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2> 학문의 뿌리, 경학

2016. 1. 29. 21:31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2> 학문의 뿌리, 경학 자료 / 보정산방 

                                                           

2012.09.0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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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전남 강진군 도암면의 다산초당.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유배된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1년을 이곳에서 살면서 실학체계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했다. 강진군청 제공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누구인가. 1,000편이 넘는 논문과 수많은 연구서들이 있으되, 그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행정관의 가이드북인 <목민심서>가 주로 운위되고, 남양주의 실학 박물관 입구에는 그가 설계했다는 기중기 모형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가 꿈꾼 나라의 응용, 혹은 분지에 해당한다. 다산이 구상한 세계의 전체 모습을 보려면 그의 필생의 저작인 '경학(經學)'을 만나야 한다.

 

   경학이란 '유교 경전에 대한 주석과 해석'가리킨다. 안다. 주석은 원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뛰어야 벼룩"이라 코웃음 칠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해석학은 삶의 지향을 뒤바꾸고, 문명의 성격을 재정위하는 데까지 이른다. 조선시대는 12세기 주자가 정위한 지침을 주조로 삶의 제 부면을 구축해 왔다. 그런데 이 프레임을 19세기 다산이 '전복'시키고, 새 문명의 구상을 제시한 것이다. 가족과 친구, 선배들이 가톨릭 신앙을 빌미로 한 정치적 숙청에서 무수히 죽어나갈 때, 그 피비린내에서 살아남아, "머나먼 남쪽 땅끝에, 북풍에, 흩날리는 눈처럼 내몰린" 몸으로, 자신의 희망을 담아 육경사서(六經四書)의 재해석 몰두한 것이다.

 

독자들은 경학이란 이름이 여전 생소할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주윤발이 주연한 영화 '공자'에는 아리따운 여인이 하나 등장한다. 위나라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이다. 공자가 이 여인을 만난 기사가 <논어>에 실려 있다. "공자가 남자를 만났다. 자로가 싫은 기색을 했다. 공자 말했다. '내(予) 맹세컨대(所) 잘못이 있다면(否者),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야.'" 사마천 이래 다들, 공자가 방문국의 제후 부인을 예방하는 관례를 존중한 것일 뿐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다산은 이 전통적 독법에 잠깐만, 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웬 변명인가. 여기 로맨스의 흔적은 없다. 당시 위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공자로 하여금 남자를 방문하게 했다.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 남자에 격분해 아들 괴외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나섰고, 거사가 실패하자 망명했다. 영공의 죽음으로 위나라의 권력이 괴외의 아들 출공 첩에게 가게 되자, 공자는 부자간의 골육 상쟁을 우려했다. 여기 제자 자로와 공자의 의견이 갈렸다. 공자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괴외를 후계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했고, 자로는 어머니 목에 칼을 들이댄 패륜아에게 권력을 줄 수 없다고 맞섰다. 자로가 공자의 방문을 싫어한 이유가 여기 있다." 하여 다산은 이 구절을 공자의 변명이 아니라 확신으로 해석한다. "내 그렇게 (조언하기 위해 남자를) 방문하지 않았다면(否者),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야."

 

다산의 경학은 이전의 정통인 주자의 해석을 뒤엎는 구절로 그득하다. 그 단편적 전복들은 하나의 체계를 예고하고 있다. 위의 예에서 보듯, 주자가 '개인'과 '일상'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면 다산은 '정치'와 '권력'을 축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았다. 해석은 시대적 정황의 산물이고, 해석자 고유의 열망과 좌절을 당연히 반영한다.

 

놀랄지 모르지만, 유학(儒學)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의 유학에도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 화담같은 풍류 예술가, 퇴계같은 수도사형 학자, 남명같은 무사형의 기개, 허균이나 연암같은 문학적 천재들, 그리고 한말의 혜강같은 경영사상가까지….

 


   다산은 이들과 달리, 관료적 자의식에 철저하다. 정도전과 율곡처럼, 그는 정치적 개혁에 모든 관심을 투여했다. 캐치프레이즈는 신아구방(新我舊邦), "묵은 내 나라를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였다. 목표는 택민(澤民),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사회적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였다.

 

다산은 당대의 '학문'이 옛 유교의 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대의 지식과 학문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지식과 이념의 지도를 구축해 나갔다.

 

다산은 명청대 훈고학의 방법과 새로운 발견을 흡수했으되, 그 학풍이 '지식을 위한 지식'일 뿐이라서,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삶의 개선에 기여하는 실질이 없다고 물리쳤다.

 

   엄격한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는 '신 기풍'에 대해서 다산은 정조와 더불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삶은 절제되어야 하고, 의미에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 점에서 "울부짖고, 한숨 쉬고, 웃고 떠드는" 문학을 마뜩잖게 보았다. 그는 가령 동시대 이옥(李鈺)의 다음과 같은 시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 틀림없다. "한밤중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새벽이면 시부모 문안 드리는 (이 지긋지긋한 일상), 내 언젠가 친정에 돌아갈 날 있으리, 그럼 밥도 안 먹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잠만 자야지."

 

다산이 맞닥뜨린 가장 큰 적수는 정통 주자학, 혹은 성리학이었다. 조선유학의 이 오래된 성채에 그는 홀로 맞섰다. 윤휴가 주자의 주석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그리고 머나먼 땅에 유배 온 그의 신세를 생각하면 이 도전은 목숨을 건 위태로운 모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산은 망치를 들고 '주자학'을 전면적으로 깨기 시작했다. 왜? 핵심은 주자학이 '불교'처럼 '개인'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덕성이란 사이와 관계에 걸쳐있는 것이라서, 명상의 삶에서는 확보될 수 없다!" 그는 명상에서 활동으로, 자연(無爲)에서 정치(有爲)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관심의 초점을 전면 이동시켜 나갔다. 다산은 세상의 악과 대면하는 지식인의 사회적 소명을 환기하고, 그들이 감당할 권력의 합리적 운용을 촉구했다.

 

이 이동을 위해 그는 분명한 신학에 의존했다. 신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편만한 주자학의 지렛대인 이(理)의 무기력함을 해소하는 한편, 아울러 이기(理氣)를 둘러싼 어지러운 논란을 일거에 잠재울 것이다! 그렇게 단순함으로 확보된 에너지는 행사(行事)에 필요한 지식과 역량으로 발휘될 것이었다.

 

'주재하는 하느님'이라는 관념은 그가 한때 깊이 심취했던 가톨릭의 영향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 상제(上帝)라는 토속적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제사를 금지함으로써 유교 문명과 대치하는 순간, 다산은 그 이국의 '종교'와 결별했다. 다산의 '신(天)'은 오직 합리적 이성과 도덕적 충동의 원천인 점에서, 그리고 신에 대한 봉사는 오직 이웃을 통해서만 하라고 권한다는 점에서, 그 초월자를 위해 따로이 드릴 예배는 없다! 다산의 신학이 종교가 아니라 정치로 귀착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가 꿈꾼 세상은 민생이 윤택하고, 부(富)가 공정하게 분배되는 세상, 모두에게 직업과 가정이 있고, 사회적 약자들이 쉼터를 갖는 나라였다. 대동(大同)의 이상은 유교의 오래된 꿈이다. 여기 관건은 '정치'이다. 다산은 권력은 덕성과 전문지식을 갖춘 엘리트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유교의 오랜 생각에 철저했다. 일본의 유학은 그 뛰어난 학문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막부(幕府) 체제를 의식하여, 군주의 덕성을 마키아벨리처럼 면제해 줌으로써 다산의 질타를 받았다.

 

   다산은 다가올 근대의 원리를 고민했다기보다 유교의 옛 정신을 '회복'시킴으로써 현실을 근본적으로 혁신시키는 방향을 택했다. 이 엇갈림이 우리가 다산에게서 보는 곤혹의 실체이다. 근대를 지향했다는 실학의 대표자가 왜 "공자와 맹자의 옛 학문(洙泗學)으로 철저히 복고하겠다"는 스탠스를 지키고 있느냐 하는 것. 그러나 가장 래디컬 한 혁신은 종종 과거로의 회귀라는 외피를 입고 온다는 것은 역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임을 기억하자.

 

시대가 달라져도 풍경은 데자뷔, 여전하지 않은가.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사정 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삶, 높아진 스펙의 기준에 취업은 어렵고, 결혼은 늦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체감 행복지수는 바닥인데, 정치는 여전히 이념과 진영으로 이전투구 중이다. 이기심을 감춘 그럴듯한 명분과 현란한 언어를 넘어 어떻게 살 만한 세상을 '실용'으로 구축해 나갈 것인가. 경학을 위시한 다산의 경세학, 그리고 시와 편지, 논설에 이르기까지 전 저작이 이 오래된 '정치'의 과제를 풀기 위한 고심의 토로이다. 시대는 달라졌으되, 다산이 '마음의 구상(心書)으로', 실행해 보지 못하고 꿈으로 남겨,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고 한 이 해법을 지금의 현실에 적용하고,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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