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 22:30ㆍ美學 이야기
중국·일본에도 없는 독창적인 여래상의 무게 | ||||||||||||||||||
김대환의 文響 - (11) 신라목조삼존불감(新羅木彫三尊佛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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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木彫佛龕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1962년에 국보 제42호로 지정된 송광사 普照國師 목조삼존불감으로 唐나라에서 8세기~9세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된다(사진①). 이 유물이 우리나라 작품이 아닌 이유는 불감의 材質이 白檀木(흰박달나무)으로 우리나라에서 自生하지 않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佛龕彫刻의 圖像이 중국 唐나라의 도상과 거의 일치하며 일본에도 唐나라에서 수입된 같은 계통의 목조삼존불감이 傳世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신라시대 중국 唐나라에서 수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언제부터인가 고려시대 보조국사 知訥(1158~1210년)의 願佛로 口傳돼 오고 있다. 6·25전쟁 때는 약탈자들의 눈을 피해 작은 단지에 넣어져 오이밭 땅속에 숨겨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일본에는 송광사의 목조삼존불감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唐나라에서 수입한 목조삼존불감 2점이 전해 오는데, 三重縣의 개인소장 목조삼존불감(사진②)과 金剛峯寺에 소장된 목조삼존불감(사진③)이다. 불감의 재질은 송광사 것과 같은 白檀木으로 불감을 닫으면 八角柱형태이며 겉면 상단부에 넝쿨무늬장식이 조각돼 있고 경첩장식까지 거의 동일하다. 송광사의 불감은 三重縣의 개인소장품처럼 크기가 작고 금강봉사의 삼존불은 높이 23cm로 큰 편에 속한다. 일본에 전해진 唐나라의 목조불감 2점과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모두 중국 唐나라의 작품으로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일본으로 옮겨와 傳來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목조불감은 조선시대 이전의 것은 알려진 사례가 없었고 남아있는 유물은 거의 조선후기의 유물뿐이었다(사진④). 그런데 우리나라 목조불감의 제작 年代를 신라시대까지 끌어 올려줄 목조불감을 實見해 처음으로 소개한다. 국내 개인소장의 목조삼존불감이다(사진⑤). 이 목조삼존불감의 재질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自生하는 소나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建築材나 彫刻用材로 많이 사용돼왔다. 박달나무에 비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彫刻은 용이하지만 쉽게 부러지거나 害蟲에 약하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옻칠을 사용했는데 옻칠은 고조선 시대부터 靑銅劍의 칼집이나 나무그릇, 악기제작 등의 실생활에 도료로 사용했으며 방수, 방충, 방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소나무로 만든 목조삼존불감이 일천년 넘게 보존된 것은 불감의 겉면과 속면을 옻칠로 여러 번 두껍게 칠한 덕분이다. 그러나 목조삼존불감의 일부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옻칠의 검은색이 탈색돼 누렇게 변하고 목재가 훼손되는 아쉬움이 남겨졌다. 불감의 경첩은 모두 다섯 개로 不老草裝飾이고 靑銅으로 제작됐으며 중국의 경첩보다 더 세련됐고 하나의 경첩에 10개의 청동 못으로 견고하게 고정했다. 正面의 경첩은 송광사의 목조삼존불감처럼 開閉式이 아니고 일본 금강봉사의 목조삼존불감처럼 封合式으로 불탑이나 부처님의 복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목조삼존불감의 표면에는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서 봉안했던 것으로 아직도 붉은 천 조각이 붙어 있으며, 옻칠의 일부는 오랜 세월에 걸쳐 눌린 纖維織造 흔적이 남아있다. 목조삼존불감의 크기는 높이가 22.3cm이고 바닥 폭이 가로13cm, 세로9.5cm로 송광사의 목조삼존불감보다는 훨씬 크며 일본 금강봉사의 목조삼존불감과 비슷하다. 불감을 닫았을 때는 八角柱形態의 중국 것(송광사 목조삼존불감, 일본 금강봉사 목조삼존불감, 일본 삼중현 목조삼존불감)과는 다르게 둥근 기둥모양이다.
이 목조삼존불감은 일본 진언종의 空海大師가 806년경에 중국 唐으로부터 들여와서 현재 일본 金剛峯寺에 모셔진 목조삼존불감과 세부적인 조각의 기법과 圖像은 완연히 다르지만 전체적인 형식은 비슷한 계통으로 보인다. (사진②)와 (사진④)에서, 제일 아랫단에는 네모의 틀 속에 惡鬼를 배치해 악귀를 딛고 선 모습으로 그 위에 香爐와 獅子를 불상의 대좌 옆에 배치한 것과 여래상과 보살상의 천정에는 天蓋를 裝嚴했는데 휘장형식의 천개는 두 불감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양쪽 左右佛龕의 천개는 파손돼 일부만 붙어있지만 역시 같은 양식으로 보인다. 불감속의 여러 圖像들은 한국과 중국의 조각기법 차이가 완연하며 도상의 배치와 내용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세부적인 조각기법은 모두 정교한 透彫, 丸彫, 浮彫의 목조각 기법을 총동원해 정성스럽게 제작했다(사진⑥). 이 목조삼존불감의 표현양식은 三世佛이며 중심이 되는 가운데의 불감의 本尊佛은 경주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아미타여래상(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 전재자 註)이다. 右肩遍袒으로 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袈裟를 걸쳤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한 채 결가부좌한 두 발위에 편안히 올려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자연스럽게 내려놓은 降魔觸地印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땅의 神을 가리키는 手印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得道할 때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땅의 神을 불러서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手印으로 결가부좌한 불상에서 나타난다. 머리 위에는 높은 肉髻와 커다란 螺髮을 표현했으며 근엄하고 자비스러운 相好다. 벌어진 어깨와 풍만한 신체에 약간 잘록한 허리를 표현했고 목에는 공덕과 번뇌를 나타내는 三道의 흔적이 있다. 앙련과 복련의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聖聞인 迦葉과 阿難을 배치했고 그 뒤로 협시보살상과 신장상등을 차례로 배치했다(사진⑦). 특히, 왼쪽불감의 비로자나여래상은 우주만물의 창조신이며 윤회의 상징인데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이고 대표적인 如來像으로 남북국시대 신라 화엄종에서 8세기부터 제작되기 시작해 9세기~10세기에 널리 유행했으며, 화엄종의 主佛로서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검지를 세워 그 끝마디를 왼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智拳印의 手印을 하고 있다(사진⑧). 오른쪽 불감은 중앙의 아미타여래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상과 아래로 사자상과 향로를 배치했으며 제일 밑에 惡鬼像을 별도로 배치했다(사진⑨). 좌우불감의 본존불 대좌는 받침이 원형으로 돼있으나 중앙 본존불의 대좌받침은 생략했고 각 불상의 光背는 擧身光으로 光心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다음으로 넝쿨무늬를 돌렸으며 外光은 활활 타오르는 火焰무늬를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했다. 목조삼존불감안에 표현된 圖像들은 가운데불감에 13像, 왼쪽불감에 8像, 오른쪽불감에 8像으로 모두 29像이다. 이 像들은 여래상과 협시보살, 성문, 사자, 악귀, 역사상으로 서로가 그 尊格을 달리 하지만 각 도상의 성격에 맞게 입체적으로 조각돼 작은 불감 속에서도 우주만물의 온 세상을 잘 담아내고 있으며 남북국시대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금강봉사의 목조삼존불감이 806년경에 들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점과 불감속 도상의 배치와 조각기법 등을 고려하면 9세기경에 제작된 남북국시대 신라의 목조삼존불감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實物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文獻에서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신라시대의 목조삼존불감이 생생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해외의 개인소장가로부터 입수해 이제는 故鄕으로 돌아와 後孫들의 품에 터를 잡게 됐고,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의 사연과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과연 이 新羅木彫三尊佛龕은 그토록 소망하던 일천여년 만의 아름다운 歸鄕을 이루게 된 것일까.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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