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생애와 예술

2016. 1. 21. 21:08글씨쓰기


 

추사의 생애와 예술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왕조 후기, 문예의 중흥기라 일컫는 정조 10년인 1786년 6월 3일 충청도 예산에서 金魯敬과 杞溪兪氏의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순조와 헌종을 거쳐 철종7년 까지 71세를 일기로 타계한 예술가, 금석학자, 경학자였다. 추사는 字가 元春이고, 號는 秋史, 阮堂 등이다. 추사는 어려서 부친 김노경(1766-1837)의 가학을 통해 학문의 기초수련을 쌓았으며, 북학파의 박제가(1750-1815)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24세(1809) 때 연경 사행에 수행하여 당시 청조 학예계의 양대 거장이었던 옹방강(翁方綱;78세), 완원(阮元;47세) 등과 사제의 의을 맺고 교유하였는데 그들로부터 해동의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 후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명가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면서 청조의 금석학을 연구하고 서화진적을 감상할 수 있었다. 34세(1819) 때 문과에 급제했고, 41세(1826) 때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다. 53세(1838) 때 부친 노경이 73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47세(1832) 때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을 저술하였고, 55세(1840) 때 제주도에 유배되고, 57세(1842) 때는 부인 예안이씨가 타계한다. 58세(1843) 때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가지고 온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준다. 63세(1848) 되든 해 12월 6일 드디어 제주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다. 71세(1853) 때 타계하기 3일 전에는  <판전>을 썼다.


   추사는 생원시와 문과에 각각 급제하여 충청도 암행어사와 형조참판에 올랐으나 역류에 밀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년 가까운 적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적거시기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추사체, 부작난, 세한도가 이루어 진다. 추사체는 금석학한예(漢隸)에 바탕을 두고 비학의 여러 이론과 장점을 구비한 혁신적인 서풍이다. 추사는 이 외에도 천문, 지리, 음악, 사학, 제자백가와 불교를 체득화 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므로 추사는 글씨와 그림을 구별하지 않았고, 화론은 난법과 일치하며, 난화를 그리는 법을 서예의 예서를 쓰는 법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체의 속기와 형사(形似) 위주의 서풍을 배격하고, 높은 식견과 안목에서 나오는 理念美의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모처럼 꽃피려한 우리 고유의 동국진체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문기위주의 문인화비학파예서가 선호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Ⅱ. 추사의 書論


  추사의 서론 예술지향적 학예일치 사상과 금석 고증학을 이론적 근거 하고 있으며, 실사구시에 입각한 이론과 실제부합된 경지의 소산이다. 특히 완원의 설을 받아들여 一家의 견해를 형성하였으며, 그의 <書派辨>은 완원의 저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는 주로 구양순(557-641)의 글씨를 썼는데 그 이유는 완원의 서론에서 북비의 정통을 이은 것은 구양순이라고 하였고, 옹방강이 그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사의 서론은 거기서 더 높은 경지로 변해가니, 그는 서예의 근원을 西漢隸 두었으며 예서를 쓰지 않고서는 서예의 본령을 파악할 수 없고, 또한 깊은 학문적 교양을 갖추기 전에는 예서를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정서나 행, 초의 근원이 예서에서 나왔고,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확립된 東漢隸 이전에 두드러지지 않은 서한예로부터 공부해야 한다. 예서이 있고 고졸한 것을 최상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 拙함이라는 것은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 예서의 장점은 오로지 拙에 있다. 이것을 모르고 글씨에서 외형만을 찾으려 한다면 이는 글씨장이에 불과하다. 또한 청고고아한 정신이 마음 속에 들어 있지 않고서는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니 곧 문자향, 서권기가 들어있지 않는 사람은 고졸한 맛을 낼 수가 없다."


고 하였는데 이러한 예서관은 졸박한 가운데 절묘를 보는 것이 소동파가 말한 취중에 진미를 보는 것과 문인취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그는 서한예에 해당하는 고경명을 즐겨 임서하였으며, 서한예의 정신으로 운필한 것이다. 또한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 이후의 글씨는 고졸방경을 추구한 결과 전통적인 방법을 탈피하여 추사자신의 독창적인 글씨체를 만든 것이다.
 이번에는 추사의 서론을 글씨체에 따라 살펴 보기로 한다. 추사의 서예작품은 오체  중 예서와 행서가 그 대종을 이룬다. 그의 자식인 상우에게 쓴 글을 보면,


   "예서는 서법의 근본이니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한다면 예서를 알지 않을 수 없다. 예서를 쓰는 법은 반드시 모지고 굳세며 옛스럽고 졸박한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나 그 졸박한 곳은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느니라. 한나라 예서의 신묘함은 오로지 졸박한 곳에 있는 것이니 사신비가 정말 좋고 이밖에는 또 예기, 공화, 공주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蜀 지방의 여러 석각은 심히 옛스러워서 반드시 먼저 이로부터 좇아 들어가야만 한다. 그런 뒤에라야 가히 속되지 않을 수 있다. 예서는 대체로 번드르한 모습이나 市井의 기풍을 걸러내야 한다.
 또한 예서 쓰는 법은 가슴 속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이 있지 않다면 손에서 나올 수가 없다. 가슴속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은 또한 가슴속에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지 않으면 팔뚝 아래와 손가락 끝에 드러나 피어날 수 없으니, 보통 해서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문자향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기본이 되는 것이요 또한 예서 쓰는 심묘한 비결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추사의 해서관은 그의 아들 상우에게 쓴 글에서 나타난다. 즉 다음 글에서 보듯이 초학에 있어서 구양순의 예천명이나 화도사비로 입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글씨 쓰는 법은 예천명이 아니면 손에 익힐 수 없다. 趙彛齋(盂堅) 때부터 예천명으로 해서법의 모범을 삼았는데 그때인들 어찌 왕우군이 쓴 황정경악의론이 없었겠느냐. 모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잘못 옮겨져서 준칙을 삼을 수 없었으니 원래의 비석에서 진적을 탁본 해 오는 것만 못하였으므로 예천이나 화도 등의 비석에 머리를 수그리고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추사는 墨友인 듯한 方老에게 써 보낸 글에서 북비가 아니고서는 웅장하고 굳센 것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計白當黑'으로 표현되는 布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포백은 셋이 있다. 글자 가운데 있는 포백과 글 줄 사이에 있는 포백이다. 처음 배우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똑 고르게 해야 한다. 이미 똑 고르게 할 줄 알고 나서야 삐뚤고 바른 것과 성글고 빽빽한 것이 그 사이에 뒤섞여진다."


라고 하여 포백은 한 자 가운데도 자간이나 행간에도 모두 존재하되 처음에는 고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포백이 고르게 된 뒤에 비뚤거나 바르거나, 또 성기고 빽빽한 것이라든가 서로 얼키고 떨어지는 것들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또한 추사는 "論古人書"에서 초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백양산인(陳淳)초서 쓰는 손건례(過庭)양소사(凝式)의 법식이 있으니 이는 초서 쓰는 법의 기본 법식이다. 초서 쓰는 법이 손시와 양씨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모두 한낱 붙이는 부적을 만들 뿐인데, 동쪽 우리 나라 사람들이 더욱 심하여 못쓸 글씨 아닌 것이 없을 뿐이다."
      
라고 하여 장법손과정양응식의 규범이 정종인 바 이에 따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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