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 ①죽기 전에 봐야 할 그림, 안견의 '몽유도원도'

2016. 2. 4. 22:26美學 이야기



      

[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 ①죽기 전에 봐야 할 그림, 안견의 '몽유도원도'

                     
                   
    어느 시대이든 그림엔 시대의 미학과 창의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외 유행과 수요라는 사회적 관계도 있습니다. 새로운 자극이 되는 외부 영향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전부 집어넣어 다시 본 조선시대 명작읽기입니다. 우리 함께 옛 그림이 어렵다는 편견에 도전해 볼까요? ‘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은 매주 목요일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 견본담채, 37.8×106.5㎝, 일본 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죽기 전에’라는 말을 가져다 붙인 이색 출판마케팅이 한때 눈길을 끈 적이 있었습니다. 독자를 막다른 코너에 몰아넣듯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죽기 전에 가봐 할 곳, 죽기 전에 읽어야할 책, 죽기 전에 봐야할 영화 등등을 열거하면서 제목을 붙인 것이지요. 좋든 나쁘든 간에 이런 제목을 보면서 그림에도 이 말의 적용이 가능한가 하고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못할 것은 없습니다. 남이 땐 군불에 밥 짓는 것 같아 좀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한국미술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정리가 되고 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나무랄 것도 없을 겁니다.


   한국미술에서 죽기 전에 봐야할 명화 중 첫 번째로 꼽을 그림이 바로 안견의 '몽유도원도'입니다. 이 '몽유도원도'는 교과서고 어디고 안 나온 데가 없습니다. 이른바 데자뷰입니다. 안 봐도 본 것처럼 여겨지고 몰라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명한가’ 또는 ‘왜 뛰어난 그림인가’ 라고 꼬집어 물으면 누구라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 그림이 한국미술 가운데 죽기 전에 꼭 봐야할 그림의 No.1으로 손꼽혀야할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조선전기는 적막강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자료가 적습니다. 남아있는 그림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작가가 알려진 그림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대에 이처럼 완벽한 보존 상태를 자랑하는 대작이 존재하고 있어 그 자체가 이 시대의 회화사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전기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그렸다’라고 하는 그림의 소자출(所自出)이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옛 그림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소위 그림을 통해 알고 싶은 제작자나 제작 동기가 불분명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6백년 전에 그린 그림임에도 이런 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그림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이 초여름날 밤(음력 4월20일)에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 거닐었던 도원(桃源)의 풍경을 안견을 시켜 그리게 한 것입니다. 도원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유토피아에 해당하는 동양의 이상향입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은 1미터가 넘는 대폭의 화면에 3일에 걸쳐 그렸는데 이때가 1447년입니다. 한글이 창제돼 반포된 다음 해입니다. 그림 뒤에는 조선초기의 명필로 유명한 안평대군이 직접 그림을 그리게 된 유래를 적었습니다.




유도원도 앞부분에 안평대군이 직접 쓴 서문.


그 글을 조금 현대식으로 전하면 이렇습니다.

   ‘이제 가도(안견의 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으니 예전부터 전한다는 그 도원도(桃園圖)와 같은지 모르겠다. 훗날 보는 사람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가타부타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이 깬 뒤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기에 이 글을 쓴다.



   물론 제작 동기가 밝혀졌다고 해서 다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이 그림이 중국이 국보 No.1으로 손꼽는 곽희의 '조춘도'(1072년 제작)나 프랑스의 국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년 제작)에 견주고도 남을 만한 솜씨의 그림이라는 점입니다. 더욱이 '모나리자'보다 먼저 그려진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죽기 전에 꼭’이라는 수식어가 합당한 이유 중의 이유입니다. 일제 때 중국사의 대가로 손꼽혔던 일본학자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1866~1934)은 이 그림을 보고 ‘북송 시대의 그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서양의 15, 16세기를 르네상스라고 부른다면 북송 시대(960~1126)는 바로 동양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과 귀족 중심의 고대사회가 막을 내리고 사대부, 문인들이 주류 세력이 되면서 이성적 사고가 사회를 이끈 시대인 것입니다.


   중국의 자랑하는 현란한 도자기 문화는 이때부터 본격 시작됐고 먹 한 가지만으로 산수를 표현해내는 산수화도 이때 최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앞서 북송시대 곽희가 그린 '조춘도'가 중국의 보물 중의 보물로 손꼽히는 것도 그런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서 붙여진 찬사입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고난이 '몽유도원도'를 가리켜 그런 반열에 오르고도 남는 작품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그림을 보면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안견은 꿈 속 그림을 그리면서 몇 부분으로 나눠 그렸습니다. 우선 왼쪽부터 시작해 꿈속에 말을 타고 들어간 평탄한 도입부가 있습니다. 중간 부분은 도입부에서 이어지면 도원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험한 산무더기가 보입니다. 그리고 폭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도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안견은 도원으로 가는 과정과 도원의 모습을 이어 그리면서도 이 두 풍경을 묘사하는 시각을 달리 했습니다. 즉 왼쪽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보통의 산수화에 보이는 것처럼 정면에서 본 것처럼 그렸습니다. 반면 바위틈을 지나면 펼쳐지는 도원풍경 부분에는 위에서 내려다본 이른바 부감법(俯瞰法)을 쓴 것입니다. 그는 한 그림 속에 이처럼 두 가지 시점을 적용한 것입니다. 몽중(夢中), 몽중몽(夢中夢)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다른 시점을 통해 한 눈에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솜씨는 또 있습니다. 동굴을 나와 펼쳐진다는 도원의 풍경을 그럴 듯하게 그린 것입니다. 그림 속의 동굴은 그림 중간에 폭포가 시작되는 부분 위쪽으로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곳을 지나니 확 트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 오른쪽 끝의 위쪽에 삐죽한 바위를 그려놓고 그림의 아래쪽(개울에서 오른편)에 바위들을 잔뜩 그려 넣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평화로운 도원의 풍경이 마치 동굴 속에서 쳐다본 풍경처럼 표현되었습니다.

그 외에 세부적으로 웅장한 느낌의 바위 표현, 집 주변의 대나무 등에 보이는 치밀한 표현 등도 안견만의 솜씨로 거론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꿈속에 본 풍경이라는 상상속의 풍경 그리고 그것을 설명한 이야기를 듣고서 어디에선가 실제 하는 듯한 풍경으로 그려낸 점이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몽유도원도' 이후 실제로 이렇게 큰 스케일로서 상상 속의 풍경을 박진감 넘치고 웅장하게 표현한 예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몽유도원도'를 죽기 전에 꼭 보아야할 그림이라고 했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우리가 마음을 먹는다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재 이 그림은 일본 나라의 텐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있습니다. 평시에는 일반인이든 학자이든 일체 공개하지 않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대개 임진왜란 이후일 것으로만 추정될 뿐입니다. 그동안 한국에는 1986년, 1996년, 2009년 딱 세 번만 건너와 전시됐습니다. 다음번 방문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기회를 기다려볼 뿐입니다.


▷ 안견(安堅, 생몰년미상)

   신라의 솔거, 고려의 이녕과 함께 한국 3대화가로 꼽히는 화원화가입니다. 그러나 기록 부족으로 구체적인 생년과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안견 연구의 대가인 안휘준 교수는 이 정도의 대작을 1447년에 그렸다는 것은 중년의 기량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해 대략 1400년대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뜬 것도 1460년대나 1470년대로 보았습니다.

그의 자는 가도(可度, 득수(得守)도 있습니다)이고 호는 현동자(玄洞子) 또는 주경(朱耕)입니다. 1987년 서산의 한 향토사학자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지곡(池谷)사람으로 돼 있어 충남 서산 지곡면이 고향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그곳에 기념비가 서있습니다.

   가족은 화원의 아들임에도 대과에 급제한 안소희(安紹禧)가 있었습니다. 안견 관련해 가장 큰 관심은 안평대군과 가까웠던 그가 안평 대군을 죽이고 단종까지 몰아낸 세조 이후에도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점이 아닐까요. 그에 대해 17세기 유학자인 윤휴(1617~1680)는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안평대군은 그(안견)를 아껴 잠시도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안견은 때가 위험스러움을 알고 스스로 떠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북경에서 사온 먹을 꺼내놓고 안견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시키고는 자신은 잠시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 가져온 먹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종들을 다그치자 계집종이 “안견 탓”이라고 했다. 안견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는 듯 일어나자 품속에서 먹이 떨어졌다. 안평대군은 이에 크게 노해 그를 꾸짖어 내쫓고는 다시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조금 있다가 정난(靖難)이 일어나 안평대군 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연루돼 죽은 사람이 많았다. 안견만이 홀로 화를 면했는데 이는 식견이 높고 생각이 깊었던 때문일 것이다.’


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출처: 중앙일보] [윤철규의 '한국미술 명작선'] ①죽기 전에 봐야 할 그림, 안견의 '몽유도원도'


 

[서화] 안견의 그림세계| ――······· 서예 서화작품
예쁜천사. | 조회 212 |추천 0 | 2006.02.24. 21:36 
   


   드디어 우리나라의 화가를 소개하게 되었네요. 화려하고 감각적인 서양화에 비해 수묵으로 그려진 한국화는 조용하고 수수하죠. 혹 비교를 하자면 서양화는 푸른 바다 위를 모터보트로 달리는 다이나믹한 흥분, 한국화는 솔잎 향 은근하게 풍기는 오솔길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편안함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요한 풍광 속에서 심신의 피로를 씻듯 한국화의 우아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안식을 즐길 수 있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국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모네의 해돋이 만큼 유명하지 못했죠. 이번부터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의 유명한 화가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화가 안견. 그는 신라의 솔거, 고려의 이녕 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라 평가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의 사적인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답니다. 출생년도나 사망한 시기도 알 수 없으며 신분도 막연히 중인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을 뿐이죠.

당시의 왕이었던 세종은 우리의 한글인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 등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있던 당시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세종이 궁내에 집현전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을 뿐 아니라 도화원이라 관청을 설치하여 많은 화가를 길러내었습니다.

당시 도화원의 화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으로 많이 출세를 해봐야 종6품인 별제나 선화까지 오를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안견 만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으로부터 파격적으로 정4품인 체아직호군이란 직책을 받았답니다. 또한 예술을 사랑하는 안평대군의 열렬한 후원을 받아 다른 이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사기도 했죠.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서,화에 능하였으며, 그의 집은 늘상 예술성을 지닌 선비들이 모여 그와 함께 예술세계를 견주던 곳이 되었습니다. 안평대군은 특히 미술을 사랑하여 중국에서부터 많은 고미술품을 수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안견의 재능을 아껴서,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먹이나 붓이 있으면 그에게 먼저 선물하고, 어렵게 중국에서 들여온 값비싼 화집이 있으면 그 또한 먼저 보이면서 그의 예술세계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답니다. 덕분에 안견은 중국의 휼륭한 화가의 화풍을 많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중국 화풍을 우리만의 것으로 독특하게 발전시켰답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3일만에 그 내용을 그려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안평대군은 그 그림을 보고, “자네가 꿈을 꾼 사람 같구만.” 이라면서 칭찬했다고 하죠. 그리고 당대의 문인사 22명이 시문을 지어 그림에 부쳤답니다.

하지만 1453년, 안평대군의 형 세조가 왕위를 노리고 자신의 동생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리는 계유정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당대의 충신이었던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죠.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견은 그를 후원해 주었던 안평대군에게서 고개를 돌립니다. 그렇게 살아 남은 그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는 살아 남아 특유의 독특한 화풍으로 후대의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다 /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는가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 몽유도원도 ]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안견의 대표작이자 조선회화의 대표작이죠. 그림은 왼쪽 아래의 현실세계 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위의 도원세계로 올라가면서 전개가 되고 있는 데요. 멀리 있지 않으나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한 이상향에 대한 기대감과 신비가 너무나 잘 표현되어 있죠.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지금 일본에 소장되어 있답니다.






[ 적벽도 ]



   안견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여러 그림들 중 가장 큰 작품인 이 작품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을 그린 것이라 합니다. 중국에서 이곳을 그린 유사한 그림이 많이 있다고 해요. 오른쪽 위에 신비로워 보이는 산과 그 밑의 무성한 나무들의 모습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곳인 듯한 느낌이 들죠. 또한 강한 느낌의 적벽과 그 적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유연한 필치가 대비되면서 안견 특유의 필치가 보이고 있습니다.






[ 어촌석조도 ]



   진짜 안견의 그림인지에 대한 진위여부가 가려지지는 않은 작품이지만, 아직까지는 그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견의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워낙 출중한 화가의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 때문인 듯해요. 어쨌든 중국화풍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이 작품도 한국화 특유의 여유로움이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 연사모종도 ]



   안개낀 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소재로 하는 연사모종(煙寺暮鐘)은 본래 중국이나 일본의 수묵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귀하고도 비싼 중국의 서화를 자주 접했던 안견이 중국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처럼 보이게 하는 작품이죠. 전체적인 공간 구성이나 나무에 대한 표현이 중국 곽희파풍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 사시팔경도 – 만춘 ]



   늦은 봄의 한 정경이죠. 짙은 색의 왼쪽 아래 절벽과 초가집들 그리고 멀리 뒤에 보이는 산 사이에 그리고 오른 쪽 중간 즈음에, 강 건너 있는 기와집과 주변 모습이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왠지 구름 속에 떠있는 듯한 강 건너 기와집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 처럼 느껴지네요.






[ 사시팔경도 - 초하 ]



   사시팔경도의 제목으로 초봄을 그린 초추에서 늦겨울인 만동까지 총 여덟개의 시리즈가 하나의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경물들 사이에 넓은 수면과 안개를 채워넣어 안견 특유의 한국적 정서가 잘 드러나 있죠. 다소 모호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림 속 풍광이 보는 이에게 어지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 사시팔경도 – 초동 ]



   비단에 그려진 각각의 그림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건 사진상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림이 그려지는 비단에 색을 입힐 때의 차이도 있답니다. 비단에 배경색을 물들일 때 겨울의 느낌을 더 살리기 위함이라 할 수 있죠. 초겨울에 들어가고 있는 그림 속 산과 나무가 조금은 쓸쓸해 보이네요.






[ 사시팔경도 – 만동 ]



   하늘에라도 닿을 듯 강한 기세로 뻗쳐 있는 산들과 절벽이 장관입니다. 그 안에 가지를 뻗치고 있는 소나무의 기상도 힘있어 보이죠. 늦겨울 우수에 젖은 경치 속에서도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듯한 희망이 왼쪽 가운데 그려져 있는 폭포수의 흐름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 사시팔경도 – 초추 ]



   같은 풍경을 약간 위에서 본 듯한 각도로 그려져 있죠. 조선 초기의 풍경화들 대부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그려지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이 그림들도 모두 비슷한 구도의 풍경으로 되어 있죠.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조금씩 틀린 부분들이 보입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나무나, 붓 필치의 독특함들을 발견하시는 재미도 있답니다.






[ 사시팔경도 – 만하 ]



   앞에 소개된 초하의 그림과 대칭을 이루고 있죠. 사시팔경도의 그림들 모두 쌍을 이루어 대칭구도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늦여름의 조금은 지쳤으나 아직 기세가 꺽이지 않은 듯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네요. 강한 붓터치가 안견의 기상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안평대군이 꿈 꾼 이상세계| 지난 글모음

이주현 |  2007.10.14. 23:47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조선의 안평대군 왕자가 꿈 꾼 이상세계

                                             200573025 관광학과 
                                              이 주 현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화가인 안견이 그린 산수화로, 조선 세종 말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부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신선이 산다는 이상 세계를 낭만적으로 그려 낸 작품으로 그 당시 조선 시대가 꿈꾸었던 사회, 꿈, 이상향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에 대한 사회적 배경이나 그 외에도, 그 당시 시대의 기본 지식들을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여행하고, 꿈 속에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어 3일만에 완성된 그림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며, 한국 회화사 전반에 걸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에는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발문, 그리고 안평대군의 주위에 있던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당시의 쟁쟁한 인물 21인이 자필로 쓴 찬시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회화 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써, 또 당시 안평대군을 둘러싼 중신들과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는 역사자료로써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세종대의 시서화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매우 소중한 보배라고 하겠다. 그런데 현재 이런 문학적 가치와 함께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몽유도원도가 일본 덴리 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世間何處夢桃源)
은자(隱者)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野服山冠尙宛然)
그림 그려 보아 오니 참으로 좋을씨고
(著畵看來定好事)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自多千載擬相傳)
그림이 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後三日正月夜)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 적어 맑은 정취를 기리노라(在致知亭因故有作淸之) 


   이 시문에 이어서 몽유도원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림을 보면, 그림의 왼쪽에는 현실 세계가, 그림의 중간은 도원으로 들어가는 동굴과 험난한 길이, 오른쪽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도원의 이상세계가 그려져 있다. 몽유도원도는 보통의 두루마리 그림과는 다르게, 왼쪽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성을 가지고, 꿈속 세계를 표현하였다. 복숭아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절벽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대조적인 분위기이지만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있고 조화롭게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몽유도원도'도연명'도화원기(桃花源記)' 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품이다. 몽유도원도의 장면들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안평대군이 정유년(세종 29년) 밤에 꾸었던 꿈에 나타난 장면들을 기초로 한 것이지만, 이 꿈의 내용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현실 세계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보는 이상향으로서의 측면과,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도가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안평대군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안평대군이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어서 늘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다 가 꿈을 꾸게 되었고, 꿈속의 정경도 그가 읽었던 도화원기 글의 내용과 비슷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내용과 안평대군이 쓴 발문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의 꿈 이야기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도화원기의 내용은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큰 바위가 가로막고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들어가 보니 복숭아꽃이 활짝 핀 한가로운 마을이 열리고 몇몇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를 주제로 그린 그림은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도 여럿 전하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도화원기의 내용과 비슷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나 사람들은 없고 인가 두어 채와 복숭아꽃만 활짝 피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도화원기’와 '몽유도원도'는 세속을 떠난 이상향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골 주제이다. 전란으로 피폐한 세상을 피해서 떠나간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 하지만 다시는 찾아 갈 수 없었다는 이상향. 서양 문화권에서 유토피아라고 표현하는데 실제로 유토피아(Utopia)는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유토피아적(Utopian)’이라는 형용사가 ‘공상적이고, 몽상정인, 실현 불가능한’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진정한 이상향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잠시만 짧게, 도화원기의 소개를 하자면, 도연명이 지은 유기(遊記)로, 이 글은 선경(仙境), 선계(仙界)의 전승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유토피아 사상은 후세의 문학 ·예술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번에는 몽유도원도가 보여 주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겠다. 고려 말, 조선 초...정치패러다임에 결정적인 변화가 싹트게 된다. 고려제국의 멸망과 조선건국의 격동기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 말, 징기스칸 군대와 자웅을 겨루며 고려를 지키려던 우리의 선조들은 두 가지 정책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수전에 약한 기마군단을 대적하고, 불교건국이념을 활용하여 민심을 단결시키는 내용이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의 창제라고 한다. 


   조선시대, 안평대군 역시 유사한 내용을 선택하게 된다. 그것이 몽유도원도 프로그램이다. 사도세자(단종: 전재자 註)의 정통성을 지키고 조선건국의 이상사회를 건국하자는 내용을 함축한 설계도를 작성한다. 세종대왕의 유훈을 받은 사육신과 생육신의 친필로 수결을 받고, 조선건국의 이상사회를 암시한 몽유도원도를 안견에게 그리게 하여 몽유도원도가 탄생했다.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이 승하하신 후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 구실을 하며, 둘째 형 수양대군과 은근히 맞서고 있었다. 그러다 1453년, 안평대군의 형 세조가 왕위를 노리고 자신의 동생(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리는 계유정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당대의 충신이었던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고, 결국 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그 시대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도원이 꿈에 보인 것은 자신의 성격이 고요하고 산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러나 그 꿈은 그저 단순하게 안평대군의 취향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의식 속에서 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점차 세력을 키워 가며 권력에 군침을 삼키는 형, 수양대군에 대한 염의와 비정한 정치 상황에 대한 환멸이 이런 은둔 도피적인 꿈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몽유도원도는 화려한 문치(文治)시대의 둔사(遁士)적인 낭만주의와, 점차 심상치 않은 전망으로 다가오던 정치 세계의 음험한 분위기를 떨치고, 그윽하고 고요한 시정의 세계로 날아가고 싶던 그 시대의 작은 마음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몽유도원도는 왕자로서의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고민, 즉,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알고 있었던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세계를 찾아 홀연히 도원의 세계를 여행하였으며 그가 꿈 속에서 경험한 황홀한 이상세계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꿈에서 본 그 풍경 그대로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서 본인이 직접 그리지 않고 당대의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던 안견을 불러 그의 그림 솜씨로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조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대변할 수 있는 작품이면서, 표면적으로는 안평대군의 꿈의 경험에 한하여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이것은 그 당시 조선시대의 모든 국민들에게, 그리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 될 수 있는 내용,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계속되는 전란과 눈에 보이는, 또 보이지 않는 정치인들의 싸움 등으로 인해 일반 국민들도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며 안평대군 같은 왕이나 왕자, 당시의 정치인들도 많은 고난과 어려움들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만큼 현실을 탈피하고 싶고, 모두가 원하는 이상향, 무릉도원을 찾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의 우리 세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의 정치 또한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의 문제, 전쟁과 테러, 납치, 분열, 분쟁, 투쟁 등...모두가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을 얻기 위한 전쟁은 계속 되고있다. 결국, 현실이 자신들의 제각각의 이상향에 조금이라도 가까워 지길 바라는 마음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고, 그래서 더욱 현실이 어지러운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더욱 개인의 마음 속에 유토피아를 간절히 원하고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도 이런 부분의 원인이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는 그 부딪치는 현실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머릿속에라도 그려본 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안평대군 또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 그 자신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위안이 되고 공감이 되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읽고 잠이 들어,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 무릉도원, 복숭아 꽃이 만발한 꿈의 도원을 보고 현실에서 탈피해서,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의 행복함을 느낀 것이라 한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 안견이 몽유도원도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


    세종 29년(1447) 음력 4월 21일. 화원으로서는 도화원에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직인 종6품의 별제(別提)와 선화(善畵)가 전부였던 시기에 예술을 사랑했던 세종의 총애로 정4품인 체아직호군이라는 파격적인 직책을 수여 받은 안견은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안평대군 댁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안평대군 사저인 수성궁으로 달려갔다. 안평대군과 마주 앉은 안견은 안평대군에게 간밤에 꾼 꿈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누구?


    시, 서, 화, 음악 등 다방면의 훌륭한 재능을 가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왕자가 여덟 명 있었는데 그 중 문종, 세조, 안평대군은 글씨를 잘 썼고 그림과 음악은 영응대군과 안평대군이 뛰어났다고 한다. 부왕의 풍부한 예술적 기질을 온전히 타고난 왕자는 바로 셋째 왕자 안평대군이었다.
 예술을 사랑한 안평대군은 호탕한 성격과 자유 분방한 생활태도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잘 사귀며 예술적 재능 있는 사람을 몹시도 아꼈던 당대 최고의 문객이자 풍류남아였다.



*비하인드 스토리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산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송처관 등 당대 최고의 문신 참여하여 23편의 자필 찬시가 들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림을 그린 안견과 안평대군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운명이 고작 6년 후에 어떻게 엇갈릴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림이 완성된 지 6년 후에 안평대군보다 한 살 위인 수양대군이 단종 원년 1453년 10월 10일 세종이 애써 키운 충신들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모반의 수괴로 몰아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 사사시키며 결국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조선의 7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되는 조선 최초의 쿠데타인 계유정란의 막이 올랐다. 집현전의 수장이자 몽유도원도의 서문을 지었고 그림에서 안평대군과 함께 도원을 거닐었던 박팽년은 이개, 성산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는 자리에서 세조에게 단 한번도 상감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 부르다, 결국 군기감 앞길에서 자신의 아버지, 성산문의 아버지와 함께 차열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혹형에 처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의 뒤에 갑자기 나타난 최항과 신숙주는 안평대군이 자신들을 아끼고 보살핀 은덕을 배신하고 뒤에서 칼을 꼽는 배은망덕한 행동으로 수양대군의 편에 서서 쿠데타에 가담했다. 신숙주는 세조의 오른팔이 되어 단종의 처형을 주장했으며 최항도 쿠데타에 앞장서 정난공신이 된다. 계유정란 2년전 궁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무렵 안견은 안평대군의 호출로 무계정사를 방문한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 꿈을 꾼 후 가장 경치가 비슷한 곳을 찾아 다니다, 경치가 비슷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 곳을 무계정사라 이름 붙임)


   안평대군은 안견을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에서 새로 들여온 용매먹을 보여 주면서 한 번 써보라고 했다. 이처럼 언제나 진귀한 물건을 새로 구입하면 안견에게 보여 주고 사용하게 하여 그의 안목과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던 안평대군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아무런 힘도 없는 궁중화원에 불과한 자신이 이번 기회를 통해 안평대군에게서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안평대군과 다른 일행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에 용매먹을 자신의 소매 속에 감추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이 돌아와 먹이 없어졌다는 걸 알고 노복에게 다그치려는 순간 그림을 그리고 있던 안견이 몸을 일으킬 때 그의 소매 속에 있던 먹이 떨어져 그가 용매먹을 감춘 것이 발각된다.


    안평대군은 놀라움과 노여움으로 안견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호통을 쳤고 그 말을 들은 안견은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돌아갔다고 한다.
 자신을 발탁하고 안평대군과 어울리도록 배려해준 세종. 그를 아끼어 수많은 명화를 보여 주며 그의 안목을 길러 준 은혜를 입은 안견으로써는 자신의 안일을 위해 사대부가 아닌 일개 미천한 궁중화사가 취할 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배신이 용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몽유도원도는 단순한 산수화를 넘어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이 새겨져 있는 우리 선조들의 아픈 기록이기도 하다.

 

글자수 ; 684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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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감상 [1]

에헤헷 (d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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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堅 夢遊桃源圖 [안견 몽유도원도]

비단에 수묵담채. 38.7 x 106.5 cm.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그림들을 상세히 보고 싶으신 분은 클릭을 하셔서 보세요]

 

안평대군이 서른 살 되던 해(1447년) 
어느 여름날 밤에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표제와 발문을 비롯해 신숙주, 이개, 정인지, 박연, 박팽년, 김종서 등 
당대 최고 문사들의 모두 23편의 저마다의 자필 찬시가 곁들여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편대군의 발문에 의하면 그림은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그리기 시작하여 3일 만인
23일 완성되었다고 하며 그림의 내용은 통상적인 두루마리 그림과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쪽 상단부로 전개되어 있다.
왼쪽 도입부의 현실세계에서 출발하여 두루마리를 따라 오른쪽 도가(道家)의 이상경(理想景)인
도원(桃園)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이 구현되어 있다.

 

평원의 잔잔한 풍경에서 시작되는 도원을 향하는 길은 
고원(高遠)의 험한 절벽과 강물을 힘들게 건너고 나면
심원(深遠)의 넓은 대지위에 펼쳐진 화사한 복숭아 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그림에서의 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꿈결같은 몽롱한 분위기가 하면 전체에 녹아져 있어

그윽하면서도 신비스러우며 당대의 화풍이 거의 망라되어 있어 다양한 느낌과 분위기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맨 오른쪽이 도원경, 그리고 중간 부분이 현실세계에서 도원경으로 연결되는 험난한 기암괴석군,

그리고 맨 왼쪽이 현실세계로 나뉘어 볼 수 있다.

감상자에 따라 2부분 또는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그림을 세부분으로 나눴다.

 



   먼저 오른쪽 도원경 부분인데 이 작품은 두루마리 그림이기에 펼치는 순간 가장 먼저 도원경이 눈에 들어 온다.

안평대군이 가장 보고 싶어 하던 부분인 도원경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부터 도원경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이나 그림은 이러한 일반론을 뒤집고 오른쪽에 도원경을 그렸다.

 

 


< 오른쪽 도원경 부분 세부도 >

 


   병풍처럼 기암고봉들이 도원을 감싸고 있고 특히 상단에서 보여주는 기암고봉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이곳이 신선들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점은 부감법을 이용해 공중에서 바라볼 때 보여주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넓게 조망하는 효과를 냈다.

특히 도원 중앙 아래의 암산 가운데 부분의 높이를 현저히 낮춰 도원의 면적을 크게 보이게 한 부분은

안견의 탁월한 능력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산과 바위로 둘러쌓인 중경의 넓직한 분지에는 복숭아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활짝 핀 복사꽃은 빨간 꽃잎으로 그려져 화사한 분위기가 나며 꽃술은 금색으로 반짝인다.

도원(桃園)의 오른쪽 대각선 끝자락에 아담한 집에 세 채가 있고

중간의 복사꽃 사이 물가에는 배가 매어져 있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자욱한 안개 속에 복사꽃만 화려하다. 

여기가 바로 꿈속에서 그리던 이상향인 신선들이 사는 도원경이다.

 

안견은 기암괴석과 도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모습을 한 화면에 절묘하게 배치하여

도원경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 중간 부분의 세부도 >

 


   뭉게 구름처럼 보이는 황토산을 운두준법으로 그리고 산의 아랫쪽은 밝게 표현하여 조광효과를 내었다.

표면처리에 있어서 필선이 하나하나 구분되지 않도록 붓을 서로 잇대어 그렸는데

이러한 산악 표현은 중국 송, 원대에 유행했던 이곽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곽파란 북송 초기의 이성(李成)이 완성시킨 북방계 산수화 양식과 거기에 또 다른 형식을 가미시킨 곽희(郭熙)의

산수화 양식을 계승시킨 화가들을 말하며 조선 초기 화단에 영향력이 컷던 화풍이다.

 

그림 가운데 부분은 안평대군이 도원을 찾아가면서 보았다던

'산 벼랑이 울퉁불퉁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꿈 속의 바로 그 모습을 그렸다.

웅장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럽게 보이는 봉우리는 중첩되게 그려져 의도적으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면서

형태의 천차만별로 산중의 험준함을 잘 표현했다.

 

현실세계와 도원의 사이는 기암절벽이 이중으로 가로막고 있다.
막막하게만 보이는 두 세계 사이에도 이들을 연결하는 길이 암시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은
그만큼 도원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그림의 구도는 '이상향을 향한 역경의 행로'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시내는 구비져있고, 길은 백번이나 꺾여나간듯한데 깎아지른듯

솟아오른 절벽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다 문득 시선을 낮추니 숲 가장자리의 두 갈래 오솔길이 보인다.

이 곳의 산들은 아까 현실세계의 산과 분명히 다르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듯한 기괴한 바위산의 풍경이 이미 현실에서 떠나 꿈속에 와 있음을 말해준다.
산길 우측의 흘러내리는 2단 폭포가 이 경계만 넘으면 바로 도원임을 알려주고 있다.

 


   도원에 도착하기 전의 정경들이다.

원경으로는 희미한 기암고봉들이 감싸안을 듯 둘러져 있고 도원에 이르기전 목마른 갈증을 축이게 함인가.

중경에 이르러서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 계곡에서는 맑은 물들이 2단의 폭포로 쏟아져 내린다.

폭포로 떨어져 내리는 물들을 전경의 낮으막한 험준한 산과 기암들이 막아 얇고 넓은 연못을 이루게 하고

연못 주변에 서있는 봉숭아 나무들은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 화면의 왼쪽편인 무릉도원으로 가는 출발 지점 세부 부분도>

 



   이 장면은 몽유도원도의 가장 왼쪽 부분이다.
왼쪽 아래에 대충 대충 간단하게 야산으로 그려놓은 이 광경은 현실세계를 묘사하고 있어.

그림의 구도가 마치 동네 산을 옆에서 보는듯 평면적이다.
'현실'이라고 해놓고는 현실답지 않게 흐릿하게 그려 이 그림에서 가장 신경쓰이지 않았던 부분이다.

중부지방 특유의 야산 모습에서 처럼 사실적이고 실경적인 요소를 가미해 그렸는데

다른 부분의 비실경적 모습과 대비되어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각 경물들은 분리된 듯 하면서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있으며 
특히 좌반부의 정면시각과 우반부의 부감법을 이용한 공간 처리,
평원과 고원의 대조, 사선운동의 활용을 통해 자연의 웅장함과 선경의 환상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실경적 요소와 환상적인 세계의 교묘한 구현 등에는 안견의 독자적인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산수화로 손꼽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몽유도원도는 여러 기법의 표현 등에서 북송대의 화풍을 보이지만 이를 토대로 발전시킨

안견의 독창성이 잘 집약되어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후대의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안평대군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 >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과 안견의 그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듯, 
작품의 제작 연유를 적은 장문의 제기를 손수 적은 것은 물론이고
큼지막한 제목글씨까지 멋들어지게 써서 첫머리에 붙혔다.

3년 후 어느 날 다시 옛 감회에 젖어 다음의 제시(題詩)를 지었다.

 

世間何處夢桃園 [세간하처몽도원] 이 세상 어느 곳이 꿈에 본 도원인가.
野服山冠尙宛然 [야복산관상완연] 시골사람 옷차림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著畵看來定好事 [저화간래정호사]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참으로 좋구나
自多千載擬相傳 [자대천재의상전]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後三年正月一夜 [후삼년정월일야] 삼년 뒤 정월 초하룻날 밤.

在致知亭因披閱有作 [재치지정인피열유작] 치지정에서 다시 펴보고 짓노라

 

淸之 [청지]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기록으로 볼 때 최소한 1893년에는 일본에 있었기에 아마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강탈된 문화재란 증거가 없다보니 반환을 요구할 수도 없어 영원히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명작이다.

(옮김)

 






淸之 [청지]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기록으로 볼 때 최소한 1893년에는 일본에 있었기에 아마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강탈된 문화재란 증거가 없다보니 반환을 요구할 수도 없어 영원히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한 명작이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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