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제조한 차[新茶] / 다산, 육원중, 윤외심

2016. 1. 12. 06:34茶詩

 

 

 

 

 

        

  7. 새로 제조한 차[新茶]
 

소금장 밖에는 높다란 깃대를 세우고서          銷金帳外建高牙
게의 눈과 고기 비늘 안화가 가득하여라         蟹眼魚鱗滿眼花
가난한 선비는 점심 끼니도 채우기 어려워      貧士難充日中飯
새 샘물 떠다 부질없이 우전차를 다리도다      新泉謾煮雨前芽
백성의 근심은 신선 경계에서 묻지를 마소      民憂莫問群仙境
수액은 손 사절하는 집에 누가 나누어줄꼬      水厄誰分謝客家
스스로 믿노니 가슴속에 막힘이 없는데다       自信胸中無壅滯
청고한 맛의 차를 마시니 더욱 자랑스럽네      喫添淸苦更堪誇

 

항상 맑은 물로 늙은 치아를 닦고자 하여         玄淡常思潄老牙
몇 군데의 명산에서 선화를 보았던고              名山幾處見仙花
곡우 전에는 어떤 이가 호구차를 주었는데       雨前人致虎口
구름 밖에선 누가 용정차를 전해 줄런고          雲外誰傳龍井芽
병든 몸 이미 말랐는데 마음은 죽지 않았고      病骨已枯心未死
옛 전원은 비록 있으나 꿈에는 집이 없다오      故園雖在夢無家
노동은 허물어진 집에 하 많이 굶주리면서       盧仝破屋多饑餒
양액의 청풍을 도리어 스스로 자랑하였네
        兩腋淸風還自誇

 

이상은 원중의 시이다.

 


문득 입 안에 진진한 맛 이는 걸 느끼어라        忽覺津津動頰牙
선생의 붓 아래 완연히 꽃이 피는 듯하네         先生筆下宛生花
사제는 몹시도 매운 향기가 떠 움직이고          麝臍酷烈浮香氣
작설의 새싹은 뾰족하게 새로 솟아나도다        雀舌尖新迸早芽
제조하는 법칙은 정채의 솜씨에 의거하고        碾硏法依丁蔡手
맵고 단 성미는 심서가의 장부에 알맞아라       辣甘性合沈徐家
시를 이루매 용육을 얘기한 내가 우스워라       詩成笑我談龍肉
오직 산나물이 있어 맛을 자랑할 만하다오       獨有山茹味可誇

 

이상은 외심의 시이다.
 

 

[주D-001]게의 …… 안화(眼花) : 게의 눈과 고기 비늘은 곧 차를 끓일 때에 물이 부그르르 끓어오르는 모양을 형용한 말이고, 안화란 눈이 어른어른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2]우전차(雨前茶) : 곡우(穀雨) 때에 채취하여 제조한 차를 이름.

 

[주D-003]수액(水厄) : 차를 무리하게 많이 마시게 됨을 이름. 진(晉) 나라 때 왕몽(王濛)이 차를 매우 좋아하여 손이 그의 집에 가면 반드시 차를 마시게 되므로,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 매양 왕몽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오늘은 수액(水厄)이 있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선화(仙花) : 차의 별칭이 선아(仙芽)이므로 차의 꽃을 이른 말이다.

 

[주D-005]노동(盧仝)은 …… 자랑하였네 : 노동은 당(唐) 나라 때의 시인인데, 허물어진 집이란 곧 한유(韓愈)가 노동의 〈월식(月蝕)〉 시를 칭찬하여 지은 시에서 “낙성에 살고 있는 옥천 선생은 허물어진 집 두어 칸이 있을 뿐이네.[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 한 데서 온 말이고, 양액(兩腋)의 청풍(淸風)이란 바로 노동이 차(茶)를 좋아하여 차를 예찬하는 시에서 “ …… 다섯 잔을 마시면 기골이 맑아지고, 여섯 잔을 마시면 선령이 통하고, 일곱 잔은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남을 느끼게 된다.[五椀肌骨淸 六椀通仙靈 七椀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제조하는 …… 의거하고 : 정채(丁蔡)는 송(宋) 나라의 정위(丁謂)와 채양(蔡襄) 두 사람을 합칭한 말인데, 복건성(福建省)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용단차(龍團茶)를 전후에 걸쳐 이 두 사람이 제조하였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07]맵고 …… 알맞아라 : 심서가(沈徐家)는 곧 당(唐) 나라의 심전사(沈傳師)와 서회(徐晦)를 합칭한 말인데,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었고 서회는 술을 잘 마시는 주호(酒豪)로서 일찍이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徐家)의 폐장(肺腸)과 심가(沈家)의 비장(脾腸)은 참으로 편안한가?"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4 

 

      - 시(詩)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 [1] 제7권 / 다산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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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자 註 : " 碾硏法依丁蔡手"는 정위의 제다법(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과 채양의 다서(다록)에 따라 만든 용단차를 찻맷돌로 갈아

                가루차(末茶 : 韓中)를 만든 다음, 점다법(點茶法)으로 다완에서 찻솔로 격불하여 마시기 전에 찻맷돌에 가는 단계를 지칭한다.

                  다산의 평생 친구였던 외심 윤영희가 살았던 조선조 후기에도 돈차, 청태전 등의 단차(團茶)를 손수 찻맷돌에 갈아서 만든 

               가루차를 상용하고 있었다는 사례가 되는 시이다.

                  

                  반면에 명나라 시인인 육원중의 시에서는 눈노아(潄老牙), 호구(虎口 : 중국 소주 虎丘山의 당시 이름), 용정아(龍井芽)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포다법(泡茶法)에 의한 녹차 우려마시기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윤외심의 세화시에서  " 사향처럼 향기로운 차에 매운 향기가 떠오르고(麝臍酷烈浮香氣)"에서 '매운 향기'는

               다산이 월출산 백운동에 사는 제자인  이시헌(이대아 1803~1860)에게 보낸 서간문에서 처럼 삼증삼쇄(三蒸三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일쇄차(日曬茶)인 떡차를 마실 때 풍겨지는 매운 향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산의 차운시인 우세화시에서 "새 샘물 떠다 부질없이 우전차를 다리도다( 新泉謾煮雨前芽)"는 곡우전 어린 잎으로

                만든 우전차로 만든 녹차 잎차를 전다법(煎茶法)에 의하여 달여서 마신 것을 표현한 것으로, 삼인의 차운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명과 조선에서는 선호하는 다법이 서로 다르고, 다산과 윤외심이 산차 자다법과 단차를 찻맷돌에 간 가루차 점다법으로

                서로 화운(和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에 이르기 까지 사대부들이 서로 선호하는 다양한 다법으로 차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하지만 당나라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칠완차가(七椀茶歌)」에서 마신 차는 송대와 달리 엽차였다. 송대의 떡차는 이 엽차보다 맛과 향이 훨씬 더 우수했다. 그렇지만 정위채양 등은 북원(北苑)의 떡차 처음으로 만들어 황제께 바쳤다. 송나라 황도보(黃道輔)가 지은 『품다요록보(品茶要錄補)』에는 “다품(茶品)은 용봉단(龍鳳團)보다 귀한 것이 없다. 무릇 떡차 8개의 무게가 한 근이다. 경력(慶曆) 연간에 채군모가 복건운사(福建運使)가 되어 처음으로 작은 조각의 용차(龍茶)를 만들었다. 그 품질이 아주 뛰어났는데 이를 소룡단(小龍團)이라 하였다. 무릇 떡차 24개의 무게가 한 근이었다. 그 값은 황금 2냥이었다. 하지만 황금이 있어도 차를 얻을 수가 없었다. 매번 남교(南郊)에서 치재(致齋)할 때면 중서성과 추밀원에 각각 떡차 하나씩을 내려 네 사람이 이를 나눠 가졌다. 궁인(宮人)들은 종종 금을 그 위에 아로새기기까지 했으니 귀중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 용단(龍團)정진공(丁晉公)에게서 시작되어 채군모가 완성했다. 구양영숙(毆陽永叔)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채군모는 선비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하기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덕리가 본문에서 이 때문에 나무람을 받았다고 한 것은 바로 위 구양수의 언급을 두고 말한 것이다.


   정리한다. 송나라 때 마신 차는 모두 떡차였다. 이때의 떡차는 용뇌향과 같은 향약을 넣고 만든 향차였다. 하지만 오늘 날은 굳이 송나라 때 떡차 만들던 방법을 따라 비싼 비용을 들여가며 향약을 넣은 떡차를 만들 필요가 없다."   이덕리의  <동다기>)

 

(5. 『동다기』의 떡차론과 차 효용론 차문화사 / 옛사람 내면풍경 -

 http://sambolove.blog.me/150122650115 )

 

 

 

                  동양3국 중 중국의 문화는 한일 양국과는 달리 중원땅을 지배하였던 한족 이외의 이민족들에 대하여  별다른 거부감이 없이

                후대에 이를 포용하고 있는 경향이 크나, 이는 인구상 소수이고 문화적으로 열등하였던 흉노,돌궐족,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과

                만주족 등이 군사적으로 강성하여 중원을 정복하고 오호16국, 요, 금, 원, 청을 건국하여 한족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였으나
                이들은 뿌리깊은 한족 중심의 중원문화에 오히려 동화됨으로서, 폭 넓은 문화를 향유하고 호화로운 궁정생활을 유지하여 갔다는

                점에서 한족들은 오히려 더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이 그 연유이다.

 

                    다만 몽고족의 원나라를 북쪽 초원지대로 밀어내고 백련교와 황건적의 세력을 등에 업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송대

                부터 유행하던 용봉단차 중심의 점다법에 대해서 " 차역(茶役)이 극심한 백성들의 노고를 들어준다"라는 정치적인 수사를

                앞세웠지만, 몽고족의 원나라 황실과 고관들의 수탈경제에 대한 차농과 차상인들의 반감과 거부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단차를 폐지하고 잎차(散茶)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시대에 산차법이 시행되어 다병(茶甁)이나 다관에다 우려마시는 포다법(泡茶法)과 두껑이 있는

                 유개호인 개완(蓋碗)에다 우려마시는 충다법(冲茶法)이 북경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되어 후대로 갈수록 차산지인 남부 지방으로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갔으나, 한반도의 조선조에서는 고래의 전통적인 약탕(藥蕩) 또는 약다법(瀹茶法)인 전다법(煎茶法),

                 육우의 <다경>에 나오는 가루차를 다려마시는 자다법(煮茶法), 가루차를 다완에다 넣고 찻솔(茶筅)이나 고리달린 찻숫가락으로

                 저어(擊拂) 마시는 점다법(點茶法)과 삼국시대로 부터 내려온 잎차나 돈차(錢茶)를 우려서 마시는 충포법(冲泡法) 등이

                 골고루 활용되고 있음이  위의 <우세화시집>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이후의 여러 시문과 서화들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란 중의 피폐해진 시기를 잠시 제외하고는 궁중과 사대부들 간에 차문화는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양란을 거쳐오면서 숭유억불 정책과 사원 경제의 피폐로 인하여 불교 사찰에서 차문화는

                 조선조 중기 이후 부터 쇠퇴하여 조선조 후기에 초의선사가 사원 차문화를 중흥시키기 이전 까지는 거의 쇠락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청나라와 조선과 서로 소원해진 외교통상교류 때문에 조선통신사 등을 통한 공식적인

                 국가간 교류 이외에는 문화교류가 거의 단절되어 송나라 시대의 가루차(抹茶 :日) 점다법(點茶法)을 위주로 하여 잎차를 우려

                 마시는 충포법이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중(韓中)에서 충포법, 포다법 또는 엄다법(淹茶法)이라고 부르는 

                 우려마시기를 고래의 약탕 용어인 전차법(煎茶法)으로 부르며 , 다법의 이름을 새로이 바꾸지 않고 있어서 문화교류 단절로

                 인한 차문화의 후진성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치유신 이후에는 구미 중심의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치중하느라

                 동양 3국 간의 차문화에 대한 교류 활동을 등한히 하여 기존의 말차도(抹茶道)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전차도(煎茶道)를 시행하는

                 소위 일본다도 중심으로 고착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