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 400년 도읍 국내성은 어디인가?

2013. 7. 19. 01:21우리 역사 바로알기

 

 

 

(원문)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305§ion=sc2§ion2=

 

 

 


<삼국사기 잡지 지리>의 기록에 따른 고구리 도읍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동명성왕 원년(BC37) 졸본성에서 40년을 지낸다.
유리왕 22년(3)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겨 425년을 지내고,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156년을 지내고,
평원왕 28년(586)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겨 83년을 지내고,
보장왕 27년(668)에 멸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는 BC 26년 “도읍을 졸본(卒本)으로부터 눌현(訥見)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눌현 천도 기사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위 <잡지> 기록에는 산상태왕 “13년(209) 겨울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는 기록과 동천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년(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 고국원태왕 12년(342) 가을 8월 환도성을 다시 이거하였다가 13년(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고, 장수태왕 15년(427) 평양으로 옮기게 되는 것인데, 고구려의 천도 기록이 <삼국사기 잡지 지리>에는 상당 부분 누락되어 있다.
 
고구리의 도읍이었던 환도에 대해서는,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번한의 옛 도읍은 개평부 동북 70리”라 기록되어 있어 번조선의 도읍이 안시 임을 알려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안시는 곧 환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안시 = 환도이므로 안시성을 찾으면 고구리의 도읍 환도성은 저절로 찾아질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시가 환도가 같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산서성 중남부에 있는 화염산(火焰山) 남단에 안시성이 있는데, 그 산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정상에서는 화염산맥을 이루는 봉우리들이 서로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 화염산 바깥에 안시성이 있고, 그 산 안쪽 정상에 환도성이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같은 곳이라고 말한 것이다. 
 

▲  당태종의 눈알이 빠진 안시성은 현 중국 산서성 남부 신강현에 병풍처럼 늘어서있는 화염산의 남단이다.     

    

▲ 깎아지른 화염산 남단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환도산 정상에 오른다. 정상은 넓고 자체 농사가 가능하고 봉우리들이 평탄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 고구리의 도읍 환도산성이 있었다.


   
고구리 400년 도읍 국내성은 어디인가?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21년(2) 도읍 졸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중 제물인 돼지가 달아나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붙잡았는데, “그곳의 땅이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지세가 험해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는 곳이 바로 국내성이다. 이 말은 졸본에서 국내성은 돼지가 달아나다 잡힐 정도로 그리 멀지 않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高句麗의 광개토태왕의 도읍지였던 국내성(國內城)은 과연 어디였을까?

(1) <신당서 열전 145-동이열전>의 고구리

(원문)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 而赢随山屈缭为郛, 南涯浿水,王筑宫其左。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한서지리지: 马訾水西北入盐难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行二天一百里) 
 
(번역) 고구리는 본 부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 동으로 바다 건너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 건너 백제가 있다. 서북에서(으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그 나라 임금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컫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이었다. 경사(=장안)로 부터 오천리(?)를 가면 산을 따라 굴곡지게 휘감으며 성곽을 이루고 남쪽 끝에는 패수가 있다. 왕은 그 좌측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또한 국내성, 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으로 안시성으로 흐른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요새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커다란 배로 사람을 건네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한서지리지 : 마자수는 서북에서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2개 군을 거쳐 길이는 2,100리이다.) 이상  
 

▲  <신당서> 기록을 현 산서성 분하에 대입하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해설) 위 기록을 압축해서 간단히 지리비정을 하면 마자수라고도 불리는 압록수 동쪽에 국내성과 평양성이 있고, 안시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즉 압록수변에 국내성, 평양성, 안시성, 서안평이 모두 위치해야 지리비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식민사학은 압록수를 현 압록강, 국내성을 집안, 평양성을 평양, 서안평을 압록강 하구 단동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국내성(집안)은 압록의 북에 있으며, 평양성(평양)은 압록강이 아닌 대동강변에 있고 안시성은 서만주 요하 강변으로 비정하였으므로 이 지리비정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신당서>에 언급되어 있는 압록수는 산서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분하(汾河)이며, 국내성은 평요(平遙), 평양성은 임분(臨分), 안시성은 신강현, 서안평은 황하와 분하가 만나는 하진시로 비정되어진다. 기록의 바다(海)는 황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따르면, 북부여의 5세 고두막단군과 6세 고무서단군이 즉위한 곳이 졸본이라 한다. 따라서 졸본성은 북부여의 도읍이기도 했고 추모대제 고주몽이 도읍을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졸본성의 위치를 알려면 고구려의 다른 도읍을 찾아 역으로 그 위치를 추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卒本)은 국내성으로 보이는 평요고성(平遙古城)에서 가까운 현 산서성의 성도(省都) 태원(太原)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삼국사기>에 “40세에 왕이 죽으니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태원 서쪽에 용산이라는 산이 있기 때문이다. <대청광여도>에도 그려져 있으며, 현대지도에도 용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  <대청광여도> 졸본성인 태원 서남쪽에 고구리 시조 추모대제가 묻힌 용산이 있다.


 
平遥古城 (평요고성)

 태원시 남쪽에 있는 평요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평요고성(平遥古城)이 있는데 고구려의 오랜 도읍이었던 국내성으로 보인다. 다음은 평요고성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자료인데 국가 도성(都城)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번역) “중국 산서성 중부의 평요고성은 2,700년 역사적 문화로 유명한 성으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고 중국 고대 도시의 원형이다. 평요의 고대명칭은 고도(古陶)였고, 서주 선왕 때(B.C 827~782년) 대장군 윤길보장군에 의해 토성으로 처음 세워졌고, B.C 221년부터 진나라 때 군현제를 처음 실시한 이래 평요성은 지금까지 현의 치소였다. 춘추 시기에는 진(晋)나라, 전국 시기에는 조(趙)나라, 진나라 때는 평도현, 한나라 때는 중도현으로 종친대왕(宗親代王)의 도성으로 했으며, 북위 때 평요현으로 개명되었다.
명나라 홍무 때 중축되었는데, ‘9리 18보’에서 ‘12리 8분 4리’로 중축되면서 토성이 석성으로 바뀌었다. 총 길이 6,163m, 높이 약 12m, 면적 약 2.25km2이다. 진국사와 쌍림사, 평요문묘 등이 세계문화유산의 보호범위에 든다. 성황묘는 성 동남쪽에 있으며, 재신묘, 토군묘와 함께 건축군이 조성되어 있다. (평요고성의 세 가지 보물인 쌍림사는 성 서남에 있고, 북제 무평 2년(571) 세워졌다)
성벽의 총 길이는 6,163m로 동쪽 성벽이 1,478m, 남쪽 성벽이 1,714m, 서쪽 성벽이 1,494m, 북쪽 성벽이 1,476m으로 거북 모양으로 되어 있다. 북문이 거북이 꼬리에 해당하고 남문이 거북이 머리에 해당한다. 남문은 영훈문, 북문은 공극문, 상동문은 태화문, 하동문은 친한문, 상서문은 영정문, 하서문은 봉의문이라 한다. 서문은 봉황신화의 영향으로 봉황의 모양이다. 길상의 뜻이며 덕정혜민(德政惠民)과 국운융창(國運隆昌)을 위한 것이다.“ (이상)
 
(원문) (원문) 中国北部山西省中部(平遥地处汾河东岸、太原盆地的西南端)的平遥古城是一座具有2,700多年历史的文化名城是保存完整的历史名城,也是中国古代城市的原型。平遥旧称“古陶”,始建于西周宣王时期(公元前827年~公元前782年)为夯土城垣,为西周大将尹吉甫驻军于此而建。自公元前221年,秦朝政府实行“郡县制”以来,平遥城一直是县治所在地,延续至今。春秋时属晋国,战国属赵国。秦置平陶县,汉置中都县,为宗亲代王的都城。北魏改名为平遥县。
明代洪武三年(公元1370年)扩建,由原“九里十八步”扩为“十二里八分四厘”
(6.4公里),变夯土城垣为砖石城墙。平遥城墙总周长6,163米,墙高约12米,把面积 约2.25平方公里。还有镇国寺、双林寺和平遥文庙等也都被纳入世界遗产的保护范围。城隍庙位于城东南的的城隍庙街,由城隍庙、财神庙、灶君庙三组建筑群构成 (古城的第三宝是位于城西南的双林寺。该寺修建于北齐武平二年(公元571年)。
平遥城墙周长6162.68米(与明初“周围十二里八分四厘”吻合),其中东墙1478.48米,南墙1713.80米, 西墙1494.35米,北墙1476.05米,东 、西、北三面俱直,唯南墙随中都河蜿蜒而顿缩逶移如龟状。将六道城门分别叫 南曰迎熏,北曰拱极,上东门太和,下东门亲翰,上西门永定,下西门凤仪,似乎受到 早年关于西门外有凤凰来朝的神话影响,“箫韶九成,凤凰来仪”,凤凰来而有容仪,是吉祥的瑞应,令人进而想到德政惠民,国运隆昌。
 
이렇듯 평요고성은 그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국가의 도성으로 보인다. 특히 북쪽의 수호신인 거북이(현무)가 남쪽을 보고 있는 형상이라든가, 하서(봉의)문이 우리 민족의 문화인 봉황신화의 모양에다, “덕으로 정치를 베풀어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국운을 융성하게 한다.”는 뜻은 국가의 도성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문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요고성에 도읍을 둔 나라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중국의 조상들은 대대로 섬서성 또는 하남성 일대로 국한되고, 나머지 사방이 모두 동이족의 강역이었다. 특히 산서성은 환국에서부터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거쳐 북부여와 고구려까지 우리 민족의 핵심강역이었던 곳이다. 

▲ 치양식의 성벽 높이 12m에 해자까지 있고, 크기가 자금성의 3배가 넘어 국가급 도성으로 보인다.     © 편집부
▲ 평요고성의 정문인 남문은 거북이 머리에 해당한다.     © 편집부
▲ 봉황신화의 모양인 평요고성의 하서문인 봉의문의 누각은 우리 숭례문과 너무도 유사하다.     © 편집부
▲ 북문에서 본 평요고성 내부는 자금성의 3배 크기이다.


     
  성벽의 치(雉)양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평요고성은 고구려 국내성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평요고성의 면적은 경복궁의 5.5배이고 북경 자금성의 3배가 넘으며, 성벽의 높이는 12m이고 성 주위에 해자가 파여 있어 국가급 도성임이 확실하다. 평요고성은 위대한 대제국 고구리의 국내성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임분시에는 평양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에 산서박물관이 서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분시 중심에 있는 평양고루(平陽鼓樓)는 북을 매달아 놓은 누각인데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이것 역시 고구리 도읍 평양성에 있던 고루가 아닌가 한다.  

▲ 평양고루의 웅장한 모습. 북을 걸어놓은 누각이 이 정도면 고구리의 국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