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교

2013. 7. 10. 11:24잡주머니

 

 

     

배화교가 의외로 엄청난 종교입니다

현대 종교의 뿌리이자 근간을 제시했다는 정도..

이게 중국에서도 선교를 해서 배화교로 알려졌는데 종교 의식 때

불을 지피고 하는 의식 때무넹 그렇다는군요

대표적으로 사탄..이라는 단어가 유래 된 게 배화교..즉 조로아스터교이고요

(천사의 배신)

가톨릭에서 사제가 밀가루 떡과 포도주를 주는 의식이

이 종교에서 유래 되었답니다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불을 신성시하고 유일신을 예배하던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입니다. 교도 자신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불을 숭상하는 종교라고도 합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짜라투스트라라고 하는게 본어발음입니다. 조로아스터는 영어발음이죠. 조로아스터교는 짜라투스트라가 만든 종교이며, 유일신교입니다. 유일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며, 그의 아들이자 성령인 스펜타 마이뉴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퍼트리고, 악한 정령인 앙그라 마이뉴가 인간들을 유혹하고 해치는 것을 막습니다. 후에 앙그라 마이뉴는 기독교로 넘어가면서 사탄이라 불리워집니다.


    경전 《아베스타》에 의하면, 태초에 앙그라 마이뉴(훗날의 아리만)는 악을 택하고, 스펜타 마이뉴(아후라 마즈다의 성령)는 선을 각각 택하였다 합니다. 신자가 생각 ·말 ·행동에서 그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죠. 그 한쪽은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도 부릅니다.
(기독교와도 같이 체계적인 체계가 잡혀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조로아스터교는 베다 시대 아리아인의 종교와 뿌리를 같이 합니다. 이란 고원의 척박한 조건에서는 삶의 영위를 추구하는 가운데에서도 덕성이라는 것이 종교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요. 하지만 금욕주의의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손노리의 게임 악튜러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었죠(먼산)

 

* 강지석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9-27 18:30)

 

 

 

 

기독교 교리 형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상징 -

 

   

 

-조로아스터도 긴머리에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든다.
  기독교의 예수 성화와 매우 흡사하다.-

 

-지팡이(심판을 의미)를 들고 후광을 띤 채 설교하는 조로아스터(짜라투스투라)-

-불(악 응징.심판을 상징)을 다루는 조로아스터의 모습-

 

 



-오늘날도 조로아스터교는 인도와 터키,이란 일부에 남아있고
  연전히 불에 대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로아스터 교의 교리

 


  
즉,
   동정녀 잉태
   박사가 위문함
   영리한 소년
   산상수훈
   기적을 베품
   십자가 수난을 당함
   부활함
   심판주로 재림함........
   등의 요소는 유대인들에 의해 기독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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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모정의 여신 이시스 신이 아들 호루스를 안고 있는 모습-

 

 

 
    예수 신화는 디오니소스 신인 신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대 중동 전역에 두루 퍼졌던
동정녀 탄생,
기적을 베푸는 사나이,
수난을 당하는 구세주,
그리고 부활이라는 코드
로 널리 퍼진 여러 신화적 코드를 모두 수용한 것이다.
 
    자식 호루스를 온갖 위난으로부터 보호하며 양육한 이야기로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는 여신으로 고대 중동 전역에서 숭배되고 회자된
유명한 깊은 모정의 신이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모델이 되었다.
 
    오시리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 누이동생 네프티스도 함께 애도하고 있는 장면과,
오시리스를 나타내는 사자(死者)의 관 양쪽 끝에는 흔히 이 두 여신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이 따스한 모정의 여신에 대한 신앙은 이집트 지역 밖으로까지 널리 퍼져,
이시스교(敎)로서 소 교단을 형성할 정도였다.

 

* 강지석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9-09-27 18:30)

 

 

 

    
 
  ▲ 밑에서 바라본 배화교 신전  
 
    이란의 역사에서 조르아스터교(배화교)를 떠나서는 그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 이란에 이 조르아스터교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이란 전통 설인 ‘노루즈’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쉬라즈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당시 아케메네스 시대에 속국 사절들이 이 노루즈 때 페르시아를 방문해 대왕을 알현하고 선물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란에서 배화교의 원조는 이란 남부 야즈드에 있는 어테쉬카테 사원이다. 이 사원에는 수 천 년을 이어오면서 그들이 숭배하는 불씨가 꺼지지 아니하고 지금도 타고 있다. 배화교의 역사를 대략 기원 전 13세기쯤으로 보고 있다.

 

     이란에 기원 전 역사와 함께 살아 숨쉬는 도시엔 이 배화교 사원의 흔적이 어디나 남아있다. 케르만시 배화교 신전, 에스파한 시 배화교 신전이 그 대표적이다.

 


    
 
  ▲ 신전 위에서 바라 본 시내 모습  
 
필자가 이번엔 에스파한 배화교 신전을 찾았다. 에스파한을 찾는 많은 여행객이 이맘 광장 주변 유명세를 자랑하는 그런 곳만 찾지 작은 산을 타고 올라야 볼 수 있는 이 배화교 신전은 거의 찾지 않는다. 그렇게 이름난 유적은 아니지만 2개의 탑이 흔들리는 마나르 좀분 사원을 탐방하고 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에테쉬카테(불의 신전)를 찾았다.

 

7월 중순 한여름 낮 기온은 거의 40도를 오르내린다. 습도가 낮아 그나마 견딜 만 하다. 차에서 내리니 덩그런 돌산이 하나 보인다. 이 돌산 위에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토담들이 보인다. 중앙에 원형 탑이 덩그마니 보인다. 이 원형 탑이 바로 어테쉬카테(불의 신전) 란다.

 

신발 끈을 단단히 잡아매고 언덕을 오른다. 한 10여분을 올라 신전 정상에 도착했다. 오르는 사람이라고 나밖에 없다. 신전 정상에 서니 사방으로 확 트인 에스파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층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은 시내. 한 마디로 숲에 싸여있는 숲 속 정원 도시였다. 에스파한 시내를 가로지르는 쟈안데 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정겹다. 저 강이 있기에 6백여 년 이곳에 사산니안 왕조의 수도가 형성되었고 지금의 푸른 숲이 있게 되었다.

 

배화교의 배경은 이렇다. 조로아스터를 개조로 하는 종교. 보통은 개조의 이름을 따서 조로아스터교로 불리고 있지만 교도 자신들은 아후라마즈다를 신앙하는 데에서 ‘마즈다 예배교’ 라고 한다. 성립 연대와 장소에 관하여 여러 설이 있지만, 성전(聖典)의 언어·내용·형식의 분석에 의하면, BC 1200년 무렵 동북 이란에 정착하게 된 인도 이란어족 사이에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산 정상에 있는 배화교 신전  
 
     곧이어 동 이란으로 중심지를 옮겨 서쪽 팔스·메디아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BC 6세기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이 성립했을 때 이미 왕가와 왕국의 중추를 이루는 페르시아인의 대부분이 신봉하는 종교가 되었다.

 

    사실은 다리우스 1세 이래의 여러 왕의 비문에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신앙이 명백하게 표명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본래는 사원이나 우상의 건립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제국 발전기에 선진문명에 접촉하면서 우상을 세우고 사원도 건립하게 되었다.

 

    그때 사원의 성소에 일상생활이나 의식에 없어서는 안 될 불을 성별(聖別)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서 안치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배화교(拜火敎)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침입으로 종교적 전통 계승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어진 동북 이란계의 파르티아왕조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깊게 수용하면서 신앙은 준수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때의 조로아스터교는 왕권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이 시대에 교역활동을 위해 많은 이란인이 중국 당(唐)나라에 들어갔다. 중국에서의 조로아스터교는 현교라고 불리었고 교도의 필요에 따라서 현교사도 몇 개 세워졌으나 전도활동은 하지 않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인도가 발상지가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종교였다. 대개 현재의 인도 민족을 아리아인이라 분류하는데, 이란의 페르시아족 역시 이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인도인들이 아주 종교적인 민족이었듯이, 이란 역시 종교적인 민족이다. 현재 이란의 정치체제가 세계에서 유일한 신정일치의 정치체계라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7세기에 이슬람교가 대두하여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조로아스터교도의 수는 점차 감소되어 야즈드·케르만 지방에서만 잔존하게 되었다. 현재 조로아스터교는 이란이나 세계 각지에 사는 신도를 합해야 10만여 명에 불과하다.


 

에스파한의 배화교 신전 어테쉬카테(Ateshkadeh)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5410 - 경남도민일보

 

 

 

아바국

 

    아바국은 기원전 9-7세기에 이르러서야 최초로 만나라는 국가가 건국되어 약 2-300년간 유지 되었다.
그 후로 기원전 7-6세기에 미디아가 만나를 이어 건국되었는데, 이 미디아는 성경에 나오는 메데족속을 의미하며 페르시아 민족의 원류이기도 하다. 이 당시 한 예언자가 나타나는데 그의 이름은 카라투스투라이다. 이 예언자는 B시를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을 돌며 신성한 불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전했다. 이로 말미암아 미디아 국가는 배화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배화교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불을 숭배하고 많은 고행을 함으로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자신을 불로 태움으로써 성화된다고 믿었다. 실제로 B시에 있는 배화교 신전에는 많은 고행을 하는 수련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몸을 불태움으로써 불의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행위를 하였다. 배화교의 신은 사람들을 가난에 빠지게 하여 결국 비참하게 죽게 한다. 배화교가 들어간 나라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인도네시아에 배화교가 들어갔을 때, 이란, 아바국 등 배화교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 가난하다. 또한 아바국의 배화교는 인도에서 온 쉬바신의 영향을 받았다. 배화교 신전 위에 삼지창 모양의 쉬바신을 상징하는 철물이 꽂혀있다. 쉬바신은 매우 음란한 영으로 배화교의 가난함과 쉬바신의 음란함이 결합되어 아바국을 어렵게 하고 있다. (계속)

 


     배화교는 지금 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문화 깊은 곳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제리의 중요 상징물을 보면 항상 불이나 불을 상징하는 것이 있다. 불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것이며 자신의 뿌리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제리에서 가장 큰 명절인 노브르즈 바이람은 배화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화교의 달력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다. 이날 사람들은 장작불을 만들어 이 위를 뛰어 넘으며 자신의 근심, 걱정을 불에 태우고 희망을 취한다는 의식을 행한다. 또한 배화교의 신은 지금도 계속 사람을 재물로 받고 있다. 얼마 전 이곳에 실크로드 중보기도팀이 방문해서 사역을 한 적이 있다. 여러 주제로 기도하던 중에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는 낙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30대 중년 여성이 일반적으로 5,6번의 낙태 경험이 있다. 이것은 보건 교육이 잘 안 되었기도 하지만 음란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을 위해 기도할 때 이 낙태가 다른 신에게 드려지는 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배화교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불에 태우며 신에게 재물로 드린 것처럼, 쉬바신과 결탁해서 음란한 모습으로 변신한 배화교의 신은 그 음란함을 통해 태여난 수많은 아기들을 낙태라는 방법으로 재물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소름끼치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낙태는 범죄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태법이 공식적으로 재정되도록 기도했다. 이렇게 배화교는 사라진 듯 하지만 오랜 기간동안 이땅의 왕노릇한 신은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다른 신과 결탁하며 이 땅의 거민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배화교 신전을 방문할 것이다. 그 신전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이 악한 영을 묶으며 기도해야겠다.


 

 

 

 

 


    이 사진이 바로 B시에 있는 배화교 신전의 모습입니다. <배화교3>에 나온 사진은 아바국의 대통령이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순교자들을 위로하는 기념탑을 세운 것인데 이 상징물의 형태가 배화교의 불을 상징하는 형태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의 성기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서 배화교의 음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아바 민족은 항상 순교자의 묘지를 참배할 때 마다 이 기념 탑을 돌면서 전쟁을 통한 아르메니아와 기독교에 대한 한을 되씹으며 눈물을 흘리곤 한답니다. 지난 2000년 여름에 아바국을 찾았던 15명의 아바국을 향한 기도의 용사들이 함께 모여"하나님 이 아바국을 혼란케하고 부패케 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왜곡시키는 이 악한 영들의 실체를 보여"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보여주신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뱀과 사자의 형상이었는데 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사자는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며 연구하던 중 저희가 알게 된 것이 바로 사자의 갈기가 불의 형상과 같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고 결국에는 사자가 배화교를 상징하는 동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운데 보여준 환상의 마지막에는 이 뱀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모습을 보여주셨음에 감사하며 우리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아바국을 묶고 있는 강력한 두개의 영 이슬람과 배화교의 영을 계속해서 공격하며 더이상 이 땅 가운데 영향력을 해사할 수 없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10.99.238.111 ff 11/14[13:34] fffff

 

 

 

2000/11/7(화) 17:00 (MSIE5.0,Windows98) 210.220.36.184 1024x768
이슬람의 나라 아바국  

    아바국은 이슬람의 나라입니다.
A.D4세기에는 초대교회가 있던 나라로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카프카즈 최초의 나라였으면서도 A.D7-13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랍민족의 침략과 몽골제국의 침력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슬람화가 되기까지...민족의 영웅이었던 바벡장군과 그의 군사들이 아랍민족과 이슬람을 향하여 죽기까지 대항하였던 그 보람도 없이...!
결국 이슬람화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불운의 아바민족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현재 아바국은 시아파 이슬람이지만 같은 시아파 이슬람인 이란과는 정치적으로는 가깝지 않고 오히려 수니파 이슬람인 터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바국의 이슬람 사원의 자리에 우리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다같이 기도합니다.

 

이란 아즈드의 배화교 신전 

 

    야즈드는 조로아스타 교(배화교)의 발상지라고 한다.

 

조로아스타교는 기원전 6세기경의 아케메니드 제국의 국교였다고 하니 이 도시의 역사가

2,500년 이상 되었다고 하는 것이렸다.

그러나 지진 등의 자연재해와 전쟁에 의한 파괴로 그 당시의 유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튿날 아침 먼저 조로아스타교의 불의 성전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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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로아스타교의 불의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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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타교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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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타교의 영원한 불>

이 불은 1,500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일이 없는 불이라고 한다.

조로아스타교에는 신상 같은 것은 없고 단지 불을 숭배하는데 이곳에 있는 불이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불로서 조로아스타교 신도들의 숭배의 대상이라 한다.

이 불은 유리로 된 칸막이 안에 모셔져 있는데 무언가 신성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 곳에는 성화외에 6천년전에 조로아스타교를 창시한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옆에 글씨가 써있는데 "바른 길을 행하라"라고 하는 뜻의 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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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타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타의 초상>

조로아스타교는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로 오래동안 신봉되기도 하였지만 7세기에 페르시아가

이슬람화하면서 개종하지 않은 조로아스타교의 신자들이 인도등지로 피난을 가서 이란에는 

현재 야즈드의 1,500명을 비롯하여 전국에 1만명 정도의 신도만 남아 있고 오히려 인도에 

더 많은 신도들이 있다고 한다.

 

 

성화를 모시고 있는 성전은 70여년 전에 이란 정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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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저장고>

야즈드는 사막에 세워진 도시라 옛날부터 물의 공급이 어려운 문제였다.

근처의 산에서 물을 끌어들여 이와같은 저장고에 저장하고 배수시설을 통해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저장고 주변의 탑들은 지하의 물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여 물의 부패를

막는 환기구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즘은 상수도가 공급되어 생활용수로 사용하므로 이 저장고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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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아스터교의 성지인 침묵의 탑>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흙, 바람, 물, 불을 신성시하였는데 사람의 시신은 부정한 것으로

보고 시신을 매장함으로써 흙을 더럽힐 수 없다고 생각하여 조장(鳥葬)을 하였다고 한다.

조장을 함으로써 죽은 자가 하늘로 빨리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 침묵의 탑은 조장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 조장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위생상의 이유로 정부에서 이를 금하여 지금 침묵의 탑은 역사적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이 곳에서는 바람소리 이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침국의 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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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탑 아래쪽에 보이는 집들은 장례를 지내러 온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로 샤용되던

건물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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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탑 내부>

평지에서 100m 정도의 높이에 있는 침묵의 탑에 올라 가 보았다.

직경 50m정도인 원형의 토성으로 되어있고 토성의 안쪽 바닥에는 넓직한 돌들이 깔려 있다.

한 가운데 움푹 패인 웅덩이가 있다.

사람의 시신을 새들이(주로 독수리) 쪼아 먹기 쉽게 토막을 내서 돌위에 널어 놓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뜯어 먹었고 남은 뼈는 가운데 웅덩이에 모았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산(酸)을 뿌려 녹여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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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탑에서 내려다 본 신시가지>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함.
이슬람교 이전의
고대 이란 종교.
고립된 지역과 특히 인도에서 번성했다.
인도에는 '파르시' 또는 '파르세'로 불리는
 이란 조로아스터교도 이주자들의 후손이 남아 있다. BC 6세
기에 이란의....
 예언자·
종교개혁가인
자라투스트라(영어명:Zoroaster)가
창시했으며
 
다른 서양종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유일신론적이고
이원론적인 성격을 띤다.
자라투스트라의 개혁은 그가 태어나고 교육받은 전통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그당시 사회는 ......
 
1==족장과 사제계급,
2==전사계급 농부와
3==목축업자 계급 등 3계급으로 구분된 듯하다.
 
    이 계급구조는 종교에도 반영되어 특정 신들, 즉 다이바(천상의 존재)들이
3계급과 각기 관련되었다. 예를 들면 미트라와 바루나를 위시한 아후라('主')
들은 제1계급과 관련되었다.
자라투스트라는 한 아후라, 즉 아후라 마즈다('지혜의 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최초로 아후라 마즈다를 선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신은 다리우스 1세(BC 522~486 재위)의 위대한 신으로 등장하는데,
다리우스가 자라투스트라의 제자를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자라투스트라의 교리체계에서 악의 근원은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 아들이
영원한 경쟁관계에 들어선 태초의 창조 때 자유의지를 행사한 것으로 소급된다.
 
 1==한 아들인 스펜타 마이뉴('자애로운 영')는 선을 선택하여 진리·정의·생명의
속성을 얻는다. 또 하나의
 
2==아들인 앙그라 마이뉴('파괴의 영')는 악을 선택하여 그에 수반되는 파괴
·불의·죽음의 힘을 얻는다. 자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세계는 얼마 뒤 대화재로 소멸되고,
 
     선의 추종자들만이 새 창조에 동참하기 위해 부활한다. 새 창조가 일어날
때까지 죽은 자의 영혼은 보응의 다리를 건너는데 선한 자는 천국으로 사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기 위해 기다린다.

 


    후대의 조로아스터교 우주론은 세계의 역사를 각기 3,000년씩 4시기로 구분되는
광대한 드라마로 인식한다.
 
   무한한 시간 안에서 빛에 거주하는 오르마즈드와 그의 아래 어둠에 거주하는
 아흐리만은 무한한 시간 동안 서로 공존한다.
 
    첫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그들을 갈라놓았던
공허를 건너 오르마즈드를 공격했다.
 
    오르마즈드는 투쟁기간을 줄이려는 아흐리만과 한시적으로 협정을 맺지 않으면
투쟁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알았다. 오르마즈드는 조로아스터교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가장 경건한 기도인 아후나 바이랴를 암송한다.
 
     아흐리만은 혼비백산하여 심연으로 후퇴한 뒤, 다음 3,00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오르마즈드는 먼저 자애로운 불멸자를 비롯한 영적인
존재를 창조한 뒤,
 
    그에 상응하는 물질인 하늘·물·땅·식물 및 최초의 황소와 최초의
인간(Gayōmart)을 창조한다. 그 다음 오르마즈드가 인간의 선재 영혼
(fravashis)을 향해 초기 상태에 영원히 머물든가,
 
    아흐리만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해 물질 세계로 화육(化肉)하든가
선택하라고 지시했을 때, 그들은 탄생과 전투를 선택한다.
한편 아흐리만은 여섯 마귀와 물질적인 창조를 했다.

 


2번째 3,000년이 끝날 때 아흐리만은 최초의
여자인 창녀의 유혹을 받아 하늘을 찢고 오르마즈드의 창조물을 타락시켰다.
아흐리만이 마가요마르트를 죽이자 그의 몸에서 인간과 광물이 나왔고,
황소를 죽이자 그 몸에서 동물과 식물이 나왔다.

 

 
3번째 기간에 아흐리만은 물질세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르마즈드가 만든 함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운명에 처했다.
 
마지막 3,000년이 시작되자 지상에
종교가 도래했다. 그것은 -자라투스트라
-의 탄생이었다. 1,000년 주기가 끝날 때에는 자라투스트라의
 계승자요, 사후에 낳은 아들인 새로운 구원자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3번째로 등장한 마지막 구원자인 사오시안스는 마지막 심판을 행하고,
 불멸의 음료수를 분배하며, 새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무한한 시간에서
 비롯된 유한한 시간은 1만 2,000년이 지난 뒤 무한한 시간과 융합된다.
조로아스터교의 문서들은 2가지로 뚜렷이 구분된다.
 
    본래의 경전인 〈아베스타 Avesta〉는 아베스타어로 불리는 고대
 이란어로 기록되었고,
 
    그보다 훨씬 후대의 본문은 중기 페르시아 방언인 팔래비어 또는
페르시아어로 씌어졌다.
 
    자라투스트라가 죽은 뒤 그의 종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남쪽으로
 서서히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메대와 페르시아 영토로 전파되었다.
이렇게 전파되는 동안 조로아스터교는 어쩔 수 없이 여러 남신·여신을
숭배하던 고대종교와 혼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BC 599~330)에 진행된 듯한 이 혼합 과정은

 

 
〈아베스타〉 후반부에 반영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BC 330) 뒤 약 4세기가 지났을 때 이란은 다소
헬레니즘화되었고 토착종교는 무시되었다. 그결과 조로아스터교의 부흥은
 아르사시드 제국, 즉 파르티아 제국(BC 247~AD 224) 말엽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되었다.

 

   AD 224년 민족주체성을 확립한 새로운 페르시아 왕조인
사산 왕조가 출현하여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 왕조의 지배계급은 상당한 권력을 소유했고, 다른 종교들
(그리스도교·마니교·불교)을 박해했다. 〈
 
    아베스타〉가 편찬되었고, 일상어인 팔래비어로 번역·주석되었다. 아케메네스
통치기간에 〈가타〉의 유일신론 체계는 점차 마즈다교의 이원론적 교리로
대체되어 마침내 정통 교리가 되었다. 이슬람의 지배 아래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설득과 강요를 받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어느 정도 관용의 대상이 되어 약 3세기 동안 그 핵심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8~10세기에 종교 박해가 일어나고 이슬람교 개종이 강요되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이란을 떠나 인도로 가서 대부분
 봄베이 지역에 정착했다.
 
    19세기에 이르러 파르시라고 불린 조로아스터교도들은 부·교육·자선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 파르시들은 이란에 남아 있던 조로아스터교도들(가바르)과
 새로이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 2개 집단과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들만이 오늘날까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조로아스터교 예배는
신전의 불을 돌보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조로아스터교 [자라투스트라교,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자라투스트라교)
야즈드 조로아스터 사원 (이란)

   배화교, 혹은 자라투스트라교(영어식 조로아스터교)

는 기원전 약 1800년경에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세워진 종교이다. 기원전 600년

경에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이미 그리스 지방에 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 (Ahura Masda)

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게

 특징으로, 이러한 이원론적 교리는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 조로아스터 달력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조로아스터 달력종교력으로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에 의해 사용된다. 태양력과 거의 유사하며
 오늘날까지 조로아스터 교도들이 장소에 상관없이
 종교적인 목적으로 이 달력을 사용한다.

 

    사산 제국아르다시르 1세(재위 서기 226~241)의

달력 개혁 이전까지 사용된 달력은 적어도 기원전 5세기

중엽에서 부터 사용된 것으로 기본적으로

   바빌로니아 달력에 기초하고 1년이 360일인 달력이었다.

 

   달력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차(1년이 360일이므로 매년 5.2425일의 오차가 생긴다)는 관측에 따라 주기적으로

 13번째 윤달을 넣어줌으로서 해결하였다.

 

   날과 달을 신의 이름을 따라 짓는 전통은 이집트의 전통과 흡사하며

 기원전 458년에서 기원전 330년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특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기원전 404~기원전 358)의 재위 중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에 반해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도입된 달력은 이집트 달력에 기초하여 1년이

365일이며, 12달은 각각 30일로 되어 있었다. 달과 날의 이름은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쓰던 이름을 계속 사용하였지만 12번째 달은 추가적인 5일을 지니고 있었다.

 

   추가적인 5일은 고대 아베스타의 성가의 이름을 따서 가타 또는 로 이름지어졌다.

따라서, 윤달은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종교력에 있어서의 1년의 첫날은

 1월 1일에서 9월 1일로 이동되었다.

 

    새로운 체계는 혼란을 유발하였고 많은 반대가 일어났다. 따라서, 많은 조로아스터

축제는 기존 역법 및 새 역법에 따른 서로 다른 두가지 날짜를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