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학문 뒤엔 18제자가 있었다"

2016. 2. 10. 02:12다산의 향기



      "다산 정약용 학문 뒤엔 18제자가 있었다" 자료 / 보정산방

2010.08.1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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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유배시절(1801~1819) 다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강진에 내려갈 때에는 혼자였으나 유배에서 풀려날 때 그에겐 ‘18제자’ 그룹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7•30~8•31,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을 공동 주최하는 강진군과 예술의전당이 개막에 앞서 공개한 유묵 35점은 강진에서 다산이 행한 교육 및 학문활동, 제자들과의 교유관계를 잘 보여준다.



◇다산과 황상의 특별한 만남

 

   1801년 겨울 다산은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강진 유배지에 도착한다. 가는 집마다 문전 축객을 당한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 사람은 동문 밖의 주막집 주인. 그는 이곳에서 기숙하며 유배생활에 들어간다. 이때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학동들이 찾아온다. 손병조, 황상, 황취, 황지초, 이청 등. 이 가운데 해배 뒤에도 교유가 이어진 제자는 황상과 이청 정도. 황상은 훗날 ‘치원유고’라는 문집을 낼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이청은 다산과 함께 ‘대동수경’을 편찬하고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으로 대성한다.

공개 자료 가운데 ‘증산석’(贈山石)은 다산이 15세의 황상을 처음 만난 1802년 10월, 어린 제자에게 학문을 권하며 쓴 글이다. “내가 산석(山石:황상의 아명)에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하니 그는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말하기를 ‘공부하는 자는 세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황상은 이 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한다. 황상이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게 된 것은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다. 황상은 스승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제관계를 이어간다. 초당시절 다산이 보은산방에 있는 황상에게 보낸 시(‘차운기황상보은산방’)는 끈끈한 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다산은 시 말미의 덧붙인 글에서 ‘나의 제자 가운데 시(詩)를 꼽으라면 바로 그대일 뿐”이라며 황상을 극구 칭찬한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이 고향에서 보낸 편지(1828년 6월12일자)에는 황상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제자를 그리워하는 스승의 정이 배어난다. 다산은 편지에서 강진의 농사를 걱정하고 이청 등 제자들의 안부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강진 읍내 시절 다산은 백련사혜장선사와 교유하며 또, 혜장의 소개로 초의선사도 알게 된다. 이번에 공개된 ‘견월첩’(見月帖)은 다산이 혜장선사를 위해 쓴 친필 한시첩이다.


이 시기 특기할 만한 일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손수 한문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이다. 다산은 ‘천자문’ ‘소학’과 같은 기존 한문교재들이 지나치게 어렵고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알고, 새로운 교재 편찬에 나섰다. 1804년에는 ‘천자문’을 대체할 ‘아학편’을 짓고, 곧이어 ‘제경’(弟經)을 편찬했다. 이번에 발굴된 ‘제경’은 다산이 ‘효경’ ‘소학’ 등에서 아동들이 가져야 할 예의범절을 담은 구절을 뽑아 모은 윤리교과서로, 강진 제자 윤시유가 친필로 옮기고 이청이 발문을 써 강진에서 교재로 널리 쓰였음을 보여준다.



◇다산초당의 ‘18제자’

 

   강진 주막집에서 5년,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초당에서의 10년은 다산의 학문이 무르익던 시기.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학문적 토론도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이 시절 제자 그룹은 ‘다신계절목’에 나와있는 ‘18제자’가 중심이다. 대부분 다산초당을 제공한 윤씨 집안의 자제들이나 이유회, 이강회 등과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도 들어있다. 또 18제자는 아니지만 윤시유, 윤창모, 윤정기, 이시헌 등도 다산에게 배웠다. 이 시절 다산은 다산강학에 참여했던 제자 윤창모를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다산의 초당 시절 유묵으로는 제자 윤시유의 재혼을 축하하는 시모음(‘요조첩’), 품석정의 자연 풍광을 노래한 시첩(‘품석정서’), 백운동의 지인들에게 쓴 편지(‘백운통천’), 국화의 덕을 찬미한 글(‘석재죽란 고성애국’), 정석(丁石)•약천(藥泉)•다조(茶조)•연지석가산(연못) 등 다산초당의 주변 경관을 묘사한 시(‘다산사경’) 등이 있다. 다산은 ‘요조첩’에서 중국에서 유행한 ‘하신랑’이란 사(詞)의 곡조를 써서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심경을 그려냈다. 또 ‘석재죽란’에서는 “여름에는 잎을 보고 가을에는 꽃봉오리를 보고 낮에는 자태를, 밤이 되면 그림자를 관찰한다”는 국화감상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초당 시절 다산은 논어고금주, 시경강의, 경제유표, 목민심서 등 주목할 만한 저술들을 쏟아냈다. 다산이 이토록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18제자’로 대표되는 제자들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해배된 뒤에도 그리움이…

 

   다산은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산초당을 잊지 못했다. 1823년 18제자의 일원인 윤종삼과 윤종진이 스승의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다산은 초당의 지붕은 이었는지, 연못의 잉어는 얼마나 자랐는지, 백련사의 동백은 무성한지 등 강진의 안부를 묻는다. 이번에 공개된 ‘기숙(윤종삼)과 금계(윤종진)에게 준 글’에는 이러한 초당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상세하다.


다산은 또 수시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월출산 아래 백운동의 이씨(이시헌으로 추정됨)에게 보낸 편지 등 4통을 엮은 두루마리가 그것이다. 제자들도 경기 마현(현 능내리)의 다산 생가를 방문하고 편지를 띄우며 안부를 전했다. 한편 이 무렵 추사 김정희는 다산의 아들 학연과 학유의 소개로 강진의 다산 제자들과 교유관계를 맺는다. 이번에 공개된 ‘노규황량’(露葵黃粱), ‘보정산방’(寶丁山房), ‘용구초당(蓉鷗艸堂)’ 같은 추사의 편액글씨는 대부분 추사가 강진의 다산 제자들에게 써준 것들이다.


‘정약용의 강진유배기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는 “다산이 강진에서 양성한 제자들은 단순히 스승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다산학단’을 이룰 만큼 학문적 성과도 적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차장은 “서예사적으로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과 추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제자들의 유묵에 대한 조명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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