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정섭이 쓴 끽휴시복, 난득호도 | 서예
판교 정섭(1693~1766)은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당시 여덟명의 괴짜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양주팔괴중 으뜸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글씨는 판교체라는 경지를 열어 황정견의 산곡체와 더불어 괴이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서체를 구사하고 있으며, 특별히 그의 서체를 <난석포가체>라고 하여 마치 길바닥에 돌맹이를 이리저리 널어놓은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림에도 뛰어나 사군자와 문인화는 우리나라 근세의 유명한 서화가 <해강 김규진 선생>이 사표로 삼을 만치 격조가 높았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글씨나 그림을 구하면 보배를 얻은 것처럼 소중하게 여길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최근에는 그가 쓴 <난득호도 難得糊塗>라는 글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데, 탁본을 수집하는 우연한 기회에 <끽휴시복 喫虧是福>이라는 탁본을 입수하게 되어 두 글씨를 대조하면서 정판교의 품성을 헤아려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합니다.


<끽휴시복 ~ 손해보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행복이다.>
만자손지기 / 가득찬 사람은 덜어지게 되어 있고
휴자영지점 / 비어있는 사람은 점점 차게 되어 있다.
손어기즉영어피 / 자기가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
각득심정지반 / 그러면 각자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
이득아심지안즉평 / 그 때가 나의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니
차안복즉재시의 / 바로 복을 받는 때가 아니겠는가.

<난득호도 ~ 멍청함을 얻기란 정말 어렵다.>
총명난 호도난 / 총명하기도 어렵고 멍청하기도 어렵다.
유총명이전입호도경난 / 총명한 사람이 멍청하게 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방일착 퇴일보 당하심안 / 집착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하니
비도후래복보야 / 나중에 올 복을 받고자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끽휴시복>과 <난득호도>는 어쩌면 정판교의 인간성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정판교가 산동에 부임한 어느 날, 하루는 래주의 거봉산으로 유람을 갔다. 원래 목적은 산중에 있는 정문공비를 감상할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늦어 산중에 있는 오두막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주인은 스스로 <호도노인>이라고 칭하는 유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주인은 집안에 탁자만큼이나 큰 벼루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조각이 아주 뛰어나 판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정판교에게 벼루의 뒷면에 써 넣을 글을 한편 부탁했다. 정판교는 흥이 일어 그 자리에서 <난득호도>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그 아래에 <강희수재 옹정거인 건륭진사 / 정판교는 강희제 때 수재라는 지방 벼슬,옹정제 때 거인이라는 현의 벼슬, 건륭제 때 진사라는 중앙벼슬을 역임한 것을 자랑삼아 새긴 것>라고 새긴 낙관을 해 주었다. 벼루가 컸으므로 아직 여유가 남아 정판교는 주인에게 발어를 써기를 부탁했다. 그러자 주인은 붓을 들어 <득미석난得美石難 득완석우난得頑石又難 유미석전입완석경난由美石轉入 미어중美於中 완어외頑於外 장야인지려藏野人之廬 불입부귀문야不入富貴門也 / 아름다운 돌을 얻는 것은 어렵고 단단한 돌을 얻기란 더욱 어렵다. 아름다운 돌이 단단한 돌로 바뀌기란 더더욱 어렵다. 아름다움은 가운데 있고 단단함은 바깥에 있으니 야인은 초가집에 있고 부귀한 집 문을 드나들지 않는다.>
그리고는 도장을 하나 찍었는데, 그 도장에는 이렇게 새겨 있었다.
<원시제일 향시제이 전시제삼 / 세단계의 과거시험을 보아 각각 1,2,3 등>
정판교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으며, 이 노인이야말로 은퇴한 고관이며, 호도노인이란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지은 이름임을 알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난득호도>의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추가했다.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전입호도경난 방일착 퇴일보 당하안심 비도후래복보야>
‘사람은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새는 먹이 때문에 죽는다.’ 정판교는 ‘이익 추구가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장사꾼들의 지나친 탐욕은 현실에서 벗어난 억지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천만원 벌면 딱 맞는 장사를 통해 3천만원을 손에 넣었다면 그것은 과도한 욕심이라는 것이다. 그 이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십중팔구 고객을 농락했거나 사업 파트너의 이익을 갈취해서 불린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근시안적인 돈벌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따라서 ‘손해 보는 것이 오히려 복’이라는 바보 철학의 정신을 마음 깊이 새김으로써 탐욕스런 마음을 뿌리치고 깨끗하고 호탕한 장사 전략을 구사하여 장기적인 이익을 도모해야 한다. <정판교 / 바보 경영의 대지혜>
http://blog.daum.net/imrdowon/8468083
難得糊塗
어수룩한 척하기는 어렵다
聰明難 糊塗難 (총명난 호도난)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방일착 퇴일보 당사심안)
非圖後來福報也( 비도후래복보야)
판교 정섭이 산둥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 만난 호도노인(糊塗老人) 이란 은거하고 있는 옛 고관의 비범함에 놀라 지은 글이다. 판교 정섭이 하루는 내주 지방의 거봉산을 찾았다. 육조시대에 세워진 정문공비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가다가 시간이 늦어 산속에 있는 茅屋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모옥의 주인은 유생의 티가 나는 노인으로 스스로 糊塗老人(어수룩한 늙은이)라고 소개하였다. 모옥에는 네모난 탁자만큼이나 큰 좋은 돌에 조각을 잘 새겨 넣은 벼루가 있었다. 판교 정섭은 좋은 벼루를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다음날 아침 어수룩한 노인은 판교 정섭에게 벼루에 새기기 좋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판교 정섭은 즉석에서 ‘난득호도’라는 네 글자를 먼저 쓰고 이어 자신을 다음과 같은 글로 써 남겼다.
康熙秀才 (강희수재) 강희제 때 수재 합격
雍正擧人 (옹정거인)옹정제 때 거인 합격
乾隆進士 (건륭진사) 건륭제 때 진사 합격
당시의 과거제도는 3단계의 시험을 치렀는데, 향시鄕試(고향마을에서 치르는 1단계 시험)에 합격을 하면 수재라 불렀고, 각 성省에서 치르는 2단계 시험에 합격하면 거인, 마지막으로 황제 앞에서 치르는 3단계의 전시殿試에 합격을 하면 진사가 되었다. 정판교는 글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나, 과거시험에는 좀 늦어 늦은 나이에 산동山東의 현령縣令이 되었을 뿐이다. 벼루가 워낙 컸으므로 정판교는 자신의 글을 쓰고 남은 빈 자리에 노인에게 발문跋文을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노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得美石難(득미석난 ) 아름다운 돌은 얻기 어렵다
得頑石尤難 ( 득완선우난) 굳센 돌을 얻기도 또한 어렵다
由美石轉入頑石更難 ( 유미석전입완석갱난) 아름다운 돌이 굳센 돌로 바뀌기는 더더욱 어렵다
美於中頑於外 (미어중완어외 ) 아름다움은 속에 있고, 굳셈은 밖에 있으니
藏野人之廬 (장야인지려 ) 시골사람 오두막에 숨어 살뿐
不入富貴門也(불입부귀문야) 재산과 지위를 위해 드나들지 않는다
글을 지어 쓰기를 마친 다음 노인은 낙관을 썼다.
院試第一 원시에서 일등
鄕試第二 향시에서 이등
殿試第三 전시에서 삼등
노인이 쓴 대구(對句:짝을 맞추어 쓴 글)을 읽고 판교 정섭은 깜짝 놀랐다. 그제야 비로소 이 모옥에 묻혀 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노인은 고관을 지내고 은퇴하여 숨어 살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판교 정섭은 다시 붓을 들어 앞에 쓴 <난득호도> 네 글자에 보태어 다음과 같은 對句를 썼다.
聰明難 糊塗難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수룩하기도 어렵다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총명한 사람이 어수룩하게 되기는 더 어렵다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한 생각을 버리고 한 걸음 물러서면 마음이 편안해 지리니
非圖後來福報也 도모하지 않아도 나중에 복된 응보가 올 것이다
이후로 ‘난득호도’는 판교 정섭의 좌우명이 되었고 그는 이 글을 그의 특유의 글씨체로 써서 책상 머리에 붙여놓았다. 그러나 판교 정섭이 ‘난득호도’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느끼고 깨달은 것은 관직을 떠나 고향 양주로 돌아갈 때였다.판교 정섭이 관직에 있는 동안 큰 가뭄이 들어 농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자기가 책임을 지리고 하고 즉각 관청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의 기근을 구하였다. 상부에 허가를 받기 위해 공문을 올리고 조정의 비준을 기다리다가는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고 말 형편이었다. 한시가 급한 사정에 판교 정섭은 관청의 창고를 모두 열어 구재미를 나누어주니, 현성안팎의 길 위에는 벌떼와 같은 백성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았으나, 집집마다 모두 구재미를 받아 잠시나마 기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판교 정섭은 그때 백성의 어려움을 <逃荒行>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十日賣一兒 ( 십일매일아 ) 열흘만에 아이 하나 팔고
五日賣一婦 (오일매이부) 닷새만에 부인을 팔고
來日勝一身 (래일승일신 ) 내일은 제 몸만 남아
茫茫郞長路 (망망랑장로 )망망한 유랑길 오르네
그러나 이런 판교 정섭의 선행은 도리어 부패한 고관들과 돈 많은 부호들의 미움을 사는 빌미가 되었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예순 한 살 때 일이다. 마침내 그가 근무하였던 현을 떠날 때 현의 모든 백성들이 길거리로 나와서 울며 그를 전송하였다. 이때 세 필의 당나귀 가운데 한 필에는 자신이 타고, 또 한 필에는 길을 인도하는 書僮 한 사람을, 나머지 한 필에는 자신의 옷과 서화 그리고 거문고 하나를 실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현령으로 지낸 판교 정섭의 삶이 얼마나 청빈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난득호도의 뜻을 다시금 절감하였다. 그는 에순을 넘긴 나이에 파면을 당하고서야 비로서 삶의 예지를 처절하게 깨닫고, 스스로 총명함보다는 ‘호도’의 길을 택하였다.
호도란 바보라는 뜻으로도 통한다. 따라서 난득호도는 바보인 척하기도 어렵다는 말이다. 이 말은 혼란한 세상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 드러내 보이지 말고 되도록 자신의 재주를 감추고, 그저 바보인 척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혜로우나 어수룩한 척하고, 기교가 뛰어나나 서투른 척하고, 강하나 부드러운 척하고, 곧으나 휘어진 척하며 …… 예나 지금이나 총명하기도 어렵고 또한 총명한 가운데 멍청하기도 어려운 세상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멍청한 사람이 총명한 사람으로 바뀌기도 어렵고, 또한 총명한 사람이 멍청한 사람으로 바뀌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듯이, 사람도 너무 깐깐하면 친구가 없고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때로는 조금 멍청한 듯 행동하는 것이 늘 지나치게 똑똑하고 예민하여 모든 일에 즉각 즉각 빠르게 반응하는 것보다 한결 나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판교 정섭이 이 글을 짓고 쓴 다음부터 난득호도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생활 속의 격언이자 금언이 되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자기의 집의 거실이나 서재, 또는 현관 아니면 사무실에 판교 정섭이 쓴 난득호도라는 편액을 즐겨 걸고 있다. 이 판교 정섭의 바보철학이 중국인들의 인생철학이자 생활철학의 하나가 된 것이다.중국인들은 본래 자기의 깊은 속내와 생각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집이나 건물의 밖도 될 수 있으면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그저 처음 집을 지을 때의 모습 그대로 꾸밈없이 가꾸고 산다. 판교 정섭의 난득호도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글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한 걸음 물러남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판교 정섭이 말하였듯이 뒷날 저절로 찾아 오는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노자가 말한 대변여눌(大辯如訥:말을 썩 잘하는 것은 도리어 말이 서투름과 같다)와 대교약졸(大巧若拙:크게 기교가 많음은 졸박한 것과 같다)나 송나라 때의 蘇東坡가 말한 대지약우(大智若愚:큰 깨달음은 어리석음과 같다)는 말 모두는 이런 동양인의 깊은 속마음과 지혜의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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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代]] 중국 청대 판교 정섭의 서예작품| ▒▒ 中國書藝 ▒▒
友石/朴信根 | 2009.08.01. 11:50
판교 정섭의 서예세계 정섭(鄭燮; 1693一1766) 자 극유(克柔), 호 판교(板橋). 강소성(江蘇省) 흥화(興化) 출생이나 양주에 가서 살았다.. 시(詩)·서(書)·화(畵) 모두 특색 있는 작풍을 보이며, 양주팔괴(楊州八怪)를 대표하는 화가요 문학가이다. 강희 연간에 수재(秀才), 옹정 연간에 거인(擧人), 건륭 연간(1736년)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50여 세에 비로소 산동성의 지현으로 부임했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현령으로 정사에 힘썼지만 상관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1746년의 대기근 때 관의 곡창을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는데, 1753년 기근구제에 대하여 고관에게 거역하였다 하여 면직된 다음 병을 핑계로 그후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이후 양주에서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만년에 더욱 고독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데, 팔괴의 한 사람이자 오랜 벗인 이선의 보살핌을 받았다. 화훼화를 잘 그렸고, 특히 난초와 대나무에 뛰어났으며, 시·서·화 삼절로 알려졌다.
그의 시는 체제에 구애받음이 없었고, 서는 고주광초(古籒狂草)를 잘 썼다. 행해(行楷)에 전예(篆隸)를 섞었는데, 그 사이에 화법도 넣어서 해방적인 독자적 서풍을 창시하였다. 팔분(八分)에 대하여 그의 서체를 육분반서(六分半書)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화훼목석(花卉木石)을 잘 그렸으며, 특히 뛰어난 것은 난(蘭)·죽(竹)으로서 상쾌한 감이 있는 작품이 많다. 〈묵죽도병풍(墨竹圖屛風)〉 〈회소자서어축(懷素自敍語軸)〉 등의 작품과 《판교시초(板橋詩鈔)》 《도정(道情)》 등의 시문집이 있다.









<난득호도 難得糊塗>
난득호도 밑의 글씨는 "총명난 호도난 유총명이전입호도갱난 방일착 퇴일보 당하심안 비도후래복보야" 총명해지기도 어렵거니와 멍청해지는 것도 또한 어렵다. 총명하면서도 멍청해지려는 것은 더 더욱 어렵다. 집착을 버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 마음이 평안한 것을. 나중에 복받고자 함이 아닐찌니.
호도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풀을 바른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라고 풀이 했다. 따라서 호도를 멍청하다고 풀이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혹독한 가뭄으로 관내의 백성은 굶주리는데 곤내 창고는 비어 있고 중앙정부와 지주들은 지원을 않고 관리로서 결판을 내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해야하는 심경이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쓴 휘호라고 짐작하고 있다.









출처;서예세상 |
cafe.daum.net/useok/Gstq/184 우석서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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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3월 이전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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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김영안 | 제 목 | 추사를 넘어서 | 내 용 | 제목 : 추사를 넘어 저자 : 김 종헌 출판사 : 푸른역사 출판일 : 2009,5.29 독서일 2010.3.1
사람을 판단할 때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사람의 언행과 함께 글씨의 솜씨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심정즉필정(心正卽筆正)이란 바른 마음에서 바른 글씨가 나온다.
쓰다 버린 붓이 무덤같이 수북이 쌓여도 하나도 진기한 일이 아니며. (退筆成塚不足珍) 만 권의 책을 읽어야 비로소 신과 통할 수 있다 (讀破萬卷始通神) – 소동파.
도에 뜻을 두고 (志于道) 덕에 근거하며 (據于德) 인에 의지하며 (依于仁) 예술에 노닌다 (遊于藝) - 논어 술이편
삼절- 시서화: 잘 지은 글과 시는 서예라는 시각 예술의 옷을 입어 긂과도 잘 어울릴 수 밖에 없다.
핵의 씨눈이 살아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지제력(五指霽力)하고 만호제력(萬豪霽力)하여 중봉(中鎽)으로 글씨를 써야 한다. 붓으로 다섯 손가락의 고른 힘으로 붓대를 잡고, 모든 붓 털이 힘을 골고루 발휘하며, 붓끝이 늘 가운데로 오게 하여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 소지도인 강창원.
안필은 순간적으로 체득한 짧은 순간에 부드러우나 단호하게 붓을 누르는 것이며, 돈필은 보다 강하고 느리게 누르는 것.
서예가들은 전각을 할 때 성명인은 음각한 경우에는 아호인은 양각하여 나란히 찍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난득호도(難得糊塗) – 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 판교 정섭
전체적으로 옆으로 쓴 가로획보다는 내려쓰는 세로 획이 더 굵게 양의 기세로, 같은 획이라 할 지라도 왼쪽 획은 가늘고 오른 쪽 획은 보다 굵게 양으로, 안쪽의 획보다는 바깥쪽 획을 굵고 힘차게 양의 기세로 썼다.
아름다운 돌을 얻기 어렵다 (得美石難) 굳센 돌 역시 얻기 어렵다 (得頑石尤難) 아름다운 돌이 굳은 돌로 바뀌기는 더욱더 어렵다 ( 由美石轉入頑石更難) - 모옥.
반은 배우고 반은 버려 일찍이 전부를 배운 적이 없다. 전부를 이루고자 욕심내지 않으며 실제 전부를 이룰 수도 없으니 또한 반드시 전부를 이룰 필요도 없다. (學一半 敝一半 未當全學 非不欲全 實不能全 亦不必全也) - 판교
서예가와 문인들이 대나무를 즐겨 그리는 이유는 대나무가 문학성을 내포하고 있고, 대나무를 그리는 법이 서예 기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시의 관계는 서로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대나무를 그리는 순서는 처음에 줄기(竿)를 그리고 나서 가지(枝)를 그리고 그 위에다 잎(葉)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나무의 특징인 마디(節)를 그린다. 이는 시의 기승전결과 통한다.
그림 그리는 법에는 장강 일만 리와 같은 멀고 긴 연원이 있고 (畵法有長江萬里) 글씨의 필획의 힘은 외로운 소나무 가지의 굳세고 곧음과 같다. (書勢如孤松一枝) - 추사.
봄바람은 크게 부드러우나 능히 만물담아 포용하고 (春風大雅能容物) 가을 물과 같이 차고 맑은 선비의 문장은 속세의 먼지에 물들지 않는다. (秋水文章不染塵)
서예에서는 익숙하게 잘 쓴 달필의 글씨만이 좋은 글씨는 아니다. 쓰지 않을 수 없어 절실히 쓰는 글씨가 좋은 글씨다. 마음이 충만한 가운데 저절로 흥이 나서 쓴 글씨가 좋은 글씨다. 추사는 왕희지의 아름답고 고상한 운치, 구양순의 규범적인 법식, 안진경과 소동파의 의취를, 조맹부의 아름다운 자태, 판교의 개성의 괴를 넘어 입고출신의 정신으로 자신의 품성과 운명을 담은 괴졸한 아름다운 경지를 창조했다.
見利思義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見危授命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澹洦明志 욕심 없이 마음이 깨끗해야 큰 뜻을 밝게 가질 수 있고, 寧靜致遠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포부를 이룰 수 있다. – 안중근.
삼여도(세 마리 물고기 그림): 삼국지 위서 왕랑조 어떤 사람이 동우에게 시간이 없어서 독서를 못한다고 하자 독서에는 일년의 나머지인 겨울, 하루의 나머지인 밤, 밝은 날의 나머지인 흐리고 비 오는 날 (陰雨)의 세 여유만 있으면 충분하다.
大成若缺 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결함이 있는 듯하지만 其用不敝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大楹若沖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여 其用不窮 그 쓰임에 끝이 없다. 大直若屈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大巧若拙 큰 솜씨는 마치 서툰 듯하며, 大辯若訥 큰 솜씨는 마치 어눌한 듯하다. 躁勝寒 분주하게 움직이면 추위를 이길 수 있고 靜勝熱 고요히 차분하게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淸靜爲天下正 맑고 고요하면 천하의 마음을 이룬다. –노자 도덕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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郑板桥
(清代书画家、文学家)
编辑 锁定
郑板桥(1693-1765),原名郑燮,字克柔,号理庵,又号板桥,人称板桥先生,江苏兴化人,祖籍苏州。康熙秀才,雍正十年举人,乾隆元年(1736年)进士。官山东范县、潍县县令,有政声,后客居扬州,以卖画为生,为“扬州八怪”重要代表人物。 郑板桥一生只画兰、竹、石,自称“四时不谢之兰,百节长青之竹,万古不败之石,千秋不变之人”。其诗书画,世称“三绝”,[1] 是清代比较有代表性的文人画家。[2] 著有《郑板桥集》。 - 中文名
- 郑板桥
- 别 名
- 郑克柔(字)、郑燮
- 国 籍
- 中国
- 民 族
- 汉族
- 出生地
- 江苏兴化
- 出生日期
- 1693年11月22日(癸酉年)
- 逝世日期
- 1765年1月22日(乙酉年)
- 职 业
- 画家
- 主要成就
- “扬州八怪”之一
- 代表作品
- 《板桥全集》《甘谷菊泉图》《兰竹芳馨图》《清光留照图》《墨兰图》《墨竹图题诗》
- 年 代
- 清朝
早年时期
1693年(清圣祖康熙三十二年)11月22日子时,郑板桥出生,其时
家道已经中落,生活十分拮据。三岁时,生母汪夫人去世,少时随父立庵至真州毛家桥读书。至八、九岁已在父亲的指导下作文联对。十四岁又失去继母郑夫人。乳母费氏是一位善良、勤劳、朴真的劳动妇女,给了郑板桥悉心周到的照顾和无微不至的关怀,成了郑板桥生活和感情上的支柱。十六岁从乡先辈陆种园先生学填词。二十岁左右考取秀才。二十三岁娶妻徐夫人。是年秋郑板桥首次赴北京,于漱云轩手书小楷欧阳修《秋声赋》。二十六岁至真州之江村设塾教书。[3] 客居扬州
1723年(雍正元年),父亲去世,此时板桥已有二女一子,生活更加困苦。由于生活困苦,郑板桥在三十岁以后即弃馆至扬州卖画为生,实救困贫,托名”风雅”。在扬州卖画十年期间,也穿插着一些旅游活动。不幸的是徐夫人所生之子去世,郑板桥曾作诗以致哀。三十二岁出游江西,于庐山结识无方上人和满洲士人保禄。出游北京,与禅宗尊宿及其门羽林诸子弟交游,放言高论,臧否人物,因而得狂名。在名期间,结织了康熙皇子、慎郡王允禧,即紫琼崖主人。[3] 中年生活
1728年(雍正五年),客于通州,读书于扬州天宁寺,手写《四书》各一部。 1730年(雍正七年),作《道情十首》初稿,三十九岁,徐夫人病殁。郑板桥十载扬州,结论了许多画友,金农、黄慎等都与他过往甚密,对他的创作思想乃至性格都有极大的影响。
1733年(雍正十年),郑板桥四十岁,是年秋,赴南京参加乡试,中举人,作《得南捷音》诗。为求深造,赴镇江焦山读书。现焦山别峰庵有郑板桥手书木刻对联“室雅何须大,花香不在多”。 1736年(乾隆元年),在北京,参加礼部会试,中贡士,五月,于太和殿前丹墀参加殿试,中二甲第八十八名进士,为赐进士出身,特作《秋葵石笋图》并题诗曰“我亦终葵称进士,相随丹桂状元郎”,喜悦之情溢于言表。 1737年(乾隆二年),滞留北京一年左右,以图仕进,未果,南归扬州,得江西程羽宸资助,娶饶氏。乳母费氏卒。
1739年(乾隆四年),作七律四首赠淮南监运使虞见曾。
1740年(乾隆五年),为董伟业《扬州竹枝词》作序。 1741年(乾隆六年),入京,候补官缺,受到慎郡王允禧的礼诚款待。 1742年(乾隆七年)春天,郑板桥为范县令兼署小县朝城,始订定诗、词集。[3] 1743年(乾隆八年),将《道情十首》几经修改,至是方定稿,刻者为上元司徒文膏。1744年,饶氏生子。郑板桥宰范期间,重视农桑,体察民情、兴民休息,百姓安居乐业。
1746年(乾隆十一年),自范县调署潍县。是年山东大饥,人相食。潍县原本繁华大邑,然自是年灾荒连年,救灾便成了郑板桥主持潍县政事的一项重要内容,他开仓赈货,令民具领券供给,又大兴工役,修城筑池,招远近饥民就食赴工,籍邑中大户开厂煮粥轮食之。尽封积粟之家,活万余人。秋以歉收,捐廉代轮,尽毁借条,活民无算。潍县饥民出关觅食,板桥感叹系之,作逃荒行。 1747年(乾隆十二年),满洲正黄旗人、侍讲学士德保主试山东,板桥同在试院,相与唱和。1748年,
1748年(乾隆十三年),大学士高斌和都御史刘统勋为特使到山东放赈,板桥随之。秋大熟,潍县灾情渐趋缓解,饥民也由关外络绎返乡,板桥作还家行纪其事。为防水浸寇扰,捐资倡众大修潍县城墙。秋末,书修潍县城记。乾隆出巡山东。郑板桥为书画史,参与筹备,布置天子登泰山诸事,卧泰山绝顶四十余日,常以此自豪,镌一印章“云乾隆柬封书画史”。 1749年(乾隆十八年),饶氏所生之子又于兴化病殁。与御史沈延芳同游郭氏园。重订家书、诗钞,并手写付梓。
1750年(乾隆十五年),撰板桥自序。同年,重修文昌祠,倡建状元桥,作文昌祠记。
1751年(乾隆十六年),海水溢,板桥至潍县北边禹王台勘灾。郑板桥作官意在“得志则泽加于民”,因而他理政时能体恤平民和小商贩,改革弊政,并从法令上、措施上维护他们的利益,板桥宰潍期间勤政廉政,无留积,亦无冤民”,深得百姓拥戴。潍县富商云集,人们以奢靡相容,郑板桥力倡文事,发现人才,留下了许多佳话。作“难得湖涂”横幅。
1752年(乾隆十七年),主持修潍县城隍庙,撰城隍庙碑记,在文昌祠记和城隍庙碑记里,板桥力劝潍县绅民修文洁行”,在潍且百姓间产生了相当大的影响。同年,与潍县童生韩镐论文,并作行书七言联删繁就简三秋树,领异标新二月花。”郑板桥在潍县任上著述颇多,其《潍县竹枝词》四十首尤为脍炙人口。“民于顺处皆成子,官到闲时更读书”。官潍七年,板桥无论是在吏治还是诗文书画方面都达到了新的高峰,“吏治文名,为时所重”。板桥居官十年,洞察了官场的种种黑暗,立功天地,字养生民的抱负难以实现,归田之意与日俱增。[3] 晚年生活
1753年(乾隆十八年),郑板桥六十一岁,以为民请赈忤大吏而去官。去潍之时,百姓遮道挽留,家家画像以祀,并自发于潍城海岛寺为郑板桥建立了生祠。去官以后,板桥卖画为生,往来于扬州、兴化之间,与同道书画往来,诗酒唱和。
1754年(乾隆十九年),郑板桥游杭州。复过钱塘,至会稽,探禹穴,游兰亭,往来山阴道上。
1757年(乾隆二十二年),参加了两淮监运使虞见曾主持的虹桥修禊,并结识了袁枚,互以诗句赠答。这段时期,板桥所作书画作品极多,流传极广。
1762年(乾隆二十七年),画了一幅《竹石图》,一块巨石顶天立地,数竿瘦竹几乎撑破画面。右上角空白处题诗一首:“七十老人画竹石,石更凌嶒竹更直。乃知此老笔非凡,挺挺千寻之壁立。乾隆癸未,板桥郑燮。”下揿两方名号印。画幅右下方空白处又押上“歌吹古扬州”闲章一方。郑板桥颠沛了一生,不向各种恶势力低头,仍如磐石般坚强,如清竹般劲挺,如兰花般高洁。诗题得整整斜斜,大大小小,或在峰峦之上,代之以皴法;或在竹竿之间,使画连成一片;或在兰花丛中,衬托出花更繁,叶更茂。画上题诗,宋元即首,并非郑燮始创,但如郑燮之妙,实不多见,妙就妙在各类艺术高度统一。
1765年1月22日(乾隆三十年十二月十二日),板桥卒,葬于兴化城东管阮庄,享年七十三岁。板桥二子均早卒,以堂弟郑墨之子鄣田嗣。[3] [4] 诗书画三绝
书法艺术
郑板桥书法,用隶体掺人行楷,自称“六分半书”,人称“板桥体”。其画,多以兰草竹石为主,兰竹几成其心灵的郑板桥的书法艺术,在中国书法史上是独树一帜的。
由他23岁写的《小楷欧阳修《秋声赋》和30岁写的《小楷范质诗》推知,板桥早年学书从欧阳询人手。其字体工整秀劲,但略显拘谨:这与当时书坛盛行匀整秀媚的馆阁体,并以此作为科举取士的标准字体有关。对此,郑板桥曾说:“蝇头小楷太匀停,长恐工书损性灵。”在他40岁中进士以后就很少再写了。郑板桥书法最被称道的是“六分半书”,即以“汉八分”(隶书的一种)杂人楷、行、草而独创一格的“板桥体”。
“六分半”书,是郑板桥对自己独创性书法的一种谐谑称谓。隶书中有一种笔画多波磔的“八分书”,所谓“六分半”,其意大体是隶书,但掺杂了楷,行、篆、草等别的书体。《行书曹操诗》轴(如同,现藏扬州博物馆)可视为“六分半”体的代表作。此件写曹操《观沧海》诗,幅面很大,平均每宇有10平方厘米以上,字体隶意颇浓,兼有篆和楷;形体扁长相间,宅势以方正为主而略有摆宕。拙朴扩悍,恰与曹诗雄伟阔大的风格相似。郑板桥曾在《赠潘桐冈》诗中称道自己的书法:“吾曹笔阵凌云烟,扫空氛翳铺青天。一行两行书数字,南箕北斗排星躔。”
郑板桥书法作品的章法也很有特色,他能将大小、长短、方圆、肥瘦、疏密错落穿插,如“乱石铺街”,纵放中含着规矩。看似随笔挥洒,整体观之却产生跳跃灵动的节奏感。如作于乾隆二十七年的《行书论书》横幅,时已七十高龄,乃晚年佳作。大意是说苏东坡喜用宣城诸葛氏齐锋笔,写起来十分如意,后来改用别的笔,就手心不相应。板桥自己喜用泰州邓氏羊毫笔,写起来婉转飞动,无不如意。于是把泰州邓氏羊毫比作宣城诸葛齐锋,最后说:“予何敢妄拟东坡?而用笔作书皆爱肥不爱瘦,亦坡之意也。”整幅作品结字大大小小,笔划粗粗细细,态势欹欹斜斜,点画、提按、使转如乐行于耳,鸟飞于空,鱼游于水,在一种态情任意的节律中显露着骨力和神采:清人何绍基说他的字“间以兰竹意致,尤为别]趣”。从这件作晶的章法、结体和笔画,不准看出他“波磔奇古形翩翩”的兰竹娄神。
绘画艺术
郑板桥出身于书香门第,康熙末年中秀才,雍正十年中举人,乾隆元年中进士,五十岁起先后任山东范县、潍县知县计十二年。“得志加泽于民”的思想,使得他在仕途对连年灾荒的平民百姓采取了“开仓赈贷”“捐廉代输”等举措,这引起了贪官污吏、恶豪劣绅的不满,被贬官。之后,他靠卖画维持生活。郑板桥的一生,经历了坎坷,饱尝了酸甜苦辣,看透了世态炎凉,他敢于把这一切都糅进他的作品中。郑板桥的题画诗已摆脱传统单纯的以诗就画或以画就诗的窠臼,他每画必题以诗,有题必佳,达到“画状画之像”“诗发难画之意”,诗画映照,无限拓展画面的广度,郑板桥的题画诗是关注现实生活的,有着深刻的思想内容,他以如枪似剑的文字,针砭时弊,正如他在《兰竹石图》中云:“要有掀天揭地之文,震电惊雷之字,呵神骂鬼之谈,无古无今之画,固不在寻常蹊径中也。” ①瘦劲竹子画:当郑板桥任山东潍县知县,曾作过一幅画《潍县署中画竹呈年伯包大中丞括》,画中的竹子不再是自然竹子的“再现”,这诗题,不再是无感而发的诗题,透过画和诗,使人们联想到了板桥的人品,他身为知县,从衙斋萧萧的竹声,联想到百姓困苦疾声,说明他心中装着百姓,情感链系在百姓身上。这时画中的竹叶有了形象的扩展,郑板桥开仓赈贷,救济灾民的场景一幕幕地浮现在人们脑海里,“凝固的瞬间”在观众的脑海里变成了无限延续的故事,好似极富感染力的小说、影片那样,扣人心弦,发人深思。寥寥几笔竹叶,简练几句诗题,让人倍感作品中蕴藏着的深刻的思想、浓浓的情意。再有几幅是郑板桥被贬官后离开潍县,三头毛驴一车书,两袖清风而去,临行前后作的画,其一画竹图题云:“乌纱掷去不为官,囊囊萧萧两袖寒,写取一枝清瘦竹,秋风江上竹渔竿”,借竹抒发了他弃官为民、淡泊名利、享受人生的平静心态,其二《竹石图》画幅上三两枝瘦劲的竹子,从石缝中挺然后立,坚韧不拔,遇风不倒,郑板桥借竹抒发了自己洒脱、豁达的胸臆,表达了勇敢面对现实,绝不屈服于挫折的人品,竹子被人格化了,此时,“诗是无形画,画是有形诗”。类似的还有《墨竹图》《竹图》,这几幅墨竹图,都是借竹子抒发他遭贬官后,越发洒脱。郑板桥所画竹子和题画诗,大多是借竹缘情,托物言志,抒发了“衙斋卧听萧萧竹,疑是民间疾苦声”的情怀,表现出“立根原在乱岩中,任尔东西南北风”的坚劲,表达出“写取一枝清瘦竹,乌纱掷去不为官”的气节和气概,凡竹子的高风亮节,坚贞正直,高雅豪迈等气韵,都被他表现得淋漓尽致。这正是郑板桥作品不同于传统花鸟画之处,不同于前人之处。传统的兰竹大多数表现为欣赏性的、娱乐性的主题,画面主要追求自然
形象的真与美、绘画技能的高与低、笔墨运用的娴熟与雅俗,而到了郑板桥的笔下,除了达到这些技能技巧外,题画诗还赋予这题材新的思想内容和深邃意境,使花鸟画亦能产生思想性、抒情性,给人以深刻的感受。[6] 郑板桥画竹独特,画石亦如此。自然界再无情的石头在他笔下也活了,如《柱石图》中的石头,这也是前人画中常用题材,但很少把它作为主体形象来表现的。而郑板桥在画幅中央别具一格地画了一块孤立的峰石,却有直冲云霄的气概,四周皆空没有背景。画上四句七言诗:“谁与荒斋伴寂寥,一枝柱石上云霄,挺然直是陶元亮,五斗何能折我腰。”诗点破了画题,一下子将石头与人品结合到一块儿,可谓“画不足而题足之,画无声而诗声之。诗画互相为用,开后人无数法门。”板桥借挺然坚劲的石头,赞美陶渊明。板桥赞美他刚直不阿、品格高尚的人格,同时似乎也有吐露他自己同样遭遇及气度的意思。画中的石头代表了人物形象,蕴藏着刚直不阿、气宇轩昂的品质,使人感到,此处画石头比画人更有意味,更能揭示深刻含义。
②兰花图:郑板桥还有很多以兰花为主题的画,也表现了一些新的内容,借题画诗发挥,寓意对各种各样事物的看法。如:有的借兰花特征,透溢出做人胜不骄、败不馁,持平常心态的胸臆,题画诗云:“兰花与竹本相关,总在青山绿水间,霜雪不凋春不艳,笑人红紫作客顽。”由兰花让人产生联想,做人要像兰花一样幽静、持久、清香,不浮不躁,不争艳。咫尺画幅,拓展无限之大,意境深邃。又如:有的借一丛丛兰花,夹着一些荆棘的自然现象,抒君子能宽容小人之大度的气质。《荆棘丛兰石图》题画诗云:“不容荆棘不成兰,外道天魔冷眼看,看到鱼龙都混杂,方知佛法浩漫漫。”另一幅《荆棘丛兰石图》题云:“满幅皆君子,其后以荆棘终之何也?盖君子能容纳小人,无小人亦不能成君子,故棘中之兰,其花更硕茂矣。”板桥匠心独运,兰花中穿插几枝荆棘,画兰花与荆棘共存,表达了遇有小人,虚怀若谷、和睦共处,“历经磨练,方成英雄”的宽宏大量之胸怀,读画者亦受益匪浅。越读越感简单的植物具有高深的意境,乐趣无穷。纵观郑板桥笔下所画的兰竹石,细品题画诗,我们不难看出,他喜画兰竹石的缘由,正如他所云:“四时不谢之兰,百节长青之竹,万古不败之石,千秋不变之人”,而“为四美也”。“有兰有竹有石,有节有香有骨”。在他眼中,兰竹石,能代表人坚贞不屈,正直无私,坚韧不拔,心地光明,品格高洁等品格,因而其题画诗的字字句句,托物言志,意境深远。[6]
③题画诗:题画诗在他笔下,除了在内容上有思想性,抒情性以外,在形式上还更具有艺术性、趣味性。题画诗能充分体现“书画同源”“用笔同法”的艺术趣味,而传统画家的题款跋文,大多题于画的空白处,与画面起平衡作用,但“扬州八怪”的题款已脱传统国画以及“文人画”题款、题诗的窠臼,特别是郑板桥将书法与画糅合在一起,还成了共同表现形象的特殊手法,彼此关系不分割。如《兰石图》,郑板桥别具匠心地将诗句用书法的形式,真草隶篆融为一体,大大小小,东倒西歪,犹如“乱石铺街”地题于石壁上,代替了画石所需的皴法,产生了节奏美、韵律美,又恰到好外地表现了石头的立体感、肌理美,比单纯用皴法表现立体感更具有意趣。这倒成了不可或缺的表现方法,既深刻揭示兰花特征,寓意高尚人品的意境美,又有书法艺术替代皴法的艺术美。让人在观画时既享受到画境、诗境的意境美,又能享受到书法艺术的形式美,沉浸在诗情画意中。另在许多兰竹石的画幅上,他题诗的形式变化多端,不守成规,不拘一格,自然成趣,达到书佳、行款得体,画亦随之增色。所谓行款得体,即是视画面的实际,进行构思,讲究构图的形式美,因而他将题画诗或长题于侧,或短题于上下,或纵题、或横题、或斜题、或贯穿于兰竹之间、藤叶之间,断断续续地题,观其形态,参差错落,疏密有致。是书也是题,是画也是诗,是诗也是画,欣赏每幅画中题画诗,既是绝妙的书法再现,也是将书画相映成趣的综合艺术,书题与画面有机地交融在一起,构成了统一的诗情画意,给人以综合的完美的艺术享受。[6] 为官清正廉洁
郑板桥情系百姓,与民同忧。乾隆六年(1741年)春,因科举及第考中进士的郑板桥被派往山东范县任县令,开始了他长达12年的官宦生涯。他为官力求简肃,视排衙喝道之类的礼仪为桎梏。为察看民情、访问疾苦,他常不坐轿子,不许鸣锣开道,不许打“回避”“肃静”的牌子,身着便服,脚穿草鞋到乡下察访。即便夜间去查巡,也仅差一人提着写有“板桥”二字的灯笼引路。因为他常常微服“陇上闲眠看耦耕”,以致“几回大府来相问”,竟找不到他的人影子。
对于百姓的疾苦,他时时刻刻都挂在心上。他一生善于画竹,尤其善于据竹写诗。在潍县任县令时,他的顶头上司、山东巡抚包括向他索求书画,他画了拿手的竹子,并在上面题诗一首:“衙斋卧听萧萧竹,疑是民间疾苦声。些小吾曹州县吏,一枝一叶总关情。”
乾隆十一年(1746年),郑板桥调署潍县,在潍县任上七年,竟有五年发生旱蝗水灾,生民涂炭,哀鸿遍野。他一面向朝廷据实禀报灾情,请求赈济;一面以工代赈,兴修城池道路,招收远近饥民赴工就食,并责令邑中大户轮流在道边开厂煮粥,供妇孺耄耋充饥。同时,责令囤积居奇者迅速将积粟按通常价格卖给饥民。他自己也节衣缩食,为饥民捐出官俸。在最危急之时,他毅然决定打开官仓放粮。
乾隆十七年,他愤然辞官,回到故乡江苏兴化定居,继续以诗、书、画为生,直到终老。[4] 扬州画家李鳝(《楹联丛话》):三绝诗书画,一官归去来。[8] 清代袁枚:板桥书法野孤禅也……乱爬蛇蚓,不足妃稀。 清代学者康有为:乾隆之世,巳厌旧学。冬心(金农)、板桥参用隶笔,然失则怪,此欲变而不知变者。[9] 启功(《论书绝句》):坦白胸襟品最高,神寒骨重墨萧寥。朱文印小人干占,二百年前旧板桥。[5] 蒋士铨(《题画兰》):板桥作画如写兰,波磔奇古形翩翩,板桥写兰如作字,秀叶疏花是姿致。[10] 清代“扬州八怪之一”的金农:兴化郑进士板桥风流雅谑,极有书名,狂草古籀,一字一笔,兼众妙之长。 清末历史地理学家、金石文字学家、目录版本学家、书法艺术家杨守敬(《学书迩言》):板桥行楷,冬心分隶,皆不受前人束缚,自辟蹊径。然为后学师范,或堕魔道。[11] 以怪出名
郑板桥的“怪”,颇有点济公活佛的味道,“怪”中总含几分真诚,几分幽默,几分酸辣。每当他看到贪官奸民被游街示众时,便画一幅梅兰竹石,挂在犯人身上作为围屏,以此吸引观众,借以警世醒民。[13] 颇有骂名
郑板桥无官一身轻,再回到扬州卖字画,身价已与前大不相同,求之者多,收入颇有可观。但他最厌恶那些附儒风雅的暴发户,就像扬州一些脑满肠肥的盐商之类,纵出高价,他也不加理会。高兴时马上动笔,不高兴时,不允还要骂人。他这种怪脾气,自难为世俗所理解。有一次为朋友作画时,他特地题字以作坦率的自供:
“终日作字作画,不得休息,便要骂人。三日不动笔,又想一幅纸来,以舒其沉闷之气,此亦吾曹之贱相也。索我画,偏不画,不索我画,偏要画,极是不可解处。然解人于此,但笑而听之。”
个人润例
郑板桥卖画,不像历来文人画家那样犹抱琵琶半遮面。既然已经迈进市场,索性大大方方的。他制定《板桥润格》,成为中国画家明码标价卖画的第一人。“大幅6两,中幅4两,小幅2两,条幅对联1两,扇子斗方5钱。凡送礼物食物,总不如白银为妙;公之所送,未必弟之所好也。送现银则心中喜乐,书画皆佳。礼物既属纠缠,赊欠尤为赖账。年老体倦,亦不能陪诸君作无益语言也。”还在最后附了一首诗:“画竹多于买竹钱,纸高六尺价三千。任渠话旧论交接,只当秋风过耳边。”明明是俗不可耐的事,但出诸板桥,转觉其俗得分外可爱,正因他是出于率真。[13] [8] 好吃狗肉
板桥定润格,规定凡求其书画者,应先付定金,并作润例,颇为风趣。当时,许多豪门巨绅,厅堂点缀,常以得到板桥书画为荣。但板桥不慕名利,不畏权势,生平最不喜为那些官宦劣绅们作书画,这在他老人家的润格里是不便声明的。有一次,一帮豪绅为得其书画,运用计谋,设下陷阱。他们了解到板桥爱吃狗肉,就在他偕友外出交游的必经之路上,借村民的茅舍,烹煮了一锅香喷喷的狗肉,待板桥经过时;主人“笑脸相迎,并以狗肉好酒相待。”板桥不疑,开怀畅饮,连赞酒美肴不止。饭罢,主人端出文房四宝,言请大人留联以作纪念。板桥深觉今有口福,便立刻应诺,随即起身提笔,并询问主人大名,署款以酬雅意。书毕,尽兴而归。后来,在一次宴席上,他偶然发现自己的书画作品挂在那里,方知自己受骗,十分后悔,自己嘴馋不已。[13] 刻苦习字
据说,郑板桥早年学书相当刻苦,写众家字体均能神似,但终觉不足。有一次,他竟在妻子的背上划来划去,揣摩字的笔画和结构。妻子不耐烦了,说:“你有你的体,我有我的体,你老在人家的体上划什么?”这无意间说出的一语双关的话,使板桥恍然有悟:不能老在别人的体格上“规规效法”,只有在个人感悟的基础上,另辟蹊径,才能独领风骚。于是,他取黄庭坚之长笔划入八分,夸张其摆宕,“摇波驻节”,单字略扁,左低右高,姿致如画。又以画兰竹之笔入书,求书法的画意。清人蒋士铨说他“写字如作兰,波磔奇古形翩翩”,生动地道出了“板桥体”的特质。[13] 板桥姻缘
郑板桥文采盖世,可惜早期穷途潦倒,一日走到一家人门前,惊觉门前的对联是自己的诗作,郑生向户主饶夫人问个究竟,饶夫人说自己女儿极爱郑板桥的作品,郑生忙道自己正是郑板桥,饶夫人马上把女儿五娘叫出来,并且把她许配给郑板桥,郑板桥后来高中进士,大小登科一道儿至,夫妇二人也恩爱一生。[13] 余桃口齿
郑板桥在《板桥自叙》曾写道:“酷嗜山水。又好色,尤多余桃口齿,及椒风弄儿之戏。然自知老且丑,此辈利吾金币来耳。有一言干与外政,即叱去之,未尝为所迷惑。”余桃口齿,椒风弄儿,都是好男风的典故。大意说是自己尤其喜好男色,但是因为老丑,常常是因为金钱而接近他。只是他却不许男妓干扰他外政,否则就驱逐出去。并没有因男色而耽误县治。曾主张改刑律中的笞臀为笞背。身为县令,一次不得不对一犯赌美男施以杖责,竟至于差点当堂落泪。[14] 巧骂豪绅
有一次,一个豪绅求郑燮题写一个门匾。那个豪绅平日里巴结官府,干尽了很多坏事。郑燮决定要捉弄他一下,便写了”雅闻起敬“四个字。油漆门匾时,郑燮叮嘱漆匠对”雅、起、敬“三个字只漆左半边,对”闻“字只漆”门‘字。过了一段时间,豪绅楼前门匾上的字没上漆的部分模糊不清了,而上漆的部位越发清晰。远远一看,原来的“雅闻起敬”竟成了“牙门走苟”(“衙门走狗”的谐音)。[13] 郑板桥的先祖于明洪武年间由苏州阊门迁居兴化城内至汪头,至郑板桥已是第十四代。父亲郑之本,字立庵,号梦阳,廪生家居授徒,受业者先后达数百人。
纪念馆
江苏兴化郑板桥纪念馆
郑板桥纪念馆,位于江苏省兴化市昭阳镇牌楼北路2号。1983年11月为纪念清代书画家、文学家郑板桥而建立。1993年11月新建馆舍为古典式建筑,迎门为大型花岗岩郑板桥全身塑像、郑板桥兰竹石大理石壁雕。该馆藏品1181件,其中郑板桥书画墨迹33幅,金农、闵贞、郑銮、刘熙载等人的书画348件,当代名人为纪念郑板桥、施耐庵而作的书画833件。 河南范县郑板桥纪念馆
范县郑板桥纪念馆,位于河南省范县辛庄乡毛楼村。占地28亩,主体建筑“三绝堂”,将展示郑板桥的生活、写作、作画的场面,除三绝的诗书画作品展览外。还设有“金水桥”、“板桥故居”、“幽逸廊”等建筑。[15] 故居
郑板桥故居,位于江苏省兴化市东城外郑家巷7-8号。坐北朝南,前后两进,有正屋坐南朝北房3间,另有门楼、小书斋、厨房各一间。故居内陈列郑板桥生活用具及郑板桥书画复制品,研究郑板桥的资料等等,堂屋条台上立有一古铜色郑板桥全身塑像。1983年全面修缮。为市级文物保护单位。该馆基本陈列为“郑板桥生平及艺术成就”。陈列“昭阳郑氏家谱”、板桥老人的遗物、7种版本的《郑板桥集》、板桥墨迹的复制品和照片以及有关的研究论著、资料和剧本、金石、传说故事等。 墓地
墓地
位于江苏省泰州市兴化市大垛镇管阮村北,郑板桥林园陈列室西侧,旧地名“郑家大场椅把子地”。1964年,为纪念郑板桥逝世200周年,当地政府重修郑板桥墓,将其迁葬于鹦鹉桥畔海子池中方壶岛上;文革期间被破坏;1995年4月19日,“郑燮墓”被江苏省人民政府公布为第四批江苏省文物保护单位。
郑板桥_百度图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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个人简介
郑燮(1693-1765),清代著名画家。字克柔,号板桥。江苏兴化人。康熙秀才、雍正举人、乾卫隆进士。曾任山东范县、潍县县令。做官期间,不肯逢迎上司,颇能关心人民疾苦,饥荒年岁,曾因擅自开仓赈济,拔款救灾,获罪罢官。后来长期在扬州以卖画为生。受石涛、八大山人影响较深,又发挥了自己的独创精神,为“扬州八怪”之一。他的画以竹、石、兰蕙为最工,用笔秀劲潇洒,多而不乱,少而不疏,芳兰数丛,浓墨画花,秀逸多姿;浓淡疏密,墨色淋漓,天趣横溢,神理俱足。他主张“不泥古法”,重视艺术的独创性。重视深入生活,观察写生。书法杂用篆、隶、行、楷并以隶为主,兼有画意的美感,独创一格,自调用为六分半书,人称之谓“乱石铺街”体。兼长篆刻,古朴不俗。《桐阴论画》的作者秦祖永曾把丁敬、金农、郑燮、黄易、奚冈、蒋仁、陈鸿寿七人的印章边款题跋辑为“七家印跋”。作品很多,画风极大地影响了清代的画坛。代表作品有:《修竹新篁图》、《清光留照图》、《兰竹芳馨图》、《甘谷菊泉图》、《拄石干霄图》、《丛兰荆棘图》、《画竹留赠图》等。有《板桥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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