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춘천박물관 문화대학 "역사를 담은 미술" 9/5일 제7강 (한정희 - 중국의 문인화)

2016. 2. 2. 04:49美學 이야기



      [모니터링] 국립춘천박물관 문화대학 "역사를 담은 미술" 9/5일 제7강

                           (한정희 - 중국의 문인화)| 자유게시판 

                 

一宅 |  2013.09.06. 16:52 


"사의(寫意)와 형사(形似) 사이, 문인화 - 소식에서 동기창까지"

   오늘 강의는 애초 "사의(寫意)와 형사(形似) 사이, 문인화 - 소식에서 동기창까지"라는 제목으로 예고

되었었다. 요약문 제목은 "중국의 문인화"라고 바꿔서 단순화시켜 놓았다. 굳이 어려운 말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 보였다.



   지난 주에도 박물관의 기획특별전인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8.13-10.6일) 전시와 관련

하여 수강생들을 불러 강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 일찍 와서 전시를 미리 보려던 생각이 늦어지는

바람에 못 보고 말아 아쉬웠다. 게다가 다다음 주는 두 번째 답사가 예정돼 있어서 서울의 미술관을

하루 둘러보는 일정 때문에 안내의 말이 길었다. 


   한정희(韓正熙) 선생은 원래 공학도였다가 전공을 바꾸어 중국 회화를 전공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모두 서양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할 때 중국화를 공부하며 학계의 공백을 그나마 채워주었던 학자

스타일의 선생이다. 전에도 춘천박물관에서 문화대학 강의가 있었기에 나에겐 특별히 새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문인화를 두 시간에 정리하며 그림도 함께 본다는 건 아무데서나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아니다. 차분하게 그림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가는 분위기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수강생들에게 재미보다는 보고 느끼며 배우게 한다는 데 강의 진행의 중점을 두는 듯 보였다. 여름도

물러가고 가을로 접어드는 날씨에 수강하는 분들도 이전과 다름없이 좌석을 채웠다.

 


  문인화라고 하면 얼핏 우리는 조선시대 문인화를 떠올린다. 지금처럼 시각문화가 만개한 상황에서

문인화가 그리 큰 관심거리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전통을 생각하고 과거의 정신

문화나 회화사를 말할 때 문인화는 결코 녹녹한 주제는 아니다. 문인화(文人畵, Literati Painting)라고

할 때는 직업화가였던 화원화가들이 아닌, 성리학을 기본 소양으로 갖춘 선비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점이 그중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문인화가들이 중국의 문인화를 많이들 따라

그리며 배웠기 때문에 중국의 문인화에 대한 지식은 결코 중국 회화사를 안다는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금처럼 다양한 시각 자료들이 소통되는 상황에서는 또 과거 중국과 우리나라의 세세한

영향관계에 대한 지식을 반드시 전제해야 된다는 점도 중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강의에서는 먼저 개념의 유래부터 소개하며 이런 점들을 적절히 섞어서 설명하며 화면으로 그림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문인화가 태동한 시점은 북송 중엽의 11세기다. 용어를 처음 쓴 것은 명나라

때의 동기창이다. 일부 이전 시기인 당나라 그림을 추종하는 그림도 그렸으나, 송나라 사대부 문인

들이 개성적인 화풍을 추구하며 새로운 화풍을 보였던 데서 문인화가 태동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약문에서는 "북송대의 문인화는 문동(文同)과 소동파 등에 의해 묵죽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어

지고 있다"라고 현하였다. 이후 강의는 송 - 원 - 명 - 청으로 시대를 이어가며 문인화를 그린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하며 진행되었다.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밀려나며 대만으로 갈 때 궁중의 보물들을 챙겨갔으므로 중국 역대의 중요한

작품들 다수가 타이뻬이의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었고, 지난 시절 우리나라의 중국 회화 소개도 대만

을 통해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륙의 중국과 수교하면서,

그리고 근래 중국의 여러 성들에서 박물관들이 정비되고 소장 회화작품들이 알려지게 되고 또 중국

이외의 나라들에 나가 있는 작품들에 대한 정보까지 보태지면서부터 중국회화사는 이전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들로 채워져갔다. 그림 하나하나의 그런 내력을 함께 아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일 것이다.
  아래는 문인화의 태동을 증거하는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인 문동<묵죽도>이다.



문동,  <묵죽도>




  문인화에서 산수화는 미불(米:1051-1107년)이 새롭게 창안하였고, 그것을 '미법산수'라고 부른

다. 미불이 그렸다고 전하는 아래의 <춘산서송도(春山瑞松圖)>에서 보이듯이 미법산수는 "여백을

활용하며 붓질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이나 품격이 있는 산수를 그렸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기법이며 이후 오랫동안 문인들로부터 사랑받았다"소개하였다. 마침 송나라 서예사와 미불을

공부하던 참이라 유심히 들었다.


미불(米芾), <춘산서송도(春山瑞松圖)>




   이공린(李公麟)도 마찬가지였다. 이공린은 복고를 추구하여 고졸한 인물화를 그리고 동물화

라는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다. <효경도(孝經圖)><오마도(五馬圖)>, <산장도(山莊圖)> 부분들인데,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그가 그렸다는 <서원아집(西園雅集)> 그림도 보였다(진품 여부는 모르지만

아직 학계에 인정되지는 않아 보이는 작품임!).

이공린(李公麟), <효경도(孝經圖)> 부분



이공린(李公麟), <오마도(五馬圖)> 부분



이공린(李公麟),  <산장도(山莊圖)> 부분



전(傳) 이공린(李公麟), <서원아집(西園雅集)>




   또 그림은 그리지 않은 사람이지만 서예가로 황정견(黃庭堅)초서를 중국 최고작이라 소개하기도

하였다.(내용은 사마천 <사기>의 염파와 인상여 열전을 쓴 것임)


 황정견(黃庭堅),  <사기>




   아래는 문인산수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많다고 강의에서 특별히 강조하며 소개한 이공린의 제자

교중상(喬仲常)의 <적벽부도(赤壁賦圖)>이다.(이하 소개하는 그림들 역시 내가 여기에 소개하고픈

그림들 위주로 선택하되, 중국 사이트인 '百度百科'를 주로 하여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그림들을

옮겨 실은 것임을 밝혀둔다. 하나라도 더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 때문에 약간 무리를 해서 되도록이면

나은 사진으로 고른 것들이니까 화질이 좋건 별로건 따지기 없기!)


교중상(喬仲常), <적벽부도(赤壁賦圖)>


 원래는 <후(後)적벽부>를 그린 그림으로, 아래는 그 부분 부분을 확대해보는 그림들이다.








교중상(喬仲常), <적벽부도(赤壁賦圖)> 부분




  원대는 혹독한 지배로 오히려 '문인화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강남 오흥 출신인 천재적인 '전방위적

예술가' 조맹부가 가장 대표적인 문인화가라 하겠으며, '원4대가'로 불리는 오진(吳鎭), 예찬(倪瓚),

황공망(黃公望:1269-1354년), 왕몽(王蒙)도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화가들이다. 고려시대 원 지배

하의 충선왕이나 이제현과도 관련이 있는 조맹부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작화추색도(鵲華秋色

圖)>(1295년)가 있고, 그 외에 <수촌도(水村圖)>(1302년)나 <쌍송평원도(雙松平遠圖)>도 소개되었다.


황공망(黃公望) ,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이 그림은 조맹부가 친구 주밀을 위해 그의 고향 산동 제남을 찾아가 작산과 화주부산을 그려준 것

에서 <작화추색도>란 이름을 붙였는데, "지평선이 낮은 새로운 평원산수"를 선보이며 오대시대의

동원(董源)의 기법 등을 빌면서도 이것을 "서예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회화와 서예의 일치"를 기법적

으로 시도하였다는 점과 "평화로운 문인의 이상향을 그려넣어 주제가 있는 산수화로 전환"한 점이 이

그림이 지니는 회화사적인 의미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수촌도>동거파(동원, 巨然)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면 <쌍송평원도>이곽파 화풍으로 그린 것이며, 이처럼 양파를 아우름으로써 화가들에게

회화사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그의 글씨체인 송설체(松雪體)까지 생각한다면 그가 미친 영향은 실로 넓고 크다고 하였으나 그의

글씨는 보여주지 않았다. 아래는 조맹부의 행초서 <낙신부(洛神賦)> 일부이다. 하긴 세상엔 "미불을

배우면 조맹부의 속됨을 병으로 여긴다[學米病趙俗]"는 말이 있지 않던가.



맹부, <낙신부(洛神賦)>




    원사대가들은 조맹부를 통해 동거파의 전통을 따르며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오진의

<어부도>도 소개하였지만, 묵죽화를 완전한 회화의 단계로 올라서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묵죽보

(墨竹譜)>를 소개한다. 


맹부,   <묵죽보(墨竹譜)>





   예찬의 산수화는 "정갈하고 품격있다"며 <용슬재도(容膝齋圖)>를 보여주었다. 친구의 서재를 겨우

무릎을 허용할 정도라며 원두막처럼 표현하였다. 


예찬, <용슬재도(容膝齋圖)>




   황공망 작품으로는 80세 경(혹은 82세)에 그렸다는 유명한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1347~1350

년 사이)가 있다. "항주의 부춘강 주변의 풍광을 그린 것인데 변화가 많고 격조가 넘치는 걸작이다.

무용(無用)이라는 도사에게 주기 위해 그렸으며 필법이 탁월하고 구성이 뛰어나서 후대에는 최고의

문인산수화로 명성이 높았다"고 소개하였다. 그간 이 작품은 적힌 글씨에 따라 '무용사권(無用

師卷.636.9cm)''자명권(子明卷)' 이라 불리는 두 본이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전해오며 알려졌는데,

그중 앞에 무용사권은 그림 앞부분 일부가 잘라져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잘라진 앞부분 그림은

중국대륙의 절강성박물관'잉산도(剩山圖, 51.4cm)'라 불리며 수장되어 있다가 2011년 대여되어

대만에서 함께 전시되면서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크게 보기가능) 

황공망,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아래가 절강성박물관의 잉산도라 불리는 앞부분이다.


황공망,  <잉산도>



   확대한 그림이다. 앞에 소장자가 전서체로 "산천혼후 초목화자(山川渾厚 草木華滋:산천은 모두 질박하고 중후하며 초목들은 화려하게 무성히 자라난다)"라고 쓴 글이 있다.


황공망,  <잉산도>



   그간 두 본 중 어느 작품이 진품이냐를 놓고 논쟁도 있었으나 발문에 '무용'이란 글자가 있는 '무용

사권'진짜로 확인되었다고 하였다. 청나라 황제들이 대대로 친람한 그림들이었으나 건륭제가 자명

권을 진본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니 가짜를 진품이라고 한 셈이었다. 그만큼 여러 모본들이 전해오며

영향을 끼친 그림이고, 자명권 역시 국보급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참고로

소장 경위나 진위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블로그 http://blog.daum.net/shanghaicrab/3308100를 참조할

수 있어 소개한다.] 아래는 자명권이다. 제발로 글씨가 잔뜩 들어가 있다. 역시 클릭해서 크게 보면 글자

까지 명료하게 읽어볼 수 있는 파일이다!


황공망,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왕몽은 다른 화가와 달리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강한 회화성' 때문에 대단히 표현적인 화가였다고

한다. 청변산도(靑변山圖)>를 보면, 산을 그리는 우모준(牛毛준)이란 준법을 쓰며 화면의 질감표현에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왕몽에겐 그래서 중국의 반 고흐란 별칭이 있다고 한다.


 왕몽, 청변산도(靑변山圖)>




  원명 교체기를 지나며 왕몽의 영향이 이어졌으나, 명나라 홍무제의 문인 숙청으로 다시 문인화는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다시 소주를 중심으로 이른바 오파(吳派)라 불리는 화가들이

나왔다. 그중 우선 두경(杜瓊)<남호별서도(南湖别墅圖)> (상해박물관)가 기억에 남았다. 



 두경(杜瓊), <남호별서도(南湖别墅圖)>




   다음으로 많이 소개한 화가가 심주(沈周:1427-1509년)이다. 심주는 뛰어난 기량을 지닌 문인화가로

오파라는 화파를 탄생시켜 이후 "중국화가 문인화 위주로 전개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하였

다. <야좌도> <여산고도> <우의도> 등도 소개하였으나 기억에 남을 만한 유명한 작품 하나를 꼽으

라면 역시 여러 책들에서 소개하는 <장려원조도(杖藜遠眺圖)>가 아닐까 싶다. 시로 표현한 인생관

이라 말할 만하다고 보인다. 


심주(沈周),  <장려원조도(杖藜遠眺圖)>


   심주는 또 소주 일대의 실경을 많이 그린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아래는 <양강명승도(兩江名勝圖)>

가운데 항주의 하천축사(下天竺寺)와 마안산(馬鞍山) 그림이다.


 

  심주(沈周), <양강명승도(兩江名勝圖)>




   심주에게 배운 문징명(文徵明:1470-1559년)은 그의 절의 때문에 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문인들이

많이 거명하던 문사였다. 문징명은 스승과 달리 "꼼꼼한 필치와 강한 채색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은

언뜻 보아서는 문인화의 분위기와 동떨어져 보이나 볼수록 의미있는 자태를 드러낸다"며 소개하

였다. 아래 <우여춘수도(雨餘春樹圖)>에서 "사물들을 모두 경사지게 처리한 것은 의도적으로 수평

성을 깨뜨리는 것이며 화면에 긴장감을 높이려는 시도로 매우 근대적인 감각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소개는 안 한 작품이지만 문징명이 그린 왕희지의 일화인 <난정수계도(蘭亭修契圖)>가 보여 그의

행초서 작품인 천자문과 함께 소개해본다.



문징명(文徵明), <우여춘수도(雨餘春樹圖)>




문징명(文徵明), <난정수계도(蘭亭修契圖)>




문징명(文徵明), <천자문>




  명대에 화풍을 일신하며 '전위적'이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개성을 새로이 보여준 화가가 있었

으니, 바로 서위(徐渭:1521-1593년)란 화가이다. 그의 근대적인 감각을 보여줬다는 <잡화도권(雜畵

圖卷)>이다. 


서위(徐渭),<잡화도권(雜畵圖卷)>




    명말이 되면서 오파의 감각적인 화풍을 퇴보라 여기며 동기창(董其昌:1555-1636년) 등의 송강파(

松江派)가 나왔다. 복고풍으로 이전의 대가들 작품을 모방하여 그리는 방작(倣作)들도 유행하였다고

소개하였다. 미국에 가 있는 <청변산도(靑변山圖)>도 동원과 황공망의 기법을 원용한 것이나 근대

적인 시각을 반영하여, 전통 계승과 그 속의 변화라는 측면이 모두 보인다고 하였다.


동기창(董其昌), <청변산도(靑변山圖)>



   동기창은 문인화 이론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의 화론은 <개자원화전> 같은 나중의 책들에 수록되

었다. 그는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점을 바꿔 "학습이나 학문으로 인한 습득이 가능한 것"이라 하

였고, 남북종론을 통해 직업화가 그림보다 문인화가 우월하다는 논지를 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천재도 악덕지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업적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도 근래에 와서야 가능하였

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가 있는 <방거연산수축(倣巨然山水軸)> (1630년)

에서는 구조적인 관점으로 산수를 본다는 해석 때문에 그가 중국의 세잔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그림이 미흡해 보여 그 아래 다른 그림(<山水手卷>)도 찾아 소개한다. 


 

동기창(董其昌), <방거연산수축(倣巨然山水軸)>



동기창(董其昌), <山水手卷>




   한정희 선생은 이 부분에서 동기창의 방작들을 가지고 그림을 연습했던 조선 후기 강세황의 그림도

소개하였다. 최고의 산수화라는 평과 함께. 아래는 1749년에 그린 강세황의 <방동현재산수도(倣董

玄齋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이다. 올 6월 탄생 300주년 특별전 도록에 실린 그림으로, 강세황

이 동기창이 동원의 필의로 그린 그림을 보고 그렸으니 동원-동기창-강세황이라는 오랜 정신사적인

내력을 숨겨 가진 그림인 것이다. 



강세황,  <방동현재산수도(倣董玄齋山水圖)>




   소개는 없었지만 동기창은 글씨 때문에도 조선 후기의 서화계에서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던

사람이다. 동기창 행초서들이다.  






동기창,  행초서




   청대에 들어서 처음은 자칭 정통파라 주장하는 왕시민, 왕감, 왕원기, 운수평(四王吳운) 등이 있

었고, 이에 대한 반발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개성을 추구했던 팔대산인 양주팔괴 등이 있었으나

여기선 설명을 생략한다. 다만 청조의 지배를 피해 살았던 팔대산인(八大山人)이란 사람의 단순하고

명쾌한 수묵 그림만 봐둔다. 세상에 눈을 감은 조는 새와 화난 눈동자의 물고기 그림이다.





 




   또한 그중에 자연을 변형시키고 운율화된 산을 그려 '유기체적인 산수'라는 평을 들은 석도(石濤)

<황산팔승도(黃山八勝圖)>를 소개한다. 일본 나라에 가 있는 그림이다. 




 



석도(石濤), <황산팔승도(黃山八勝圖)>




 아래는 문징명의 초상인데, 강의에서 본 것과는 좌우가 바뀌었다.


문징명의 초상


    청대 후기에는 선물로 주고받던 문인화도 상품화되어 팔렸다. 전통을 도외시하는 개성파들도 많이

나왔고 전통적인 문인화가들은 오히려 '전통화파'라 불리거나 나중에는 '신문인화'라 불리게 되었다

는 설명이다. 주요 인물로는 조지겸, 오창석, 제백석 등으로 이어지며 현대에 이른 것이다. 빈농 출신

으로 모택동의 해방을 맞은 제백석은 인민화가로 추앙되며 그림을 선사하기도 하였으나, 문화혁명

는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다가 지금은 '중국의 피카소'라고 높여질 만큼 그의 작품들이

높은 경매가를 호가하고 있단다. 참고로 그의 자서전 <치바이스가 누구냐>가 작년말 학고재에서

새로 나왔기에 강추로 소개하며 다른 말을 대신한다. 그전의 <쇠똥화로에서 향내나다>를 도판의

화질을 높이며 거의 그대로 다시낸 개정판이다.


  중국의 문인화 전통에서 나름으로는 강남의 화가들이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며 면면히 이어내려온

맥락은 매우 크고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 강의였다. 같이 온 김홍영 운위장은 한정희 선생의

이름 때문에 여교수인 줄 잘못 알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예전에 나도 이 분은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제자백가(<순자>)도 번역하는구나 하고 놀랐던 때가 생각났다. ○

   


                                       cafe.daum.net/history.cc/jU35/509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