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 울산바위 (임채욱 사진)
설악산 등반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이 사진 속 장소가 어딘지 기억하실 겁니다. 설악산의 명소 중의 하나인 울산바위입니다. 울산바위가 울산에 있어야지 왜 설악산에 있느냐고요?
오래된 전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조물주가 금강산을 한 번 멋있게 만들어보려고 전국의 잘 생긴 바위들을 죄다 금강산으로 불렀답니다. 울산에 있는 울산바위도 먼 길을 떠났죠. 그런데 워낙 몸이 무겁고 느려서 그랬는지 설악산 부근에 왔을 때는 그만 금강산 일만 이천 봉 공사가 다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울산바위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설악산에 눌러앉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설악산의 명승으로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울산바위는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대한 봉우리 6개가 병풍처럼 늘어서 둘레만 자그마치 4㎞에 이릅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인문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울산(蔚山)이란 이름은 기이한 봉우리들이 산(山)에 울타리(蔚)를 친 것 같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합니다.
외설악 산줄기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빼어난 경관 덕분에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0호 지정되기도 했지요. 굽이굽이 물결치는 능선 위로 우뚝 솟은 바위의 장엄한 자태를 한 번 보세요. 눈 덮인 겨울 설악산의 정취와 참 잘 어울리지 않나요?
▲ 설악산 백담계곡 (임채욱 사진)
설악산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절경 ‘백담계곡’입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 폭의 수묵화가 떠오르지 않나요? 이렇게 사진으로만 봐서는 그 느낌이 확 다가오지 않지만, 전시장에서 직접 보신다면 그 감흥이 정말 남다르실 겁니다.
설악산이든 금강산이든 한라산이든 사진작가들이 찍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은 사실 너무나 많습니다. 음식점에 가도 있고, 심지어 달력에도 이런 사진들은 흔하디흔합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뭔가 좀 다르죠. 그냥 아름답다, 멋지다, 라고 표현해버리고 말기에는 기존의 풍경 사진과는 뭔가 좀 다른 정취를 느끼게 해줍니다.
비결이 뭘까요? 바로 한지입니다. 보통 사진은 사진용 인화지에 뽑아냅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해드리는 사진들은 한지에 인쇄한 겁니다. 이 사진들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임채욱이란 사진작가입니다.
산 사진을 찍던 작가가 어느 날 한지에 출력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 찾아봤더니 국내에는 회화나 사진 작품을 인쇄할 용도로 개발된 한지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가장 큰 한지 업체를 직접 찾아가서 인쇄용 한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마침 그 업체에 자체 연구소가 있었고, 정부 연구지원 프로젝트로 선정되면서 2010년에 인쇄용 한지를 공동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진이 수묵화를 닮은 느낌을 전해주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는 “특히 설산을 묘사한 사진을 보면 나무나 바위에 있는 선적인 요소들이 마치 수묵화의 표현을 보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 봉정암 부처바위 사진(왼쪽),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임채욱 작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위의 왼쪽 사진은 설악산 봉정암 부처바위의 모습입니다. 왼쪽 옆선을 자세히 보세요. 영락없이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부처님의 얼굴입니다. 누가 깎았을까요? 자연이 빚어낸 신비로운 조화입니다. 작가는 이 부처님의 모습에서 백제가 낳은 불세출의 명작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떠올렸습니다.
두 사진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정말 얼굴을 따라 흐르는 유려한 곡선이 더없이 닮았습니다. 봉정암 부처바위가 합장하는 모습은 아무나 찍을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얼굴 바위와 손 바위의 높낮이가 달라서 특정한 어느 한 지점에서만 보인다는군요. 저 절묘한 장면을 포착할 수 있는 명당자리는 공교롭게도 봉정암 스님들만 출입할 수 있는 출입금지구역 입구 쪽에 있다고 합니다. 작가가 이 기막힌 바위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봉정암 스님의 명함에 담긴 바로 저 부처님 사진이었다고 하니 그 또한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작가는 이 사진을 그냥 사진으로 둔 게 아니라 한지 10장에 나눠서 인쇄한 뒤에 8m 높이로 이어 붙이고 손으로 구겼습니다. 실제 바위를 보는 것처럼 입체감을 살린 거죠. 그렇게 탄생한 ‘구겨진 사진’이 전시장 한쪽 벽에 암벽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또 다른 장관입니다. 어느 날 실패한 사진을 구겨서 내던졌다가 나중에 다시 보니 작품으로 보이더라는 작가에게는 참 우연하게도 ‘구겨진 사진’이 다른 작가의 작업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자신만의 전매특허가 된 셈입니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216512&re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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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케나 ‘소나무’
이 사진 보신 적 있으시지요? 세계적인 풍경 사진가 마이클 케나의 ‘소나무(Pine Trees)’입니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에 있는 이 작은 섬은 사진가들 사이에선 출사지로 굉장히 유명한 곳입니다. 가스저장 시설 건설계획으로 한때 사라질 위기를 맞았던 이 섬의 비경이 2007년 이곳을 지나던 마이클 케나라는 외국인 사진가의 카메라에 포착됩니다. 그 사진 한 장이 섬을 살려내는 기폭제가 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당시에 큰 화제가 됐지요.
그런데 2014년에 이 사진을 놓고 마이클 케나 측과 대한항공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대한항공이 2011년에 자사 홍보 광고에서 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솔섬 사진을 사용하자 마이클 케나 측에서 사진을 베꼈다며 저작권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소송은 결국 대한항공 측의 승소로 끝이 났습니다.
그 런데 임채욱 작가가 바로 이 솔섬 사진으로 사진작가 데뷔를 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솔섬 하면 마이클 케나가 얼른 떠오르지만, 그가 솔섬 사진을 처음 찍은 작가도 아니었고 솔섬 사진의 대명사도 아니란 뜻입니다.
아래에 임채욱 작가의 솔섬 사진이 있습니다. 작가는 이 사진을 작업했을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월천리 작품의 핵심은 컬러와 더불어 장노출을 이용해 물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수묵화처럼 번지게 표현한 거예요. 수묵화의 번짐이 카메라의 장노출로 가능했습니다. 장노출을 하면 실제로 색이 바뀌어요. 노란 불빛이 하늘의 파란색과 섞여 하늘색이 녹색으로 변하죠.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개입해 색이 바뀌는 것을 카메라가 포착한 거예요. 월천리에서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은 동양화의 여백이었습니다.”
▲ 임채욱 ‘월천리’
동양화, 수묵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임채욱 작가가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이력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동양화 같고 수묵화 같은 사진의 외형적 아름다움에만 치중하지 않습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인터뷰 설악산>입니다. 설악산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설악산을 관광지로만 인식해온 그 한계를 넘어서 단순히 산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내면적 가치, 그 정신성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대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산 하면 금강산을 먼저 떠올리죠. 조선 후기의 위대한 화가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비롯해 역대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금강산을 찾아 글을 짓고 그림을 남겼습니다. 지리산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설악산은 그 정도로 인정을 못 받아온 게 사실입니다.
임채욱 작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금강산과 지리산은 수려하되 장엄하지 않고 장엄하되 수려하지 못한 데 비해 설악산은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명산 중의 명산이란 겁니다. 그래서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며 수행을 했고, 겸재의 스승 삼연 김창흡이 10년 동안 기거하며 정자를 짓고 기행문을 남겼으며,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고, 만해 한용운이‘님의 침묵’을 쓴 곳도 바로 설악산이라고 작가는 힘주어 말합니다. 이렇게 설악산에 얽힌 내력을 속속들이 공부하고 그 정신까지 체득하고자 했던 작가의 태도를 알고 나면 이제 그가 찍은 사진은 분명 달리 보이게 됩니다.
▲ 임채욱 ‘설악’
임채욱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60여 점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가까이 보이는 산봉우리는 마치 짙은 먹으로 그려낸 듯 선명합니다. 화면 위쪽에는 짙은 운해에 가려진 먼 산이 옅은 먹으로 칠한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아스라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이 사진의 방점은 오른쪽 아래 산봉우리 위에 도도하게 서 있는 새 한 마리입니다. 작가는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바로 저 새가 이 산의 주인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절묘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을까. 작가는 이번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8년 동안 50차례 넘게 설악산을 오르내렸다 합니다. 그런 열정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것은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였습니다. 케이블카가 설치되면 봉정암 부처바위를 찾는 이들은 그 뒤로 지나는 케이블카를 향해 고개 숙여 기도하는 셈이 될 거라고 말입니다. 솔섬 사진 작업을 정리해서 2010년에 펴낸 <월천리 솔섬>을 읽어보면 LNG 생산기지 건설이 임박했다는 현실 앞에서 분노와 회한을 쏟아내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임채욱 작가에게 사진은 그냥 좋은 장면만 찍어서 보여주면 그만인 한낱 눈요깃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진이라는 결과물을 내놓기까지 그가 걸은 여정이 훨씬 더 값지게 느껴지더군요. 더 멋있고 더 끝내주는 사진은 다른 데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 수묵화처럼 깊은 울림을 주는 사진들 속에서 제가 발견한 건 작가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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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9] 사진이야 수묵화야? 한지에 담긴 설악산 비경 (2016.01.07.)
■ 참고한 책들
임채욱 <월천리 솔섬>(아트블루, 2010)
임채욱 <설악산>(다빈치, 2016)
■ 전시 정보
제목: 인터뷰 설악산
기간: 3월 22일까지
장소: 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아라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