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 청자 - 정리

2016. 1. 28. 03:23도자 이야기



       2. 고려 청자


    2-1. 청자의 기원

 

 

   * 이번부터 도자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청자에 대한 연재가 시작됩니다.

 

 

 

 


 

 

     청자철분이 많이 함유된 회백색 흙을 태토 삼아 기형을 빗어 구운 뒤에 여기에 소량의 철분이 들어 있는 투명성 유약을 발라 가마속에 넣고 산소를 차단한 채(환원 소성) 청녹색으로 구운 도자기를 말한다.

 

 

 


청자 과릉 환호(靑磁瓜稜丸壺) 당 9세기 월주요 높이25.8cm
중국 영파시 천일각박물관

 

 

 


청자 화구 완(靑磁花口碗) 당 901년 월주요 높이 8.5cm
중국 임안시문물관

 

 

 

    중국에서 최초로 청자가 만들어진 것은 3세기경으로 아주 오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때의 청자는 매우 초보적인 것으로 색깔도 오늘날의 청녹색과는 거리가 먼, 매우 어두운 갈색을 띄었었다. 9세기 이후 중국에 선종이 널리 보급되면서 좌선과 함께 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었는데 이때 다시 청록색을 띠는 청자가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 차를 마시는 찻잔으로 옥기(玉器)가 사용했는데 이것이 점차 푸른색 나는 청자 잔(碗)으로 대체됐다. 그 중에서 특히 절강성에서 만들어진 월주(越州) 가마청자완은 당시 최고로 다완으로 손꼽혔다.

 

   한반도에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부터 청자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학자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다. 하지만 대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에 걸쳐 월주 계통의 청자 제조기술받아들여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초기의 청자가마터인천 경서동, 용인의 서리, 예성강 주변의 봉천 원산리 가마 등이 거론된다.



 

    2-2. 고려 청자의 특징

 

 

    일반적으로 고려 청자의 특징은 비색(翡色)으로 표현된 색깔, 상감 기법처럼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기법 그리고 고려 사람들의 생각과 취향이 반영된 무늬와 형태에 있다고 설명된다.  

 

   고려 청자는 중국의 청자 제조기법을 받아들여 제작되기 시작했다. 특히 송나라 청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하지만 고려 청자는 이러한 영향을 받는 가운데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의 푸른색은 비밀스러운 색깔이란 뜻에서 비색(秘色)으로 불리웠다. 그러나 비취빛이 감도는 고려청자의 청녹색은 중국의 청자 색깔과 크게 달라, 별도로 비색(翡色)이란 독자적인 말로 표현됐다. 

 

 

 

 


청자 과형병(靑磁瓜形甁) 12세기전반 높이22.8cm
국립중앙박물관

 

 

 

   윤용이 교수는 KIST에서 청자 유약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가장 보기 좋은 비색이 나오려면 유약에 약 3% 정도의 철분이 포함있어야 한다고 했다. 철분이 1% 정도이면 아주 약한 연두색이 되고 또 철분이 5~6% 정도가 되면 어두운 녹색 나온다고 한다.

 

   상감 기법 초벌구이를 한 도자기에 홈을 파고, 백토나 흑토를 넣고 메워 문양을 표현한 기법이다. 이런 기법은 도자기 제조 역사가 깊은 중국에서도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독창적 기법이다. 상감기법은 주로 12세기중엽 이후에 등장하기 시작해 13세기 이후가 되면 무늬를 넣지 않은 청자보다 월등히 많은 수량이 제작됐다.

 

   고려 청자의 문양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에서는 이런 중국 전래의 문양은 고려에 전해진 뒤 다양하게 변화, 변용되었고 또 고려 청자를 일상 생활이나 종교 생활에서 사용했던 고려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표현 수단이 됐다. 특히 연화문, 보상화문, 운학문 등은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던 고려인들의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청자상감 보상화당초문 완(靑磁象嵌寶相花唐草文碗)
12세기중반  높이 6.2cm 국립중앙박물관

 





 

 

    2-3. 청자의 종류

 

 

    청자의 종류는 1) 문양을 표현하는 방법, 2) 문양 표현에 사용된 재료, 그리고 3) 도자기의 형태따라 각각 분류가 가능하다. 이런 분류 방법을 살피기에 앞서 청자에는 아무런 문양도 넣지 않고 유약만 발라 구운 청자도 있다. 이는 순청자라고 하며, 또 바탕 그대로가 무늬라는 의미에서 소문(素文) 청자, 민무늬 청자라는 말도 쓴다.

 

   문양 표현에도 크게 나누어 보면, 새기는 기법, 그려 넣는 기법 그리고 찍어 바르는 기이 있다. 새기는 방법에는 문양을 파서 표현하는 음각(陰刻), 문양 주변을 파내 문양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한 양각(陽刻) 그리고 문양선에 홈을 파서 다른 흙을 넣어 색을 나타낸 상감(象嵌) 기법 등이 있다.

 

그려넣는 기법은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석간주라는 산화철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철화(鐵畵)철채(鐵彩, 온통 발랐다는 의미) 그리고 금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화금(畵金) 청자 있다. 그 외에 찍어 바른 기법으로는 산화동(酸化銅)을 사용한 동채(銅彩)기법을 꼽을 수 있다. 산화동은 고려시대에 금보다 비싸 문양의 일부에 약간만 찍어 발라 액센트를 준게 보통이다. 그리고 백토물(白泥)을 점점이 찍어 바르거나 또는 넓게 발라서 흰색 효과를 노린 퇴화(堆花) 기법 있다.


   (동채라는 말은 최근에 쓰기 시작한 말로 과거에는 산화동이 진사에 들어 있으므로 이를 진사 또는 진사채(辰砂彩)라고 했다)

형태에 따른 분류는 대개 사용 용도와도 관련되는데 다완, 대접, 매병, 항아리, 화장병, 합, 연적, 향로, 대접 등이 있다.

 

 




 

      2-4. 음각, 양각 청자

 

 

 

 

 청자음각 연화문 반(靑磁陰刻蓮花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文盤)12세기전반 높이 4.5cm
(이병창박사 기증품)

청자양각 모란당초문 발과 뚜껑
12세기전반 높이 9.5cm 오사카시립동양

(靑磁陽刻牧丹唐草文共蓋鉢) 
도자미술관(이병창박사 기증품)

 

 

 

 

    우선 음각(陰刻)이란, 말 그대로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문양을 파고 그 위에 바로 유약을 칠해 구은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면 파인 홈에 유약이 고이면서 다른 부분 보다 짙어져 마치 문양을 그려 넣은 것처럼 보인다. 양각(陽刻)은 이와 반대로 나타내고 싶은 문양의 주변을 깎아내 문양을 돋보이게 해서 구은 것이다. 이 역시 문양 주변의 얕은 곳에 유약이 몰리며 대비의 효과를 통해 문양이 도드라져 보인다. 양각인 경우에는 대개 문양 틀을 만들어 이를 찍어서 문양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경우가 많다.

 

   음각과 양각 기법은 순청자에서 문양이 있는 청자로 발전하는 과정에 주로 나타나며 중국의 용천요(龍泉窯) 계통의 기법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2-5. 상감청자

 

 

 

 


청자상감 송하탄금문 병(靑磁象嵌松下彈琴文甁)
12세기중반 높이30.9cm 이화여대 박물관

 

 

 

    상감(象嵌) 기법 고려청자에만 보이는 독창적인 문양표현 기법으로 중국에는 이같은 기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 시대에는 청동 기물에 문양을 표현할 때,  홈을 파고 금이나 은실을 집어 넣어 표현하는 이른바 금입사(金入絲), 은입사(銀入絲) 기법 발달했는데 청자의 상감 기법은 이와 같은 청동기의 표현 기법에서 힌트를 얻어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감 기법은 문양의 윤곽선을 따라 뾰족한 도구로 홈을 파 문양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음각 기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음각이 유약의 짙고 옅음에 따라 문양이 나타나는 것과 달리 상감은 파낸 홈 속에 다른 색깔의 흙을 넣어 흙의 색깔에 따른 문양 효과를 연출한 기법이다. 채워 넣은 곳이 흰색으로 나타길 원할 경우에는 백토(白土)를 넣었고, 검은 색 효과를 위해서는 흑토(자토, 赭土)가 사용됐다. 또 백토를 사용한 흰색 효과를 낸 것을 백상감 (白象嵌)기법이라고 하며 자토를 사용한 경우는 흑상감(黑象嵌)이라 한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쓴 때에는 흑백 상감이라고 부른다.

 

 

 


청자상감 동자보상화당초문 수주
(靑磁象嵌 童子寶相花唐草文 水注)

12세기중반 높이18.8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흑백 상감을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주가 되는 문양은 백상감으로 처리하고, 주문양의 백상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주변을 흑상감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명한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의 경우, 백상감으로 학의 몸체를 먼저 처리한 다음, 다리와 부리 부분을 흑상감으로 마감했다.
 
   상감 기법은 음각처럼 선을 새기는 게 일반적인데 모란 잎같이 넓적한 면을 얇게 벗겨내고 그곳에 백토나 흑토를 넣은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선으로 묘사한 선상감(線象嵌) 과 구별하여 면상감(面象嵌)이라고 부른다. 또 효과를 원하는 문양을 파는 대신 주변을 긁어낸 뒤 그곳에 상감토를 넣은 것을 가리켜, 마치 네거 필름과 같은효과를 냈다고 해서 역(逆)상감이라고 부른다.

 




    2-6. 철화 청자

 

 

 

 

 


청자철화 양류시문명 통형병(靑磁鐵畵 楊柳詩文銘 筒形甁)
12~13세기 높이27.8cm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를 푼 것을 붓에 찍어 그림을 그린 뒤에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로, 그렸다는 화(畵)자를 사용해 철화(鐵畵) 청자라고 부른다.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는 별로도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산화철이 주로 포함된 자토(赭土=적색 점토)를 물에 개어 붓에 찍어 썼다. 철화 청자는 과거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의미에서 그림 회(繪)자를 사용해 회고려(繪高麗), 회청자(繪靑瓷), 철회청자(鐵繪靑瓷)라는 말로도 불리웠다.

 

   철화 청자는 초기의 조질 청자(태토가 거칠고 유약도 녹청색으로 발색되는 거친 청자)에서 발전해 12세기 초반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의 철화 청자는 중국 원나라의 자주요(磁州窯)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철화 청자의 문양에는 뛰어난 회화적 솜씨가 발휘된 것도 있으나 13세기 들어 상감 기법의 문양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자 점차 쇠퇴했다.

 

 

 


청자철화 절지조충문 병(靑瓷鐵畵折枝鳥蟲文甁)
12세기전반 높이 28.9cm

 

 

 

   특히 철화 청자는 청자와 마찬가지로 산화철로 문양을 그린 다음 투명한 청자유를 입혀 재차 환원 번조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이 산화 번조 것들이다. 따라서 철화 청자의 색깔은 산화된 상태를 보여주는 갈색을 띠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무늬는 대체로 국화문, 당초문, 국화당초문 등과 같은 초화문(草花文)이 많이 그려졌다. 철화 청자의  종류로는 주둥이가 큰 대구병(大口甁)을 비롯해 매병, 기름병, 정병, 합, 호 등이 있다. 또 장고(長鼓)처럼 생긴 기형에 철화로 무늬를 그린 청자도 있다.

 

 



 

    2-7. 철채 청자

 

 

 

   

      청자철채 상감운학문 매병

         (靑磁鐵彩象嵌雲鶴文梅甁)    
      12세기 높이 35.7cm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철채 상감삼엽문 매병

(靑磁鐵彩象嵌蔘葉文梅甁) 
12세기반 높이 27.6cm 국립중앙박물관 

 

 

 

   철화 청자와 같이 산화동을 안료로 사용했지만 붓으로 그림을 그려(畵) 넣은 것이 아니라 전체를 채색하듯 발랐다는 의미에서 철채(鐵彩)라는 말을 쓴다. 철분의 농도가 짙은 경우에는 마치 흑유를 바른 것처럼 아주 검게 보이는 것도 있다. 철채는 상감 등의 기법과 함께 사용해 강한 흑백 대비를 통해 문양을 돋보이게 하는 기법으로도 쓰였다.

 

   철채 청자의 경우, 일본의 일부 학자(伊藤旭太郞)는 굽을 제외한 전체 부분을 철분이 많이 든 흙물(鐵泥)로 화장을 하듯 바른 뒤에 문양을 표현했다고 해 철니지(鐵泥地)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흑고려(黑高麗) 또는 고려 천목(高麗天目)이란 말도 썼다. 
 

 


 

    2-8. 철유 청자

 

 

 

 

 

  

철유상감 수조문 편병(鐵釉象嵌樹鳥文扁甁)
13세기후반 높이 29.2cm 국립중앙박물관

 철유상감 연화문 과형병(鐵釉象嵌蓮花文瓜形甁)
13세기후반 높이 26.6cm 국립중앙박물관

 

   철유(鐵釉) 청자의 태토보통 청자를 만들 때 쓰이는 태토와 동일하지만 유약 자체에 철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굽고 나면 유약색으로 인해 갈색 또는 흑갈색을 띠게 되는 청자를 가리킨다. 철유 유약을 바른다는 점에서, 산화철 안료로 전체를 바르고 그위에 청자 유약을 입힌 철채 청자와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최근 연구에는 중국 길주요(吉州窯)의 영향을 받았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가마터에서 철유 청자의 파편이 다수 확인됐다.

 

 

 

  2-9. 화금 청자

 

 

 

 

 

 

     청자상감 화금수하원문 편병
       13세기 높이 25.5cm국립중앙

(靑磁象嵌 畵金樹下猿文 扁甁)
박물관(오른쪽은 뒷부분의 확대)

 

 

 

   화금(畵金) 청자금을 사용해 문양을 그렸다는 의미 보다는 일부 문양에 금이 사용된 청자를 가리킨다. 다른 이름으로 금채(金彩) 청자라는 말도 쓴다.


   금은 900℃를 넘으면 기화되어 날아가 버리므로 값도 값이지만 문양으로 표현하기가 매우 힘들다. 현재 전해지는 것을 보면 상감문양 주변에 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 보통이다. 화금 표현방식은 상감 문양을 표현한 뒤, 일부에 약간의 홈을 파고 그곳에 접착제를 사용해 금분을 메워 넣는 것이 보통인데 대개 오랜 세월 탓으로 금분은 떨어져 나가고 접착제 흔적만 남은 것이 많이 있다. 상감 기법에 금채를 사용한 것은 12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지만 사례를 매우 희귀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대개 그후 13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고려사』에는 고려 대에 원나라 조정에 화금 청자를 진상해 높이 평가받은 기록이 나온다. 예를 들어 조인규(趙仁規)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세조 쿠빌라이를 만나 나눈 대화 기록이 전해지는데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인규가 화금 자기를 바쳤더니 원 세조가 화금은 그릇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냐고 물었다. 인규가 대답하길 단지 채색을 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 했다. 세조가 다시 묻기를 그 금은 다시 쓸 수 있느냐고 했다. 인규는 자기는 깨지기 쉬운 것이며 금도 떨어지고 마니 어찌 다시 쓸 수 있겠는가 라고 답했다. 세조가 그 대답을 훌륭하다 하고 이후로는 자기에 화금을 하지 말고 진헌도 하지 말라고 했다」
(仁規嘗獻畵金磁器, 世祖問曰, 畵金欲其固耶, 對曰, 但施彩耳, 曰其金可復用耶, 對曰, 磁器易破, 金亦隨毁不復用, 世祖善其對, 命自今磁器毋畵金, 勿進獻...)

 

 



 

    2-10. 진사 청자

 

 

 

 


청자 진사채당초문 접시(靑磁 辰砂彩唐草文楪匙)
12세기 높이 5,8cm 대영박물관

 

 

 

   구으면 붉은 색이 나는 산화동을, 색을 내는데 사용한 청자를 가리킨다. 산화동은 자연 상태로는 광물의 일종인 진사(辰砂)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과거에는 이를 사용한 청자를 진사(辰砂) 청자 또는 진사채(辰砂彩) 청자 라고 불렀다. 진사 청자는 문양의 액센트를 위해 점을 찍듯 바른 것을 말하며 진사채는 그릇 전체에 진사로 채색하듯 칠한 것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도 산화동을 가지고 도자기에 붉은 색을 표현한 경우가 있다. 원나라 시대에 경덕진에서는 백자 위에 산화동으로 그림을 그려 붉은 문양을 나타낸 유리홍(釉裏紅) 기법이 사용됐다. 그러나 중국의 이런 기법은 14세기 전반에 보이는 기법이다. 반면 고려의 진사 기법은 이보다 무려 1세기나 앞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사 표현방식은 상감 표현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독창적인 도자기 표현기법이라 말할 수 있다 .

 

 

 

  청자 진사채연화문표형

주자  13세기 전반 높이 32.7cm 호암미술관

 

 




 

    2-11. 연리문 청자

 

 

 

 

 

 

청자 연리문 합(靑磁連理文盒) 12세기전반 높이3.9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연리문(連理文)이란 원래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뭇가지 모습에서 연유한 문양이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무가 서로 엉켜 한 나무인양 자라는 것을 말한다. 연리문 청자는 이처럼 두가지의 흙을 태토에 함께 섞어 도자기를 빗은 것을 가리킨다.

 

   대개 회백색 청자토 백토흑토(검은 색으로 나타나는 자토(赭土))를 함께 반죽해 도자기를 빗어 이들 흙이 자연스럽게 뒤엉키며 만들어내는 문양을 즐긴 청자이다. 연리문에 쓰인 각각의 태토는 불속에서 서로 익는 온도와 수축율이 다르기 때문에 제작이 매우 힘들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고 또한 형태의 크기 역시 소형이 대부분이다.

 

   연리문 청자에 대해 일본에서는 그 문양이 메추리 깃털을 담았다고 해서 우스라데(鶉手)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꼬일 교자를 써서 교태(絞胎)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를 마블 웨어(marble ware)라는 말로 표현한다.

 

 


 

 

    2-12. 퇴화기법 청자

 

 

 

청자퇴화 작약문 주자 및 승반(靑磁堆花芍藥文注子 및 承盤)
11세기후반~12세기초  총높이 19.3cm 호암미술관

 

 

 

 

청자백니채 촉규문 매병(靑磁白泥彩蜀葵文梅甁)
13세기전반 높이 38.7cm 보스톤미술관 소장


 

 

 

 

   퇴화(堆花)는 초벌구이 위에 백토나 자토 등을 찍어 발라 도드라게 해 문양을 강조한 기법을 말한다. 퇴(堆)는 쌓아올린다는 말로 다른 흙을 살짝 쌓아올려 꽃과 같은 문양을 나타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퇴화를 포함한 더욱 포괄적인 기법을 가리는 말로 백니채(白泥彩)라는 말도 쓴다. 백니채는 초벌구이한 청자위에 백토 물을 엷게 풀어 붓에 찍어 문양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백니로 그림을 그리거나(白泥彩) 또는 점처럼 찍어(堆花) 표현한 기법이 모두 들어간다.

 




2-13. 상형청자

 

 

 

청자 헌다용 다완(靑瓷 獻茶用 茶碗)

 

 

 

청자 동자형 연적(靑磁童子形硯滴)
12세기전반 높이 11.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자기나 향로 같은 기형의 일부에 동물이나 사물의 모습을 본떠 장식한 것을 상형(象形)청자라고 한다. 상형 청자는 제작 기법에 따른 분류는 아니지만 고려청자에 특히 많이 보여 독창적인 특징 중 한 가지이다. 

 

   상형청자는 주로 향로, 연적, 주전자 등에 많이 보이며 기형의 전체 또는 일부에 동물, 상상속의 동물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표현돼있는 게 일반적이다. 1124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자신의 고려방문 보고서인『선화봉사 고려도경(善和奉使 高麗圖經)』에 고려의 청자사자 향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책속에서 ‘사자가 향 연기를 뿜어내는데 비색 청자로 돼 있으며 그 모양이 정교하고 절묘하다’라고 보고했다.

 

 

 

 

청자상감 노문 용두주전자(靑磁象嵌蘆文龍頭注子)
12세기 높이 23.2cm 리움미술관

 

 

 

 

   향로는 향을 넣고 뚜껑을 닫으며 향 연기가 동물 입을 통해 나오는 구조로 된 것이 일반적이다. 향로 뚜껑에 표현된 상형 동물로 기린, 거북, 사자, 원앙 등을 꼽을 수 있다. 불전이나 왕실에 사용했던 만큼 위엄에 가득한 동물이나 상상속의 동물이 주로 표현됐다.

 

   주전자의 경우는 뚜껑 일부에 용이나 인물의 형태가 표현된 경우가 있다. 연적은 주로 형태 전체가 이용되고 있는데 거북, 원숭이, 오리 등의 동물 이외에 어린 동자, 동녀의 모습을 빗어 연적으로 만든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정확히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청자로 나한상과 같은 인물상을 만든 것들이 전한다.

 

 



    2-14. 명문(銘文) 청자

 

 

 

 

청자상감 시문연당초문 표형병(靑磁象嵌詩文蓮唐草文瓢形甁)
12세기중엽 높이 39.2cm 국립중앙박물관

 

 

   명(銘)은 새긴다는 뜻으로 고대에 청동기를 만들 때 제작 연유를 그릇 바닥이나 안쪽에 새긴데서 유래한다. 청자의 명문은 뾰족한 도구로 새겨 글자를 남긴 것과 상감으로 글자를 나타낸 것 두 가지로 나뉜다.   

 

 

 

 

청자 연당초문 효구명 정병(靑磁蓮唐草文孝久銘淨甁)
높이 36.7cm  네즈(根津)미술관

 

 

 

 

 

13-2청자상감 상약국명 합(靑磁象嵌尙藥局銘盒)
12세기 높이 9.6cm 한독의약박물관

 

 


   명문의 내용은 크게 시문을 새기는 것에서 제작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이라고 여겨지는 글자그리고 제작한 연도, 즉 간지를 새겨넣은 것 등으로 나뉜다. 고려시대 도자기제작가 이름을 분명히 밝히 사례가 한두 경우 전하는데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된 고려백자 호(高麗白磁壺)에는 바닥에 「순화 4년 계사년에 태묘의 제일실에 쓰일 제기를 제기장 최길회가 제작했다(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享器匠崔吉會造」고 적혀 있어 993년의 도공 최길회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일본 네즈(根津)미술관에 있는 청자양각연당초문 정병 바닥에는 「효구각(孝久刻)」이라고 적혀있어 양각으로 문양을 새긴 분업체제의 도공 이름이 효구인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외에 제작에 관련된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로 「조청(照淸)」「효광(孝光)」「지(志)」「효문(孝文)」「효자각(孝子刻)」「유(兪)」등이 확인되고 있다.

 

   간지명(干支銘) 청자는 청자의 제조 연대를 확인하는데 결정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매우 소중히 다뤄진다. 간지명 청자는 상감 기법의 대접이나 접시 등에 많이 보이며 지금까지 발굴된 간지명이 대부분 13세기 후반에 집중된 것이 특징이다.

사례를 보면 「기사(己巳, 1269년)」「경오(庚午, 1270년)」「임신(壬申, 1272년)」「계유(癸酉, 1273년)」 「갑술(甲戌, 1274년)」「임오(壬午, 1282년)」「정해(丁亥, 1287년)」등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간지를 모두 60년을 내려잡아 「기사」를 1329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 외에 원나라 말기의 연호인 「지정(至正)」이라고 쓴 접시전남 강진군 사당리 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지정은 원나라 15대 황제인 혜종때 사용하던 연호로 1341년에서 1367년까지 쓰였다.

 

 

 

    2-15. 녹청자 綠靑磁

 

 

 

 

         

       녹청자 병(綠靑磁甁) 10세기~12세기
높이 27.2cm 개인

녹청자 다완(綠靑磁茶碗) 10세기중반~11세기중반
입지름 15.5cm 개인 

 

 

   조악하기는 하지만 청자 태토를 사용해 짙은 녹색이 나는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를 녹청자라고 한다. 녹청자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신라시대 토기에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회유(灰釉) 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는 설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뼈를 담는 골호에 녹청자로 만든 사례가 더러 있다.
 
   두 번째는 초기에 고려청자가 보급되는 과정에 고급 청자와 달리 일반 서민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약간 수준이 떨어지는 청자가 보급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설이다.

 

   초기의 고려청자는 중국의 발달된 월주요(越州窯) 계통의 영향을 받아 고급청자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런 월주요 계통의 다완은 갑발(匣鉢)을 씌워 제약해야 하는 등 제작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청자 문화가 점차 확산되면서 모래 등 잡물이 섞인 청자 태토를 사용해 유약도 회유와 흡사한 것을 써서 구으면 녹갈색을 띠는 청자를 만들어 널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초기의 대표적인 녹청자 가마로 인천 경서동, 현재 인천국제컨트리클럽 안에 있는 가마터가 유명하며 그 외에 전국에 약 50여 곳의 녹청자 가마터가 확인되고 있다. 또 지난 1983년과 1984년에 발굴된 완도 앞바다의 침몰선에서 나온 3만여점의 도자기는 거의가 녹청자 도자기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병, 대접, 접시, 다완 등 민간에서 사용하는 생활용기였다.

 

 

 


 

    2-16. 고려백자

 

 

 

 

 

고려백자 상감모란유문 병(白磁象嵌牧丹柳文甁)
12세기중반 높이 28.8cm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시대하면 흔히 청자만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고려시대에도 전시기에 걸쳐 백자가 제작, 생산됐다. 고려 백자는 청자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해 기형, 문양, 제작 기법면에서 청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렇지만 도자기를 빗는 흙, 즉 철분이 덜 들어 있는 백토를 사용한 것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철분이 많이 든 태토로 빗은 도자기가 청자이며 철분이 덜 섞인 백토를 찾아 거기서 다시 철분을 제거한 뒤에 그 흙을 태토로 사용해 만든 도자기가 백자이다.

 

 

 

                                        고려백자 양각연화문 접시(高麗白磁 陽刻蓮花文楪匙)12세기 입지름 15.1cm 호암미술관

 

 

 

   따라서 제작 기법상의 분류로 치자면, ‘시대’를 가리키는 접두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청자, 백자라고 불러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려를 대표하는 도자기로 청자가 거론되고 또 고려청자라는 말이 일반화되어 왔기 때문에 백자 중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을 가리켜 편의상 고려 백자라고 부르게 됐다.

   최근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고려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초기 청자와 거의 같은 시기인 10세기 초반인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백자의 종류는 병, 매병, 합, 접시, 대접, 향로 등 청자의 종류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양이 적을 뿐이다.

 

 

 

 

고려백자 순화4년명 항아리(高麗白磁 淳化4年銘 壺)
993년 높이 35.3cm 이화여대박물관 보물 237호

 

 

 

 

   고려 시대의 백자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말까지 청자가 쇠퇴하면서 함께 퇴락해 거의 생산이 중단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시대 백자를 대표하는 자료로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고려백자 순화4년명 항아리 꼽을 수 있다. 이 항아리의 바닥에는 「순화4년 계사 태묘제1실, 향기장 최길회조(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亨器匠 崔吉會造)」라고 돼있다.

   순화는 중국의 북송시대 태종 때 쓰던 연호로 990년에서 995년까지 사용했다. 순화 4년은 고려로 치면 성종 12년, 즉 993년에 해당한다. 높이 35.3cm의 길죽하게 생긴 이 항아리는 몸통의 색깔이 누르스름하다. 또 태토 역시 철분이 많이 섞인 청자토가 아닌 백토에 가까워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자로 보고 있다.

 

 


 

    2-17 청자 기와

 

 

 

 

 

청자양각 모란당초문 기와(靑磁陽刻 牧丹唐草文 瓦) 12세기중반
높이12.2cm, 길이 40.9cm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사』에는 고려시대에 궁궐 지붕을 청자 기와로 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청자기와에 대한 것은 기록만 전할 뿐 이를 입증할 실물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1927년 일본인 학자에 의해 개성 만월대의 고려 궁궐터에서 청자기와 조각 하나가 발견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후 1964년과 196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강진의 사당리 가마터본격적으로 발굴 조사하면서 수십 조각의 청자기와를 발견해내 고려사의 내용이 사실임을 재차 입증했다. 그리고 1990년 전후해 중국을 통해 북한의 개성에서 새로 발굴된 청자기와가 몇 점 국내에 전해지기도 했다. 

기와는 물내려가는 골을 만들어주는 암기와와, 암기와를 이어주는 수기와로 나뉜다. 또 이런 암수 기와들이 처마 끝에서 마무리될 때 마구리처럼 막아주는 기와로 암막새기와와 숫막새기와가 있다. 청자기와 중 화려한 문양이 들어있는 것은 대개 이들 막새기와다. 막새기와에는 주로 당초문, 모란당문, 연화문 등이 사용됐으며 기법으로는 양각, 음각, 반양각 등 다양한 기법이 사용됐다.  

 

   참고로 『고려사』에서 청자기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가 18권, 의종11년4월 병신조
「사월 여름 병신 초에 대궐 동쪽에 이궁이 완성돼 이름을 덕수궁, 천녕궁이라 했다.(...)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대평정을 만들었고 태자에게 편액을 쓰게 했다. 대평정 곁에는 이름난 화초와 갖가지 과일 나무를 심었으며 고려의 진귀한 물건을 배치해 놓았다. 또 정자 남쪽에 연못을 파고 관난정을 세웠다. 그 북쪽에 양이정을 지었는데 청자(靑瓷)로 지붕을 이었다.」
(夏四月丙申朔, 闕東離宮成, 宮曰壽德曰天寧(...) 毁民家五十區, 作大平亭,命太子書額, 旁植名花異果, 高麗珍玩之物布列左右, 亭南鑿池, 作觀灡亭, 其北構養怡亭, 盖以靑瓷.)

 

 



    2-18 매병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12세기중반 높이 42.0cm 간송미술관

청자음각 연화문 매병(靑磁陰刻蓮花文梅甁)
12세기 높이 39cm 목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려청자 중에서도 특히 12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많이 만들어진 형태의 도자기이다. 이런 모습의 병은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외형을 보면 좁은 입주둥이가 잘룩하게 마무리되고, 이어지는 어깨가 크게 벌여졌다가 다시 빠르게 좁아지는 형태이다.

매병의 기본 형태는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중국 매병과 고려청자 매병은 12세기 전반 이후부터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고려화(化)된 매병은 어깨가 둥글게 떡 벌어지고, 몸체를 따라 좁아진 동체의 윤곽선이 굽바닥 바로 위쯤에서 살짝 밖으로 튕겨나가는(外反) 듯한 모습이 특징이다. 이같은 형태는 단정하면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를 전해준다. 반면 중국 매병은 어깨선이 그대로 밋밋하게 바닥까지 흐르는 게 보통이다.   
 
   매병의 용도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매병을 술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매병이란 이름에 대해서는 명나라 황제가 이 병에 매화 가지를 꽂아놓고 보았더니 좋았다고 해서 ‘매병(梅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태안 앞바다에서 건져낸 고려 매병에는 ‘꿀을 담아 보낸다’내용의 죽간(竹簡)이 꽂혀 있어 꿀은 물론 그와 비슷한 액채를 담던 용기로 두루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서 나온 목간에는 매병을 가리켜 「성준(盛樽)」「준(樽)」이란 글자로 표기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매병을 일반적으로 술항아리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2-19 정병

 

 

 

 

 

청자양각 포류수금문 정병(靑磁陽刻蒲柳水禽文淨甁)
12세기 높이 36.7cm 호림미술관

         청동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
11~12세기

 

   정병(淨甁)은 원래 인도에서 승려가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물병에서 유래했다. 범어로는 쿤디카(kundika)라고 한다.

이 병이 차츰 부처님을 떠받드는 공양 도구로 쓰이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님의 구제의 상징이나 자비심을 표현하는 상징으로도 쓰였다. 특히 관음보살이 가지고 있는 지물(持物)로 자주 등장한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보이는 정병.

 

 

 

   청자 정병은 청동기로 만든 청동 정병과 거의 비슷해 청동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려 시대의 청동 정병에 대해서는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남겨 놓은 기록이 있다. 거기에는 ‘정병은 목이 길고 배가 불룩하며 옆으로 물을 따르는 주둥이가 하나 나있다. 중간에 두 마디가 있는데 물레 흔적이다. 뚜껑과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턱 위에 다시 작은 목이 나있어 비녀나 붓의 형상을 띤다. 귀인, 나라의 관청, 사찰, 도관 그리고 민가에서 두루 사용하며 주로 물을 담아 썼다. 높이는 1자2치, 몸통둘레는 4치, 용량은 3되이다(淨甁之狀 長頸脩腹 旁有一流 中爲兩節 仍有轆轤. 蓋頸中閒 有隔. 隔之上 復有小頸 象簪筆形. 貴人國官 觀寺民舍 皆用之 惟可貯水. 高一尺二寸 腹徑四寸 量容三升)’라고 했다.(『고려도경』권31「기명(器皿)」)라고 돼있다.

 

   이 기록을 보면 정병은 물을 담아 사용했으며 사찰이나 도교의 도관 뿐아니라 왕궁, 귀족 그리고 관청, 민간 등에서 두루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2-20 향로

 

 

 

 

청자사자형 삼족향로(靑磁獅子形三足香爐)
12세기전반 21.1cm 국립중앙박물관 

청자구용형삼족향로(靑磁龜龍形三足香爐)
12세기 높이 20.4cm 리움미술관

 


   절에서 향 공양을 위해 청자로 만들었던 도구로 흔히 향 뚜껑은 흔히 사자, 기린, 원앙 등 과 같은 여러 동물의 모습을 본떠 나타냈다. 또 연꽃 모습을 한 것 이외에 연꽃 위에 칠보문을 투각으로 올려놓은 것도 있어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고려의 상형 청자를 대표하는 기형이다.

 

 

 

    2-21 주전자

 

 

 

 

청자투각 동자연당초문 주자 및 승반(靑磁透刻童子蓮唐草文注子,承盤)
12세기전반 21.2cm 국립중앙박물관   

 

 

 

 

   절에서 차를 공양하거나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 차나 술을 담아 마시는 용기로 사용했다. 한자로는 주자(注子)라고 한다. 청자로 만들어진 주전자의 형태는 당나라 때 유행한 금동, 은동제 주전자의 외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보다 앞서 주전자는 병이나 항아리의 일부가 변형되어 주전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표주박형 주전자는 표주박형 병에 물따르는 수구(水口)와 손잡이(把守)를 단 것이다.

 

   주전자는 수구와 손잡이가 밖으로 돌출해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매우 허약해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또 주전자를 올려놓는 받침, 승반(承盤)까지 모두 갖춘 경우는 더욱 흔치 않다. 주전자의 형태는 시대와 제작지에 따라 다르기도 한데 일반적으로 길죽한 형태의 주전자가 둥근 형태의 주전자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2-22 다완

 

 

 

 

청자 잔 및 잔탁(靑磁盞, 托盞)
12세기 높이 8.2cm 리움미술관

 

 

 

 

청자상감 국화문 잔 및 상형 잔탁(靑磁象嵌菊花文盞, 床形盞托)
12세기 높이9.5cm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상감모란문잔탁(靑磁象嵌牧丹文盞托)
13세기 높이 10.1cm 개인

 

 

 

 


   우리말로 찻잔이다. 9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선종의 보급과 함께 좌선에 도움이 되는 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고 따라서 많은 수의 찻잔, 즉 다완이 제작됐다. 차마시는 습관은 고려에도 전해져 고려청자 중 초기 청자는 전체의 약 90% 가 다완일 정도로 많이 생산됐다.

 

   초기의 다완은 뒤집어 놓으면 삼각형을 이루듯이 측면의 선이 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의 음차 습관과도 관련이 깊은데 고려시대에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차(煎茶)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직선적 외관을 가진 다완은 12세기 이후가 되면 받침(잔대, 盞臺)이 곁들여지는 잔 세트로 바뀐다. 또 잔과 잔대가 곁들여진 찻잔 세트가 되면 찻잔의 형태 역시 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작은 술잔형이 된다.

 


 

 

    2-23 모란문

 

 

 

 

청자상감 진사채모란문 매병(靑磁象嵌辰砂彩牧丹文梅甁)
12세기중반 높이34.6cm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상감 모란문 합(靑磁象嵌牧丹文盒)
12세기 높이 4.1cm 국립중앙박물관

 

 

 

 

   모란은 화사하고 탐스러운 꽃이 자랑인데 중국 당나라때에는 국화(國花)로 여겨질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이후 모란꽃은 꽃중의 왕으로 여겨지며 부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정착하게 됐다. 최상급 고려청자는 주로 왕실, 권문 세가, 사찰 등에서 사용했으므로 자연히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 문양이 자주 새겨졌다.

음각으로 모란문을 새긴 매병과 흑백 상감을 사용해 화려한 모란꽃과 모란잎을 장식한 항아리 등이 유명하다.

 

 

 

    2-25 국화문

 

 

 

청자상감 국모란문 장경각병(靑磁象嵌 菊牧丹文 長頸角甁)
12세기 높이 32.8cm 호암미술관

청자상감 국문 표형주자(靑磁象嵌 菊文 瓢形)
13세기 높이 28.8cm 호림박물관

 

 

   국화가 도자기 문양으로 등장하는 일은 중국에서는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원래 중국에서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문인화로 많이 그려지는 대상이다. 하지만 이는 문인화가 널리 보급된 명나라 말기 이후의 일이다. 중국 도자기에 국화 그림이 등장하는 것은 청나라 때 만들어진 채색 도자기 정도이다. 이 경우에도 문양이 아닌 채색 그림의 일부로 등장한다.

 

   따라서 고려청자의 국화문은 매우 독자적인 문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청자의 국화 문양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연구된 바가 없다. 또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국화문은 고려청자 중에서도 상감 기법의 청자에 많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경우에도 상감 기법을 사용해 직접 문양을 새겨 넣은 것과 도장을 찍듯이 인화 기법으로 처리한 것 두 종류가 있다. 

 

   고려청자에는 다양한 형태의 국화문이 사용됐는데 단독으로 쓰인 것, 연속 문양으로 쓰인 것, 국화잎 한 두개를 달고 있는 것, 위에서 본 국화꽃과 옆에서 본 국화꽃을 한 줄기에 나란히 표현한 것. 국화꽃 주변에 국화잎을 덩굴처럼 반복한 것 등등이 있다. 특히 덩굴잎이 곁들여진 문양은 국당초문(菊唐草文)이라고 한다.  

 

 



     2-26 포류수금문




 

청자상감 위로수금문 도판(靑磁象嵌葦蘆水禽文陶板)
12세기 20.5x15.9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청자상감 포류수금문 표형주전자(靑磁象嵌浦柳水禽文瓢形注子)
12세기 높이 36.1cm 국립중앙박물관




   포류수금(浦柳水禽)이란 말 그대로 하면 물가의 버드나무와 물새란 뜻이다. 그런데 도자기문양에서는 보다 문학적으로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물가에서 물새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문양을 가리킨다. 포류수금문은 문양으로 보면 단순 반복이 불가능하다. 그 자체가 매우 회화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예 도안이나 문양으로 사용된 사례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매우 드물다. 


   고려청자에는 특히 부안유천리가마 일대에서 이같은 포류수금문 청자가 많이 구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포류수금문이 등장하는 청자는 일부 매병도자기 판(陶板) 그리고 완(盌) 등에 한정돼 있다.  





자상감 포류수금문 완(靑磁象嵌浦柳水禽文盌)
12세기 입지름 13.9cm 국립중앙박물관




   포류수금문의 유래에 대해서 과거 최순우 前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중국 요(遼)나라 때의 무덤에 이런 내용의 벽화와 연관지어 설명한 적이 있다. 또 일설에는 고려 의종때 왕이 신하들과 함께 뱃놀이를 자주 즐긴 적이 있는데 당시의 연회 모습에서 문양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2-27 포도동자문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표형주전자
(靑磁象嵌葡萄童子文瓢形注子)
12세기후반~13세기 높이38.5cm
오사카시립동야도자미술관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사이개호
(靑磁象嵌葡萄童子文四耳蓋壺)
12세기 높이 35.8cm 리움미술관




   중국 북송시대가 되면 오대(五代)의 전란이 수습되면서 사회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현세의 행복을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희망하며 일상에 사용되는 여러 생활용품 속에 다양한 길상적 의미지를 담았다. 포도 문양 역시 이때부터 다산(多産), 다자손(多子孫)을 상징하는 의미지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송과 끊임없이 교류하던 고려도 이와 같은 중국 사회의 유행을 받아들여 포도 문양을 자손 번성의 상징으로 적극 사용한 듯하다. 고려청자의 포도 문양은 대개 동자가 곁들여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포도 문양의 유래와 의미를 더욱 분명히 말해주는 요소이다. 고려청자속의 포도동자문은 주로 호리병과 주전자에 많이 등장한다.






     2-28 해무리굽




 

청자완(靑磁碗) 고려 10세기 높이5.0cm




   초기 고려청자중국 월주요에서 구워진 중국 청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월주요의 청자다완은 굽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인데 다완을 뒤집어보면 굽 바닥에 둥그런 넓은 띠가 둘러진 것처럼 보인다. 중국에서는 이를 중국 고대의 납작하고 둥근 옥을 닮았다고 옥벽저(玉璧底)라고 불렀다. 저는 바닥이란 뜻이다. 





청자완(靑磁碗) 당 9세기 월주요
높이3.8cm 절강성문물고고연구소





   한국에서는 최순우 前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런 모양의 굽에 우리말을 지어 붙이며 마치 햇무리처럼 보이지 않냐고 해서 햇무리굽이란 이름을 붙였다. 햇무리굽은 한자로 일운문(日暈文)굽이라고 표기한다. 전라남도 해안일대에서 9세기에서 10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초기청자는 대부분이 이같은 햇무리굽을 가진 청자 다완이다.





     2-29 굽받침




 


청자양각당초문접시 12세기 높이 1.9cm 
아래 사진의 가운데 6개의 규사목 받침을 고인 흔적이 있다.



   도자기를 가마에 넣고 구을 때 균형을 잡기 위해 평편한 도지미(陶枕)를 받쳐 놓고 굽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가마 속에서 굽는(번조, 燔造) 동안 유약이 녹아내리면서 유약이 도자기와 도지미 사이에 스며들어 둘이 서로 달라붙게 된다. 이를 무리하게 떼어내게 되면 도자기 밑바닥이 상해 상품 가치를 잃는다. 따라서 도지미와 도자기가 잘 분리되도록 또다른 받침을 고여 굽는 되는데 이때 굽에 받치는 것을 굽받침이라 한다.   


   초기청자중국 월주요 제작방식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불에 잘 견디는 흙, 즉 규석이 많이 들어간 흙을 작게 빗어 굽받침으로 사용했다. 이런 굽받침은 불에 잘 견디는 흙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내화토 받침, 내화토목(耐火土目)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 중기가 되면 순전한 규석 덩어리인 뽀얀 차돌(규사, 硅砂)을 구해 이를 잘게 부숴 굽받침으로 사용했다. 이것이 규사목(硅砂目)이다. 그리고 후기로 내려오면 그냥 모래를 뿌리는데 그친 모래 받침, 태토를 빗어 받친, 태도 비짐눈을 사용했다.

모래를 사용한 경우에는 떼어낸 이후에도 바닥이 거친 상태 그대로 여서 강가의 큰 자갈로 바닥을 문질러 남아있는 모래를 털어낸다.






     2-30 환원번조





 

청자음각 연화문 매병(靑磁陰刻 蓮花文 梅甁)
12세기 높이 38.9cm 선문대학교 박물관




   번조는 굽는다는 뜻의 한자어이다. 환원 번조(還元燔造)는 가마 속에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넣고 구을 때 한참 불을 땐 뒤에 불구멍을 닫아 산소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즉 산소 공급을 막은 채로 도자기를 굽는 방식을 가리킨다. 반면 산화 번조는 불구멍을 열어놓고, 즉 산소를 계속 공급하면서 굽는 것을 말한다. 



   도자기 가마에 불을 때면서 1,100℃ 이상으로 온도가 올라가면 가마의 불구멍을 막는데 이때부터 가마 내부에서는 환원 번조가 시작된다. 즉 불구멍을 막으면 외부에서의 산소 공급이 막히는데 이때 가마 내부는 산소가 부족해 불완전연소 상태가 된다. 불완전연소 상태가 되면 가마 내부는 부족한 산소를 찾아 태토나 유약에 포함된 산소까지 빼내서 연소시키려고 하게 된다.


   바로 이때, 청자 태토나 유약에 들어있는 철분 속에서도 산소가 빼앗기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를 학술적으로 말하면 산화제이철(FeO)에서 산화제일철(FeO)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이 이뤄지면 철 본래의 색인 푸른색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자의 푸른색이 만들어지는 비밀이다. 또 이렇게 굽는 방법을 환원 번조라고 한다. 

 

   청자를 구울 때 제대로 불구멍을 막지 못하거나 어떤 이유로 산소가 들어가게 되면 환원 번조가 아닌, 산화 번조가 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태토나 유약 속의 철분이 본래의 푸른색이 아닌 누르스름한 빛을 띄게 된다. 청자 색의 일부가 누렇게 된 것에 대해 흔히 산화(酸化)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청자가 땅속에 파뭍혀 있는 동안 산성(酸性)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니다. 가마 속에서 구워질 때 산소가 들어가서 산화 번조되었다는 의미이다. 






     2-31 빙열, 간뉴 혹은 뉴




 

빙렬이 보이는 청자 확대사진





   청자 표면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벌집 또는 작은 그물망처럼 보이는 미세한 금이 무수히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빙열(氷裂)이라고 한다. 빙열은 얼음판에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미술 시장에서 이를 가리켜 ‘뉴가 들어 있다’고도 한다. 이것은 도자기의 미세한 금을 가리키는 일본말인 간뉴(貫入 또는 慣乳)가 한국에서 방언화된 말이다. 

 

   청자 표면의 빙열은 태토의 수축율과 유약의 수축율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인 것으로 결코 흠이 아니다. 청자는 태토로 형태를 빗은 뒤에 유약을 바르고 약 1,200~1,300℃로 굽게 되는데 이때 유약은 높은 온도에 녹아 유리와 같은 층이 된다. 또 태토 역시 고온에 녹으면서 유리질화(瓷化)되는데 이를 자화(瓷化)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고온에 구워진 도자기는 가마 내에서 식힌 뒤 꺼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식히는 과정에서 완전히 유리가 된 유약층과 유리질로 변한 태토는 그 두께나 성분 때문에 수축율이 다르게 된다. 보통 그 차이가 10% 이상 된다고 할 정도로 크다. 특히 더 많은 수축되는 태토 때문에 겉에 씌워진 유약층에 금이 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빙렬이다.


   둘 사이의 수축율 차이가 10% 이상 되면 유약층이 들고 일어나 떠버려서 그릇으로 사용할 수 없다. 경험 많은 도공에 말에 따르면, 가마에 불때기를 멈추고 식기를 기다리는 동안 ‘쩍’ ‘쩍’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고 한다.






     2-32 고려청자 가마터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가마터.(1964년)
들판이 맞닿아있는 안쪽 산기슭에 가마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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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리 발굴사진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가마는 지방호족의 영향아래 전라도 일대, 충청도, 경기도, 개성 인근의 황해도 등지에 다양하게 분포했다. 그러나 고려 왕권이 강력해지고 정치 제도가 완성되는 11세기 후반부터는 차츰 전라남도 강진(康津)전라북도 부안(扶安) 일대로 집중되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이 두 지역 이외에 고급 청자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 청자의 뛰어난 솜씨를 말해주는 청자는 모두 이 곳에서 만들어졌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강진의 대표적 청가 가마터가 있는 대구면 사당리(大口面 沙堂里) 가마터는 1910년부터 알려졌으나 본격적인 발굴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1965년부터 이뤄졌다. 이곳에서는 청자기와 조각이 확인됐을 뿐 아니라 12세기를 대표하는 비색 청자와 상감청자의 파편이 다수 발굴됐다.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保安面 柳川里) 가마터는 강진 사당리 가마터와 함께 12세기 절정기의 청자를 굽던 가마로 인근에 40여개의 가마터가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논밭으로 개간돼 그 흔적 조차 확인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이곳에서 발굴된 도자기 파편은 이화여대박물관에 다수 소장돼있다.


   관영으로 운영되던 강진과 부안의 청자 가마는 14세기 후반이 되면 고려 왕조의 쇠퇴와 함께 맥이 끊기게 된다. 이 무렵 청자 기술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졌는데 약 50여년 뒤인 세종때 조사한 기록(세종실록지리지)을 보면 당시 전국 3백여 곳 자기소와 사기소가 있는 것으로 전한다.






    2-33 중국의 고려청자 평가


 

   과거 세계 최고의 도자기 제조기술을 보유했던 중국도 고려청자만큼은 그 수준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당시의 자료로 널리 인용되는 것 중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나라 태평노인이란 사람이 지은 『수중금(袖中錦)』이 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은 1123년(인종 1년) 여름 송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약 한 달간 송도에 머물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적은 보고서이다. 여기에 당시 고려의 청자에 대한 언급이 세 군데 나온다.


1) 그릇은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것이 많고 청자는 귀하게 여기고 있다.
   (器皿多以塗金, 或以銀, 而以靑陶器爲貴)


2) 도자기 색이 푸른 것은 고려 사람들이 이를 비색이라 부른다. 이는 근래 제작이 매우 정교해졌으며 색과 윤택이 몹시 뛰어나다. 술 담는 항아리는 참외 모습을 띠었는데 위에 뚜껑이 있고 연꽃 위에 오리가 엎드린 형태를 띠었다. 또 완, 접시, 술잔, 사발, 화병, 탕잔도 잘 만들었는데 모두 (중국) 정요의 그릇을 모방했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술 항아리만 다른 것과 다르므로 특별히 이를 나타낸다.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酒尊之狀如瓜, 上有小蓋, 面爲荷花伏鴨之形, 復能作盌葉杯甌花甁湯琖, 皆竊放定器制度, 故略而不圖, 以酒尊異於他器, 特著之.)
*고려 도경은 일부 내용에 대해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여기에 그린다는 말을 사용했다. 현재 서긍이 그렸다는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3) 사자모양 향로 역시 비색이다. 위는 쭈그려 앉은 짐승처럼 돼있고 아래는 벌어진 연꽃이 이를 떠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 가운데 이것이 가장 정교하고 절묘하다. 그 나머지인 즉 (중국) 월주가마의 옛 비색이나 (중국) 여주의 새로운 가마에서 구운 그릇과 대개 비슷하다.
(狻猊出香, 亦翡色也, 上爲蹲獸, 下有仰蓮以承之, 諸器惟此物最精絶, 其餘則越州古秘色, 汝州新窯器, 大槪相類)





   또 남송시대의 수장가였던 태평노인『수중금(袖中錦)』에는 천하 제일의 물건을 나열한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고려청자가 들어가 있다.
    監書, 內酒, 端硯, 洛陽花, 建州茶, 蜀綿, 定磁, 浙漆, 吳紙, 秦銅, 西馬, 東絹, 契丹鞍, 夏國劍, 高麗翡色, 興化軍子魚, 福州荔眼, 溫州掛, 臨江黃雀, 江陰縣河豚, 金山劍鼓, 簡寂觀苦荀, 東箤門把鮓, 京兵, 福建出秀才, 大江以南士大夫, 江西湖外長老, 京師婦人, 皆爲天下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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