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9. 05:11ㆍ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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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감춘 땅] .........봉암사 월봉토굴
밖은 닫되 안은 열어 오로지 ‘법대로’
26년 전부터 산문 폐쇄…욕망·야망·무지에 ‘철책’
산 속 꼭꼭 박힌 토굴들은 하늘의 별처럼 ‘총총’
새와 다람쥐와 산토끼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지만 사람의 출입은 허용치 않는 곳이 있습니다. 경북 문경 충북 괴산 일대의 희양산이 그렇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경북 문경 봉암사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인터체인지로 들어가서 가은을 지나 석탄박물관 쪽으로 방향을 트니 멀리서부터 불끈 솟아오른 하얀 화강암 바위가 길(道)을 이끌었습니다.
한반도의 단전을 외호하는 척추 희양산입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에 있습니다.
사람의 건강은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는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앉고 바로 서는 것이 바로 호흡하는 첩경입니다. 바른 자세로 바로 숨쉴 때 몸과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희양산 화강암 바위는 멀리서봐도 그 단단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998미터의 희양산은 가히 하늘을 떠받들 수 있을만큼 단단해 보입니다. 척추가 곧고 단단하니, 한반도의 숨구멍도 제대로 열린 셈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숨구멍을 연 그 희양산으로 다가갔습니다.
봉암사 월봉토굴
성철 등 선지식 ‘결사’, 목숨 건 수행…20여리 전부터 발길 금지
희양산문에 들어서기 20여리 전부터 입산과 수렵을 금한다는
경고문구가 곳곳에서 번뜩입니다.
희양산 봉암사는 오직 ‘부처님 오신날’ 하루만 불자들에게 절문을 열만큼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턱이 높습니다. 봉암사 일주문에선 경비들이 철밧줄을 쳐놓은 채 사천왕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과 약속을 하고 철밧줄을 내려 차를 통과시켰습니다.
계곡을 따라 500여 미터를 올라가니 대한불교조계종의 유일한 종립특별선원인 천년고찰 봉암사의 위용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우뚝한 화강암 아래로 산속에선 보기 어려운 넓은 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절 옆으로는 금강산 계곡 못지않다는 빼어난 계곡이 흐르고 있습니다.
봉암사는 879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입니다. 신라시대 때 아홉개의 사상 흐름을 형성했던 구산선문의 하나인데, 구산 선문 중 유일하게 정통으로 선(禪)만을 이어가는 곳입니다. 봉암사가 근대에 더욱더 유명해진 것은 성철 스님을 비롯한 선지식들이 1947년 이곳에서 결행한 ‘봉암사 결사’ 때문입니다.
당시부터 성철, 청담, 자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 스님 등 근현대의 고승들은 오직 ‘부처님 법(진리)대로만 살아보자’고 결의한 채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직접 일하고 탁발을 하면서 철저히 수행을 했습니다. 이곳엔 그들의 추상 같은 수행 정신과 기상이 서려 있습니다. 경내를 오가면서도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사미승들과 행자들의 걸음 걸음에서부터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금강산 못지않은 천하절경 계곡…한국 유일의 출세간 성지
그런데 인간은 긴장하는데 긴장하지 않는 소리가 정적을 깹니다.
“따르륵 딱, 따르륵 딱”
나무를 좇는 천연기념물 까막딱따구리 소리입니다. 삼엄한 분위기에도 새들과 산짐승은 자유롭습니다. 잠시 뒤 서산을 넘는 해와 함께 춤추는 산새들이 노는 숲 속에서 10여명의 젊은 스님들이 나왔습니다. 온종일 산을 지키고 돌아오는 스님들이었습니다. 이곳 선승들은 일년 사시사철 빼놓지 않고 당번을 정해 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입산을 막다보면 희양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불만도 적지 않습니다. 금강산 못지 않은 이 산을 왜 스님들만 독차지하고 있느냐는 항변도 들립니다. 그러나 봉암사 선승들은 “전국의 사찰들이 하나같이 세인들의 관광과 유흥장소화하고 있는데, 적어도 한 곳만이라도 청정 도량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1982년부터 산문을 폐쇄했습니다. 그 뒤 이곳은 한국 유일의 출세간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저녁공양할 때가 다 됐는데 왜 이제야 오노. 빨리 가서 씻고 공양들 하거라!”
계곡 건너편으로 돌아오는 그들을 지켜보던 주지 함현 스님의 말에 젊은 스님들은 조용히 합장한 채 총총히 경내로 들어갔습니다. 후학들을 경책하는 주지 스님의 목소리엔 엄격함 속에도 자비가 배어 있었습니다. 좀체 사랑을 표현하지 않지만 늘 진심이 묻어나던 시골의 옛어른들처럼 말이지요.
엄격함 속에도 자비 배어…새벽 3시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예불
저녁공양을 마치면 산사는 더욱 더 고요해집니다. 산사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밤엔 일찍 잠이 듭니다. 참선을 하는 이들도 조용히 해야 합니다. 다른 수행자를 방해해선 안됩니다. 제가 머문 요사채는 계곡 옆에 있었습니다.
대보름을 넘긴 달빛이 희양산 흰바위에 반사돼 계곡 옆 요사채 방안까지 스며들었습니다. 그 빛이 세속인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듯 했습니다. 더구나 이 계곡에서 산다는 용이 조화를 부려 세인의 오염마저 씻어내려는 것이었을까요.
한밤중에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내렸습니다. 굵은 빗줄기에 세속의 잡념들이 모두 쓸려내려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곧 언제 그랬냐는듯이 비가 그치더니 하룻밤 기온이 봄부터 겨울을 오갔습니다.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산사엔 다시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새벽 3시 목탁소리가 메아리쳤습니다. 인간과 산짐승과 식물과 무정의 중생들까지 도량의 모든 생명을 깨우기 위한 도량석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면서 경내를 돌았습니다. 잠시 뒤엔 다른 스님이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이어 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둘씩 각 방에 불이 켜지고, 가사를 챙겨 입은 스님들이 하나둘씩 대웅전으로 모였습니다. 주지 함현 스님을 비롯한 50여명의 대중들이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렸습니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그들의 예불 모습에서도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봉암사
바위 지붕에 굴참나무로 엮은 월봉토굴, 산-집-인간 경계 허물어
아침 공양 뒤 주지 스님과 선방에서 죽비를 잡고 수행을 이끈 입승 법웅 스님 등 네 선승과 함께 산내 토굴을 찾아 나섰습니다. 봉암사는 부처님 오신 날에라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희양산 수십리 속에 꼭꼭 숨은 토굴들을 세인이 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쉽게 맛볼 수 없는 행운인 셈이지요.
그러나 ‘하늘이 감춘 땅’은 쉽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감춘 땅’의 입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봉암사 선승들만이 아닌듯 했습니다. 희양산의 산신도 외부인을 경계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날다람쥐들처럼 숲속을 헤치고 달리는 산승들을 찍으면서 동영상 카메라를 들고 뒤따르던 조소영 피디가 계곡에서 계곡에서 굴러 팔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토굴과 암자에 가기도 전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금방 조 피디의 팔이 부어올랐습니다. 팔을 조금만 만져도 아파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더 이상 산행을 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팔이 부러졌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조 피디는 주지 스님과 함께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박종찬 기자, 법웅 스님 등 세 선승은 산행을 계속했습니다.
하산하는 주지 스님과 조 피디를 뒤로하고 가파른 산길을 숨가쁘게 올라갔습니다. 그런 산길을 한 시간쯤 올랐을까. 멀리서 인간 세상의 풍경이라곤 믿기 어려운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월봉토굴이었습니다. 바위를 지붕 삼고 굴참나무로 엮은 토굴집은 산과 집, 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렸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산과 승(스님)이 하나가 된 산승이었습니다.
이곳 월봉토굴은 봉암사 한주인 월봉(97) 노스님이 3년 전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월봉토굴은 그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그냥 부른 것입니다. 월봉 스님은 이곳에 토굴을 짓고 텃밭을 일구고 수행하며 바위와 나무와 산새들과 멧돼지와 산토끼를 벗해 살았습니다. 그가 100살이 다 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은 그런 ‘자연’스런 삶 때문일 것입니다.
세속 일이라도 대운하 등 ‘자연’과 ‘법’ 거스르면 가차없이 죽비
세인의 입산을 막기 위해 산문을 지키고 밤새 허리를 곧추세운 채 참선을 하던 그 서릿발 같은 선승들의 어디에 그런 정겨움이 숨어있었을까요. 봉암사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던 선승들은 자기가 먹을 밥과 반찬을 아껴 마당가 한 귀퉁이 바위 위에 곱게 놓아두었습니다. 겨울철이라 먹을 것이 부족할 산짐승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철두철미한 참선 수행 중에도 선원 마당 한쪽에 매일 너구리와 새 밥을 주어온 그들입니다.
세상 일엔 무관심하고 오직 수행 밖에 모르리라 여겨졌던 봉암사 선승들이 가장 먼저 경부대운하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 뜨악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만 있으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을텐데 세상 일에 끼어들어 자칫하면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지 스님은 개발에 찬성하는 지역 유지들이 눈총에도 아랑곳 없이 경부대운하 코스를 순례하는 ‘종교인 100일 순례단’들에게 오는 3월 7일엔 산문까지 열어주기로 했습니다. 산과 강은 인간만이 사는 곳이 아니며, 동식물들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는 자타불이의 깨달음이 없다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폭력 앞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산짐승들이 인간들보다 더 산승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백두대간 일대의 산짐승들이 총소리가 나면 동물적 감각으로 살기 위해 희양산으로 달려온다는 얘기들이 산군들 사이에선 회자됩니다. 그 정도로 희양산은 동식물에겐 낙원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봉암사 선승들이 지키는 것은 산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오직 자신 밖에 몰라서 결국 자신을 죽이는 인간의 욕망이며, 야만이며, 무지로부터 입니다. 그런 인간의 무지와 미망을 깨우듯이 낙원을 자유롭게 노닐던 까막딱따구리가 다시 죽비 마냥 소리를 냈습니다.
“따르르 딱, 따르르 딱!”
봉암사 월봉토굴
조회 수 1276 추천 수 0 2015.05.22 16:33:28
( 월봉토굴 )
월봉토굴은 큰 절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으며,
희양산 깊은 골짜기에 꽁 꽁 숨어 있다.
그곳은 2011년 101세에 열반하신 월봉스님께서
30여년 이상 오랫동안 수행하던 곳이기에 '월봉토굴'이라 불리워 진다.
바위 지붕에 굴참나무로 엮어 만든 토굴은
집과 산이 하나로, 멀리서 보면 희양산에 깃든 제비집 같다.
새와 너구리 등 산짐승이 사람과 함께 지내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그 경계를 허문 곳이다.
본래 ‘토굴’이란 명칭은
부처님 당시 제자들과 이곳 저곳 다니면서
동굴, 숲 등에 흙이나 나무로 간단히 만든,
수행하며 머무는 자연적인 거주처를 일컬었으나,
지금은 절이나 암자가 아닌 곳에서 수행자가 수도하는 곳이면
외딴 일반 집이라도 그냥 토굴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월봉토굴' 마냥.. 진짜배기 토굴은 아주 귀한 편이다.
월봉 스님..
희양산 봉우리에 달이 높이 뜬, 그 경지에 항시 머물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은.. 천진불 그 자체의 스님이시다.
스님 어떻게 사세요..?
그냥 살기 되네요..!! ..??
중도 중생들 처럼 먹어야 사니, 밥도 해먹고, 죽도 해먹고, 떡도 해먹고
살지만.. 여기 떡 맛은 달라요..
그 다른 떡 맛을
아무리 말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손짓 발짓 해가며 설명해봐야
그 떡 맛을 알 수 없지 않은가..
스스로 그 떡을 먹어봐야 맛을 알지...!!!
30년 이상 면벽참선을 해 봐도, 그 맛을 알지 말지지..
언어도단이다.
간단히 미소 띤 그 한 마디에 ...말 문이 막히고,
가슴에 깊은 여운이 박힌다.
스님은 본래 온 그 곳으로
다시 돌아 가셨지만,
지금은 새와 너구리와 산 짐승들이 놀다 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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