 향했다. 파르완에 도착하여 먼저 쿠두크로부터 양군 진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징기스칸은 쿠두크의 작전 방법이 나빴음을 꾸짖고 전쟁터의 선정도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전쟁 패인이 쿠두크의 지휘 잘못에 있음을 일깨어 주었다.

    징기스칸은 서기 1221년 가을에 호라즘에서 귀환한 주치, 차카타이 및 오고타이와 호라산에서 돌아온 투루이와 함께 가즈니(Ghazni)로 급히 진격했다. 모하메드의 아들 잘라 웃딘이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곳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징기스칸은 가즈니에 도착하니 이미 자랄 웃딘은 그곳에 없었다. 자랄 웃딘은 대승이후 전리품을 서로 다툼으로 해서 아프가니스탄병과 터키병과의 불화로 병력들이 모두 흩어져 가즈니를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인도 국경을 넘어 편지압 지방으로 달아나려 했다. 징기스칸은 자랄 웃딘군이 인더스(Indus)강을 건너 도주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급히 추격하여 밤중에 인더스강 가까이서 적의 후위를 만나 격파했다.

    서기 1221년 11월 24일 인더스강을 배후로 몽골군과 자랄 웃딘의 호라즘군이 결전을 벌렸다. 자랄 웃딘은 우익에 정예 이슬람군을 배치하고 용장 아민 아르말릭이 지휘하에 인더스강을 따라 몽골군 우익을 공격하도록 했다. 징기스칸은 반월형(半月形)으로 진형을 갖추고 여러 겹으로 종대를 이루어 자랄 웃딘군을 포위했다. 달이 밝아 전투는 계속되어 몽골군은 자랄 웃딘군을 초생달 모양으로 겹겹이 쌓고 인더스강으로 조여들자 자랄 웃딘군은 본의 아니게 배수진이 되어 버렸다.

    징기스칸은 적의 우익이 강함을 알고 먼저 적의 우익을 집중공격하자 아민 아르 말릭의 우익은 거의 전멸하고 아민 아르 말릭은 판지압지방으로 도주해 버렸다. 날이 밝자 몽골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자랄 웃딘은 700명 정예부대로 중앙을 수비하도록 하면서 포위망을 뚫으려고 전후좌후를 돌격하면서 결사적으로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육박전(肉薄戰)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정오가 되어 자랄 웃딘은 포위를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음을 알고, 등에 방패를 매고 손에 기를 들고 인더스강까지 말을 달려가서 20척(6미터)이나 되는 절벽에서 말과 함께 인더스강의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헤엄쳐서 인도 쪽으로 도망해 버렸다.

    징기스칸은 도망하는 자랄 웃딘을 높은 언덕에서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다가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배우라고 말했다. 그리고 추격을 중지했다. 징기스칸은 인더스강 우안으로 북상하여 서기 1222년 봄 힌두쿠시 산중에서 여름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해에 발라 노얀(八刺)이 인더스강을 넘어 물탄(Multan)과 라흐레(Lahore)를 유린하면서 자랄 웃딘을 추격했으나 너무 더워 탐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징기스칸은 자랄 웃딘이 다시 재기해 쳐들어 올 것에 대비하여 1222년 봄에 오고타이를 시켜 가즈니를 토벌케 했다. 오고타이는 가즈니를 파괴했다. 헤라트시에서 자랄 웃딘이 파르완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들이 몽골군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에르지기데이(Ilchigidei)를 보내 오고타이를 증원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집요하게 저항했으나 1222년 6월 14일 헤라트(Herat)는 에르지기데이 부대에 의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1주일 동안 학살되었다. 메르프(Merv) 그리고 발흐시도 파르완 승리의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이르켰으나 징기스칸이 보낸 5천명의 두루바이부대에 의해 다시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서기 1223년 봄에 징기스칸은 사마르칸트를 출발하여 그해 여름을 타시켄트에서 가까운 크란바시(Qulan Bashi)에서 보내고 가을에 이르티시강 상류에 머물러 있다가 1224년에 다시 출발하여 1225년 봄에 투우라강가(지금 울란바토르 지방)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남러시아를 원정하고 돌아오는 체베와 수부타이군과 합류했다.

    징기스칸의 몽골군은 부당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순순히 항복하지 않고 강력하게 저항할 때 철저히 잔인하게 복수하였다. 호라즘 전투에서 몽골군은 기술자들을 우대하여 즉시 활용하였다. 다른 한편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요새를 공격하는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성을 지키고 있던 호라즘 시민들은 그들의 동족이 몽골군 선두에 서서 성의 해자를 메우고 공성기를 옮기자 동족에게 활을 쏠 수도 없어서 참담한 마음으로 성을 사수하려는 의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앙을 끌어들인 호라즘 샤 아라우드 딘 모하메드(Alaud Din Mohammed, 1119∼1220)는 첫째, 너무 사리사욕이 많아서 이웃 이슬람족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으며, 둘째, 몽골사절단과 상인들을 이유없이 약탈하고 살해하여 벌써 왕으로서의 도덕성을 잃었으며 징기스칸의 공격 구실을 주었다. 셋째,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만하게 굴다가 몽골군을 만나자 우유부단하여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으며, 넷째, 전략과 전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여 각 도시에 많은 병력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이를 집중시켜 몽골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각 도시와 성을 그 지역 군인과 주민에게 맡겨 굳게 지키기만 하다가 몽골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차례차례 모두 패하고 말았다.

    징기스칸은 서기 1218년에서 1224년에 이르는 7년간의 서정(西征)을 마치고 서기 1225년 몽골로 개선했다. 귀국 즉시 그는 금국(金國)정벌에 나서려 했다. 그래서 서기 1225년 겨울에 대군을 일으켜 금국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에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금국정벌의 시기가 아님을 건의하여 정벌을 중지되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