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31. 04:09ㆍ글씨쓰기
진晉 위부인필진도 書
2005.07.01. 08:45
http://blog.naver.com/spdlqjrl/100014570297
진晉 위부인필진도衛夫人筆陳圖
서序
대저 삼단三端의 묘는 용필用筆에 앞서는 것이 없고 육예의 오묘는 은구銀鉤 보다 무거운 것이 없다. 옛날 진나라 승상 이사가 주나라 목왕의 글씨를 보고 이레 동안 탄식을 일으키고 그 뼈가 없음을 걱정했고 한나라 상서 채옹이 홍도에 들어가 비갈을 열흘이나 보며 돌아오지 않으면서 그 출군出群한 것을 탄성했으니 그러기에 그 근원에 달하는 것을 아는 자는 드물고 그 이치에 어두운자는 많다. 근대 이래로는 아주 옛을 스승하지 않고 정황을 쫓아 도를 버리고 겨우 성명이나 적을 뿐이고 혹 배움이 견문을 넉넉히하지 않으며 또한 성공하게 이루는 것이 적고 나아가지 않아 정신을 허비하게 하니 스스로 영험에 통해 물건에 느끼지 않으면 이 도를 더불어 말하지 못한다. 지금 이사의 필묘筆妙를 산정刪定하고 더우기 윤색을 더해 모두 일곱조목으로 하고 아울러 그 형용과 사례를 왼쪽과 같이 해서 여러 자손에게 주어 영원히 모범되게 하니 장래의 군자는 때로 다시 보기를 바란다 .
붓은 숭산의 절벽 가운데 토끼털로 구월의 것을 거두니 그 붓머리의 길이 한치 대롱의 길이 다섯치로 필봉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으로 하고 벼루는 전학의 새돌로서 윤나고 껄꺼로움이 서로 겸비한 것으로 진액이 뜨고 먹을 빛내는 것으로 한다 .그 먹은 여산의 송연과 대군의 사슴아교로 십년이상의 강하기가 돌 같은 것으로 한다. 종이는 동양의 어란지로 비고 부드러우며 미끄럽고 깨끗한 것으로 한다 .
무릇 글씨의 자字를 배움에 먼저 집필을 배우니 진서일 것 같음에는 필두로 부터 거리하기 두치 한푼에 잡고 행초서 같음에는 필두로 부터 세치 세푼에 잡는다. 하필해서 점획과 파별 굴곡에는 모두 모름지기 일신의 힘을 다해서 보내고 만약 초학자인 경우에는 큰 글자를 먼저하고 작은 것을 쫓지 못한다. 잘 감식하는 자는 써 내지 못하고 잘 써 내는 자는 감식을 못한다. 필력이 좋은자는 뼈가 많고 필력이 좋지 못한 자는 살이 많다, 뼈가 많고 약간 살이 있는것은 근서筋書라 이르며, 살이 많고 약간 뼈인 것은 묵저墨猪라 이르며, 힘이 많고 근육이 풍부한 것은 성聖 무력하고 근육이 없는 것은 병病이다 하나 하나 그 소식을 쫓아 사용하면
ㅡ 천리에 진을 친 구름이 은은하나 그 실은 꼴이 있다.
,(*구절칠 주) 높은 봉우리의 떨어지는 돌이 도르륵한 듯 실로 무너져 내리는 듯 하다
(*삐칠 별, 영자팔법의 략掠) 무소뿔, 상아를 자르는 듯
(*戈의 두번째 내려긋는 획) 백균짜리 쇠뇌가 발동 하는 듯
ㅣ 만년 묵은 마른 등나무 줄기
(八의 오른쪽 것) 무너지는 파도와 우레가 달림
(*句의 두째획)굳센 쇠뇌의 근육 마디
오른쪽 일곱 조목의 필진筆陳의 출입하며 베고 찍는 그림은 집필에 일곱 종류가 있으니 마음이 급하고 집필이 느슨한 자 마음이 느슨하며 집필이 급한 자 있다.
만약 집필이 가까우면서 긴밀히 하지 못하는 자, 맘과 손이 가지런하지 못한 자 뜻이 뒤고 붓이 앞에 있는 자 는 패한다.
만약 집필이 멀면서 급하고 뜻이 앞서고 붓이 뒤한 자 이긴다 또 여섯 종류의 용필用筆이 있어 결구가 둥글게 갖춰 전서법 같으며 회오리 날려 쇄락함이 장초같으며 흉하고 험해 가히 두려움이 팔분서 같으며 요조히 출입함이 비백 같으며 경개히 특립하기가 학머리 같으며 울연히 뽑아나 종횡함이 고예같다 .그러나 마음을 위곡委曲에 두고 매번 한 글자를 함에 각기 그 꼴을 형상하니 이 조작이 묘하면 서도는 필畢 한다. 영화 사년 상우에서 제기製記
*위부인은 왕희지가 서법을 배웠다는 사람으로 당나라 한유의 평에 의하면 왕희지의 글씨는 이쁘고 아장한(姸媚) 것이라는 것이고 한편 문장에 비유하면 심히 말 잘 다듬어 놓은 춘추좌씨전에 비유되는데 내 견해로도 아마 요새말로 한다면 멋있게 세련된 글씨라고 하면 비교적 가까운 범주의 표현이 될까한다 왕희지의 잔적으로 전하는 것들을 보고 추론컨데 그가 여성에게 배웠다는 것은 역시 타당한 말이 분명하다. 그의 글씨는 귀족적 사대부의 글씨로서 표본이 될만큼 대단히 다듬어 절제되고 이쁘고 미려한 묘한 맵시의 자태를 낸다.
위부인(272-349)은 또한 서진의 명필 위항(252-291)의 질녀로 위항은 할아버지 위개衛凱 아버지 위관(220-291), 아우 위선, 위정 아들 위조 위개衛玉+介등과 함께 모두 글씨로 이름난 집안인데 일찌기 진무제가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려다가 가후의 원망을 사게되었는데 이로 인해 혜제가 즉위하고 일족이 해를 입었다 남편 이구(?-325)는 진나라의 사주자사를 역임하며 매번 역전해서 적을 잘 막았으나 끝내 석호에게 패해 남쪽으로 피해 오다가 낙마해 죽었으니 진나라가 남천한 동진(317-420) 이후 과부로서 글씨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처음 배움에 큰 글자부터 하라는 것은 만약 작은 글자를 먼저 배우게 되면 단지 눈살미로 긋기만 하다시피 하는 것이어 필기의 획과 결구를 익숙히 이룰 뿐 한획 한획에서나 획의 연결에서 일종의 붓을 쓰는 요령을 익히는 것을 별로 요하지 않게 되고 글자가 작을수록 측필의 표도 덜 난다 글씨쓰기의 기법에서 진서 즉 정자가 가장 어렵다는 것이 통설이다 가끔 그다지 필법을 배우지 않고 단지 행정서사 따위의 일에 오래 종사해 직업적으로 행초의 읽고 쓰기를 배운사람이 이 글자 독해를 밑천으로 서예를 할 뿐이다시피 한 경우에 보면 흔히 측필로 정자를 쓰는 것을 보며 혹은 이외 어떤 글씨체를 써든 간에 세필을 벗어나는 경우 그중 경험과 다소 눈살미가 있어 구사하는 글씨가 다소 느리다던가 요새 부드럽고 흡수성 좋은 종이가 흔한 만큼 필획이 모호히 번지거나 다소 획이 퍼져 다듬어진 글씨로 쓴다든가 등의 필획보다는 염색해 발라 그리는 듯한 형태로 교묘히 변형되는 것도 볼수있다.
이 글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씨 일가의 서예에 대한 기존의 소개를 정리하면,
위개는 삼국 위나라의 서가로서 후한 말년에 사공연의 벼슬을 헀다가 상서로 옮았으며 조조의 위나라가 들어서자 시중으로 배수되고 조서와 전장의 저작을 맡았으며 62세로 죽었다. 서법청화에는 그가 초서와 고문을 잘해서 대략 그 묘를 다했으며 초서의 세가 약간 여윈데 필적은 정밀 익숙하다 했고 서단에는 그가 소전과 예서 장초가 능품에 들었다 했으며 그는 전서를 잘했는데 한단순의 문하에서 나온 것으로 그가 한단순의 고문상서를 베끼어 한단순에게 보내 보이니 한단순도 어느 것이 자기가 쓴 것인지 위개 것인지 몰랐다 한다. 당시 그의 글씨는 위탄과 같이 이름을 나란히 했으며 그의 글씨는 북파에 새로운 영향을 준 것으로 인정되어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에는 말하길 그의 수선비는 양대안 , 시평공, 정장유, 그리고 위령장 등의 이름난 비에 모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
아들 위관은 서진의 서가로서 초서에 공교해 당시의 명필 삭정과 함께 이묘二妙로 일컬어 졌다. 장지의 장초를 학습하고 아비의 필의를 참작해 일가를 이루었는데 후세에 일컫기를 천연의 자태가 특히 빼어나 홍안이 죽지를 떨쳐 청풍위에 훨훨연 하는 듯 함이 정情을 거느려 운용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했다. 당나라 이사진은 그를 채옹, 양곡과 같은 열에 두었고 장회관은 그를 장지 종요 이왕과 함께 같은 무리로 했으며 서단에는 그의 장초를 신품에 넣고 소전 ,예, 행은 묘품에 넣었다.
위관의 아들 위항은 서진의 황문시랑을 하면서 위관과 함께 혜제 초에 가후의 해를 입었다. 이미 할아비와 아비의 서법에 장지를 학습해 성취가 있었으니 서단에는 말하길 산예서散隸書를 만들어 예서를 열어 폈으며 미미히 그 희끗함이 드러나 구속됨이 비백과 같았으며 예서에서 소쇄했다 했으니 산예서란 산필을 이용해 예서를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글씨를 꽃을 꽂은 미녀가 웃으며 거울대에서 춤추는 것으로 일컬었다. 그의 서법서로 전하는 것으로 사체서세가 있다 (고문, 전서, 예서, 초서의 사체).
당송팔가의 첫째 인물로 치는 당의 한유는 유종원과 함께 고문부흥운동을 일으켜 진대 이래의 자구나 운을 맞추고 어려운 고사를 인용하고 묘사와 수식을 일삼는 문풍인 사륙변려문을 비판하고 글이 고박함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따라서 비록 그는 명필이나 서예가로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서예에도 이런 관점을 가졌던 것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데 위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마침 이런 운동의 일환에서 인지 이때 옛 글자인 석고문의 발견으로 그는 석고가라는 유명한 글을 지어 찬양하면서
"왕희지의 속된 글은 자미姿媚함에 편승하니
몇장 종이로 오히려 좋아라 흰거위를 바꾸도록 했는데
주나라 이후로 여덟 왕조가 잇는 전쟁이 파하도록
아무도 석고를 수습함 없음은 어인 이치인가" 라고 했다.
"신은 나이 스물넷에 숲아래 은거하였사온데 나는 새가 왼손에 종이를 지니고 오른손에 붓을 지녀 신에게 오백일흔아홉자를 주어 일년을 지나지 않아 형세가 방불해지고 그 글의 문장이 계속해 어렵지는 않아 마침내 궁구해 알게 되었습니다 뒤에 북주(*556-581)의 적병이 가득 퍼지는 일을 만나 도로는 멀고 험한데 양주의 저자에서 걸식하니 성은 심씨 자는 광광光姜인 한 노모가 신에게 한끼 찬을 주었기에 그 뜻에 갚을 바 없어 신은 숟갈의 면 위에 하나의 야夜 자를 지어 바로 시장에 가서 보상하게 하니 가까이서 본 자가 셋 멀리서 본 자가 둘인데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천금을 획득했습니다."
어쨌건 한유는 대문호로 당시 궁중이나 개인이 소장한 왕희지의 글씨를 직접 보는데 누구보다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지만 단순히 개인 한유의 독단적 평이라기 보다는 역시 당시까지의 왕희지 글씨에 대한 통론을 약간 자기 입장에서 연미하다고 묘사해 말하고 이 것은 물론 한유가 글씨보는데 일가견이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어쨌건 한유는 당시 문풍뿐 아니라 같이 풍미된 왕체 또한 복고적 관점으로 시류를 비판하는데 있어 그리 탐탁치 않게 보았음을 알수 있다.
笔阵图
正文编辑
注释编辑
译文编辑
作者简介编辑
최근 수정 시각 : 2015-11-06 20:09:09
- 상위 항목 : 중국사의 여성
偉夫人
272(서진 진시 8) ~ 349(동진 영화 5)
중국 동진의 여류 화가이자 서예가다. 이름은 삭(鑠)이고 자는 무의(茂猗).
위전(衛展)의 누이동생이며 여음태수(汝陰太守) 이구(李矩)의 부인이다. 위부인의 아버지는 위항이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위부인도 그러한 가풍에 따라 글씨를 배웠는데, 남편인 이구가 적군을 막다가 낙마해서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글씨쓰는것에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종요의 필적을 본받아 자신의 글씨를 완성하였는데, 제자로는 그 유명한 왕희지를 두었다. 왕희지의 글씨는 이쁘고 아장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위부인의 영향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쓴 글로 필진도(筆陣圖)』가 있고 왕희지의 『제위부인 필진도후(題偉夫人筆陣圖後)』를 첨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namu.wiki/w/위부인
[转载]东晋卫夫人《笔阵图》

标签: 转载 |
卫夫人《笔阵图》分段释读
原文:
注释:
银钩:本指书法中的“钩”这种基本笔画,因优美的笔画能表达出婉媚有力,故谓之“银钩”。在本文中指代书法艺术本身,即古代“六艺”中之“书”也。
释文:
原文:
注释:
行草书:由称草行,一种比较流动而近于草书的书体。
释文:
原文:
注释:
释文:
延伸阅读
《笔阵图》及其理论价值的思考
家学渊源(北派之祖卫瓘侄女、卫桓从的妹妹),有名当代。《书法要录》说她得笔法于钟繇,熔钟、卫之法于一炉。所着《笔阵图》中云:“横”如千里之阵云、“点”似高山之墬石、“撇”如陆断犀象之角、“竖”如万岁枯藤、“捺”如崩浪奔雷、“努”如百钧弩发、“钩”如劲弩筋节。有《名姬帖》、《卫氏和南帖》传世。其字形已由钟繇的扁方变为长方形,几条清秀平和,娴雅婉丽,去隶已远,说明当时楷书已经成熟而普遍。《书评》称之为“如插花少女,低昂美容;又如美女登台,仙娥弄影,红莲映水,碧海浮霞。”
卫铄认为,书法品位就高在“多力丰筋”,即筋劲,力强。多“肉”则是下品,是“墨猪”,臃肿无神气。魏晋人讲“风骨”,讲“清奇险峻”,所以以“瘦硬”为美。后代人或崇尚“丰腴”,或崇尚“肥劲”,对“筋”、“骨”、“肉”也就有了不同的理解。但“书必有神、气、骨、肉、血,五者缺一,不能成书”(苏轼《东坡题跋》卷上)则是历代书家的共识。卫铄的贡献就在于她把“筋”、“骨”、“肉”之说引入书论,使之成为书法审美范畴,为后世的创作和欣赏开辟了新的思路。
《笔阵图》完整原文:
一[横]如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形。
丶[点]如高峰坠石,磕磕然实如崩也。
丿[撇]陆断犀象。
乙[折]百钧弩发。
丨[竖]万岁枯藤。
丶[捺]崩浪雷奔。
刁[横折弯钩,以“刁”代替]劲弩筋节。
右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有心急而执笔缓者,有心缓而执笔急者。若执笔近而不能紧者,心手不齐,意后笔前者败。若执笔远而急,意前笔后者胜。又有六种用笔:结构员备如篆法,飘飘洒落如章草,凶险可畏如八分,窈窕出入如飞白,耿介特立如鹤头,郁拔纵横如古隶。然心存委曲,每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书道毕矣。永和四年上虞制记。
《笔阵图》完整释文:
笔毫要取那高山绝壁中的兔毛,八九月间猎取,笔头要一寸,管长要五寸,锋毫要齐整,锋腰要有强度。砚台要选用浅黑干涸的新石,润滑与滞涩兼顾,能浮耀墨汁的光泽。至于墨要取庐山的松烟、代郡的鹿角胶,要十年以上,强硬如石的作为制造的原料。纸则要取东阳鱼卵纸,柔软滑净的。大凡学写字,先要学执笔之法,如果作真书,要执去笔头二寸一分处;如果是行草,要执去笔头三寸一分处。下笔点画波撇曲折,都要尽一身之力行笔。初学书者先学大字,不得从小字开始。善于鉴赏的不善于写,善于写的不善于鉴赏。善用笔力者多骨,不善笔力者多肉。多骨少肉者叫它“筋书”,多肉少骨的叫它“墨猪”,多力丰筋的是可取之法,无力无筋的为错误之法。要一一从其间吸取奥妙、体会真谛,并且合理地运用它。
横画:要像千里阵云,隐隐然其实有高低不同的形状。
侧点:要像高峰坠石,磕磕然实际在崩塌。
撇掠:锋锷能在陆地截断犀角象牙。
戈笔:要像百钧重的弓张箭发。
努笔:要像万岁枯藤一样多节而瘦劲。
背抛法:要像蹦浪雷奔一样徐迟有力。
钧弩势:要有如强弩筋骨一样遒劲。
右边是七条笔阵出入斩斫图。执笔有七种情形。有时候心情紧急而执笔却不紧,有时心情宽松执笔却很紧。如果执笔离笔头近而又不紧,意在笔先就会成功。于是又有六种用笔之法:
结构字体、布置形势完备的如篆法;
笔势飘逸洒脱而又自由奔放的有如章草;
波撇凶险可畏如八分书;
那笔法出入娴静优雅的好比作飞白书;
笔画高耸挺立如鹤头书;
纵横沉凝遒劲的如古隶。
然而还要用心思考,考虑详尽,再作一字,各象其形,这样才有可能臻于妙境,书道也只有在这时才算穷尽。岁在永和四年,上虞制图并撰文。
卫夫人笔阵图 卫夫人笔阵图_百度图片
'글씨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판교 정섭이 쓴 끽휴시복, 난득호도 (0) | 2016.01.31 |
---|---|
예기비(禮器碑) (0) | 2016.01.31 |
‘가보,가학의 전통이 빛나다’ 성호기념관 특별전 (0) | 2016.01.30 |
왕희지 제위부인필진도후(王羲之·題衛夫人筆陣圖後) (0) | 2016.01.30 |
中国书法简史 (0) | 2016.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