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2016. 2. 2. 01:48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 자료 / 보정산방

2010.08.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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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은 때때로 갈림길에 맞닥뜨린다. 그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고, 어떤 미래에 스스로를 던질까 생각한다. 먼 안목에서 보면 역사 또한 수많은 갈림길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갈림길에 서서 시대를 고뇌하고 미래를 꿈꾼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부른다. 이 주인공들 중 우리는 특히 진실을 추구한 주인공을 회상하고 존경한다.

   진실은 진리와 다르다. 진리는 추상적 공간에서 성립하는 논리적 정합성이나 사물과 기호 사이의 사상(寫像)관계를 뜻한다. 그러나 진실은 체험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성립하는 행위의 참됨을 통해 설립한다. 특정한 삶의 맥락에서 권력에 저항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진실이 성립하는 것이다. 참된 지식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인물이며, 시대의 고뇌를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 역사의 문턱에 서서 시대를 고뇌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조선조의 질서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던 시절에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으며, 현실적 좌절과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남겼다. 그는 현실적으로 성공하기에는 너무 정직했고, 학문적으로 실패하기에는 너무 야심이 컸다. 다산은 젊은 시절 철인왕(哲人王) 정조(正祖)에 의해 발탁되어 개혁을 꿈꾸었으나, 천주교가 빌미가 되어 노론(老論)이 던진 그물에 걸렸다. 정조의 죽음과 다산의 유배로 조선의 역사가 맞닥뜨렸던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이 결정되었다. 그것은 수난과 고통의 길이다. 다산은 유배된 후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마치 그 걸작들이 못다 한 개혁의 대체물이기라도 한 듯이, 수많은 철인(哲人)들이 그랬듯이, 다산 또한 정치적 패배와 철학적 승리를 동시에 안았다. 그 결과 나타난 담론적 성과는 자생적 근대성의 확보였다.

   다산에게서 근대성은 산업 혁명, 기술 문명, 대중 투표 등과 더불어 만개한 본격적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화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사상적·담론적 근대성이었다. 이렇게 자생적 근대성을 담지했던 그의 사상은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그를 근대성의 문턱에 위치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그의 사유에서 두 차원에 걸쳐 새로운 사유가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새로운 인간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회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산의 사유를 경학(經學)경세학(經世學)으로 나누어 본다. 다산이 일생에 걸쳐서 했던 작업은 주자(朱子)의 조선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주자에 대한 개혁으로서 경학이 나타나며, 조선에 대한 개혁으로서 경세학이 나타난다. 경학이 주자학으로 무장했던 당시 기득권자들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라면, 경세학은 새로운 조선으로 거듭나기 위해 그린 개혁의 청사진이다. 다산의 경세학에서 맹아적이지만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왕을 뽑아야 한다는 정치 사상과 농민이 자신의 땅을 책임지고 경작하여 그 수확의 일정한 양을 세로 바쳐야 한다는 경제 사상이다. 즉, 기본적으로 다산의 경세학은 정치에 참여하는 자영농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 있다. 이 생각이 밑바탕에는 새로운 인간관이 깔려 있었다. 다산의 경학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다산은 주자학에 의해 추상화되었던 사유를 다시 구체적이고 질박하고 경험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한다. 그것은 존 로크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판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곧 이기론(理氣論)비판에 집중된다. 



   다산은 주자에 의해 이루어진 사서(四書)를 집요하게 비판함으로서 성리학을 논파했다. 이 논파는 우선 주자 사유의 선험적(transcendental) 성격(이·理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음으로는 주자 사유에 내포되어 있는 불교적·도가적 요소(무·無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는 주자 사유의 위계적·신분적 구도(분·分의 세계관)에 대한 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어떤 인간관을 낳았는가? 우리는 다산에게서 근대적인 인간, 즉 의지와 욕망과 감성을 가진 인간을 본다. 즉, 성리학의 선험철학과 위계적 사유를 통해 존재론적·사회적 피라미드의 벽돌인 인간으로부터 개체성을 가진 주체, 그리고 무(無)에 의해 탈색된 인간으로부터 피와 살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의 변환이다.

   다산에게서 우리는 ‘주체’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 주체는 자아의 확실성, 원자적(原子的)개별성, 계약등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해내는 그러한 서구적 주체가 아니다. 다산이 그린 주체는 개인의 이기심을 넘어선 도덕적 존재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고대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주체, 즉 우리가 ‘도덕적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주체이다. 바로 여기에 서구적 근대성과 다산이 그린 자생적 근대성 사이의 걸림길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길 중에서 현실화된 것은 다산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이었다.



   우리의 근대화는 바로 서구화의 길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뜻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 근대화의 비극이 놓여 있다. 다산의 사유는 고독한 몸부림으로 끝나고 역사의 강물은 다른 길로 흘러갔다. 현대에 들어와 우리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자본주의에 찌들고 파시즘에 우롱당한 대중을 본다. 꿈은 깨지고 싸늘한 현실만이 남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극대화된 근대성의 한가운데에서 또 다른 기운(氣運)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본다.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처절할 정도로 강한 비판 말이다. 푸코, 돌뢰즈, 데리다를 비롯한 거장들의 서구 근대성 비판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 않았던 또 다른 근대성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가까운데 살면서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던 옛친구들과의 만남처럼, 저 멀리에서 잊어졌던 우리의 자생적 근대성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근대로의 몸부림은 이제 다시 만나고 있지 않은가. 다산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 끝나지 않은 꿈을 이어받아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이다.


이정우 <전서강대교수·철학>, 한국 근-현대 20인(1) - 문화일보, 1999.10.09

[출처] 다산 정약용|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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