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 무명자집/ 책(策)/지도〔地圖〕

2016. 2. 3. 23:03美學 이야기



       윤기 무명자집/ 책(策)/지도〔地圖〕|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낙민 |  2015.12.09. 15:33

                 


책(策)
지도〔地圖〕



지도란 산천의 요새와 험하고 평평한 형세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책(圖冊)이므로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림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 그림 아닌 것으로 그림을 보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어이하여 집사께서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도라는 것에 관심을 보이시면서, 지도 밖의 참 지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에서 여기에 힘쓰지 않고 지도 그리는 것을 국가의 제일 급선무로 여기는 것은 바로 화공(畵工)이 개나 말을 그리기 싫어하고 귀신과 도깨비를 그리기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시대의 구경거리로 제공할 요량이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림의 격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림 아닌 그림〔非圖之圖〕’이란 이와 다릅니다. 양곡(暘谷)과 매곡(昧谷) 및 명도(明都)와 유도(幽都)가 사방에 분배되고 열두 주(州)의 열두 산이 그림 속에 일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으니 요 임금이 봉해 준 봉지(封地)의 지도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주(冀州)ㆍ연주(兗州)ㆍ청주(靑州)ㆍ서주(徐州)ㆍ양주(楊州)ㆍ형주(荊州)ㆍ예주(豫州)ㆍ양주(梁州)가 구역(九域)에 펼쳐져 있어 높은 산과 큰 하천 및 해사(海沙)와 삭남(朔南)이 한눈에 또렷하니, 우 임금이 다스린 지역의 지도를 여기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또 한 폭의 얇은 비단에 비슷하게 그리는 것을 어찌 일삼겠습니까.

   또 당시의 덕업과 교화가 거룩하고 드넓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밝게 비추고 있으니, 큰길을 따라 걷고 험한 용문에 오르는 것처럼 환한 것은 오직 이 ‘지도 아닌 지도’일 뿐입니다. 그때 가령 한 사람의 화공이 붓을 휘둘러 산이 솟고 물이 감아 흐르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천하의 신묘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 각고의 노력으로 그려내어 더없이 핍진하게 묘사해내었다 하더라도, 저는 어디가 요 임금의 교화가 입혀진 사표(四表)인지 또 어디가 문명이 펼쳐진 사해(四海)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처럼 참 지도는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습니다. 까닭에 삼대 이전에 여지도(輿地圖)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지도가 무익하다는 것을 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공이 바친 낙사(洛師)의 지도는 《서경》에 처음 보입니다. 그런데 간수(澗水)의 동쪽과 법수(瀍水)의 서쪽에 있는 모습이 천년 뒤에도 눈에 완연한 것은 곧 〈낙고(洛誥)〉에 있지 결코 지도에 있지 않습니다. 그 지도 역시 〈낙고〉의 글로 인해 당시에 점괘와 함께 올린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진짜 살아있는 여지도의 그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주나라가 망하자 왕자(王者)의 자취가 끊어지고, 옛날 문왕과 무왕이 다스리던 산천의 판도가 모두 영가(嬴家 진나라)의 지도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형경(荊卿 형가(荊軻))이 독항(督亢) 지역의 지도를 마련해 간 것이 다만 구빈(九賓)의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는 꼴이 될 뿐이니, 지사(志士)의 한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아, 주나라의 길을 돌아보니, 이것이 어떤 시대입니까. 아홉 폭(幅)의 산하가 그림 같건만 《춘추》에서 주나라 땅이 없다는 것을 읽을 수 있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바다로 가는 길을 잃어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로 변하였습니다. 당당한 화하(華夏)의 지도가 한 조각 독항 땅의 지도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건만 역수(易水)에 흰 옷차림의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습니다. 우 임금의 자취가 닿은 곳과 희공(姬公 주공)이 경영하던 곳이 거의 없어져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는데, 부질없이 서책 위의 몇몇 글자에 산하(山河)의 그림자만을 남겨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천하 후세를 그르치는 빌미가 꼭 지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순과 삼대 시대에 그리던 것은 해와 달과 별과 산과 용과 화충(華蟲 )뿐이었고, 왕부(王府)에 보관하는 것은 관석(關石)과 화균(和匀)뿐이었으니, 어찌 지도란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 이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오직 지도 만들기만 일삼아, 용면(龍眠)의 공을 다하여 한 개의 산이라도 틀릴까 염려하고, 호두(虎頭)의 기예를 다하여 하나의 강이라도 빠뜨릴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지(輿誌)에서 고찰하여 왕부(王府)에 보관해 두고, 스스로 ‘반 폭의 천에 요도(瑤圖)를 담고, 비단에 부온(富媼)을 포괄하였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토붕(土崩)의 환란이 생기면 지도는 다만 적을 인도하는 신묘한 방책이 될 뿐이고, 필경에는 그림의 떡을 보고 배가 부르기를 구하는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림을 볼 뿐 그림 아닌 것으로 그림을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드러나기 전에 미리 도모해야 한다.〔不見是圖〕’ 하였고, 《시경》 〈대아 증민(烝民)〉에 ‘내가 헤아려 도모하도다.〔我儀圖之〕’ 하였으니, 어찌 꼭 붓을 빨고 분을 씹으며 옷을 풀어헤치고 퍼질러 앉아 그린 뒤에야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책을 읽을 때마다 옛 성인이 〈하도〉를 본받아 ‘그림 아닌 그림’을 가지고 천하의 지도를 삼은 것에 감탄하고, 또 후세에 단지 그림으로 그린 지도만 지도라고 여겨 진짜 지도를 잃어버린 것을 가슴 아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뜻밖에 집사의 질문이 특별히 지도에 미치시니, 섭공(葉公)이 용을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주D-001]양곡(暘谷)과 …… 유도(幽都)가 : 요 임금 때 동서남북 사방에 있던 고을이다. 양곡(陽谷)은 동쪽에 있는 고을로 희중(羲仲)에게 머물게 하여 뜨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하도록 하였고, 매곡(昧谷)은 서쪽에 있는 고을로 화중(和仲)에게 머물게 하여 들어가는 해를 공경히 전송하여 가을 수확을 고르게 하도록 하였고, 명도(明都)는 남쪽에 있는 고을로 희숙(羲叔)에게 머물게 하여 여름 기후를 고르게 하도록 하였고, 유도(幽都)는 북쪽에 있는 고을로 화숙(和叔)에게 머물게 하여 겨울철 기후를 고르게 하도록 하였다. 《書經 堯典》
[주D-002]우 임금이 다스린 지역 : 《서경》 〈우공(禹貢)〉에서 말한 지역으로, 우 임금이 다스린 중국 구주의 땅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3]낙사(洛師)의 …… 모습이 : 낙사(洛師)는 낙읍(洛邑)이다. 주나라 성왕(成王) 때에 주공이 도읍을 낙읍으로 옮기고 낙사도(洛師圖)를 그려 바치며, 전말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서경》 〈낙고(洛誥)〉이다. 여기에, “내가 을묘일 아침에 낙사에 이르러 하삭과 여수를 점쳤습니다. 간수의 동쪽과 전수의 서쪽을 점쳐보니 낙읍을 먹어들어갔습니다. 내 또 전수의 동쪽을 점쳐보니 또한 낙읍을 먹어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지도와 점괘를 올립니다.〔予惟乙卯 朝至于洛師 我卜河朔黎水 我乃卜澗水東瀍水西 惟洛食 我又卜瀍水東 亦惟洛食 伻來以圖及獻卜〕”라고 하였다.
[주D-004]형경(荊卿)이 …… 꼴 : 형경은 전국 시대의 자객이다.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진 시황을 죽여 원수를 갚고자 하니, 당시 전광(田光)이란 고사(高士)가 형가를 소개해 주었다. 형가는 진(秦)나라에서 죄를 짓고 망명한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연나라 독항(督亢) 지역의 지도를 가지고 진나라 수도인 함양(咸陽)을 향해 떠났다. 형가가 함양의 궁전에 당도하자 진 시황은 조복을 걸치고 구빈(九賓)이라는 성대한 의전(儀典)을 갖추어 형가를 맞이하였다. 형가가 지도에 들어 있던 비수를 들어서 진 시황의 소매를 잡고 가슴을 찌르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비수를 던졌으나 구리 기둥을 맞히고 말았다. 형가는 마침내 여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고 말았다. 《戰國策 燕策》

[주D-005]역수(易水)에 …… 사람들 : 형가가 역수에서 진나라로 떠날 때, 죽으러 가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친척과 지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작별했다고 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여기서는 청나라에 항거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말한다.
[주D-006]해와 …… 화균(和匀)뿐이었으니 : 《서경》 〈익직(益稷)〉과 〈오자지가(五子之歌)〉 참조.

[주D-007]용면(龍眠) : 송(宋)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 1049~1106)의 호가 용면거사(龍眠居士)이다. 자는 백시(伯時)이고, 지금의 안휘성 서성현(舒城縣) 사람이다. 시에도 뛰어났으며, 고동서화의 감상에 남다른 안목을 가졌다. 그가 그린 산장도(山莊圖)는 세상의 보물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고개지(顧愷之)와 장승요(張僧繇)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D-008]호두(虎頭) : 진(晉)나라의 고개지(顧愷之, 345~406)를 말한다. 자는 장강(長康)이고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사람이다. 호두 장군(虎頭將軍)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재(才), 서(書), 치(癡)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인물화에 장기를 보였다.

[주D-009]요도(瑤圖) : 국가의 산천 형세를 그린 지도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국토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주D-010]부온(富媼) : 지신(地神)을 말한다. 《한서》 권22 〈예악지〉에 “후토(后土)의 부온이 삼광(三光)을 밝힌다.” 했는데, 그 주에 “온(媼)은 노모(老母)를 칭하는 말이다. 땅〔坤〕이 모(母)가 되므로 온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역시 국토를 가리킨다.

[주D-011]토붕(土崩) : 땅이 무너진다는 말로, 국가의 기반인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해짐을 말한다.
[주D-012]섭공(葉公)이 …… 좋아하는 것 : 겉으로는 어떤 사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주변에 있는 여러 기물(器物)에 용을 그려 놓을 정도로 용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실제로 용을 만나자 크게 놀라 달아나서 정신을 잃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新書 雜事5》 요컨대 지도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진심이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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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地圖者所以知山川阨塞險夷處。而有國之不可廢者也。
對。以圖視圖。不若以非圖視圖。則何執事之惓惓於世俗所謂地圖。而曾不及於地圖外眞箇地圖耶。彼世俗之不事乎此。而輒以畫圖爲有國之第一急務者。正如畫工之惡圖256_323b犬馬而好作鬼魅也。如欲供一時戱玩之具則已。不然則豈知畫格者哉。乃若愚所謂非圖之圖則異於是。暘谷昧谷明都幽都之分排於四方。而十有二州十有二山。莫不領略於度內。則堯封之地圖可按也。冀兗靑徐楊荊豫梁之羅列於九域。而高山大川海沙朔南。靡不指點於眼中。則禹貢之地圖可考也。又奚事乎一幅鮫綃之依微彷彿也哉。且當時之德業聲敎。嵬乎蕩蕩。至今照人耳目。赫赫若遵康衢而登龍門者。惟此非圖之圖是已。向使一畫工揮灑出山峙水繞之形而已。則雖以天下神手慘憺經營。模得十分逼眞。而愚未知何者是放勳所被之四表。而何者是文命所敷之四海也。若是乎地圖之不可以圖也。是故三代以前。未嘗有所謂輿地之圖者。誠知其無益也。周公洛師之圖始見於書。而澗水東瀍水西之宛然如見於千載之下者。乃在於洛誥一篇。不在於其圖。而其圖又因其書。而可想當時之與卜並獻。則謂非輿地之眞箇活畫可乎。嗟乎周亡而王迹熄。昔日文武之山川版籍。盡入於嬴家畫圖。而荊卿之齎送督亢地圖。只足爲設九賓之玩。則志士之難恨。庸有旣乎。噫。顧瞻周道。此何256_323c等時。九幅之山河如畫。而讀無地於春秋。江漢之朝宗失路。而人盡化於氊裘。堂堂華夏地圖。不翅若一片督亢。而易水白衣更無聞焉。則禹迹之所揜。姬公之所營。其將淪沒不復。而謾留得山河影子於方冊上若干字而已耶。嗚呼。誤天下後世者。未必非地圖爲之祟也。唐虞三代之時所繪畫者。日月星辰山龍華蟲而已。藏於王府者。關石和匀而已。夫安有地圖。而降及後世。不此之務。惟地圖之是事。竭龍眠之工而惟恐一山之或差。極虎頭之技而惟恐一水之或漏。考諸輿誌。藏之王府。自以爲握瑤圖於半幅。括富媼於錯繡。而一朝有土崩之患。則是圖也適足爲仇敵嚮導之妙方。而畢竟未免求飽於畫餠矣。所以然者非他。由其以圖視圖。而不知以非圖視圖也。書曰不見是圖。詩云我儀圖之。又何必舐筆咿粉。解衣槃礴而後謂之圖也哉。愚也每於讀書之際。未嘗不感慕於古聖人之則河圖而以非圖之圖爲天下地圖。又未嘗不惻然愍傷於後世之徒以圖爲圖而失却眞圖矣。不圖執事之問特及於地圖。其不至於葉公好畫則幸矣。


 

 cafe.daum.net/jangdalsoo/b3In/181   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