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3> 정약용 vs 주희

2016. 1. 29. 21:46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3> 정약용 vs 주희 자료 / 보정산방 

                                                           

2012.09.0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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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철학자

 

   역사를 보면 한 가지 담론만이 허용되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당연히 이런 시대에는 특정 텍스트가 가공할 만한 권위를 행사할 수 밖에 없다. 조선 시대에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즉 사서(四書)가 그런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사서가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단순히 정치권력의 필요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상이한 시대를 가진 4권의 책을 사서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낸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해석 체계 아닐까. 인간의 내면에서부터 사회와 정치의 문제, 나아가 우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합적인 설명틀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사서는 그토록 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4권의 고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시킨 주희(朱熹ㆍ1130~1200)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동양적 사유의 촘촘한 그물망 펼친 주희

 

   새로운 사유를 꿈꾸는 사람들 앞에는 이제 넘기 만만치 않은 거대한 성곽이 우뚝 솟아있는 셈이다. 주희의 모든 고뇌와 그 찬란한 결과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서집주(四書集注)>다. 주희의 사유는 어떤 곤충도 쉽게 빠져 나가기 힘들게 촘촘히 짜인 거미줄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거미줄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일본에서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ㆍ1627~1705)가, 중국에서는 대진(戴震ㆍ1723~1777)이 목숨을 걸고 그 힘든 작업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힘이 딸려서일까. 그들은 지엽적으로만 주희와는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데 만족했다. <사서집주>의 거미줄을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통과해서 극복하려면 동아시아는 정약용이라는 걸출한 철학자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어떤 식으로 주희의 거미줄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맹자>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지금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모두 깜짝 놀라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측은지심은 사단(四端), 즉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4가지 도덕적 마음 중 하나다. 맹자는 나머지 세 가지 마음으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이야기했다. 측은지심이 일종의 동정심이라면, 수오지심은 모욕을 당했을 때 생기는 수치심이고, 사양지심은 손님이 집을 방문할 때 생기는 공경하는 마음이고, 시비지심은 부당한 것을 보았을 때 생기는 무엇이 불의고 정의인지를 판단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4가지 마음에 대해 주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은 감정(情)이고, 인(仁), 의(義), 예(禮) 그리고 지(智)는 본성(性)이다. (…)사단이라고 할 때 단이란 글자는 실마리를 말한다. 그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 본성의 본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이 본성을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묵묵히 확장하여 마음에 채울 수만 있다면 하늘이 내게 준 것을 모두 다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맹자집주(孟子集注)>)

 

그렇다. 주희에게 측은지심과 같은 윤리적 감정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진 선한 본성이 실현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잘해야 사단이란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 의, 예, 지란 본성이 있기 때문에,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란 선한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주희에게 있어 본성이 원인이라면, 감정이란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모든 논의가 그렇지만, 본성이 원인이라면 본성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주희는 배우는 자들에게 권고했던 것이다. 하늘이 내게 준 선천적인 본성을 자각하여 그것을 마음에 가득 채우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선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정약용, 사색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다

 

   하지만 '우물에 빠지려고 했던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되물어보았을 때, 우리는 정약용의 속앓이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위기에 빠진 아이를 목격했을 때 측은지심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내면에는 인한 본성이 있다는 증거라고 주희는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이지, 마음의 본성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주희와 정약용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기 상황에서 본성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아이에게로 나아갈 것인가. 주희가 본성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면, 정약용은 확고한 의지로 아이를 구하는 길로 나아가려고 한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행사(行事) 이후에 성립한다.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인'이라 말할 수 없다. 한 그릇의 밥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지심'이 생겨도 그것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의'라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을 때 '공경지심'이 생겨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예'라 말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무고(誣告)를 당했을 때 '시비지심'이 생겨도 분명하게 분별해 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지'라 말할 수 없다.'(<맹자요의(孟子要義)>)

 

측은지심이 생겼다면, 아이를 구해야만 한다. 수오지심이 생겼다면, 치욕스러운 밥을 내팽개쳐야만 한다. 공경지심이 생겼다면 몸소 나아가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해야만 한다. 시비지심이 생겼다면 당당하게 옳고 그름을 증언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데도 하지 못한다면, 인의예지가 인간의 본성이든 하늘의 본성이든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정약용이다. 주희가 심오한 깊이를 가진 본성으로 침잠해 들어갈 때, 정약용은 자리를 박차고 타자와 어울리는 삶의 세계로 뛰어들려고 한다. 물론 그가 인의예지라는 명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실천, 그러니까 행사 이후에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뿐이다.

 

아이를 구하는 데 성공했을 때, 우리는 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치욕스러운 밥을 버렸을 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손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했을 때, 우리는 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당하게 타인을 위해 옳고 그름을 증언했을 때,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사의 어려움이다. 아이를 구하느라 자신도 우물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 치욕스러운 밥을 포기했을 때 배고픔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공포,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것을 방해한다는 귀찮음, 그리고 타인을 위해 증언했다가 자신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소심함. 이 모든 심리적 장애물을 극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고귀한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실천에 대한 감각!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한가로운 방에 앉아 글을 읽거나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활을 걸 정도로 어려운 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옳은 것을 관철시키기 어려운 우리의 나약함이 아닌가. 옳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실천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외적인 조건, 그리고 우리의 내적인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정약용이 구체적인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도, 혹은 인간의 유약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뿐만 우리 후손들이 사변에 사로잡혀 삶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병든 지식인이 아니라, 당당하고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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