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쓰는 도자기란 말은 도기와 자기를 합친 말이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이 두 단어는 엄연히 구분된다. 사용하는 흙과 굽는 온도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도기(陶器)는 도토(陶土)라고 부르는 흙을 사용해 비교적 저온에서 굽는 반면, 자기(瓷器)는 자토(瓷土)를 사용해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다.
도토는 우리가 보통 찰흙이라고 부르는 붉은색 진흙을 말한다. 이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구우면 대개 1,200℃ 이상의 온도에서는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흙에 들어 있는 규석 성분은 높은 온도에서 녹아 뼈처럼 굳어져 형태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도자기 제작과정에서는 특히 이를 자화(瓷化)된다는 말로 표현한다. 즉 도토에는 이런 규석 성분이 상대적으로 적어 높은 온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집형 장군(家形俵甁) 6~7세기 높이 35cm 리움미술관
반면 자토는 대개 1,300℃ 이상을 견디는 흙을 가리키며 대개 돌가루로 돼 있다. 특히 중국 강소성 고령산에서 나는 자토가 가장 좋아 이를 고령토라고도 부른다. 또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토는 대개 흰색을 띄어 백토(白土)라고 불렀다. 이 백토 속에는 규석이 풍부히 들어 있어 높은 온도에 구워도 형체가 잘 변하지 않는다. 또 장석이 풍부해 고온에서 장석이 녹으며 유리처럼 변해(유리질화되어) 일반 질그릇과는 달리 전혀 물을 흡수하지 않는 구조가 된다.
청화백자오동학문호(靑華白磁梧桐鶴文壺)
18세기 높이 18.5cm 선문대학교 박물관
도기는 우리말의 질그릇에 해당하며 도공(陶工)이란 도토로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1-2. 사기(砂器)란
자기를 만들 때 사용했던 백토는 대개 돌가루인 사토(砂土)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사기(砂器)라고 했다. 『훈몽자회(訓蒙字會,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서)』에도 자기를 우리말로 사기(砂器)그릇이라고 했다. 따라서 자기와 사기는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백자를 백사기(白砂器), 청자를 청사기(靑砂器), 일본 자기를 왜사기(倭砂器), 중국자기를 당사기(唐砂器)라고 썼다. 또 자기를 만드는 사람을 사기장(砂器匠), 자기를 만들던 마을을 사기마을, 사기소(沙器所)라고 했다.
18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사기는 자기의 속어다’ 라고 돼있다. 흔히 사기라는 말이 들어있는 분청사기는 자자가 들어있는 청자와 백자와 다른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모두 자기를 가리킨 것이다.
분청사기 철화어문 장군(粉靑沙器鐵畵魚文俵甁)
15~16세기 높이 17cm 국립중앙박물관(동원 기증품)
1-3. 자(磁) 자와 자(瓷) 자
요즘은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도자기를 한자로 陶磁器라고 쓴다. 이는 일본에서 도자기를 말할 때 이런 한자를 사용한데서 비롯한 것이다. 원래 도자기의 우리말식 한자표현은 陶瓷器이다.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고유섭 선생은 瓷 자와 磁 자의 차이에 대해 밝혀 놓은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磁 자는 자기를 표현할 때도 쓰지만 그보다는 자석, 자기, 자침 등에 더 많이 사용되는 글자라고 했다. 瓷자는 『고려사』에서부터 보이는 글자로 그 연원이 오래되고 뜻이 분명하다고 했다.
즉 瓷자 아래에 보이는 와(瓦)는 요즘은 기와라는 뜻으로만 사용되지만 예전에는 그릇을 나타내는 말에 공통적으로 쓰였다. 옹기의 옹(甕)자에도, 병을 가리키는 병(甁)에도 와(瓦)자가 들어간다. 옛날에는 그릇은 모두 도토(陶土, 진흙)로 만들었는데 瓦자는 고대부터 이 도토로 만든 것을 뜻했다.
*이 사이트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기준으로 자(磁)자로 통일했다.
1-4. 토기(土器)는?
흔히 신라 토기, 가야 토기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이 말은 일상 생활속에서 굳어진 관용어일 뿐 학술 용어는 아니다. 뿌리를 살펴보면 일본이 유럽에서 근대적 학문을 받아들일 때 수입해 사용한 말이다. 원래 한국은 물론 중국에도 토기란 말은 없었다. 토기에 해당하는 그릇은 모두 도토(陶土)로 만든 도기(陶器)였다.
유럽의 근대 학문에서 도자기를 굽는 온도에 따라 분류한 것이 있다. 이를 보면 500~600도에 구워진 것을 토기(earthen ware), 1,000도 이상에서 구워진 것을 도기(pottery), 그리고 1,200도에서 구워지는 것을 석기(炻器, stone ware) 그리고 1,300도 이상에서 구워지는 것을 자기(porcelain)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신라토기, 목항아리와 그릇받침
가야 5세기 높이 90.1cm 부산대학교 박물관
이를 받아들인 근대 일본은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이 내용을 적용하면서 삼국 시대, 고려시대 초기에 구워진 도기를 모두 토기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신라 토기 중에는 1,100도나 1,200도에서 구워진 것들도 많이 있어 이런 이름은 잘못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신라토기 굽항아리
6세기 높이 48.5cm 국립중앙박물관
1-5. 청자와 백자
청자와 백자는 구워진 도자기의 색깔이 파란 것과 하얀 것을 보고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이지만 실은 도자기를 빚는 흙과 유약이 전혀 다르다. 청자를 만드는 흙, 즉 청자 흙은 철분이 많이 함유된 비교적 거친 점토를 그대로 태토(도자기를 만드는 재료 흙)로 사용한다. 그러나 백자는 철분이 적게 든 흙(백토)을 골라 잘 정제해 불순물과 철분을 제거한 뒤에 태토로 사용한다.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
13세기중반 높이 41.7cm 국보 68호 간송미술관
청자에는 대개 나무를 태운 재에 장석 등을 넣어 유약으로 사용한다. 이는 과거 도기를 구울 때 가마 속에서 나뭇재가 날려서 그릇 표면에 달라붙은 채 녹은 것이 맑고 투명한 파란색을 띤 데서 착안한 것이다. 청자 유약은 대개 소나무의 재를 사용하는데 재 속의 철분과 태토에 포함된 철분이 불의 조화를 거치면서 아름다운 비색의 청자색을 낸다. 백자 유약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고 질 좋은 백토를 물에 개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자철화 포도문 항아리(白磁鐵畵葡萄文壺)
17세기 높이 53.9cm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6. 고려청자와 고려백자
고려 청자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를 가리키며 조선 백자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백자를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은 편의적인 것으로 엄격하게 보자면 고려 시대에 청자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고려 시대는 통일 신라의 맥을 이어받아 산화동(酸化銅), 즉 구리 성분이 든 유약을 발라 구워 겉면이 녹색으로 보이는 녹청자(綠靑磁)도 다수 제작됐다. 또 흑갈색이 나는 흑유 자기도 구워서 민간에서 많이 사용했다.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靑磁陰刻蓮花折枝文梅甁)
12세기 높이 38.8cm
국립중앙박물관(동원 기증품)
고려 시대에도 백자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백자와 구분하기 위해 학계에서는 고려 백자라고 부른다. 고려 백자는 청자와 달리 다소 철분이 적은 태토를 사용해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고려 시대의 가마터인 경기도 용인 서리가마는 고려 백자를 굽던 곳으로 유명하다.
백자 매병(白磁梅甁) 12세기 높이 32cm 국립중앙박물관
1-7. 조선백자, 조선청자
마찬가지로 백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백자 이외에도 다양한 도자기를 구워 사용했다. 전반기에는 특히 분청사기가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또 극히 일부이지만 백자 태토 위에 청자 유약을 발라 구운 이른바 조선 청자도 제작됐다. 백자 태토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 청자는 고려 청자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 항아리(白磁壺), 15세기, 높이 17.5cm
청자 항아리(靑磁壺), 조선 16세기, 높이 23.4cm, 호림미술관
1-8. 도자기 기형의 종류
청자 기린형 삼족향로(靑磁麒麟形三足香爐)
12세기 높이 20.6cm 간송미술관
고려시대의 사극드라마에 백자가 나온다면 모두 웃는다. 고려 시대에 백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량으로 치면 1%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고려 청자로 반상기 한 첩을 잘 차려놓았다면 이것도 코미디가 된다. 고려시대에 청자로 찻잔과 대접 그리고 주전자와 같은 그릇을 만들기는 했어도 6첩, 8첩 반상기는 결코 만든 적이 없다.
말하자면 각 시대별로 만들어진 도자기 기형의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물론 대접, 찻잔, 접시 같은 일반적인 생활 용기는 공통이지만 어느 한 시대에만 주로 등장하는 기형도 있다.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며 크게 보호 장려했던 고려 시대의 청자에는 불교 의식이나 신앙 생활에 관련된 도자기들이 특히 많다. 예를 들어 불전에 향을 피우는 향로, 관정(灌頂) 의식 등에 사용되었던 주전자, 정병 등이 이런 예식과 관련된 도자기이다. 또 매병이 많은 것도 고려 청자의 한 특징이다.
분청사기 조화모란어문 장군(粉靑沙器彫花牧丹魚文俵甁) 15~16세기
높이17.6cm 길이27.8cm 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 매죽문 연적(靑華白磁梅竹文硯滴) 18세기 높이6.7cm
반면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삼은 양반 사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양반의 생활과 관련된 도자기가 많이 제작됐다. 특히 18세기후반 들어서는 연적, 필통, 지통, 붓받침 등과 같은 양반들의 기호품에 속하는 문방구류들이 다른 시대에 찾아보기 힘들 정로 많이 제작됐다.
앞서 얘기한 반상기는 19세기 들어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음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비로소 등장한 생활용기이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다.
또 조선시대 초기에서 임진왜란 무렵까지만 제작된 분청사기의 경우에는 물이나 술을 담아 사용한 장군, 자라병 등 청자나 백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기형이 많이있다.
1-9. 도자기 각 부분의 명칭
도자기 각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에는 한자어가 많다. 이는 근대 학문이 일본을 거쳐 들어 왔기 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에서 요즘도 사용하고 또 학계에서 통용되는 말이므로 함부로 한글 용어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병을 예로 들면, 입 주둥이는 구연부(口緣部), 구연부에서 몸체에 이르는 부분은 목 혹은 경(頸) 그리고 몸체로 흘러내는 부분을 사람에 비유해 어깨(견, 肩)이라고 한다. 또 병이나 항아리에서 등쪽의 불룩하게 나온 부분을 몸체, 몸통, 동체(同體)라고 하며 그 아래 부분은 허리, 요(腰)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면에 닿아 그릇을 받치게 되는 부분 중 똑바로 서있는 부분은 굽다리이며 지면과 닿는 곳은 굽바닥이다.
1-10. 도자기의 이름 붙이기
요즘은 한글 이름이 유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순전히 국내용이다. 도자기의 이름을 정하고 짓는 것은 전문가들에 부여된 중요 업무중 하나이다. 어느 도자기 한 점에 대해 거기에 담긴 특징과 성격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또 비슷한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이름이 필수적이다. 학계의 이름 짓기에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는데 이는 중국,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것이다. 도자기의 이름을 짓는데 있어 대전제는 가장 큰 특징부터 이름을 붙여 나간다는 점이다.
우선 첫째는 여러 도자기가 각각 다르게 보이는 결정적 차이인 제작 방법에서 시작한다. 즉 청자냐, 백자냐 아니면 분청사기이냐 하는 것을 정한다. 이것이 정해지면 두 번째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 즉 사용된 기법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이는 같은 백자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특징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도 연관된다.
청자에 사용된 기법은 바로 청자의 분류와도 관련되는데 청자의 기법에는 상감, 철화, 진사, 양각, 음각 등이 있다. 상감은 문양을 넣을 곳에 홈을 파서 다른 색깔이 나는 흙을 넣은 것이고 철화는 갈색 나는 안료(산화철, 酸化鐵)로 그림을 그린 것이며 진사는 산화동(酸化銅)을 칠한 것을 가리킨다. 음양각은 뾰족한 것으로 문양을 새기거나 혹은 문양 주변을 파내 문양을 도드라지게 장식한 기법을 말한다.
그런데 어느 청자에는 아무런 문양도 들어 있지 않는 것도 있다. 이 경우는 없을 소(素)자를 써서 소문(素文)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단순한 분류상의 용어로 일반적으로는 그냥 순청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 각각의 청자에 이름을 붙일 때 아무런 문양이 없을 경우에는 순 자를 떼고 청자 매병, 청자 항아리 등으로 부르는 게 보통이다.
그 다음에 붙여지는 이름은 주로 사용된 문양, 주문양에서 연유한다. 청자에는 연화문, 당초문, 동자문, 포도동자문, 포류수금문 등 다양한 문양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의 기형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다. 병인가, 찻잔인가, 주전자인가 등이다.
청자상감 진사포도동자문 주전자 및 승반(靑磁象嵌辰砂彩葡萄童子文水注,承盤》
12세기후반 높이36.1cm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청자상감진사채포도동자문 주전자 및 승반》를 위의 설명대로 구분해 보면 ‘청자+상감+진사채(오늘날은 동채라는 말을 많이 쓴다)+포도동자문+주전자와 승반’으로 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자도 마찬가지이다. 백자가 정해지면 청화 기법인가, 철화 기법인가를 보고 그 다음에 문양을 살피며 마지막으로 형태에 맞춰서 이름을 붙이게 된다.
백자청화 투각모란당초문 호(白磁靑華透刻牧丹唐草文壺)
18세기전반 높이27.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의 보물 240호는 청화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투각으로 모란 당초문을 파넣은 항아리이다. 그런데 근래 들어 박물관에서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그냥 《백자 모란덩쿨무늬 항아리》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항아리를 학술 대회 등에서 정확하게 부를 때에는 엄연히《백자청화 투각모란당초문 호(白磁+靑華+透刻+牧丹唐草文 +壺)》란 이름을 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순한글식 제목설명은 친철한 배려인지 아니면 관람객 수준을 깔본 태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당당한 이름을 놔두고 흐리멍덩한 이름을 붙이는 일은 ‘국가적 사업’의 태도는 아닌 것만은 분명하하다.
1-11. 관요와 민요
분원 제작의 청화백자 초충문 쌍이편호(靑華白磁草蟲文雙耳扁壺)
18세기후반 높이18.0cm 국립중앙박물관
관요(官窯)는 말 그대로 관에서 운영하던 가마를 가리킨다. 신라 시대의 경우 관영 공방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시대는 건국 초기에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직접 청자 가마를 운영했다. 말하자면 사영(私營)이며 민간 가마였다. 하지만 국가의 기틀이 확립되고 제도가 정비된 광종에서 성종 무렵에는 강진에 국가가 관리하는 관영 가마가 운영됐다. 조선시대 역시 초기에는 사기를 제작하는 곳이 전국에 2백여 곳 넘게 있으며 각지에서 왕실에 필요한 용품을 진상했다. 그러나 성종 초기인 1470년대 경기도 광주에, 왕실의 음식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설치되면서 이곳에서 직접 왕실용 도자기를 굽는 관영 체제가 확립됐다.
지방가마 제작으로 여겨지는 백자철사 호로문 항아리(白磁鐵畵虎鷺文壺)
17세기후반 높이 30.1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지방에는 이와 별도로 지방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민간이 운영하는 가마가 존재했다. 이들 가마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태토의 수준이나 제작 기법면에서 분원 제작의 도자기보다는 그 수준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해학적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멋은 관요의 제작품보다 한층 뛰어난 경우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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