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칠포리암각화

2016. 2. 10. 14:01美學 이야기



      

영일 칠포리암각화

다른 표기 언어 迎日七浦里岩刻畵



요약 테이블
성격 암각화
유형 유물
문화재 지정 (지정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1990년 8월 7일)
분야 예술·체육/조각
제작시기 청동기시대
소장/전승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201 외

요약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암각화.

[내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칠포리는 흥해읍의 해변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다. 이 주변의 바다와 인접한 야산 밑에서 모두 네 곳의 암각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칠포해수욕장 뒤편의 곤륜산(昆崙山) 서북쪽 기슭에 있으며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대형의 고령 양전리(良田里)식 얼굴 그림이 수직 암벽에 꽉 차게 그려진 주 암면(岩面)에 새겨진 것을 1군이라 한다. 그리고 주 암면에서 골짜기를 건너 지표면에 누워 있는 형태의 바위에 있는 것을 2군이라 한다.


   1군은 길이 300㎝, 높이 200㎝ 정도이며, 바위의 윗면에도 그림이 새겨져 있다. 마치 마제석검처럼 보인다. 또 주 암면에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이는 바윗돌이 골짜기 아래에 있다. 그 바위의 측면에도 같은 형태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2군은 1군에서 개울을 건너 지표면과 거의 같은 높이의 편평한 암면에 새겨진 암각화를 말한다.


   1군의 그림은 장기리식 얼굴 그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양 측면의 선을 둥글게 안으로 휘어 들어간 호형(弧形: 활 모양)으로 처리하였고, 그 아래위를 직선으로 연결하였다. 윗변이 아랫변보다 길다.

내부는 윗변의 중심부에 U자형을 만들고 그 안을 모두 파내었다. 그리고 가로선을 2개에서 5개까지 그어 전체를 3분 또는 많은 경우 6분할하였다. 이 1군 암면의 윗면에는 마제석검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다. 북구 기계면 인비리의 고인돌 개석에 새겨진 마제석검과 매우 흡사하다.


   2군은 편평한 바위 윗면에 새겨진 것이다. 일부 그림은 1군의 것과 같은 양전리식 얼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둥글게 옆으로 흘러내린 측면의 암면에는 크기가 아주 작은 장기리식 얼굴과 삼각형이나 타원형의 내부를 세로로 이등분한 그림이 많다.

윗면의 큰 장기리식 인면은 1군의 것보다 가늘게 새겨져 있다. 또 사람들이 다니는 길 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측면의 삼각형과 타원형은 비교적 상태가 좋다. 이 세로 이등분된 삼각형과 타원형은 여성의 성기로 추정되고 있다. 새김법은 갈아 파기로 하였으며 제작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

이 암각화가 있는 곤륜산은 조선시대에는 고령산(高靈山)이라고 불리었다. 또 전설에는 곤륜산이 고령에서 날아왔다고 하는데, 이곳의 암각화가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제605호)와 형태상으로 통한다는 점에서 흥미 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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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국의 암각화』(한국역사민속학회 편, 한길사, 1996)
  • 『살아있는 신화 바위그림』(정동찬, 혜안, 1996)
  • 「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성격」(임세권,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칠포마을 바위그림』(이하우·한형철, 포철고문화연구회, 1994)

제공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49호(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 경상북도
미탁 |  2016.01.20. 09:22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249호




소 재 지;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201외





   암각화(岩刻畵)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벽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는데, 주로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이 암각화(岩刻畵)는 칠포리 해수욕장 서쪽의 곤륜산(崑崙山) 계곡 옆에 툭 불거져 나온 바위면에 새긴 그림이다. 그림을 새긴 바위는 모두 세 군데인데, 원위치에 하나, 거기서 6m 떨어진 계곡에 하나, 그리고 20m 떨어진 곳에 또 하나가 있다. 원위치에 있는 암각화(岩刻畵)는 돌출부 앞쪽을 거칠게 쪼아서 평탄한 면을 만든 후 서쪽면 전체에 6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을 꽉차게 새겨 넣었다. 계곡에 떨어진 바위는 원위치 있던 것이 갈라져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서쪽면에 2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이 보인다. 두 곳 모두 오랜세월 탓에 그림이 많이 닳아 있다. 20m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은 작고 미완성된 상태이다. 쪼아파는 방법을 사용하여 선으로 그림을 새겼는데, 가운데가 좁고 위아래가 벌어지는 실패 모양의 좌우에 4∼5개의 굽은 선으로 위아래를 연결하고 그 사이 구간마다 알구멍<성혈(性穴)>을 새겨두었다. 


   cafe.daum.net/inje66/OvoS/253   인제초등학교 동창회(제6회)




고령 양전동과 영천 보성리 암각화, 영일 칠포리 암각화| 답사와 여행

맑은우물 | 2006.02.09. 10:24 

   





   고령 양전동 암각화는 알터 마을 입구에 있는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그림이다.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바위그림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직경 18∼20㎝의 삼중원으로 총 4개가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십자형은 가로 15㎝, 세로 12㎝의 불분명한 사각형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모양은 가로 22∼30㎝, 세로 20∼40㎝로 머리카락과 수염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농경을 위해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처에 있는 금산령 석기 유적과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와 토기를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B.C.300∼0)에 만들어진 암각화로 짐작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사회생활 등 선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조각사와 회화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영천 보성리 암각화는 거북이 모양으로 생긴 바위 한 쪽 옆면에 7개의 그림을 새겨 놓았다.

   그림을 새긴 면의 넓이는 최대 길이 337㎝, 최대 폭 130㎝이다. 포항 칠전리와 고령 양전동, 영주 가흥리에 있는 암각화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은 문화유형으로 추정되나, 각 그림의 세부형식이 조금씩 달라, 서로 시대가 달랐거나 혹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 후기나 철기시대 초기 단계의 것으로 보이며, 선사시대 경북지방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암각화는 영일 칠포리 해수욕장 서쪽의 곤륜산 계곡 옆에 툭 불거져 나온 바위면에 새긴 그림이다.

   그림을 새긴 바위는 모두 세 군데인데, 원위치에 하나, 거기서 6m 떨어진 계곡에 하나, 그리고 20m 떨어진 곳에 또 하나가 있다. 원위치에 있는 암각화는 돌출부 앞쪽을 거칠게 쪼아서 평탄한 면을 만든 후 서쪽면 전체에 6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을 꽉차게 새겨 넣었다.
계곡에 떨어진 바위는 원위치 있던 것이 갈라져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서쪽면에 2개의 같은 모양의 그림이 보인다.
두 곳 모두 오랜세월 탓에 그림이 많이 닳아 있다. 20m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은 작고 미완성된 상태이다.

   쪼아파는 방법을 사용하여 선으로 그림을 새겼는데, 가운데가 좁고 위아래가 벌어지는 실패 모양의 좌우에 4∼5개의 굽은 선으로 위아래를 연결하고 그 사이 구간마다 알구멍<성혈(性穴)>을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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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 칠포리 암각화군 :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경상북도유형문화제 제249호

거석문화란 고인돌이나 선돌따위와 같은 거석의 자취가 남아 있는 시대의 문화로 알고 있다.

매년 칠포리 암각화군이 변함없이 잘 보존되어있는지 답사를 하는곳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족은 같은 취미로 관심이 많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칠포리 암각화는 1989년 처음발견되어 지금은 주변이 정비되어 있지만 계곡으로 쓰러진 암각화도 있고, 입구에는 멸치말리는 건물이 있어 고전과 현대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될 것 같다.

잘못되었다기 보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부족하여 자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한데 어떻게 활용, 보존해야할지  미비한 것 같다. 해안을 따라 분포된 선사시대 유물들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옛날 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 발전되리라 본다.

사방기념공원, 칠포리일원 암각화, 고인돌, 포항신항만을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문화와, 토목, 해상에 관한  체험할 수 있는  훌륭한 자원을 누군가에의한 멋진 컨텐츠개발이 탄생되기를 기원해본다.

 

 

 

 

 

       아직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 정확하게 뜻을 모르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음

 

         땅에 떨어진 암각화

 





cafe.daum.net/rmfrhcrlwkeks/LK9I/27  임미향

다음 카페 <임미향>에서 발췌 ......





칠포해수욕장 암각화| we all News

록향(윤규상) | 2014.08.12. 08:32



폭군 처치하고 족장된 동쪽별은 ‘비손’선지자를 만나야했다

영일 칠포리 암각화군은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 일원에 위치해 있다.

1989년 11월, 고대문화 연구모임인 ‘포철고문화연구회’에 의해 발견되었다.



#1. 선사시대인의 염원을 담은 바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70년 겨울, 울산 언양면 일대에서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기이한 바위그림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암각화(岩刻畵)였다.

고대미술사의 한 분야이기도 한 암각화, 혹은 암화(岩畵)로도 불리는 이 바위그림은 주로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바위표면에 천연물감이나 또는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암각화는 모두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새김법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새김법이란 흑요석이나 화강암, 석영 따위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이나 청동, 혹은 다른 견고한 도구를 사용하여 바위표면을 쪼아내거나 파거나, 갈고, 그어서 새기는 것을 일컫는다.

당시 울산 천전리 계곡의 암벽에서 발견된 암각화는 동심원을 비롯한 갖가지 기하학적 무늬와 사슴 따위의 동물상과 인물상, 또 신라의 화랑들이 남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그림 등이었다.

이후에 재차 고령군 양전리에서 독특한 형식의 기하문(幾何文) 그림이 발견되었고, 첫 암각화 발견이 있었던 다음 해인 1971년 12월에는 울산 대곡리 태화강 강변 절벽에 고래를 비롯한 육지동물과 춤추는 인물 등이 조각돼 있는 것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하늘의 계시받은 선지자
남정네들에 명령했다
“대지의 어머니를 불러라”
바위에 표식이 새겨지고…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들
해석 분분해 궁금증 증폭


   국내의 역사학계는 물론 고고학계, 미술사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암각화의 발견은 일반인들에게까지 한반도에 기거했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신앙, 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인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칠포리의 암각화군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신앙, 문화 전반에 걸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암각화가 새겨진 칠포리의 바위 주변에 보호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이런 가운데 영일 칠포리 부근에서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은 1989년 11월이었다. 고대문화 연구모임인 ‘포철고문화연구회’ 의해 새로이 고인돌에 새겨진 바위그림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뒤이어 동 단체의 지속적인 조사활동에 의해 그림이 조각된 바위와 그림의 가짓수가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칠포해수욕장 뒤편 곤륜산(昆崙山) 자락과 농발재의 바위들, 그 사이의 구릉지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에 남아 있는 칠포 바위그림은 돌칼이나 돌화살촉, 이른바 성혈(性血)이라고 부르는 둥글게 움푹 파인 크고 작은 바위구멍들과 다양한 기하학적인 무늬 등이 있다.

   다양한 그림만큼이나 해석 또한 분분하여 바위그림이 사람의 얼굴을 그린 것이라거나 추상화된 가면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철기시대의 방패를 상징하는 ‘방패문 암각화’라는 해석도 있다. 돌칼의 손잡이를 닮은 모양이어서 ‘검파형(劍把型) 암각화’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다양한 해석의 이면에는 아주 오랜 옛날인 선사시대 사람들이 ‘과연 어떤 소망과 기원을 품고 이러한 기이한 암각화를 제작했을까’라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걸 안다면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의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상으로나마 당시 암각화를 그릴 때의 상황을 스토리로 구성해본다.


#2. 선지자의 지혜가 깃든 곳

   지팡이를 짚은 ‘비손’선지자가 사방을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거칠게 무두질하여 말린 담비나 사슴, 늑대 등의 짐승가죽으로 몸을 가린 한 무리의 남정네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돌망치나 석영으로 만든 돌촉 따위의 연장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부족민들 중에서 선별된, 남다른 감각과 손재주를 가진 예인들이었다.

허리까지 우거진 잡초와 들꽃을 헤치며 한참 비탈진 사면을 올라가자 소나무가 듬성한 작은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부가 둔덕을 이뤄 아늑했고, 신령스러움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부근에는 몇 개의 커다란 황적색 바위가 기이한 자태로 솟아나 있었다.

걸음을 멈춘 ‘비손’선지자가 지혜가 깃든 눈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하늘과 해의 방향, 지형과 바위를 세세하게 살폈다. 남정네들은 선지자 노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외경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제 부족민들의 앞날은 ‘비손’선지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폭군 ‘불뫼’를 단숨에 처치하고 족장자리에 오른 ‘동쪽별’이 부족 청년들을 풀어 ‘비손’을 찾아 나선 이유도 거기 있었다. 두 봄이 지난 끝에 마침내 ‘겨울동굴’에 은거하고 있던 그를 모셔온 것도 ‘비손’선지자의 놀라운 능력을 들어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부족민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비손’선지자의 능력과 행적은 사람들 입을 통해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나이가 몇인지도 몰랐다. 다만 사람들은 ‘비손’선지자가 세상의 모든 일을 헤아리고 있으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액운과 부정을 방지하고 하늘의 뜻을 전달해주는 신인(神人)이라고 믿고 있었다. 돌림병으로 전멸 위기에 처했던 어느 부족도 그의 도움으로 다시 번성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부족장이 된 ‘동쪽별’이 서둘러 ‘비손’을 찾아 모시게 한 것도 부족에 드리운 무서운 재앙의 그림자를 걷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부족에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재앙이 찾아온 것은 ‘불뫼’가 부족장이 된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당시 수십 개의 봄이 지나도록 평화롭게 부족을 다스리던 족장 ‘큰바위’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아들에게 부족장 자리를 넘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 ‘불뫼’와 ‘승냥이’,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양아들인 ‘겨울강’이 있었다. ‘큰바위’가 청년이었던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함께 들소사냥을 나갔고, 돌창을 빗맞아 한껏 사나워진 들소의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막아서서 생명을 구해준 친구가 있었다. 그때 입은 상처로 친구가 죽은 뒤 ‘큰바위’는 친구의 아들인 ‘겨울강’을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3. 대지의 어머니를 부르다

   ‘큰바위’가 판단하기에 ‘겨울강’은 부족의 융성을 가져올 훌륭한 부족장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온화한 심성에 어려운 일에 앞장설 줄 아는 용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두 아들은 오만하고 고집이 셌으며, 시기심과 욕심이 많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부족장 선출을 하루 앞두고 두 아들을 집안에 불러들였을 때 ‘큰바위’가 돌연 숨을 거두었다. 마침 양아들인 ‘겨울강’은 사랑하는 부족처녀인 ‘가을꽃’과 들판에 나가 있을 때였다. 부족장의 큰아들 ‘불뫼’는 부친이 운명하기 직전에 자신에게 족장을 맡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동생 ‘승냥이’도 이에 동의했다.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부족민들은 두 아들의 말을 믿었다.


   그때부터 ‘불뫼’는 족장의 권세를 마음껏 휘둘렀다. 동생을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앉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늙은 원로들을 자리에서 쫓아냈다. 부족의 처녀들을 뽑아서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또 항시 자신의 땅이 좁다고 투덜대던 ‘불뫼’는 이웃부족에 전쟁을 선포했다. 많은 부족민들이 전쟁 중에 죽거나 다쳤고, 이웃부족의 젊은 여자들이 육욕의 희생물이 되었다. 전쟁에 승리하고도 ‘불뫼’의 욕심은 채워지지 않았다.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겨울강’을 죽이고, 그의 여자 ‘가을꽃’을 강제로 범하고 죽게 만들었다.

부족민들이 정성으로 섬기던 여신(女神) ‘대지의 어머니’가 부족을 떠나간 것은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이상한 일들이 거듭되었다. 먼저 짐승들이 새끼를 배지 않았다. 새들도 알을 낳지 않았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않았다. 태어난 아이들이 자다가 이유 없이 죽는 일이 잦았다. 자주 비가 내렸고, 들판의 곡식들은 쭉정이로 말라갔다. 사냥할 짐승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밤하늘에는 무시무시한 유성이 불꽃을 남기며 지나갔고, 밤마다 죽은 자들이 슬프게 울며 숲 속을 걸어 다녔다.

결국 참다못한 부족의 청년 ‘동쪽별’이 야음을 틈타 몇몇 청년들을 이끌고 족장의 숙소를 습격했고, 흉포한 부족장 ‘불뫼’와 그의 동생 ‘승냥이’를 죽였다. 부족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족장자리에 오른 ‘동쪽별’은 ‘대지의 어머니’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어렵게 ‘비손’을 모셔오기로 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 ‘대지의 어머니’를 부르는 표식을 새기어라. 표식은 내가 알려주마.”

준비해온 재물을 바친 뒤 한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려 하늘의 계시를 받은 ‘비손’선지자가 명했다. 남정네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져온 연장으로 바위 표면에 그림을 새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믿었다. 그리고 간절하게 염원했다.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대지의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다시 풍성한 나날이 찾아오기를. 염원을 담은 돌망치소리가 빈 들판에 퍼져 나갔다.


 - 영남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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