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4> 정약용 vs 이황

2016. 1. 31. 01:15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4> 정약용 vs 이황 자료 / 보정산방

2012.09.0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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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

 

<목민심서> <흠흠신서>와 더불어 다산의 경세론을 대표하는 저술인 <경세유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산 정약용은 어떤 학설을 받들어 계승하거나 비판해서 넘어서는 단선적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전해오던 한학(漢學)과 주자학, 양명학은 물론이요, 그 시대에 새로 들어온 청나라의 고증학, 일본의 고학(古學)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포함하는 서학(西學)에 이르기까지 사방으로부터 다양한 사상 조류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자신의 독자적 철학을 정립한 종합적 사상가이다. 말하자면 당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상을 모두 모아 하나의 도가니에 담아 뜨거운 불길로 버릴 것은 태우고 취할 것은 녹여서 새로운 물질을 주조해내는 장인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산은 16세 때부터 서울에서 성호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을 따라 성호의 저술을 읽으면서 학문의 길을 찾아갔다. 훗날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았다"고 밝혔던 것처럼,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성호와 더불어 성호학파 안에서도 서학에 적극적 관심을 지녔던 '신서파(信西派)'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호학파의 연원을 점검하면서, 다산은 "퇴계 이후로 윤휴의 학문이 본말이 있고, 윤휴 이후로는 성호의 학문이 옛 성인을 이어주고 후세의 학자를 열어주었다"고 언급하였다. 곧 퇴계의 학풍이 윤휴를 거치고서 성호에 이르러 제대로 계승과 계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다산 자신의 학문적 뿌리도 파고 내려가면 성호를 거쳐 퇴계에 닿는다. 실학자로서 성호는 현실의 경제 문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동시에 퇴계의 학설을 계승하는 성리학자로서도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실학자이면서 주자학자라는 두 얼굴을 지닌 성호는,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은 성호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였지만 주자학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호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理)와 '기'(氣)로 하늘과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주자의 관념적 세계관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그 기초부터 허물고 자신의 독자적 철학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다산은 퇴계의 철학적 기반인 성리설을 계승하는 입장이 아니다. 다산과 퇴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단절이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다산은 주자의 성리설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퇴계의 성리설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고 있다. 성리설의 원조인 주자를 비판했으니 그 계승자인 퇴계를 비판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퇴계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단칠정 논쟁 종합해 성리학사에 획을 긋다

 

   퇴계의 학문적 견해에 대한 다산의 중요한 언급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어볼 수 있다.

 

먼저 성리설에 관한 해석이다. 다산은 23세 때(1784) 주자의 <중용> 해석에 관해 정조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쟁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해 율곡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퇴계의 견해를 지지하는 이벽과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34세 때(1795) 온양의 봉곡사(鳳谷寺)에서 성호의 종손 이삼환을 모시고 선비들과 강학회를 열었을 때, 사단칠정에 관한 이론에서 퇴계는 인성론(人性論)의 입장이요 율곡은 우주론의 입장에 따른 해석이라 규정하여, 대립하는 양쪽 입장을 종합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 견해는 그후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으로 저술되었다. 그렇다고 다산이 퇴계나 율곡의 사단칠정설에 대한 이론을 자신의 이론 속에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성리설의 이론체계 안에서 보면 양쪽이 각각 논리적 정당성을 지닌 것이라 인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갈라져 대립하던 쟁점을 종합하였다는 사실은 조선시대 성리학사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음은 경전 해석에 관한 문제이다. 주자의 제자인 왕백이나 조선시대의 이언적 등이 <대학> 에서 몇 구절을 옮겨다가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을 만들어 보완한 데 대해, 퇴계 "본채를 헐어내어 곁채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산은 퇴계의 이 비판을 적극 찬성하였다. 이처럼 그는 퇴계와 차이점은 덮어서 감추고 자신의 견해와 일치하는 점은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퇴계의 인품과 공부 자세를 깊이 사모하다

 

   다산은 34세 때 충청도 금정역(金井驛)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어 있을 때, 매일 새벽 세수를 하고 나서 퇴계의 편지를 한 통씩 읽고, 오전에 공무를 처리한 다음 정오에는 그 편지에 대한 감회를 적었다. 퇴계의 편지 30통을 33조목으로 기술한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에서 다산은 퇴계의 인간적 품격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밝히고 있으며, 퇴계의 수양과 학문 자세에 깊이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퇴계는 제자 이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포부를 알아주지 않음을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리석고 거칠음을 알아주지 않음을 탄식했다. 이 구절을 읽은 다산은 "겸손한 군자이시다. 선생이 아니면 누구를 따르겠는가!"라며 존경하는 마음을 밝히고 있다.

 

   퇴계의 인간적 포용력을 보여주는 편지를 읽고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남명 조식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제자들이 성리설의 토론에 열중하면서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인다고 비판하자, 퇴계는 토론도 필요하다고 변호하면서 학자라는 명예만 취하려는 과오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고 답장했다. "이 편지(퇴계의 답신)를 여러 번 되풀이 읽으니,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어오르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다산의 감회는, 그가 퇴계의 인품에 얼마나 깊이 감동하고 있는지를 절실하게 고백하고 있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 방법으로 이치 탐구와 공경함에 관해 설명한 데 대해, 다산은 "이 편지는 어느 한 글자 한 구절도 지나쳐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여, 한 마디 한 마디가 학문과 수양에 절실한 훈계임을 강조하였다. 퇴계가 제시한 독서의 방법론에 다산은 특히 공감했다. 퇴계는 독서는 문장의 뜻을 아는 단계를 넘어 몸과 마음으로 성품과 감정 속에서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참되고 절실히 체험하여 그 깊은 맛을 실지로 맛보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이에 다산은 "믿음의 마음과 체험의 말씀은 더욱 정밀하고 확고하여 마땅히 항상 눈에 두고 마음에 간직하여 성찰해야 할 것이다"라며, 퇴계가 제시한 학문 방법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자신의 병통을 위한 치료약으로 삼을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지은 시에서도 "반평생 가시밭길에서 낭패를 당하고/ 칠척 몸은 화살과 돌팔매 속에 지쳐버렸다오/…도산의 산과 퇴계의 물은 어디에 있는가/ 아스라이 높은 기풍 끝없이 흠모하네"라 읊어, 더구나 비방의 표적이 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퇴계의 덕을 얼마나 절실하게 사모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고

 

   다산은 분명 퇴계의 성리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퇴계의 사상 체계 안에서 수양론의 깊이와 학문 방법의 진지성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500권이 넘는 자신의 방대한 저술이 크게 경학경세론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였다. 곧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은 자신을 닦는 수기(修己)의 문제요, 일표이서(一表二書)의 경세론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문제로 대비하여 제시하였다. 성리설의 형이상학은 거부하였지만, 자신을 닦는 수양론의 문제는 퇴계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다산의 철학은 수양론의 내면적 세계에 빠지거나 경세론의 현실적 관심에 쏠리는 일방적 사유 체계가 아니다. 수양론에 기반하면서도 경세론으로 열어나가고, 경세론을 추구하면서도 수양론의 근거를 확립하고 있는 것이 다산 철학의 핵심 정신이다. 그래서 그의 대표적 경세론 저술인 <목민심서>는 첫머리에서 목민관의 실무를 논의하기에 앞서 마음의 자세를 규정하는 심법(心法)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수양론과 경세론이 다산 철학의 두 날개를 이루는 것이라면, 퇴계의 수양론은 다산 철학의 한 날개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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