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왕실에서는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함부로 없애지 않고 이른바 명당 자리를 찾아 파묻었다. 이때 태를 넣어 묻어두는 용기를 태항아리, 또는 태호(胎壺)라고 한다. 태봉(胎峰)이란 말은 이를 묻은 봉우리를 말한다.
태항아리로는 초기에 분청사기가 많이 사용됐으나 점차 순백자 항아리로 바뀌었다. 따라서 백자로 만든 태항아리 역시 형태면에서 분청사기 태항아리와 매우 유사하다.
초기의 태항아리에는 일반적으로 뚜껑 잡이에 구멍이 나있다. 뚜껑 잡이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태토를 끈처럼 말아서 붙인 것이다. 이 경우 흙 끈을 X자로 교체시키고 약간 들어 올려 아래쪽을 실이나 끈이 드나들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또 다른 경우는 뚜껑 잡이 아래쪽에 뾰족한 것으로 아예 구멍을 뚫어 놓았다.
뚜껑 잡이에 구멍이 있는 경우는 항아리 몸체에도 실이나 끈을 꿸 수 있는 걸이 구멍이 달려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구멍과 뚜껑 잡이의 구멍을 사용해 실이나 끈으로 항아리를 밀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약간 후기에 만들어진 태항아리에는 구멍이 없는 것들도 많이 있다.
태항아리는 여러 개가 짝이 되어 출토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탯줄을 묻는 항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큰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넣었기 때문이다. 또 태항아리는 태어난 아이의 출생일, 부모 이름 등을 적은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묻는 게 일반적이다.
백자 태항아리(白磁胎壺)와 태지석(胎誌石)
17세기 높이 각각 30.9cm 19.4cm 호림미술관
백자 태항아리(白磁胎壺)와 ‘천계칠년’명 태지접시(天啓七年銘 胎誌皿) 1627년
각각 높이 29.2cm, 18.7cm, 4.1cm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