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체 - 정도소의 정문공비(정희 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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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소의 정문공비(정희 하비))

수군작 2007.10.04 11:29

    


鄭道昭    ( ? ~ 516 )

   희백(僖伯). 호 중악선생(中岳先生). 허난성[河南省] 잉양[滎陽] 출생. 명문 출신으로, 박학다재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 ·청주자사(靑州刺史) 등을 역임하였고, 광주(光州:山東省 掖縣)로 부임하는 도중 그 관내 산 속의 석벽(石壁)에 수많은 시문을 새겼다. 그 작품이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은 청나라 때부터였다.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의 주창자인 완원(阮元)이 북비의 대표작으로 그것을 탁본으로 소개하였고, 양수창(楊守敞) 등이 칭찬한 뒤로 일약 북위의 대표적 서예가로 지목되었다. 서풍은 웅대하고, 강한 필세(筆勢)와 풍부한 변화가 특징이다. 작품에 [정문공비] 이외에도 [雲峯山論經書詩], [登雲峯山觀海童詩], [天柱山東湛石室銘], [白駒谷題名], [태기산명太基山銘] 등 많은 비가 있는데 그것의 대부분은 마애비(자연석을 갈아서 만든 비문)이다. 서법은 원필로써 전서나 장서(초기의 草書)의 서법과 마찬가지로 붓끝을 비교적 가운데에 두고 있어 둥그스름한 맛이 풍기는 용필법이다. 특히 [정문공비(511년)]는 포세신이 '篆勢 分韻 草情이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원필이 있고 방필이 있으며 곡이 있고, 직이 있으며 느슨한데가 있고, 급한데가 있어 힘있고 율동이 풍부하여 대범하고 정취가 있어 강경하고 자미(姿媚)하다. 
 

   정문공의 이름이 정희鄭羲이고 정도소의 아버지이다. 정희에 대한 비석이 상하 두개인데, 상비는 상태가 나빠 알아볼 수가 없고, 하비의 상태가 좋아 널리 알려진다. 따라서 '정희 하비'로 읽어야 하며, '정희하 비'가 아님에 주의하자.

 

'정희 하비'는 포세신'篆勢 分韻 草情이 모두 갖춰져 있다'라고 격찬한 바와 같이 원필이 있고 방필이 있으며 곡이 있고, 직이 있으며 느슨한데가 있고, 급한데가 있어 힘있고 율동이 풍부하여 대범하고 정취가 있어 강경하고 자미(姿媚)하다.

 

북의체를 대표하는 3비로 정문공비(511)-장맹룡비(522)-고정비(523)를 꼽는데, 이 중에서도 장맹룡비와 대조되어서, [정문공비]는 원만하고 중후하며 구수한 맛으로 더욱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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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작

2007.10.4

blog.daum.net/saenuhasa/12820249   새누하사


 

 


정문공비(鄭文公碑)



<정문공비>의 전체 명칭은 <위고중서령비서감사지절독곤주제군사안동장군곤주자사남양문공정군지비(魏故中書令秘書監使持節督袞州諸軍事安東將軍袞州刺史南陽文公鄭君之碑)>로 정도소가 썼다고 전한다. 


두 비가 있는데 하나는 산동성 액현(掖縣)의 동남쪽 운봉산(雲峰山) 마애에 있는 <하비(下碑)>이고, 다른 하나는 천주산(天柱山) 마애에 있는 <상비(上碑)>이다.  <상비>는 <하비>에 비해 글씨가 작고 마멸이 심해 글자의 대부분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하비>는 북위 영평(永平) 4년(511)에 새겼고 글씨도 완전하며 행마다 23-29자씩 총 1,300여자를 51행에 썼다.  이 비는 정도소가 그의 부친 정희(鄭羲)를 위한 송덕문으로 두 비의 내용은 대체로 같아 또한 <정희하비(鄭羲下碑)>라고도 부른다.


전체 북비 계통에서 <정문공비>는 매우 두드러진 작품이다.  험준하고 기운 형세가 없고 능각이 두드러진 봉망이 없으면서도 엄격하게 가로는 평평하고 세로는 곧은 원칙을 준수하며 용필과 격식에서 예술적 천재를 충분히 표현했다.  필치는 둥글고 윤택하며 충실하여 평평하고 곧은 필획에서 표일한 파책의 형세를 얻어 고졸하면서도 영활한 기운을 나타냈다.  필획의 굵기가 대체로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판에 박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며 필의는 마치 오래된 등나무가 서로 엉기어 있는 것 같고 풍격은 엄정하고 웅혼하다.  필획마다 중봉을 운용해 머무르고 누르며 버텨서 안주시켜 함유한 필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왼쪽삐침의 끝은 혹 직접 위로 향해 들거나 혹 안으로 수렴시켜 필획을 혼후하게 하면서 봉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타의 필획 즉, 가로획?세로획?전절?파책?점?갈고리 등의 변화도 상당히 풍부하다.  이런 변화는 제안(提按)과 조세(粗細)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 기조에 가려져 만약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그 안의 오묘함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도 용필에서 다른 것들과 다른 개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구를 보면 이 비는 너그럽고 표일함에서 문채를 이루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전절과 가로로 향하는 필획은 힘써 평정함에서 확장함을 추구함으로써 굳세고 웅장한 특색을 나타냈다.  곳곳에서도 일종의 부피감을 갖춘 암시성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는 서예의 형세에서 가장 얻기 힘든 일이다.  기세와 큰 도량을 갖추면서 격조는 엄정하고 웅장하니 북비에서 신품이라 하겠다.  엽창치(葉昌熾)는 이 비를 매우 높게 평가하며 『어석(語石)』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도소가 운봉산에 쓴 상하비와 <논경시>의 여러 비각은 위로는 예서와 전서를 이어서 북방의 거칠음을 변화한 것이니 이는 마치 무지한 곳에 문명이 들어온 것과 같다.  그 필력의 웅건함은 가히 날카로운 물소 뿔로 뱀을 치고 예리한 칼로 허공을 휘두르는 듯하여 온전히 정신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당나라의 사대가들도 모두 이 울타리에 있었으니 이는 북조의 대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서가 생긴 이래로 오직 이 작품 하나일 따름이다.”


  cafe.daum.net/gobangseyee/GsY1/32   영일서단(해맞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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