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32) 아름다운 오해

2016. 2. 3. 20:46美學 이야기



       [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32) 아름다운 오해

2015/12/28 09:08 등록   (2015/12/28 09:09 수정)


▲ 송해용 _ 님맞이 _ 145.5X97.0 _ 혼합재료 _ 2014.



(뉴스투데이=윤혜영 선임기자)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대 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폴 엘뤼아르 Paul Eluard의 자유, 원제 - 단 하나의 생각)
 

▲ 송해용 _ 님맞이 _ 90.9X72.7 _ 혼합재료 _ 2014.


   1942년 어느 봄날, 비행기 한대가 하늘을 가르더니 하얀 종이들을 공중으로 흩뿌렸다. 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독일의 프랑스 점령시기였다. 영국공군들이 삐라로 살포한 종이에는 프랑스 시인 엘뤼아르의 '자유'가 실려 있었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종이를 주워 글을 읽은 시민들은 흐느껴 울었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전쟁의 포화속에 신음하고, 군홧발에 숨죽이던 이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희망과 열정이 불타올랐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해방운동으로 이어졌고 평화를 향한 시위 아래 단결된 민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투쟁을 하였다. 가치있는 신념 아래 목숨을 바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일인가!

펜 한자루의 힘이 수백자루의 총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문학의 저력이다.
이처럼 예술은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알게 모르게 삶의 방향성을 지지해준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노력을 일깨우며 세대를 아우르는 끈이 되고 나이를 뛰어넘은 열정을 충동질한다.

예술을 향유하는 이는 비록 육신은 늙어도 정신은 찬란하여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 있는 것이다.


 
▲ 송해용 _ 님맞이 _ 90.9X65.2 _ 혼합재료 _ 2013.


   엘뤼아르의 '자유'는 다다이즘(Dada)의 창시자 '장 아르프'에게 바치는 시이다. 프랑스의 혁명운동을 위해서 쓴 시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형편에 맞게 생각하는 법이다.

즉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장 아르프의 죽음에 추모를 하는 시를 썼는데 당시 나라 돌아가는 형국과 사람들의 가슴에 열망을 부추기기 딱 좋을 내용이니 삐라로 사용되었고 시민들은 열광했다.
원뜻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나, 좋은 결과를 내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오해'라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나에게도 노처녀와 노총각을 결혼시킨 '아름다운 오해'의 사건이 하나 있다.

수년 전 일이다. 당시 단짝친구와 어울려 퇴근 후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호프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와 친구는 두부김치를 시켜 소주를 나눠 마신 후 집으로 돌아가는 행위를 일주일에 두세번 가졌다.

어느날 가보니 주인이 바뀌었고, 퉁퉁하고 인상좋은 남정네가 서빙을 하고 있었다. 주인아줌마가 시아버지 병환으로 간호차 전라도로 갔고 남동생이 당분간 가게를 대신 맡아 운영한다고 하였다.

두번째 방문한 날,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그가 서비스라며 양주 한병을 갖다 주었다. 두부김치나 감자튀김에 소주를 마시는 손님에게 거창한 양주서비스라니 참으로 과한 서비스였다.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훈제치킨을 서비스라며 또 갖다주었다. 호의가 계속되니 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손님으로 갈 때마다 파안대소를 하며 달려오는 그의 행동과 수줍음에 눈도 잘 못마주치면서 주변을 맴도는 행동에서 유추해 그가 나를 짝사랑한다고 단정지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그 가게에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의 안주와 양주상납은 계속 줄이어졌다.
친구는 싫다좋다 말도 않고 나를 따라다녔는데, 어느날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내게 고백을 했고, 당사자는 다름 아닌 호프집 사장의 남동생이었다.

두사람은 밤마다 문자와 전화로 사랑을 키워왔었고, 나는 눈치도 없이 혼자 오해를 하며 당당했으니 그 두명이 나를 두고 얼마나 웃었을지 지금도 생각하면 낯이 뜨겁다.

그래도 나의 오해로 그 가게를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둘은 결혼을 했으니 오해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글 : 수필가 윤혜영
geo0511@hanmail.net>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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