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7) 경남 통영 - 청마 유치환을 찾아서

2016. 1. 20. 02:41美學 이야기

 

       [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7) 경남 통영 - 청마 유치환을 찾아서

 

                      2015/09/14 09:40 등록   (2015/09/14 09:41 수정)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곁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흥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
 

 

(뉴스투데이=윤혜영 선임기자) 한때 이 시를 참 좋아하던 소녀시절이 생각난다. 인생은 시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내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멋진 미래가 열려있다고 착각하던 시절.

우체국에 가서 부칠곳도 없는 편지를 쓰고 미지의 내 사랑에 대해 꿈꾸며 설레이던 기억.

그러나 사람도 세월의 풍상에 깍이면서 낭만도, 꿈도 실종되지 않는가. 나이가 들어가며 포기할건 포기하고 이룰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며 체념하는 것.

   청마의 시 처럼 고결한 사랑을 꿈꾸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었고, 미지의 왕자님은 내 옆에서 부른 배를 긁적이며 깊은잠에 취해 있다.

내게서 뻗어나간 인연의 가지들에 고통받고, 때로는 행복해하고, 잠시 즐거웠다가, 또 고비를 넘으면 생각지도 못한일이 닦쳐오는 것,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인생. 그렇게 한숨 돌리고 돌아보면 우리는 이미 늙어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나는 찰리 채플린의 이말에 깊이 공감한다.

 



▲ 우체국앞 이층집이 이영도가 생전에 세들어 살던 곳

 

 

   청마(靑馬) 유치환(1908~1967)과 중앙동우체국(옛 통영우체국)은 사연이 깊다. 생전에 편지쓰기를 즐겼던 청마가 연인 이영도에게 편지를 부쳤던 곳이 바로 이 우체국이다.


정운(丁芸) 이영도가 청마를 만난 건 1945년 통영여고 교사 시절이었다. 청마는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그녀는 딸 하나가 딸린 29세 청상이었다. 교사이면서 시조시인이었던 이영도는 청마의 뜨거운 구애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는 비밀스런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수많은 연서를 나누면서 청마에겐 영감의 뮤즈이자 문학의 동반자로 함께 하였으나, 청마는 60세가 되던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별세하면서 사연 많던 사랑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후 청마를 잃은 슬픔을 이영도는 '탑'이라는 시조를 통해 승화시킨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권학준 - 청마

 

ⓒ 김정호 _  시인에 대하여

 


가난하여 발 벗고 들에 나무를 줍기로소니
소년이여 너는
좋은 햇빛과 비로 사는 초목 모양
끝내 옳고 바르게 자라지라

설령 어버이의 자애가 모자랄지라도
병 같은 가난에 쥐어 짜는
그의 피눈물에 염통을 대고
적은 짐승처럼 울음일랑 울음일랑 견디어라

어디나 어디나 떠나고 싶거들랑
가만히 휘파람 불며 흐르는 구름에 생각하라
진실로 사람에겐 무엇이 있어야 되고
인류의 큰 사랑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아 빈한(貧寒)함이 아무리 아프고 추울지라도
유족함에 개같이 길드느니보다
가난한 별 아래 끝내 고개 바르게 들고
너는 세상의 쓰고 쓴 소금이 되라

가난하여 발 벗고 들에 나무를 줍기로소니
소년이여 너는
좋은 햇빛과 비로 사는 초목 모양
끝내 옳고 바르게 자라지라

설령 어버이의 자애가 모자랄지라도
병 같은 가난에 쥐어 짜는
그의 피눈물에 염통을 대고
적은 짐승처럼 울음일랑 울음일랑 견디어라

어디나 어디나 떠나고 싶거들랑
가만히 휘파람 불며 흐르는 구름에 생각하라
진실로 사람에겐 무엇이 있어야 되고
인류의 큰 사랑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아 빈한(貧寒)함이 아무리 아프고 추울지라도
유족함에 개같이 길드느니보다
가난한 별 아래 끝내 고개 바르게 들고
너는 세상의 쓰고 쓴 소금이 되라


  -  가난하여 (杜春에게)  -



ⓒ 이인 - 행복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亞羅比亞)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生命의 書(1章)  -


ⓒ 이인 -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바위  -


ⓒ 이인 -  산이여 내 또한 너처럼 늙느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
 

 


ⓒ 장태묵 -  청마 - 길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긴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에 꽃같이 숨었느뇨


  -  그리움1  -
 

ⓒ 최석운 -  설레임
 

 

 


밤 안개는 소리 없이
 
나의 외론 항구(港口)로 밀려 와서
 
기어이 입어야 할 슬픔 같이
 
방축도 잠기고 집도 잠기고 나도 잠기고
 
그 하아얀 슬픔에 얼굴을 묻히고
 
고기처럼 헤치고 가면
 
겨우 선창가엔 여인숙(旅人宿) 등불 하나
 
젊은 여주인(女主人)은 호젓히* 앉아 웃고
 
밤새도록 저렇게 기적(汽笛)은
 
지척(咫尺) 같이 들리는데
 
비쳐도 비쳐도
 
아무것도 등태(燈台)사 안 보인단다


  - 
무야(霧夜)  -
 
 

 

 

ⓒ 최석운, 청마 - 바닷가에 서서

 


사랑하는 이와 나란히
이 버찌나무 아래 우러러 서니
머리카락 목덜미 간지리는
먼 산 눈녹이 바람의 상기 쌀쌀한 결에도
아련아련 몸기척이 오고 있어라

그렇게 조여 붙었던 것이
이제 완연 너그러움 풀려 드는 하늘 아래
가지마다 도톰히 눈뜨려는 움들
하마 여릿여릿 먼동이 틀어 오는 양
즐거운 흥성거림 소리도 들리는듯 하여라

사랑하는 이와 어깨에 손 얹고 
이 버찌나무 아래 나란히 서니
아아 기약하던 그 봄이
시방 설빔 입고
화안히 환히 오고 있어라


  - 
한루(寒樓)  -
 

ⓒ 박수만 -  한루(寒樓)

 


   이 시대에서 사랑하는 것은 비극이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시대에 마음만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자는 정박아 취급이나 받기 쉽상이다. 7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마음만으로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를 이어 나갈수 있을까?

사는것이 너무 각박해져 '정'이나 '의리'도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예술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성립될 수 없다. 연인간의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겉만 요란한 빈깡통에 지나지 않는다.

   청마와 이영도가 가정이 있는 유부남과 미망인의 사랑이라지만, 그가 남긴 문학계의 커다란 업적으로 인해 '불륜(?)'도 아름답게 포장될 수 있었다. 예술가는 오직 실력으로 승부해야 하고 가치판단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생전에 오천통에 가까운 편지를 이영도에게 보냈던 유치환, 그의 뜨거운 연정은 한국 문학사에 위대한 획을 그었다.
인간사에는 삶의 논리나 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일도 많다. 그들의 사랑도 그렇다. 인간의 유한한 삶속에서 존재에 대한 초극(超克)을 거듭하여 세속의 치정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랑도 그토록 아름답게 부활시킨 열정.

그리하여 이영도는 청마의 '뮤즈'로 작품속에서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글 : 수필가 윤혜영
geo0511@hanmail.net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