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강진 학인들

2016. 2. 10. 02:03다산의 향기



       다산과 강진 학인들 자료 / 보정산방

2010.08.1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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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다산초당 아래 마을에 들어선 다산유물전시관이 최근 성시를 이루었다.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31일까지 이어진 ‘다산유물특별전’의 관람객들이 무려 10만여명에 달했다. 최근 새롭게 발굴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강진의 학인들 사이에 주고받은 서첩과 편지들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학인들이란 대체적으로 제자들을 포함해 다산의 유배시절 교유했던 사람들이다. 신발굴 자료를 보면 다산의 인적 네트워크가 우리가 생각해왔던 이상으로 넓고 깊다. 뿐 아니라 학문적 면모에 가려졌던 인간적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가 강진에서 특별한 연을 가졌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산의 강진거처지는 네군데였다. 유배가 시작된 1801년 첫 거처는 읍내 주막집 골방. 4년을 지냈다. 그리고 1805년 겨울 보은산방으로 옮겼다. 다시 이듬 해 가을 제자 이청(李晴)의 집으로 옮겨, 1808년 봄까지 지냈다. 그리고 이 봄에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읍내에서 살던 7년 남짓한 때에는 주로 아전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 때의 제자들이 손병조(孫秉藻) 황상(黃裳) 황지초(黃之楚), 김재정(金載靖) 이청 등이었다.


이중 황상은 스승 다산으로부터 학문하는 자세는 부지런함(勤)이라는 답을 받고 평생 간직했고, 스승의 사후에도 스승의 두 아들과 교유를 했다. 자손까지도 우의를 다지기 위해 ‘정황계(丁黃契)를 맺은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다산은 다산초당에 머물며 외가쪽 해남 윤씨 집안 자제들을 중심으로 18명의 제자를 두었다. 이유회(李維會) 이강회(李綱會) 이기록(李基祿) 정학가(丁學稼) 정학포(丁學圃) 정수칠(丁修七) 윤종문(尹鍾文) 윤종기(尹鍾箕) 윤종벽(尹鍾璧) 윤종진(尹鍾軫) 윤종심(尹鍾心) 윤종두(尹鍾斗) 윤자동(尹玆東) 윤아동(尹我東) 이택규(李澤逵) 이덕운(李德芸)이 18제자. 여기에 이시헌(李時憲) 윤창모(尹昌模)도 배웠다. 이 뿐 아니라 후견인 역할을 했던 다산초당의 주인 윤단(尹?), 사돈 윤서유(尹書有, 윤창모의 아버지), 이름이 전하는 강진사람들이 여럿이다.


최근 다산의 위대한 저술의 배경에는 이들 학인들이 있었다는 점이 점차 조명되고 있다. 이들이 자료조사와 책의 편집에 ‘시스템으로’ 참여했고,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보들을 다산에 매개한 역할을 했다. 실학의 집대성에 강진학인들이 얼마나 어떻게 기여했는지는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요즘 학인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 조선일보, 200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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