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3. 작자미상, ‘운룡도’

2016. 2. 3. 00:33美學 이야기



       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3. 작자미상, ‘운룡도’| ******불교미술종합

고집통 |  2015.01.18. 14:06


 


3. 작자미상, ‘운룡도’

 

용이 하늘로 승천하듯 대승불교의 체계를 세운 용수보살

 

“궁궐에 들어가면 미끈하고 날씬한 여인들이 많다던데 우리 은신술이나 배워볼까?”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용수

은신술 배워 궁녀 희롱하다

문득 깨달음 얻은 후 출가

 

공 논리 체계화한 ‘중론’ 등

수많은 저술 후대에 남기고

대승불교의 세계 열어젖혀

 

   용수(龍樹,150~250년경)의 제안에 세 명의 친구들이 대번에 눈을 반짝거린다.

 

“은신술? 야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은신술을 배워서 몸을 숨기면 아무도 보지 못할 거 아니야? 그럼 이 여자 저 여자 내 마음대로 건드려도 표시나지 않을 테고. 생각만 해도 흥분이 돼서 가슴이 떨린다. 역시 너는 천재야 천재!”

 

“흐흐흐.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한들 여자를 껴안고 뒹구는 맛에 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심심해 죽겠는데 잘 됐다, 잘 됐어! 언제 갈까?”

 

   용수는 남천축 바라문 출신으로 천성이 총명하여 어떤 일이든 두 번 묻는 일이 없었다. 그의 천재성은 젖먹이 때부터 시작됐다. 네 가지 베다 경전을 외우는 것을 들었는데 게송이 각각 4만개나 되고, 게송마다 서른 두 글자나 되었음에도 그 문장을 모두 외우고 그 뜻을 모두 깨달았다. 생이지지(生而知之)는 그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약관의 나이에는 당시 학문에 거의 통달해 여러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천문, 지리, 점술과 참위 등 온갖 도술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분야가 없었다.

 

   오늘 만난 친구들도 용수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천하의 이치를 다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누려 아쉬운 것도 더 이상 갖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다 가진 만큼 모든 것이 시시했다. 무엇인가 자극적이고 짜릿한 즐거움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면 이 무료한 시간을 탈출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묘안이 은신술(隱身術)이었다. 은신술을 배우면 궁궐에 들어가 제왕처럼 궁녀들을 탐닉해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술사(術士)를 찾아가 술법을 얻어 자유자재로 왕궁을 드나들었다. 그들이 궁궐에서 마음껏 욕정을 채워도 그들의 일탈은 발각되지 않았다.

 

“이 무슨 상서롭지 못하고 기괴한 일인가?”

 


   왕이 크게 노한 것은 그들이 왕궁을 드나든 지 백여 일이 지난 뒤였다. 궁중 여인들 중에 임신한 사람이 생겼다. 임신한 궁녀들은 두려움에 떨며 왕에게 죄를 면해달라고 호소했다. 따지고 보면 궁녀들도 피해자가 아닌가. 왕은 지혜로운 신하들을 불러 이 일에 대해 의논했다. 연륜과 학식이 높은 한 사람이 아뢰었다.

 

“무릇 이 같은 일은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도깨비가 아니면 방술(方術)에 의한 것입니다. 미세한 흙을 문턱에 뿌려 놓고 몰래 지키게 한 후 모든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키십시오. 만약 술법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취가 스스로 드러날 것이니 무기로써 제거해야 하고, 도깨비가 들어왔다면 자취가 없을 것이니 술법으로써 없애야 할 것입니다.”

 

왕은 곧바로 칙명을 내려 지시대로 시행하게 했다. 곧바로 네 사람의 자취가 발견되었다. 왕은 힘센 장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궁에 들어가 모든 문을 다 잠근 채 칼을 허공에 휘두르게 했다.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오직 용수 혼자만이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인 채 왕의 곁에 있어 목숨을 건졌다. 왕의 주변 일곱 자 안에는 칼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용수는 욕정이 얼마나 위험한지 비로소 깨달았다. 애욕이 괴로움의 근원이며 뭇 재앙의 뿌리였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욕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용수는 결심했다.

 

“내가 만약 이곳을 빠져 나간다면 사문에게 나아가 출가법(出家法)을 받으리라.”

 

   마침내 용수는 궁궐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용수는 곧바로 산으로 들어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타고날 때부터 머리가 좋았던 용수보살은 90일 만에 소승의 삼장(三藏)에 통달했다. 그러나 뭔가 부족했다. 용수보살은 다시 경전을 찾아 설산(雪山)을 헤맸다. 정성이 통했을까. 어느 탑 앞에서 늙은 비구를 만나 대승경전을 전수받았다.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여전히 미진했다. 용수보살은 다시 새로운 경전을 찾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본 대룡(大龍)보살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대룡보살은 용수보살을 바다 속 궁전으로 데리고 들어가 칠보장에서 대승경전을 꺼내주었다. 용수보살은 경전을 읽은 지 90일 만에 일상(一相:모든 경전의 여여한 모습)을 증득하고 무생(無生)에 들어가 두 가지 인(二忍:衆生忍과 無生法忍)을 얻었다. 용궁에서 나온 용수보살은 남천축에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고 외도를 꺾어 항복받았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500여년이 지날 무렵 활동했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제2의 부처님으로 존경받을 만큼 위대한 족적을 남긴 용수보살은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한 ‘중론(中論)’ 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중론’은 ‘중도(中道)’를 논리적으로 해명한 문헌이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연기(緣起)로 파악했다. 연기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부처님은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자아인 아트만을 부정하셨다. 영원불변한 아트만조차 우리의식의 단면일 뿐이다.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읊은 귀경게(歸敬偈)는 연기를 바탕으로 한 공사상을 잘 보여준다. 그의 귀경게는 팔불중도(八不中道)라 부른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생멸거래일이단상(生滅去來一異斷常)의 여덟 가지 어리석은 견해 대신 ‘연기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는 뜻이다. 반야공(般若空)을 기본 입장으로 한 용수보살의 사상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대지도론’은 대승불교사상뿐만 아니라 초기 부파불교 교리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어 불교백과사전과 같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지도론’은 ‘중론’에서 적게 언급한 유(有)의 세계가 자세히 적혀 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책이다.

 

  

▲ 작자미상, ‘운룡도’, 조선 말기, 종이에 색, 222×217cm, 국립중앙박물관.

 


   우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치더니 용이 물살을 가르고 솟아오른다. 굵은 비늘을 꿈틀거릴 때마다 검은 구름이 피어난다. 크르릉거리며 꿈틀거리는 기세가 어떤 삿된 기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거침없다. ‘운룡도(雲龍圖)’는 용이 여의주를 얻어 승천하는 기상을 힘찬 필치로 그린 대작이다. 용만 십이지(十二支) 중 유일하게 실제 있는 동물이 아니다. 상상의 동물이다. 십이지의 나머지 동물 특징을 모두 합하면 용이 된다. 용은 한자어이고 순수한 우리말은 ‘미르’다. 미르는 ‘물’에서 나온 말이다. 호랑이가 산신(山神)이라면 미르는 수신(水神)이다. 산신과 수신은 산 많고 물 많은 우리나라에서 예술작품의 주 소재였다. 청룡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동쪽을 지키는 사신(四神)으로 등장한 이후 기와, 장신구, 범종, 도자기 등 각종 장르에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용수(龍樹)보살의 원래 이름은 나가르주나이다. 용(龍)은 나가의 의역어이고 수(樹)는 아르주나의 음역어이다. 용수는 ‘용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뜻으로 용맹(龍猛), 용승(龍勝)이라 번역된다. 용은 그가 대룡보살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을 얻어서, 수는 어머니가 아르주나라는 나무 아래에서 그를 출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용수보살이 대룡보살의 도움을 받아 용궁에 가서 대승경전을 가져왔다는 내용은 다분히 신화적이다. 왜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걸까. 그것은 인도를 포함한 동양에서 용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신성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경전을 가져왔다는 내용은 실존인물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용궁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설정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세계를 열어젖힌 용수보살의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찬탄 받는 이유는 그 신령스러움 때문이다. 가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질 때 비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이 물을 만들지는 않는다.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에 기대어 우리에게 전달해줬다. 그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탁월한 해석이다. 그 모습이 마치 여의주를 이용해 비를 부리는 용에 비견될만하다. 역시 용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용승(龍勝)보살이다. 대승불교는 크게 중관파(中觀派)와 유가학파(瑜伽學派)로 나눌 수 있다. 중관파용수보살에서 시작됐다면 유가학파무착(無着)세친(世親)에 의해 시작되었다. 다음에 무착과 세친에 대해 살펴보겠다. 두 사람 또한 용수보살 못지않은 비룡(飛龍)이다.

 

[1278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