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 위부인필진도衛夫人筆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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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   위부인필진도              

                                                                                                                 

2005.07.0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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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 위부인필진도  
진晉 위부인필진도衛夫人筆陳圖

서序
   대저 삼단三端의 묘는 용필用筆에 앞서는 것이 없고 육예의 오묘는 은구銀鉤 보다 무거운 것이 없다. 옛날 진나라 승상 이사가 주나라 목왕의 글씨를 보고 이레 동안 탄식을 일으키고 그 뼈가 없음을 걱정했고 한나라 상서 채옹이 홍도에 들어가 비갈을 열흘이나 보며 돌아오지 않으면서 그 출군出群한 것을 탄성했으니 그러기에 그 근원에 달하는 것을 아는 자는 드물고 그 이치에 어두운자는 많다. 근대 이래로는 아주 옛을 스승하지 않고 정황을 쫓아 도를 버리고 겨우 성명이나 적을 뿐이고 혹 배움이 견문을 넉넉히하지 않으며 또한 성공하게 이루는 것이 적고 나아가지 않아 정신을 허비하게 하니 스스로 영험에 통해 물건에 느끼지 않으면 이 도를 더불어 말하지 못한다. 지금 이사의 필묘筆妙를 산정刪定하고 더우기 윤색을 더해 모두 일곱조목으로 하고 아울러 그 형용과 사례를 왼쪽과 같이 해서 여러 자손에게 주어 영원히 모범되게 하니 장래의 군자는 때로 다시 보기를 바란다 .

   붓은 숭산의 절벽 가운데 토끼털로 구월의 것을 거두니 그 붓머리의 길이 한치 대롱의 길이 다섯치로 필봉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으로 하고 벼루는 전학의 새돌로서 윤나고 껄꺼로움이 서로 겸비한 것으로 진액이 뜨고 먹을 빛내는 것으로 한다 .그 먹은 여산의 송연과 대군의 사슴아교로 십년이상의 강하기가 돌 같은 것으로 한다. 종이는 동양의 어란지로 비고 부드러우며 미끄럽고 깨끗한 것으로 한다 .

   무릇 글씨의 자字를 배움에 먼저 집필을 배우니 진서일 것 같음에는 필두로 부터 거리하기 두치 한푼에 잡고 행초서 같음에는 필두로 부터 세치 세푼에 잡는다. 하필해서 점획과 파별 굴곡에는 모두 모름지기 일신의 힘을 다해서 보내고 만약 초학자인 경우에는 큰 글자를 먼저하고 작은 것을 쫓지 못한다. 잘 감식하는 자는 써 내지 못하고 잘 써 내는 자는 감식을 못한다. 필력이 좋은자는 뼈가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한 자는 살이 많다, 뼈가 많고 약간 살이 있는것은 근서筋書라 이르며, 살이 많고 약간 뼈인 것은 묵저墨猪라 이르며, 힘이 많고 근육이 풍부한 것은 성聖 무력하고 근육이 없는 것은 병病이다 하나 하나 그 소식을 쫓아 사용하면
ㅡ 천리에 진을 친 구름이 은은하나 그 실은 꼴이 있다.

,(*구절칠 주) 높은 봉우리의 떨어지는 돌이 도르륵한 듯 실로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삐칠 별, 영자팔법의 략掠) 무소뿔, 상아를 자르는 듯
(*戈의 두번째 내려긋는 획) 백균짜리 쇠뇌가 발동 하는 듯
ㅣ 만년 묵은 마른 등나무 줄기
(八의 오른쪽 것) 무너지는 파도와 우레가 달림
(*句의 두째획)굳센 쇠뇌의 근육 마디

   오른쪽 일곱 조목의 필진筆陳의 출입하며 베고 찍는 그림은 집필에 일곱 종류가 있으니 마음이 급하고 집필이 느슨한 자 마음이 느슨하며 집필이 급한 자 있다.
만약 집필이 가까우면서 긴밀히 하지 못하는 자, 맘과 손이 가지런하지 못한 자 뜻이 뒤고 붓이 앞에 있는 자 는 패한다.
만약 집필이 멀면서 급하고 뜻이 앞서고 붓이 뒤한 자 이긴다 또 여섯 종류의 용필用筆이 있어 결구가 둥글게 갖춰 전서법 같으며 회오리 날려 쇄락함이 장초같으며 흉하고 험해 가히 두려움이 팔분서 같으며 요조히 출입함이 비백 같으며 경개히 특립하기가 학머리 같으며 울연히 뽑아나 종횡함이 고예같다 .그러나 마음을 위곡委曲에 두고 매번 한 글자를 함에 각기 그 꼴을 형상하니 이 조작이 묘하면 서도는 필畢 한다. 영화 사년 상우에서 제기製記


   *위부인은 왕희지가 서법을 배웠다는 사람으로 당나라 한유의 평에 의하면 왕희지의 글씨는 이쁘고 아장한(姸媚) 것이라는 것이고 한편 문장에 비유하면 심히 말 잘 다듬어 놓은 춘추좌씨전에 비유되는데 내 견해로도 아마 요새말로 한다면 멋있게 세련된 글씨라고 하면 비교적 가까운 범주의 표현이 될까한다 왕희지의 잔적으로 전하는 것들을 보고 추론컨데 그가 여성에게 배웠다는 것은 역시 타당한 말이 분명하다. 그의 글씨는 귀족적 사대부의 글씨로서 표본이 될만큼 대단히 다듬어 절제되고 이쁘고 미려한 묘한 맵시의 자태를 낸다.

   위부인(272-349)은 또한 서진의 명필 위항(252-291)의 질녀로 위항은 할아버지 위개衛凱 아버지 위관(220-291), 아우 위선, 위정 아들 위조 위개衛玉+介등과 함께 모두 글씨로 이름난 집안인데 일찌기 진무제가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려다가 가후의 원망을 사게되었는데 이로 인해 혜제가 즉위하고 일족이 해를 입었다 남편 이구(?-325)는 진나라의 사주자사를 역임하며 매번 역전해서 적을 잘 막았으나 끝내 석호에게 패해 남쪽으로 피해 오다가 낙마해 죽었으니 진나라가 남천한 동진(317-420) 이후 과부로서 글씨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처음 배움에 큰 글자부터 하라는 것은 만약 작은 글자를 먼저 배우게 되면 단지 눈살미로 긋기만 하다시피 하는 것이어 필기의 획과 결구를 익숙히 이룰 뿐 한획 한획에서나 획의 연결에서 일종의 붓을 쓰는 요령을 익히는 것을 별로 요하지 않게 되고 글자가 작을수록 측필의 표도 덜 난다 글씨쓰기의 기법에서 진서 즉 정자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가끔 그다지 필법을 배우지 않고 단지 행정서사 따위의 일에 오래 종사해 직업적으로 행초의 읽고 쓰기를 배운사람이 이 글자 독해를 밑천으로 서예를 할 뿐이다시피 한 경우에 보면 흔히 측필로 정자를 쓰는 것을 보며 혹은 이외 어떤 글씨체를 써든 간에 세필을 벗어나는 경우 그중 경험과 다소 눈살미가 있어 구사하는 글씨가 다소 느리다던가 요새 부드럽고 흡수성 좋은 종이가 흔한 만큼 필획이 모호히 번지거나 다소 획이 퍼져 다듬어진 글씨로 쓴다든가 등의 필획보다는 염색해 발라 그리는 듯한 형태로 교묘히 변형되는 것도 볼수있다.  

   이 글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씨 일가의 서예에 대한 기존의 소개를 정리하면,
위개는 삼국 위나라의 서가로서 후한 말년에 사공연의 벼슬을 헀다가 상서로 옮았으며 조조의 위나라가 들어서자 시중으로 배수되고 조서와 전장의 저작을 맡았으며 62세로 죽었다. 서법청화에는 그가 초서와 고문을 잘해서 대략 그 묘를 다했으며 초서의 세가 약간 여윈데 필적은 정밀 익숙하다 했고 서단에는 그가 소전과 예서 장초가 능품에 들었다 했으며 그는 전서를 잘했는데 한단순의 문하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한단순의 고문상서를 베끼어 한단순에게 보내 보이니 한단순도 어느 것이 자기가 쓴 것인지 위개 것인지 몰랐다 한다. 당시 그의 글씨는 위탄과 같이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그의 글씨는 북파에 새로운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되어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에는 말하길 그의 수선비는 양대안 , 시평공, 정장유, 그리고 위령장 등의 이름난 비에 모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

   아들 위관은 서진의 서가로서 초서에 공교해 당시의 명필 삭정과 함께 이묘二妙로 일컬어 졌다. 장지의 장초를 학습하고 아비의 필의를 참작해 일가를 이루었는데 후세에 일컫기를 천연의 자태가 특히 빼어나 홍안이 죽지를 떨쳐 청풍위에 훨훨연 하는 듯 함이 정情을 거느려 운용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했다.  당나라 이사진은 그를 채옹, 양곡과 같은 열에 두었고 장회관은 그를 장지 종요 이왕과 함께 같은 무리로 했으며 서단에는 그의 장초를 신품에 넣고 소전 ,예, 행은 묘품에 넣었다.

   위관의 아들 위항은 서진의 황문시랑을 하면서 위관과 함께 혜제 초에 가후의 해를 입었다. 이미 할아비와 아비의 서법에 장지를 학습해 성취가 있었으니 서단에는 말하길 산예서散隸書를 만들어 예서를 열어 폈으며 미미히 그 희끗함이 드러나 구속됨이 비백과 같았으며 예서에서 소쇄했다 했으니 산예서란 산필을 이용해 예서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꽃을 꽂은 미녀가 웃으며 거울대에서 춤추는 것으로 일컬었다. 그의 서법서로 전하는 것으로 사체서세가 있다 (고문, 전서, 예서, 초서의 사체).

   위부인은 해서, 행서에 공교해서 서법청화에는 말하길 종요의 법을 잘하고 왕희지의 스승이라 했으며 남조 양나라의 유견오와 당의 이사진은 그의 글씨를 상품上品으로 쳤으니 위부인이 종요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위부인은 종요가 죽은지 42년 뒤에 났으니 종요의 진적을 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송의 명필 미불은 글씨를 배움에 반드시 진적을 봐야 취趣를 얻을수 있다 했다. 세상에는 역시 그의 글씨를 평해 꽃을 꼽고 춤추는 여자가 수그리고 우르러는 아름다운 용모라 했다. 당의 두보는 그의 "조패장군에게 드리는 단청인" 이란 시에 글씨를 배움에 처음에 위부인을 배우고 라고 했으니 이는 위부인의 글씨가 후세에 영향이 큰 것을 말하니 이렇듯 왕희지 만이 아니고 다른 저명한 서화가에게 영향을 주어 남조 양나라 화가 장승요, 당나라 시대의 화가 조패, 서가 장설, 여류서가 설도 등에게 영향을 줬다.

   당송팔가의 첫째 인물로 치는 당의 한유는 유종원과 함께 고문부흥운동을 일으켜 진대 이래의 자구나 운을 맞추고 어려운 고사를 인용하고 묘사와 수식을 일삼는 문풍인 사륙변려문을 비판하고 글이 고박함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따라서 비록 그는 명필이나 서예가로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서예에도 이런 관점을 가졌던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데 위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마침 이런 운동의 일환에서 인지 이때 옛 글자인 석고문의 발견으로 그는 석고가라는 유명한 글을 지어 찬양하면서

"왕희지의 속된 글은 자미姿媚함에 편승하니
몇장 종이로 오히려 좋아라 흰거위를 바꾸도록 했는데
주나라 이후로 여덟 왕조가 잇는 전쟁이 파하도록
아무도 석고를 수습함 없음은 어인 이치인가" 라고 했다.

    이로 보건데 당시는 거위를 사육함이 농가에 흔히 기르는 것이라기 보다 지금 마치 동물원에서 학을 기르는 것처럼 도사들이나 기르는 고가의 사치 생활처럼 여겨진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왕희지가 글씨로 사리를 취하려 했다고 보기 보다는 한유는 왕희지를 비하해 이렇게 말한 것이니 설혹 당시 일반 필사생이 글 몇편 베껴 줘 봐야 쌀 한됫박 닭한마리도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던지 간에 거위보다 귀하게 된 글씨를 희지가 거위를 좋아해 기꺼이 써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희지의 아들 헌지의 전서결소에도 보면,
   "신은 나이 스물넷에 숲아래 은거하였사온데 나는 새가 왼손에 종이를 지니고 오른손에 붓을 지녀 신에게 오백일흔아홉자를 주어 일년을 지나지 않아 형세가 방불해지고 그 글의 문장이 계속해 어렵지는 않아 마침내 궁구해 알게 되었습니다 뒤에 북주(*556-581)의 적병이 가득 퍼지는 일을 만나 도로는 멀고 험한데 양주의 저자에서 걸식하니 성은 심씨 자는 광광光姜인 한 노모가 신에게 한끼 찬을 주었기에 그 뜻에 갚을 바 없어 신은 숟갈의 면 위에 하나의 야夜 자를 지어 바로 시장에 가서 보상하게 하니 가까이서 본 자가 셋 멀리서 본 자가 둘인데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천금을 획득했습니다."

   어쨌건 한유는 대문호로 당시 궁중이나 개인이 소장한 왕희지의 글씨를 직접 보는데 누구보다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지만 단순히 개인 한유의 독단적 평이라기 보다는 역시 당시까지의 왕희지 글씨에 대한 통론을 약간 자기 입장에서 연미하다고 묘사해 말하고 이 것은 물론 한유가 글씨보는데 일가견이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어쨌건 한유는 당시 문풍뿐 아니라 같이 풍미된 왕체 또한 복고적 관점으로 시류를 비판하는데 있어 그리 탐탁치 않게 보았음을 알수 있다.  

[출처] 위부인필진도|작성자 훈민학당

blog.naver.com/spdlqjrl/100014570297   훈민학당(訓民學堂)





笔阵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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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笔阵图》是论述写字笔划的著作,阐述执笔、用笔的方法,并列举七种基本笔划的写法。旧题卫夫人撰,后众说纷纭,或疑为王羲之撰,或疑为六朝人伪托。因其流传很广,此姑存旧说,仍列为卫夫人作。《笔阵图》中一个突出的观点,是认为书道的精微奥妙,是难以明言的,所以文章开头便说:“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六艺之奥,莫重乎银钩。”把书法用笔之妙,列在“三端”之先;笔势遒劲有力如银钩,重于“六艺”奥妙之上。这和钟繇提出“用笔者天也”,通过用笔来体现天道是一个道理,远非凡庸所能明知的。 卫夫人提出“每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书道毕矣。”她与蔡邕钟繇一样,提倡“取万类之象”,如文中所谈的七种笔画,好有所象。《笔阵图》中一个最为突出的观点,就是讲笔力。她说:“下笔点画波撇屈曲,皆须尽一身之力而送之。”并进一步论定:“善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者谓之墨猪;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这一书法美学观念,与钟繇的一样,强调笔力与筋骨,为后世书论所广泛运用。
作品名称
笔阵图
创作年代
东晋
文学体裁
散文诗
作    者
卫铄

正文编辑

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六艺之奥,莫重乎银钩。昔秦丞相斯见周穆王书,七日兴叹,患其无骨;蔡尚书邕入鸿都观碣,十旬不返,嗟其出群。故知达其源者少,闇于理者多。近代以来,殊不师古,而缘情弃道,才记姓名,或学不该赡,闻见又寡,致使成功不就,虚费精神。自非通灵感物,不可与谈斯道矣!今删李斯《笔妙》,更加润色,总七条,并作其形容,列事如左,贻诸子孙,永为模范,庶将来君子,时复览焉。
笔要取崇山绝仞中兔毫,八九月收之,其笔头长一寸,管长五寸,锋齐腰强者。其砚取煎涸新石,润涩相兼,浮律耀墨者。其墨取庐山之松烟,代郡之鹿角胶,十年以上,强如石者为之。纸取东阳鱼卵,虚柔滑净者。凡学书字,先学执笔,若真书,去笔头二寸一分,若行草书,去笔头三寸一分,执之。下笔点画波撇屈曲,皆须尽一身之力而送之。初学先大书,不得从小。善鉴者不写,善写者不鉴。善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者谓之“墨猪”;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一一从其消息而用之。
一“横”如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形。
、“点” 如高峰坠石,磕磕然实如崩也。
丿 “撇”如陆断犀象。
乙 “折”如百钧弩发。
∣ “竖”如万岁枯藤。
㇏ “捺”如崩浪雷奔。
勹 “横折钩”如劲弩筋节
右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有心急而执笔缓者,有心缓而执笔急者。若执笔近而不能紧者,心手不齐,意后笔前者败;若执笔远而急,意前笔后者胜。又有六种用笔:结构圆奋如篆法,飘风洒落如章草,凶险可畏如八分,窈窕出入如飞白,耿介特立如鹤头,郁拔纵横如古隶。然心存委曲,每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
永和四年,上虞制记。

注释编辑

1、三端:在古代文化中指文士的笔端、武士的锋端、辩士的舌端
银钩:本指书法中的“钩”这种基本笔画,因优美的笔画能表达出婉媚有力,故谓之“银钩”。在本文中指代书法艺术本身,即古代“六艺”中之“书”也。
2、周穆王西周国王,昭王之子,姓姬名满。
3、鸿都:东汉时的皇家藏书之所。
碣:石碑圆顶者谓之碣,此特指碑碣文字。
十旬:指一百天。
4、达:通达。
达其源:通达文字产生发展的源流。
暗于理:不懂书法的道理。
5、殊:此作副词,有竟然之意。
师古:即师法于古人。
缘情:抒发感情,此理解为凭兴趣。
弃道:背弃书道。
该赡:渊博丰赡,此“该”通于“赅”。
6、通灵感物:指通于神灵,并且能感化他物。
7、更加润色:再加以修饰文字以使其具有光彩。
总:概括、归纳或谓总结。
列事:指陈述事情。
贻:遗留。
庶:希望、但愿。
8、崇山绝仞:指高山最高的地方。
锋齐:锋毫要齐。
腰强:“腰”指笔毫的中部,此即谓笔毫中部要有强 度、有弹力。
9、煎涸:通翦涸,指浅黑干涸。
润涩:此为一对反义词,即指润滑和不润滑。
浮津耀墨:浮耀墨汁的光泽。
10、鹿角胶:由鹿角熬制成的胶。
11、东阳鱼卵:一种产于东阳的鱼卵纸,东阳在今天安徽省天长县。
12、真书:魏晋之后对正体的一种称呼,也称作楷书。
行草书:又称草行,一种比较流动而近于草书的书体。
13、点画:文字点与横竖笔画的总称。
波撇:指磔和掠,即捺和撇。
屈曲:弯曲、曲折。
14、大书:写大的字。
从小:指写小字。
15、鉴:鉴别、鉴赏。
16、筋书:瘦劲有力的书
墨猪:笔画肥而无力的书。
圣:超凡、卓越。
17、消息:奥妙、真谛。
18、笔阵:将书法比喻为作战行阵。
执笔急:指执笔松。
19、执笔近:指执笔处离笔毫近。执笔近不能很好的运腕行笔,执笔不紧,运笔则无力。
20、结构圆备:指字的点画安排和形势布置完备。
篆法:此为大小篆的总称。
21、飘扬洒落:指章草自由奔放洒脱的笔势。
22、八分:东汉后期的准隶书书体,传自王次仲始,尽其笔势,舒展波撇,其势凶险可畏。
23、飞白:相传为蔡邕所创之体,此之“窃窕出入”喻其笔势在那丝丝露白处的入与出,显得娴静优美。
24、耿介:指高耸突兀貌。
25、古隶:指西汉至东汉前期通行的隶书,尚带有篆书意味,无明显的波挑,无篆书的圆润之态,其笔画尤
显纵横,粗壮朴拙而厚实。
26、心存委曲:谓作书前思考要透彻详细。
27、永和四年,上虞 制记:此二句为作者写作之
行款,永和即东晋穆帝之年号,上虞在今天浙江上虞县之西。

译文编辑

古代三端的妙用,没有先于用笔的;而六艺的奥妙,没有重于书法的。昔日秦丞相李斯见到周穆王的书法,感叹了七天之久,不满意他的书法缺乏笔力。蔡邕到鸿都观看碑碣,一百天了还不忍返回,不停的称赞那些超群出众的碑碣,所以知道通达书之源流的少,不懂得书法道理的多。近代以来竟而不师法古人,只凭兴趣背离书道,只记得姓名,有的学识并不渊博丰赡,见识又少,致使没有成就,空费了精神。于是,不是通于神灵,能感化他人的人,便不足以与其谈论此道。现今删改李斯的《笔妙》,再加以修饰的文字使其完整,总括起来有七条,并且予以说明,把对其所作的形容列在左边,遗留于子孙,永为楷模,希望将来的学书者,能有时间看看。
笔毫要取那高山绝壁中的兔毛,八九月间猎取,笔头要一寸,管长要五寸,锋毫要齐整,锋腰要有强度。砚台要选用浅黑干涸的新石,润滑与滞涩兼顾,能浮耀墨汁的光泽。至于墨要取庐山的松烟、代郡的鹿角胶,要十年以上,强硬如石的作为制造的原料。纸则要取东阳鱼卵纸,柔软滑净的。大凡学写字,先要学执笔之法,如果作真书,要执去笔头二寸一分处;如果是行草,要执去笔头三寸一分处。下笔点画波撇曲折,都要尽一身之力行笔。初学书者先学大字,不得从小字开始。善于鉴赏的不善于写,善于写的不善于鉴赏。善用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少肉者叫它“筋书”,多肉少骨的叫它“墨猪”,多力丰筋的是可取之法,无力无筋的为错误之法。要一一从其间吸取奥妙、体会真谛,并且合理地运用它。
横画:要像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高低不同的形状。
侧点:要像高峰坠石,磕磕然实际在崩塌。
撇掠:锋锷能在陆地截断犀角象牙。
戈笔:要像百钧重的弓张箭发。
努笔:要像万岁枯藤一样多节而瘦劲。
背抛法:要像蹦浪雷奔一样徐迟有力。
钧弩势:要有如强弩筋骨一样遒劲。
右边是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情形。有时候心情紧急而执笔却不紧,有时心情宽松执笔却很紧。如果执笔离笔头近而又不紧,意在笔先就会成功。于是又有六种用笔之法:
结构字体、布置形势完备的如篆法;
笔势飘逸洒脱而又自由奔放的有如章草;
波撇凶险可畏如八分书;
那笔法出入娴静优雅的好比作飞白书
笔画高耸挺立如鹤头书
纵横沉凝遒劲的如古隶。
然而还要用心思考,考虑详尽,再作一字,各象其形,这样才有可能臻于妙境,书道也只有在这时才算穷尽。岁在永和四年,上虞 制图并撰文。

作者简介编辑

卫铄(272年—349年),东晋女书法家,传为王右军王羲之)之师。名铄,字茂漪,河东安邑(今山西夏县)人。汝阴太守李矩妻,卫恒从女,世称卫夫人。工书,楷书尤善,师钟繇,妙传其法。王羲之少时,曾从她学书。《笔阵图》一篇,旧题卫夫人撰,后众说纷纭,或疑为王羲之撰,或疑为六朝人伪托。因流传很广,此姑存其旧,仍列卫夫人后,参见王羲之《题卫夫人(笔阵图)后》。
家学渊源(北派之祖卫瓘侄女、卫桓从的妹妹),有名当代。《书法要录》说她得笔法于钟繇,熔钟、卫之法于一炉。所着《笔阵图》中云:“横”如千里之阵云、“点”似高山之坠石、“撇”如陆断犀象之角、“竖”如万岁枯藤、“捺”如崩浪奔雷、“努”如百钧弩发、“钩”如劲弩筋节。有《名姬帖》、《卫氏和南帖》传世。其字形已由钟繇的扁方变为长方形,几条清秀平和,娴雅婉丽,去隶已远,说明当时楷书已经成熟而普遍。《书评》称之为“如插花少女,低昂美容;又如美女登台,仙娥弄影,红莲映水,碧海浮霞。”
卫铄认为,书法品位就高在“多力丰筋”,即筋劲,力强。多“肉”则是下品,是“墨猪”,臃肿无神气。魏晋人讲“风骨”,讲“清奇险峻”,所以以“瘦硬”为美。后代人或崇尚“丰腴”,或崇尚“肥劲”,对“筋”、“骨”、“肉”也就有了不同的理解。但“书必有神、气、骨、肉、血,五者缺一,不能成书”(苏轼《东坡题跋》卷上)则是历代书家的共识。卫铄的贡献就在于她把“筋”、“骨”、“肉”之说引入书论,使之成为书法审美范畴,为后世的创作和欣赏开辟了新的思路


笔阵图_百度百科






위부인


최근 수정 시각 : 2015-11-06 20:09:09


偉夫人

272(서진 진시 8) ~ 349(동진 영화 5)

중국 동진의 여류 화가이자 서예가다. 이름은 삭(鑠)이고 자는 무의(茂猗).

   위전(衛展)의 누이동생이며 여음태수(汝陰太守) 이구(李矩)의 부인이다. 위부인의 아버지는 위항이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위부인도 그러한 가풍에 따라 글씨를 배웠는데, 남편인 이구가 적군을 막다가 낙마해서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글씨쓰는것에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종요의 필적을 본받아 자신의 글씨를 완성하였는데, 제자로는 그 유명한 왕희지를 두었다. 왕희지의 글씨는 이쁘고 아장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위부인의 영향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쓴 글로 필진도(筆陣圖)』가 있고 왕희지의 『제위부인 필진도후(題偉夫人筆陣圖後)』를 첨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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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转载]东晋卫夫人《笔阵图》

(2013-10-21 22: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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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筆陣圖》,(晉)衛夫人(鑠)撰;(晉)王羲之正書;(清)劉行受刻。東晉永和12年(356)4月12日书。21×32cm。现藏陕西。

 

卫夫人《笔阵图》分段释读
原文:
    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六艺之奥,莫重乎银钩   1。昔秦丞相斯所见周穆王书,七日兴叹,患其无骨  2。蔡尚书邕入鸿都观碣,十旬不返,嗟其出群  3。故知达其源者少,暗于理者多  4。近代以来,殊不师古,而缘情弃道,才记姓名,或学不该赡,闻见又寡,致使成功不就,虚费精神 5。自非通灵感物,不可与谈斯道矣  6。今删李斯《笔妙》,更加润色,总七条,并作其形容,列事如左,贻诸子孙,永为模范,庶将来君子,时复览焉  7。
注释:
    1、三端:在古代文化中指文士的笔端、武士的锋端、辩士的舌端。
银钩:本指书法中的“钩”这种基本笔画,因优美的笔画能表达出婉媚有力,故谓之“银钩”。在本文中指代书法艺术本身,即古代“六艺”中之“书”也。
    2、周穆王:西周国王,昭王之子,姓姬名满。
    3、鸿都:东汉时的皇家藏书之所。
    碣:石碑圆顶者谓之碣,此特指碑碣文字。
    十旬:指一百天。
    4、达:通达。
    达其源:通达文字产生发展的源流。
    暗于理:不懂书法的道理。
    5、殊:此作副词,有竟然之意。
    师古:即师法于古人。
    缘情:抒发感情,此理解为凭兴趣。
    弃道:背弃书道。
    该赡:渊博丰赡,此“该”通于“赅”。
    6、通灵感物:指通于神灵,并且能感化他物。
    7、更加润色:再加以修饰文字以使其具有光彩。
    总:概括、归纳或谓总结。
    列事:指陈述事情。
    贻:遗留。
    庶:希望、但愿。
释文:
    古代三端的妙用,没有先于用笔的;而六艺的奥妙,没有重于书法的。昔日秦丞相李斯见到周穆王的书法,感叹了七天之久,不满意他的书法缺乏笔力。蔡邕到鸿都观看碑碣,一百天了还不忍返回,不停的称赞那些超群出众的碑碣,所以知道通达书之源流的少,不懂得书法道理的多。近代以来竟而不师法古人,只凭兴趣背离书道,只记得姓名,有的学识并不渊博丰赡,见识又少,致使没有成就,空费了精神。于是,不是通于神灵,能感化他人的人,便不足以与其谈论此道。现今删改李斯的《笔妙》,再加以修饰的文字使其完整,总括起来有七条,并且予以说明,把对其所作的形容列在左边,遗留于子孙,永为楷模,希望将来的学书者,能有时间看看。


原文:
    笔要取崇山绝仞中兔毫,八九月收之,其笔头长一寸,管长五寸,锋齐腰强者  8。其砚取前涸新石,润涩相兼,浮津耀墨者  9。其墨取庐山之松烟,代郡之鹿角胶,十年以上,强如石者为之  10。纸取东阳鱼卵,虚柔滑净者  11。凡学书字,先学执笔,若真书,去笔头二寸一分,若行草书,去笔头三寸一分,执之  12。下笔点画波撇屈曲,皆须尽一身之力而送之  13。初学先大书,不得从小  14。善鉴者不写,善写者不鉴  15。善于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谓之墨猪: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  16。一 一 从 其消息而用之  17。
注释:
    8、崇山绝仞:指高山最高的地方。
    锋齐:锋毫要齐。
    腰强:“腰”指笔毫的中部,此即谓笔毫中部要有强 度、有弹力。
    9、前涸:通翦涸,指浅黑干涸。
    润涩:此为一对反义词,即指润滑和不润滑。
    浮津耀墨:浮耀墨汁的光泽。
    10、鹿角胶:由鹿角熬制成的胶。
    11、东阳鱼卵:一种产于东阳的鱼卵纸,东阳在今天安徽省天长县。
    12、真书:魏晋之后对正体的一种称呼,也称作楷 书。
行草书:由称草行,一种比较流动而近于草书的书体。
    13、点画:文字点与横竖笔画的总称。
    波撇:指磔和掠,即捺和撇。
    屈曲:弯曲、曲折。
    14、大书:写大的字。
    从小:指写小字。
    15、鉴:鉴别、鉴赏。
    16、筋书:瘦劲有力的书
    墨猪:笔画肥而无力的书。
    圣:超凡、卓越。
    17、消息:奥妙、真谛。
释文:
    笔毫要取那高山绝壁中的兔毛,八九月间猎取,笔头要一寸,管长要五寸,锋毫要齐整,锋腰要有强度。砚台要选用浅黑干涸的新石,润滑与滞涩兼顾,能浮耀墨汁的光泽。至于墨要取庐山的松烟、代郡的鹿角胶,要十年以上,强硬如石的作为制造的原料。纸则要取东阳鱼卵纸,柔软滑净的。大凡学写字,先要学执笔之法,如果作真书,要执去笔头二寸一分处;如果是行草,要执去笔头三寸一分处。下笔点画波撇曲折,都要尽一身之力行笔。初学书者先学大字,不得从小字开始。善于鉴赏的不善于写,善于写的不善于鉴赏。善用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少肉者叫它“筋书”,多肉少骨的叫它“墨猪”,多力丰筋的是可取之法,无力无筋的为错误之法。要一一从其间吸取奥妙、体会真谛,并且合理地运用它。


原文:
    一,如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形。
    、,如高峰坠石,磕磕然实如崩也。
    丿,陆断犀象 
    (戈画),百钧弩发。
    1,万岁枯滕。
    乁,崩浪雷奔。
    (横折钩),劲弩筋节。
    右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有心急而执笔缓者,有心缓而执笔急者  18。若执笔近而不能紧者,心手不齐,意后笔前者败;若 执笔远 而急,意前笔后者胜 19。又有六种用笔:
    结构圆备如篆法20;
    飘扬洒落如章草21;
    凶险可畏如八分22;
    窃窕出入如飞白23;
    耿介特立如鹤头24;
    郁拔纵横如古隶25。
    然心存委曲,每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书道毕矣  26。永 和 四 年,上虞制记27。

注释:
    18、笔阵:将书法比作作战行阵。
    执笔急:指执笔松。
    19、执笔近:指执笔处距离笔毫近。执笔近不能很好
   的运腕行笔,执笔不紧,运笔则无力。
    20、结构圆备:指字的点画安排和形势布置完备。
        篆法:此为大小篆的总称。
    21、飘扬洒落:指章草自由奔放洒脱的笔势。
    22、八分:东汉后期的准隶书书体,传自王次仲始,
    尽其笔势,舒展波撇,其势凶险可畏。
    23、飞白:相传为蔡邕所创之体,此之“窃窕出入”
    喻其笔势在那丝丝露白处的入与出,显得娴静优美。
    24、耿介:指高耸突兀貌。
    25、古隶:指西汉至东汉前期通行的隶书,尚带有篆
    书意味,无明显的波挑,无篆书的圆润之态,其笔画尤
    显纵横,粗壮朴拙而厚实。
    26、心存委曲:谓作书前思考要透彻详细。
    27、永和四年,上虞制记:此二句为作者写作之
    行款,永和即东晋穆帝之年号,上虞在今天浙江上虞
    县之西。


释文:
    横画:要像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高低不同的形状。
    侧点:要像高峰坠石,磕磕然实际在崩塌。
    撇掠:锋锷能在陆地截断犀角象牙。
    戈笔:要像百钧重的弓张箭发。
    努笔:要像万岁枯藤一样多节而瘦劲。
    背抛法:要像蹦浪雷奔一样徐迟有力。
    钧弩势:要有如强弩筋骨一样遒劲。
    右边是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情形。有时候心情紧急而执笔却不紧,有时心情宽松执笔却很紧。如果执笔离笔头近而又不紧,意在笔先就会成功。于是又有六种用笔之法:
    结构字体、布置形势完备的如篆法;
    笔势飘逸洒脱而又自由奔放的有如章草;
    波撇凶险可畏如八分书;
    那笔法出入娴静优雅的好比作飞白书;
    笔画高耸挺立如鹤头书;
    纵横沉凝遒劲的如古隶。
    然而还要用心思考,考虑详尽,再作一字,各象其形,这样才有可能臻于妙境,书道也只有在这时才算穷尽。岁在永和四年,上虞制图并撰文。    

 

延伸阅读                           

《笔阵图》及其理论价值的思考
    中国书法由文字书写向书法艺术的本质性衍变,始于东汉末年,至魏晋南北朝可以说已是大功告成,中国书法到此时才真正具有了本体意义与美学价值。魏晋以前,人们多将书法视为歌功颂德,记事述史、谋取功名的手段,并未将书法从实用中脱离出。自东汉末年,一大批书家的出现与人们对于书法理论的思考,书法才真正发展成为一门独立的自觉的艺术。也正是通过这一时期诸如锺元常、卫夫人、王羲之、王献之等为代表的魏晋士人及杰出书法家、书论家的努力,才真正使书法成为文人士大夫抒情遣兴释怀的工具。

    值得说明的是魏晋南北朝时期的书法理论虽然数量很多,文本十分复杂,而且其中开始有了一套本质论,创作论,技法论和品鉴批评论的简单体系,但其中却充斥着大量的伪托之作。卫夫人《笔阵图》就是争议颇多的一份理论文本之一。我在文章的题目前加了一个“传”也是根据其历史性而补上的。下面就从考释开始,对《笔阵图》的理论价值作一些理论上的思考和检讨。

    关于《笔阵图》的真伪,历来说法不一,颇多争议,唐张彦远《法书要条》载为卫夫人作,而孙过庭《书谱》却提出了疑问:“代有《笔阵图》七行,中话执笔三手,图貌乖     ,点画湮讹,倾见南北流传,疑是右军所制。虽则未详真伪,尚可发起童蒙。既常俗所存,不籍编录。”后蔡希综《法书论》引“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二语,直说“右军《笔阵图》”,《墨池编》卷一录王羲之《书论》四篇,中有《笔阵图》文,文后朱长文曰:“自‘三端之妙’而下两段,传右军所作,后见张彦远《要录》以为卫夫人之然亦莫可考验也。”我认为朱长文是很明智的,他既将《笔阵图》的作者归之于王羲之,但又不把话说死,颇为中肯。的确书法创作和风格史上魏晋时代是一个扑朔迷离的时代,理论、批评史上的魏晋时代,传世文本作品均有很大的问题。《笔阵图》或疑为右军撰,或疑为六朝人托名,更有甚者,以为此篇为唐太宗所作,对于这样的一个颇具争议性的文本,持肯定意见的拿不出什么证据,他们只是沿袭旧题;持否定意见颇多,却也很难对此作出断定。不过,在历史上,他的流传甚广,在书法理论批评史上已构成了一个不小的现象,有着比较大的影响,基于此,我们姑且将此文归于卫夫人名下,不对其真伪作详实的理论定位与考证(不过其文至少为六朝以前人所撰)只从其书法美学意义书史地位及影响上作些具体的思考与研究。
    首先,我们要认识一下《笔阵图》书史价值。可以说,《笔阵图》是继蔡邕《九势》之后的又一件阐释书法技法理论的重要文本之一。从蔡邕到卫夫人几乎形成了一条线,尤其是其叙述方式与内容方面的承接性。在蔡邕的《九势》中,我们所能看到的是对一些具体技法的阐释,如“藏头护尾”、“力在其中”均用较为平白朴素的语言来描述,然而到《笔阵图》里面,却呈现出一种新的感觉,如“点如高峰坠石,横如千里阵云”,从书法赏评的心理学角度来看,这样的比喻式言论中明显的带着某种观赏的主体性意识。在语言学上,《笔阵图》所采取的比喻式与书赋是较为接近的,只不过其并未采用标准的赋体语言模式,将《九势》与《笔阵图》作一比较就会发现《笔阵图》与汉晋书赋之间是有着承接关系的,尤其是对书法技巧理论方面的相承。
    关于《笔阵图》的书法价值,我们认为更多的体现在了其只言片语中对于诸多书法美学内涵突显。下面我们就具体的分析其理论文本中隐含的美学价值。
    其一是《笔阵图》中对书法艺术及其美学本质的认识。其开篇就有“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六艺之奥,莫重乎银钩。”此之谓“三端”与“六艺”之中的书法,其艺术性都是重要的,尤其是将书法置于比礼、乐还重要的地位,在此时实在非常难得,其间至少可以说明两点;第一、卫夫人能在东晋就把书法摆到如此显赫的地位,说明她对说法艺术的美学本质有着深邃的洞察力和成熟的把握。第二、则说明至东晋以后,书法已经作为一种独立的艺术门类,堂堂正正的展现在了历史的舞台上。对于书法艺术的美学特征,卫夫人的认识明显比蔡邕他们要有更为长足的进步。她说“每为一字,各像其形,斯造妙矣,书道毕矣”。此间“每为一字,各像其形”是说每写一个字,都要通过这个字的造型来反映出这个字所应反映的那些客观事物的形象特征,其所像之形,我想,也并非形之象,更应该诠释为神之似,这从其后的“点如高山坠石”、“横如千里阵云”可见一斑,其对那七种基本点画的图释,应该是着眼于其神采、气势的。卫夫人把书道的本质,定性为客观事物物理之美,在理论上与蔡邕并无二致,当时一个典型的道法自然者,谈“各象其形”不禁就会让人联想到蔡邕的“须入其形”。
    诚如前面所讲,卫夫人对点画形态的描述主要是基于一种主体介入后的感受。在观赏与挥运中,能从单纯而抽象的线条里发现万岁枯藤、千里阵云、高山坠石,她用以描绘的言语并不简单地以具象之物表来描绘书法之理,而是以某种深刻的理解与领悟去表达对书法线条“力”与“势”的阐释。正如陈振濂先生所说:“蔡邕的‘自然’、‘阴阳’、‘形势’是在具体的技法解说中以论证作抽象法则把握,而卫夫人却是用具象的比喻来阐明抽象的原理与感受”。
    其二,《笔阵图》对书法创作中“意”与“笔”的关系讨论,这也是突显书法美学价值的又一重要课题。《笔阵图》谓:“若执笔近而不能紧者,心手不齐,意后笔前者败;若执笔远而急,意前笔后者胜。”此之“意”盖为构思立意之解。卫夫人认为此“意”应在作书之前,用笔当随其后。这可能与后人由预想字形所强调的“意在笔先”有着不尽相同的内涵,但是这种把艺术思想活动放在实际创作之先的理论内涵,实与“意在笔先”灵犀相通。在当时的书论中,诸如这样明显阐述和区别书法创作中“意”与“笔”关系的论断,实不多见,也绝非随手可得,这也更进一步地向人们诉说了书法在逐步走向自觉的历史进程。谈到这里,我们发现了一个重要问题。陈振濂先生认为,把“意”看作是构思或创作前的思想活动,很有可能是今天的看法,在古代重视技巧的时代,它更有可能指向“法度”,依此便得出了“意在笔先”之意是指基本法则技巧和立足于其上的创作构思,它意味着当时法度的确立。然而,我们在书法史上却认为法度的建立和完备是在唐代。故此有人说《笔阵图》为唐人托伪,不过,我们又发现在传为王羲之的《题卫夫人〈笔阵图〉后》说:“夫欲书者,先乾研墨,凝神静思,预想字形大小、偃仰、平直、振动,令筋脉相连,意在笔前,然后作字”。似有所渊源。对于后一种说法,待考,而至于前一种说法,我们如果根据《笔阵图》的行文方式和对线条形态的描述,就会发现如果是唐代的关于线条的研究理论,绝不可能采用比喻式,一定会比《笔阵图》成熟得多,在唐朝我们几乎找不到有关赋体文的文学现象。说到这里,我们还是坚持将《笔阵图》系于卫夫人之下。
    其三,我们认为《笔阵图》主要是对线条的研究。如前所述,它与《九势》可以看作是书法技法理论系统中的一条线。在对线条的研究中,卫夫人把重点放在了“笔力”的突显以及点画“七法”和用笔“六法”之上。骨力的表达与用笔的重要性,是《笔阵图》中关乎书法的实质性美学品格。尽管她认为书法美来自于神采与气势,诸如“千里阵云”、“高峰坠石”、“万岁枯滕”、“陆断犀象”、“崩浪雷奔”、“万岁枯滕”之谓。但在卫夫人看来,其主要来源或形式依据主要来自于力感、力度、骨力的表现,即书法线条美中之力量美、力度美的表现,这是书法线条美学中又一重要课题。《笔阵图》有云:“善于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谓之墨猪: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这一段话主要可以作两点分析,第一是“骨”和“筋”的关系讨论其核心与实质是要说明“笔力”的重要性;第二是指出了“筋”与“骨”的表现均受制于“善笔力”,亦即谓对“用笔”的表现。
    首先四“骨”和“筋”的讨论。比较早的提出“力”这一美学范畴的书法家应该是蔡邕,他认为“藏头护尾,力在其中;下笔用力,肌肤之丽。”又云“藏头,圆笔属纸,令笔心常在点画中行”、“护尾,画点势尽,力收之。”这种“力”在卫夫人这里有了具体的表现,即骨力与筋力。在蔡邕那里,他并没有详细的将“力”如何表现讲出,亦未能把“力”作为衡量书法质量高低的标准将其放在应有的重要地位。而卫夫人发展了这一点。她认为筋、骨之力的表现,在乎“用笔”,继而把重“用笔”放在了书法艺术的首要地位。从这以后的千百年来,用笔一直都被放在了第一位,元代赵孟钌踔劣小坝帽是Ч挪灰住钡囊帐跽嫜浴N胰衔婪蛉说墓丶υ谟诮渴榉ò旅畹木栌朐慈枷蛄擞帽剩⑽健跋卤实慊ㄆ睬孕刖∫簧碇Χ椭薄4蠓蔡逖楣榉ù醋鞴痰娜耍寄芾斫猓郧崆傻拿市闯鲆桓鲂⌒〉慊剐胍簧碇Γ饬ξ抟墒侵赶蚍翘辶Γ荒苁悄持质泳跎系母芯酢9赜谑榉ㄖ辛Φ谋硐滞揪叮以谝黄壑懈爬ü槟晌睢⒘簟⒛妗⒆⒄鄣取拔迨啤保抻谄瞬蛔甘觥
    我们可以进一步的肯定《笔阵图》以“用笔”为全篇之宗旨,继承蔡邕书法美学中的精华,并予以了创造性的发展,即对于“骨”、“肉”、“筋”三个概念的提出,并将它们赋予了书法艺术的形式与内容。《笔阵图》在最后还专门为用笔总结出了六种用笔之法,即“结构圆备如篆法;飘扬洒落如章草;凶险可畏如八分;窃窕出入如飞白;耿介特立如鹤头;郁拔纵横如古隶”。值得说明的是此处的用笔中都含有结构的成份,即在结构中使结字之法与挥运之法作为双重意义观之。
    其四,书法创作与品鉴之间的关系,也是《笔阵图》中颇有见地的一点。《笔阵图》中说:“善鉴者不写,善写者不鉴”。此“鉴”指欣赏品鉴,“写”指艺术创作、挥写。在今天看来,我们依据严格的分类,鉴与写已是两种不同的艺术活动,但在古代我们在大多数情况下看到的却是鉴与写的统一。善写者一般也应善鉴,善鉴者理论上出手也应该不凡。至于卫夫人为何将之对立起来,我们还有待思考,但作为一种主张也正显示着《笔阵图》在观念上的独特价值。
    另外,我们认为《笔阵图》除了突显出许多独特的美学价值外,在书法材料学和教育学意义上也有着或多或少的贡献。例如言笔、墨、纸、砚时云:“笔要取崇山绝仞中兔毫,八九月收之,其笔头长一寸,管长五寸,锋齐腰强者。其砚取前涸新石,润涩相兼,浮津耀墨者。其墨取庐山之松烟,代郡之鹿角胶,十年以上,强如石者为之。纸取东阳鱼卵,虚柔滑净者”,明显带有主体选择的色彩,表现出主动的书法艺术材料追求,也从一个侧面反映着书法的艺术自觉化。这一段文论可以说是研究文房四宝的先例。至于《笔阵图》的教育学意义也有很鲜明的语言描述,诸如“凡学书字,先学执笔”,“初学先大书,不得从小。善鉴者不写,善写者不鉴。善于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谓之墨猪: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一一从其消息而用之, ”“今删李斯《笔妙》,更加润色,总七条,并作其形容,列事如左,贻诸子孙,永为模范,庶将来君子,时复览焉”。这样的言论,应该是本于教育立场的。因为她明确指出了写作绘制《笔阵图》的功用是要“贻诸子孙,永为模范”,是给后人学习用的。在她以前的书论中,我们无法看到这般鲜明的教育立场,更无法找出这样鲜明化的言论。
    无论从何种意义上看,《笔阵图》都不愧为一篇书法理论的上乘之作,其间所涵盖的书法美学思想、对书法材料学的贡献和书法教育学的立场,都已使它成为了一个不可轻视的研究文本。比起崔瑗的《草书势》、蔡邕的《篆势》、《九势》、《笔论》,《笔阵图》的内涵要明显丰富得多,这显然是我国书法艺术与书法理论又向前进行大跨越的一个重要的时代标志,当我们还在冥思苦寻为《笔阵图》的作者考证犯愁时,它那看似静态的理论文本已在默默地显出其深刻的书法美学内涵。
                                                                       (王景)

 

    卫夫人楷书《古名姬帖》

 

    卫铄(272-349),东晋女书法家,传为王右军(王羲之)之师。名铄,字茂漪,河东安邑(今山西夏县)人。汝阴太守李矩妻,卫恒从女,世称卫夫人。工书,隶书尤善,师钟?,妙传其法。王羲之少时,曾从她学书。《笔阵图》一篇,旧题卫夫人撰,后众说纷纭,或疑为王羲之撰,或疑为六朝人伪托。因流传很广,此姑存其旧,仍列卫夫人后,参见王羲之《题卫夫人(笔阵图)后》。
  家学渊源(北派之祖卫瓘侄女、卫桓从的妹妹),有名当代。《书法要录》说她得笔法于钟繇,熔钟、卫之法于一炉。所着《笔阵图》中云:“横”如千里之阵云、“点”似高山之墬石、“撇”如陆断犀象之角、“竖”如万岁枯藤、“捺”如崩浪奔雷、“努”如百钧弩发、“钩”如劲弩筋节。有《名姬帖》、《卫氏和南帖》传世。其字形已由钟繇的扁方变为长方形,几条清秀平和,娴雅婉丽,去隶已远,说明当时楷书已经成熟而普遍。《书评》称之为“如插花少女,低昂美容;又如美女登台,仙娥弄影,红莲映水,碧海浮霞。”
  卫铄认为,书法品位就高在“多力丰筋”,即筋劲,力强。多“肉”则是下品,是“墨猪”,臃肿无神气。魏晋人讲“风骨”,讲“清奇险峻”,所以以“瘦硬”为美。后代人或崇尚“丰腴”,或崇尚“肥劲”,对“筋”、“骨”、“肉”也就有了不同的理解。但“书必有神、气、骨、肉、血,五者缺一,不能成书”(苏轼《东坡题跋》卷上)则是历代书家的共识。卫铄的贡献就在于她把“筋”、“骨”、“肉”之说引入书论,使之成为书法审美范畴,为后世的创作和欣赏开辟了新的思路。

    南朝宋羊欣《采古来能书人名》称“晋中书院李充母卫夫人善钟(繇)法,王逸少(羲之)之师”。又《传受笔法人名》有“钟繇传之卫夫人,卫夫人传之王羲之”的记载。羊欣去晋未远,此说当属可信。唐张怀瓘《书断》品其书传云:“碎玉壶之冰,烂瑶台之月,婉然芳树,穆若清风。”她的书法面貌由于出于女书家之手,故唐人书论中,评其为“插花舞女,低昂美容”,“美女登台,仙娥弄影;红莲映水,碧海浮云”。她的字迹绝少流传,只可从前人评语中得其大概。宋初《淳化阁帖》、北宋潘师旦在山西所刻《绛帖》、徽宗精选精刻的《大观帖》等三丛帖中,选人了卫夫人《急就帖》一件,但墨迹迄未流传下来,只能从三帖的拓本窥知一二。盖《急就篇》乃西汉以后传播最广的字书,历来书家也都喜欢临写它,欲观作者的本来面貌,殊非易事。至于西晋墨迹,特别是卫夫人的真笔,更不能妄下断语。
    《法书要录》汇集前人书论,其中有卫夫人《笔阵图》一篇,如说它出自卫氏,很难肯定。它的成篇时间至少在唐代以前。又有《王羲之题卫夫人笔阵图后》一篇,也不可信,但却不失其为总结书法用笔的好资料。为了抬高作品的身价,挂上名家的大名,此司空见惯之事。我们的看法,《笔阵图》不外是唐人或者稍早一些的书法家所撰,何以故?可以从唐《翰林禁经》中找到答案。《禁经》云“(永字)八法起于隶字之始,自崔、张、钟、王传授所用,该于万字,墨道之最不可明也。隋僧智永发其旨趣,授与虞秘监世南,自兹传授遂广彰焉。李阳冰云,昔逸少攻书多载,十五年偏攻‘永’字,以其备八法之势,能通一切字也”。实际上并不能赅备八法,更不“能通一切字”。宋人黄庭坚对之就有异议,他在题跋《绛本法帖》时写道:“承学之人,更用《兰亭》永字,以开字中眼目,能使学家每拘忌,成一种俗气。”唐人卢肇认为:“永字八法,乃点画尔。”说到此,用《笔阵图》与《翰林禁经》的永字八法对照,它们尽管所强调的内容有所出入,然总的立意殊属一致,只不过一是从永字剖析,一是从真书点画找出共性的笔画。所以我们说它们是同一时期——隋唐习书时讲究笔法结体方法的姊妹篇。

《笔阵图》完整原文:

    夫三端之妙,莫先乎用笔;六艺之奥,莫重乎银钩。昔秦丞相斯,见周穆王书,七日兴叹,患其无骨。蔡尚书邕,入鸿都观碣,十旬不返,嗟其出群。故知达其源者少,喑于理者多。近代以来,殊不师古,而缘情弃道,才记姓名,或学不该赡,闻见又寡,致使成功不就,虚费精神,自非通灵感物,不可与谈斯道矣。今删李斯笔妙,更加润色,总七条并作其形容,列事如左,贻诸子孙,永为模范,庶将来君子时复览焉。笔要取崇山绝仞中兔毛,八九月收之。其笔头长一寸,管长五寸,锋齐腰强者。其砚取前涸新石,润涩相兼,浮津耀墨者。其墨取庐册之松烟,代郡之鹿胶,十年以上,强如石者为之。纸取东阳鱼卵,虚柔滑净者。凡学书字,先学执笔,若真书去笔头二寸一分,若行草书去笔头三寸一分执之。下笔点画波撇、屈曲,皆须尽一身之力而送之。初学先大书,不得从小。善鉴者不写,善写者不鉴。善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微肉者谓之筋书,多肉微骨者谓之墨*。多力丰筋者圣,无力无筋者病。一一从其消息而用之。
  一[横]如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形。

  丶[点]如高峰坠石,磕磕然实如崩也。

  丿[撇]陆断犀象。

  乙[折]百钧弩发。

  丨[竖]万岁枯藤。

  丶[捺]崩浪雷奔。

  刁[横折弯钩,以“刁”代替]劲弩筋节。

  右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有心急而执笔缓者,有心缓而执笔急者。若执笔近而不能紧者,心手不齐,意后笔前者败。若执笔远而急,意前笔后者胜。又有六种用笔:结构员备如篆法,飘飘洒落如章草,凶险可畏如八分,窈窕出入如飞白,耿介特立如鹤头,郁拔纵横如古隶。然心存委曲,每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书道毕矣。永和四年上虞制记。

 

《笔阵图》完整释文:

    古代三端的妙用,没有先于用笔的;而六艺的奥妙,没有重于书法的。昔日秦丞相李斯见到周穆王的书法,感叹了七天之久,不满意他的书法缺乏笔力。蔡邕到鸿都观看碑碣,一百天了还不忍返回,不停的称赞那些超群出众的碑碣,所以知道通达书之源流的少,不懂得书法道理的多。近代以来竟而不师法古人,只凭兴趣背离书道,只记得姓名,有的学识并不渊博丰赡,见识又少,致使没有成就,空费了精神。于是,不是通于神灵,能感化他人的人,便不足以与其谈论此道。现今删改李斯的《笔妙》,再加以修饰的文字使其完整,总括起来有七条,并且予以说明,把对其所作的形容列在左边,遗留于子孙,永为楷模,希望将来的学书者,能有时间看看。
  笔毫要取那高山绝壁中的兔毛,八九月间猎取,笔头要一寸,管长要五寸,锋毫要齐整,锋腰要有强度。砚台要选用浅黑干涸的新石,润滑与滞涩兼顾,能浮耀墨汁的光泽。至于墨要取庐山的松烟、代郡的鹿角胶,要十年以上,强硬如石的作为制造的原料。纸则要取东阳鱼卵纸,柔软滑净的。大凡学写字,先要学执笔之法,如果作真书,要执去笔头二寸一分处;如果是行草,要执去笔头三寸一分处。下笔点画波撇曲折,都要尽一身之力行笔。初学书者先学大字,不得从小字开始。善于鉴赏的不善于写,善于写的不善于鉴赏。善用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少肉者叫它“筋书”,多肉少骨的叫它“墨猪”,多力丰筋的是可取之法,无力无筋的为错误之法。要一一从其间吸取奥妙、体会真谛,并且合理地运用它。
  横画:要像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高低不同的形状。
  侧点:要像高峰坠石,磕磕然实际在崩塌。
  撇掠:锋锷能在陆地截断犀角象牙。
  戈笔:要像百钧重的弓张箭发。
  努笔:要像万岁枯藤一样多节而瘦劲。
  背抛法:要像蹦浪雷奔一样徐迟有力。
  钧弩势:要有如强弩筋骨一样遒劲。
  右边是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情形。有时候心情紧急而执笔却不紧,有时心情宽松执笔却很紧。如果执笔离笔头近而又不紧,意在笔先就会成功。于是又有六种用笔之法:
  结构字体、布置形势完备的如篆法;
  笔势飘逸洒脱而又自由奔放的有如章草;
  波撇凶险可畏如八分书;
  那笔法出入娴静优雅的好比作飞白书;
  笔画高耸挺立如鹤头书;
  纵横沉凝遒劲的如古隶。
  然而还要用心思考,考虑详尽,再作一字,各象其形,这样才有可能臻于妙境,书道也只有在这时才算穷尽。岁在永和四年,上虞制图并撰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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