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의 〈감피백하(感彼柏下)〉란 시를 보면 평소에 혜원(惠遠)의 현론(玄論)을 들었음을 알 수 있네. 소동파의 〈적벽부〉만 봐도 당시에 늘 참료자(參廖子)와 이야기 나눈 것을 확인할 수 있지. 매양 봄바람이 산들 불어 초목이 움트고, 나비가 홀연히 방초에 가득하게 되면 스님 몇 분과 함께 술을 가지고 옛 무덤 사이에서 노닐곤 한다네. 쑥대가 말갈기 같은 가운데 울멍줄멍 무덤들이 들어선 것을 보다가, 술 한잔 씩을 따라 부어주며 이렇게 말했지. “캄캄한 땅 속에서 그대 능히 이 술을 마실 수 있겠는가? 그대가 예전 세상에 있을 때도 또한 하찮은 이끗을 다투고 티끌의 재물을 긁어모으느라 눈썹을 치켜 눈을 부릅뜨고 애써 힘 쏟으며 다만 힘껏 굳게 움켜쥐려고만 했겠지? 또한 일찍이 저와 비슷한 무리를 좋아하고, 육욕에 불타며, 음란한 욕정이 솟아올라, 좋은 고장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파묻혀 지내느라 하늘과 땅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은 아닌가? 또한 제 집안을 믿고 건방을 떨어 남을 무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리며 스스로를 높이지는 않았던가? 그대 이승을 하직할 때 손에 동전 한 잎이라도 지녀갈 수 있었던가 모르겠네 그려. 이제 그대의 부부가 한데 묻혔으니, 능히 지난날처럼 즐겁기는 한가? 내 지금 그대를 난처하게 함이 이와 같건만 그대가 능히 큰 소리로 날 꾸짖을 수 있겠는가?”
이같이 수작하다 돌아오노라면 날은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곤 했지.
정약용 선생의 〈초의 스님에게 주는 글(爲草衣僧意洵贈言)〉의 첫 단락이다. 불쑥 도연명과 소동파의 고사나 승려와의 교유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승려와 어울려 지낸 글을 쓰자니 공연히 멋적어 자기 변명 삼아 적은 것이다. 나는 유자(儒者)이지만 불가의 이야기 속에서도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적지 않으니 가만히 짐작해 보라는 뜻도 있다.
강진 초당 너머 백련사의 스님 몇과 동무해서 봄나들이를 나섰다. 술병을 차고 범나비 날아가는 봄 동산에서 소풍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하필 공동묘지다. 이 무덤 앞에서 술 한잔, 저 무덤 앞에서 술 한잔 따라 주며, 독백인 듯 벌써 흙밥이 되어버린 무덤 속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벌써 긴 봄날의 하루해가 뉘엿해졌다.
《법구경》에서는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고 했다. 죽고 나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뿐 동전 한 닢 지녀갈 수가 없는데, 평생 그토록 조금 더 갖고 조금 더 누리려고 아둥바둥 했던 일을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더란 말이다. 농담처럼 희떱게 무덤 속 주인에게 던지는 말 속에 준절한 깨달음이 깃들어 있다.
이어지는 네 번째 단락은 또 이렇다.
천책선사(天?禪師)가 말했다.
“부잣집 아이가 평생 한 글자의 글도 읽지 않고, 다만 제멋대로 노닐기만 일삼아, 한갖 격구나 하면서, 금안장에 옥굴레로 꾸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네 거리를 휘저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 멋대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서 있으니 애석하도다. 나나 저나 모두 허깨비(幻) 세상에서 허깨비로 살고 있을 뿐이다. 저가 장차 허깨비 몸으로 허깨비 말을 타고, 허깨비 길을 내달리며 허깨비 재주를 잘하고, 허깨비 사람으로 하여금 허깨비 일을 보게 함이 다시금 허깨비 위에다가 허깨비를 보탬이 되는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밖에 나가 어지러이 시끄러운 것을 보게 되면 슬픔만 더하게 될 뿐이다.”
천책선사는 13세기 고려 무신 집권기의 고승이다. 진정국사(眞靜國師)란 법명으로 더 알려진 그는 만덕산 백련결사(白蓮結社)의 제 4대 주지였다. 다산의 강진 초당 바로 너머 만덕사가 옛날 백련사의 자리에 터를 잡았기에, 다산은 그 인연으로 《만덕사지(萬德寺志)》를 저술하였다. 이때 읽은 천책 스님의 글 가운데 인상적인 몇 대목을 가려 뽑아 초의에게 보냈던 것이다.
위 인용은 천책의 문집인 《호산록(湖山錄)》 가운데,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만한 장문의 〈운대아감 민호에게 준 답글(答芸臺亞監閔昊書)〉에 보인다. 그의 이 글 속에는 참으로 마음에 일깨움을 던져주는 금언들이 적지 않다. 이미 흙으로 돌아간 무덤 속 주인이나, 부족할 나위 없이 득의의 한 세월을 보내는 부자집 도련님이나, 모두 헛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기는 매 한가지다. 깨달음이 없이는 눈앞의 모든 것이 다 헛것(幻)일 뿐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란 금세 스러지고 말 물거품이요,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것들에 목숨을 매달며 산다. 욕심 사납게 그러 모았으되 결국 하나도 남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위해 살아야 할까?
정민, 200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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