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2. 강도, ‘화청출욕도’

2016. 2. 3. 00:00美學 이야기



       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2. 강도, ‘화청출욕도’| ******불교미술종합

고집통 | 2015.01.16. 05:10


   

2. 강도, ‘화청출욕도’

 

“타인 위한 삶의 감동은 천년 세월 뛰어넘는다”

  

▲ 강도, ‘화청출욕도’,

 청, 비단에 색, 120.2×66.1cm, 천진시예술박물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시오. 쓸데없이 백성들만 괴롭히며 이곳에 머무르지 말고….”

 

북천축(北天竺:북인도) 소월지국(小月氏國) 왕이 중천축(中天竺:중인도)을 쳐들어와 포위하고는 한 철이 지나도록 물러나지 않았다.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걱정이 깊어진 중천축 왕이 북천축 왕에게 편지를 보내 이와 같이 물었다. 북천축 왕의 회신이 도착했다.

 

변재비구가 설법 시작하자

굶주린 말들 풀 먹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설법 들어

그때부터 마명보살로 불려

 

글재주 탁월해 경전 저술

‘대승기신론’ 저자로 알려져

  

 

“그대가 굴복할 뜻이 있다면 3억 금(金)을 보내기 바란다.”

 

중천축 왕이 말했다.

 

“이 나라 전체를 들어도 1억 금이 없는데 어찌 3억 금을 구하겠는가?”

 

북천축 왕이 대답했다.

 

“너희 나라 안에 두 가지 큰 보배가 있는데, 하나는 부처님 발우(鉢盂)이고, 하나는 변재(辯才:말을 잘하는 재주)비구이다. 이들을 나에게 준다면 2억 금으로 쳐주겠다.”

 

중천축 왕이 말했다.

 

“이 두 보배는 내가 매우 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버릴 수 없다.”

 

   중천축 왕이 변재비구를 얼마나 보배롭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천축 왕의 거부로 협상은 무산됐다. 다른 방도로 돈을 구하지 못하면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변재비구가 한 걸음에 달려왔다. 변재비구는 왕을 설득하여 자신이 월지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로써 중천축은 가까스로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도대체 변재비구의 말재주가 얼마나 뛰어났으면 한 나라의 가치에 맞먹을까. 이는 나만 가지는 의문이 아닌 듯하다. 변재비구가 월지국에서 귀국하자 신하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했다. 한 신하가 왕께 아뢰었다.

 

   “왕께서 부처님 발우를 받드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지만 무릇 비구는 세상에 많은데 1억 금에 해당된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왕은 변재비구가 사람들을 이익 되게 인도함이 한없이 넓고 깊어 한번 법을 설하면 사람이 아닌 것까지 감동시킬 수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왕은 이번 기회에 모든 미혹된 무리들을 깨닫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은 변재비구가 설법하기 전에 일곱 필의 말을 엿새째 굶겼다. 그런 다음 내외의 사문들과 이교도들을 널리 모이게 한 뒤 변재비구에게 설법을 청했다. 설법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깨닫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뒤 왕은 엿새째 굶긴 말들을 대중 앞에 매어 놓고 풀을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말들이 변재비구의 설법을 듣는데 얼마나 열중했던지 풀 먹는 것을 잊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중들은 비로소 변재비구의 설법이 대단히 수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변재비구를 마명(馬鳴)보살이라 불렀다. 말이 설법을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그 후 마명보살은 북천축에서 불법을 널리 펼쳐 중생을 이롭게 하고 방편으로 여러 사람들이 공덕을 이루게 했다. 사람들은 마명보살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의미로 공덕일(功德日)이라 불렀다.

 

   이제 막 목욕탕에서 나온 양귀비(楊貴妃,719-756)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다. 투명하게 비치는 겉옷 속으로 속옷을 입고 전족을 한 그녀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목이 마른 그녀에게 시녀가 바치는 것은 여지(여枝)일까? 양귀비는 특히 여지라는 열매를 좋아했다. 중국 남쪽 지방에서 나는 여지를 운반하기 위해 현종(玄宗,712-756 재위)은 곳곳에 준마를 배치해 양귀비가 항상 싱싱한 여지를 먹게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원성이 자자했다. ‘화청출욕도(華淸出浴圖)’는 양귀비가 화청지(華淸池)에서 목욕하고 나온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인 강도(康濤)는 청(淸)의 옹정(擁正:1723-1735) 건륭(乾隆:1736-1795) 연간에 활동했다. 그림은 비록 청대(淸代)에 그려졌지만 당대(唐代)의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해 양귀비의 몸매를 풍만하게 그렸다. 화청지는 장안 동쪽에 있는 온천 별궁으로 그곳에 양귀비의 욕실이 있었다. 현종은 매년 10월이 되면 양귀비와 함께 화청궁에 행차했다. 양귀비가 목욕하고 나온 모습을 본 현종은 양귀비에 대한 새로운 사랑에 흠뻑 젖었다. ‘화청출욕도’라는 제목은 백거이(白居易,772~846)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취했다. ‘싸늘한 봄 황제의 은총이 내려 화청지에서 목욕할 새/ 온천물 부드럽게 기름진 살결을 씻어 내리네/ 나른하여 예쁜 그녀를 시녀들 부축하여 일으키자/ 비로소 황제의 은총 새롭게 받게 되었네.’

 

   중국의 4대미인은 ‘침어낙안 폐월수화(沈語落雁 閉月羞花)’로 표현된다. 침어는 서시(西施), 낙안은 왕소군(王昭君), 폐월은 초선(貂蟬), 수화는 양귀비의 상징이다. 양귀비는 그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데서 나온 얘기다. 사람의 아름다움에 꽃마저 반응할 정도이니 가히 마명보살의 변재에 말이 우는 것에 비견될만하다. 황제가 화청궁에서 환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양귀비와 가까이하며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안녹산이 무력도발을 감행했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황제일행은 쓰촨(四川)으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길에서 양귀비는 남편이자 시아버지인 현종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그녀가 잠든 모습을 보고 해당화가 봄잠을 잔 것이라 찬탄하던 현종 앞에서 참혹하게 생을 마쳤다. 양귀비의 나이는 38세였다.

 

   말까지도 울릴 정도로 뛰어난 변재를 지닌 마명(馬鳴 혹은 아슈와고샤, 100?-160?)보살은 중인도 사위국에서 출생했다. 처음에는 불교가 아니라 외도(外道)의 법에 통달했는데 장로 협존자(脇尊者)를 만나 불교로 전향했다. 마명이 협존자의 제자가 된 과정도 매우 드라마틱하다. 북천축에서 법을 전해줄 제자를 구하지 못한 협존자는 한 외도 사문이 변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 외도 사문은 얼마나 총명하고 논의를 잘했던지 성 안에 그와 대적할 자가 없었다. 자기 재주에 겨운 사문은 만약 누구라도 자신과 겨뤄 이길 자신이 있으면 종을 치고 그렇지 않으면 공양을 받을 수 없으리라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에 협존자가 나서 국왕과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론을 벌이게 되었다. 마명은 대론에서 진 사람은 혀를 끊어버리자고 제안했다. 협존자는 혀를 끊는 대신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역제안했다. 마명이 수락했다. 나이도 많고 멀리서 온 협존자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로 했다. 협존자가 즉시 말했다.

 

“천하는 태평하고 대왕은 오래 살며 국토는 풍요롭고도 즐거워 모든 재난이 없다.”

 

마명이 말할 차례였다. 그런데 협존자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논법(論法)에서 대답을 못하면 즉시 지는 것이었다. 그는 엎드려 제자가 되어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미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부터 마명보살은 경전에 널리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마명보살의 재주는 변재뿐만이 아니었다. 양수겸장(兩手兼將)으로 글 솜씨 또한 뛰어났다. 그는 인도 최초의 불교 시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글재주가 탁월했다. 그는 ‘불소행찬(佛所行讚:붓다차리타)’ ‘금강침론(金剛針論)’ ‘대장엄경론(大莊嚴經論)’ 을 지었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대승기신론’이 그의 저작이라는 점이 의문시되는 이유는 ‘대승기신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여래장(如來藏)사상 때문이다. 마명보살은 부파불교와 초기대승불교시대 사이에 생존했는데 이때는 아직 여래장사상이 형성되지 않던 시기였다. ‘대승기신론’에 대해서는 한국의 원효 스님 편에서 다시 논의하겠다.

 

   마명보살의 저작 중 ‘불소행찬’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불소행찬’은 부처님의 생애를 아름다운 언어로 장려하게 표현한 궁정서사시다. ‘불소행찬’이 출현하기 전까지 종래의 부처님 전기(傳記)는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 여러 경전과 율장에 체계 없이 흩어져 있었다. 또한 신화적이고 설화적인 부분이 없지 않았다. 마명보살은 종래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른 전기들처럼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신비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숭고한 인물의 전기(傳記)에 충실하게 표현했다. 마명보살의 천재적인 필력이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만나 이루어진 결정체다.

 

전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확한 사료를 해석하는 안목이며 화려한 수사나 현란한 기교가 아니다. ‘불소행찬’을 읽어 보면 그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불소행찬’의 전개가 얼마나 수수하고 명료한지는 첫 문장만 봐도 알 수 있다.

 

   ‘감자왕(甘蔗王)의 먼 후손으로 태어난 석가종족에서 가장 나은 왕은 깨끗한 재물과 덕을 갖추었으니 그러므로 이름하여 정반(淨飯)이라 한다.’

 

이 문장에는 그 어떤 장식이나 겉치레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확하게 사실을 기술하려는 자의 엄중한 본분이 압축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붓다의 집안 내력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한 문장을 얻지 못해 장황하게 늘어놨던 나의 글을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불소행찬’의 전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같다. 별 내용도 없으면서 문자를 물 쓰듯 낭비하는 사람들이 귀감으로 삼을만한 글이다. 꾸미지 않아도 감동을 주는 글. ‘불소행찬’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하고 싶은 그런 경지의 글이다.

 

   이런 감동은 마명보살의 필력 위에 역경승(譯經僧)들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불소행찬’의 원래 범본(梵本)은 1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한역(漢譯)과 서장역(西藏譯:티베트역)은 28장이다. 28장에는 붓다의 탄생부터 열반 후 사리를 나누는 부분까지 전 생애가 기술되어 있다. 우리가 현재 읽는 28장의 한역본 ‘불소행찬’은 담무참(曇無讖) 스님이 413년에서 421년까지 8년에 걸쳐 번역한 것이다. 담무참 스님은 중인도 사람으로 412년에 중국에 건너온 역경승이다. ‘불소행찬’의 역문은 격조 높고 아름다운 운문이다. 다섯 자(五言)씩 시처럼 써 내려간 글을 읽다보면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이 실감난다. 마명보살의 글은 담무참 스님의 번역이 있어 더욱 빛을 발한다. 부처님이 밝혀 놓으신 진리의 등불을 마명보살이 심지를 돋우고 담무참 스님이 불을 붙여 중국에 전해주었다. 그야말로 전등(傳燈)의 역사다. 아무리 위대한 분의 생애라 해도 그것을 글과 말을 통해 전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멀리 있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여러 사람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써야 하는 이유다. 마명보살과 담무참 스님의 전등은 그 어떤 설법이나 수행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마명보살과 양귀비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능력이 사람을 넘어 동물과 식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삶의 방향은 대척점에 서 있다. 한 사람은 그 능력을 타인을 위해 회향했고 또 한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낭비했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가를 얘기하는 것은 사족이 될 것이다. 타인을 위해 회향한 삶은 비록 고달프고 힘들어도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감동을 준다. 마명보살처럼 말이다. 자신만을 위한 삶은 비록 편안하고 풍족해도 그저 그것으로 끝날 뿐이다. 양귀비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두 사람의 삶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오로지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다.

 

[1277호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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