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고려청자의 부활/문갑식
2016. 2. 12. 06:24ㆍ도자 이야기
박정희와 고려청자의 부활/문갑식
- 2015-12-22 18:29:48
박정희와 고려청자의 부활(上)]/문갑식
전라남도 강진(康津)군에는 이름난 선비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알고보면 사연이 슬픕니다. 흔히 말하는 함경도의 삼수갑산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먼 곳 가운데 하나였기에 이곳으로 유배온 분들은 대부분 중죄(重罪)를 지었던 것입니다. 선비들은 절해고도(絶海孤島)나 마찬가지인 이곳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책을 읽고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유배라는 벌이 그들에겐 성심껏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벌의 이율배반이라고 할까요.
강진에 유명한 것이 또 있습니다. 청자(靑瓷)입니다. 청자는 고려시대 때 유명했지요. 청자의 비색(翡色)을 본 중국인들은 감탄했다고 합니다. 청자의 발상지는 자기들인데 어찌하여 머나먼 고려 땅에서 이토록 신비한 빛을 냈는지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비색은 밝고 은은한 녹색에 가까운 빛깔이지요. 남송(南宋)대 태평노인이 집필한 ‘수중금(袖中錦)’이라는 책 가운데 ‘천하제일’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만을 모은 것인데 여기 “고려 비색이 천하제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 사람이 고려 청자를 세상 제일가는 명품이라고 인정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그곳까지 알려졌기 때문일 겁니다. 비색이란 말은 중국 절강성 월주(越州)의 요에서 만든 것을 일렀기에 고려 청자는 특별히 ‘고려 비색’이라 불렀지요.
강진과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즉 오늘날의 개성은 쉽게 오고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청자를 이곳에서 만들어 파도와 풍랑을 뚫고 바다를 통해 개경으로 운반했을까요? 그런 의문을 가지고 강진의 청자박물관 주변을 몇차례 취재했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오면서 청자도 덩달아 쇠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불교색 짙은 청자를 멀리하고 흰색을 아꼈습니다. 백자가 청자의 자리를 차지하게된 것입니다.
청자는 비색 대신 회청백자, 혹은 분청사기로 명맥을 잇게 됐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맞이하면서 우리 도자기 역사는 큰 위기를 맞게됩니다. 왜군들이 조선의 유명한 도공(陶工)들을 무더기로 끌고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 큰 영향을 미쳤을까 하고 의심하는 분들이 있다면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를 방문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분원리 한복판 분원초등학교 위에는 분원백자 자료관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조선 백자의 전기-중기-후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도표가 있습니다.
전기와 후기를 비교해보면 아무리 도자기에 문외한이라도 얼마나 우리 문화 수준이 후퇴했는지를 알게되지요. 분원리 분원백자 자료관에는 옛 도공들이 만들다 부순 도자기 파편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60~70년대 일본인들은 이것을 포크레인으로 긁어갔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한국인들은 넋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니 한심하지요.
무식(無識)은 결코 창피한 것이 아니지만 나라가 무지하면 결국 망하고 맙니다. 각설하고 다시 고려청자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잊혀진 고려청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보인 대 사건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인 1914년 전남 강진에서 조선총독부로 문서가 옵니다. 강진에 주재하던 일제 경찰 주재소의 순사가 “강진군 대구마을에 고려청자가 수북이 묻혀있다”는 보고서를 올린 것입니다. 일제의 최고 지도부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이 보고서의 존재는 그해 일제 기관지 경성일보에 대서특필됐지요.
일제는 수십명의 전문가를 보내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대구마을에 산재한 고려청자 요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완벽한 제품부터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 가져간 뒤에야 1939년 고적(古蹟) 107호로 지정했습니다. 폐허에 간판만 남은 꼴입니다. 광복이 됐지만 무지한 우리 정부와 민간인들은 이것을 까맣게 잊고있었습니다. 그러던 1963년 몇 사학자가 대구마을에 왔습니다. 그들은 “고려 18대 왕 의종 11년에 궁궐의 전각가운데 하나인 양의전에 청자기와를 얹었다”는 기록을 들고있었지요.
당시 이 사학자들은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분명 기록은 있는데 어떻게 머나먼 강진에서 개경까지 궁궐 지붕에 쓸 기와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당시 그들은 배로 청자를 운반했으며 강진이 청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흙)의 명산지라는 걸 몰랐습니다. 하필 그들이 찾아온 집이 지금 전남 청자 무형문화재인 이용희씨의 집이었습니다.
무식(無識)은 결코 창피한 것이 아니지만 나라가 무지하면 결국 망하고 맙니다. 각설하고 다시 고려청자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잊혀진 고려청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보인 대 사건이 있습니다. 일제 치하인 1914년 전남 강진에서 조선총독부로 문서가 옵니다. 강진에 주재하던 일제 경찰 주재소의 순사가 “강진군 대구마을에 고려청자가 수북이 묻혀있다”는 보고서를 올린 것입니다. 일제의 최고 지도부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이 보고서의 존재는 그해 일제 기관지 경성일보에 대서특필됐지요.
일제는 수십명의 전문가를 보내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대구마을에 산재한 고려청자 요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완벽한 제품부터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 가져간 뒤에야 1939년 고적(古蹟) 107호로 지정했습니다. 폐허에 간판만 남은 꼴입니다. 광복이 됐지만 무지한 우리 정부와 민간인들은 이것을 까맣게 잊고있었습니다. 그러던 1963년 몇 사학자가 대구마을에 왔습니다. 그들은 “고려 18대 왕 의종 11년에 궁궐의 전각가운데 하나인 양의전에 청자기와를 얹었다”는 기록을 들고있었지요.
당시 이 사학자들은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분명 기록은 있는데 어떻게 머나먼 강진에서 개경까지 궁궐 지붕에 쓸 기와를 만들었다는 말인가? 당시 그들은 배로 청자를 운반했으며 강진이 청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흙)의 명산지라는 걸 몰랐습니다. 하필 그들이 찾아온 집이 지금 전남 청자 무형문화재인 이용희씨의 집이었습니다.
이용희씨는 1939년생이며, 1939년은 앞서 말한대로 일제가 이 마을을 고적으로 지정한 해입니다. 뭔가 이씨가 도공이 될 것 같은 운명같은게 어렴풋이 보이지 않습니까? <中편에 계속>
당시 이씨는 군복무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씨의 어머니는 찾아온 사학자들에게 집 뒷켠의 소쿠리를 들고와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일제가 채 찾아내지 못한 고려청자의 파편들이었습니다. 이씨의 어머니는 사학자들이 경악하던 모습을 아들에게 전해줬지요. 그 놀란 표정을 짓던 이가 바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지은 고(故)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고 현재 문화재계의 거두인 정양모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습니다. 그 두분은 60년대 초기에는 박물관의 학예관 급이었다고 합니다.
최순우-정양모씨 등은 이 소쿠리의 파편을 들고 서울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내려왔지요. 이용희씨가 1964년 3월 제대했는데 사학자들이 내려온 것은 1964년 8월이었다고합니다. 이때부터 이씨는 사학자들과 동행했습니다. 이씨의 기억입니다. “당시 최순우 선생은 미술과장이고 정양모 선생은 연구관이었어요. 실측은 김동현씨가 했고 전남대 사학과생들도 함께 왔지요. 제가 살던 집이 가마터였대요.
일본인들이 발견한 요가 100개였는데 요행히 제외던거지요.” 하늘의 도움인지, 일제가 캐낸 100개 외에 우리 학계가 발견한 요가 88개나 됩니다. 그런데 왜 최순우선생과 정양모 선생은 1963년 강진에 내려왔으며 그 이후 대대적인 청자 도요지 발굴작업과 고려 청자 재현사업이 벌어지게된 것일까요? 이것은 앞서 말했듯 고려 의종 대의 청자 기와를 찾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그 뒤에 놀라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용희씨의 말입니다. “고(故)박정희 대통령께서 이왕직(李王職) 박물관에 전시된 청자를 보고 관심을 가졌던게 청자 발굴작업의 시초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왕직이란 일제가 1910년 조선을 멸망시킨 뒤 대한제국황실을 이왕가로 격하시키고 기존의 황실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宮內府)를 계승하기위해 설치된 기구입니다. 소속은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일본 궁내성(宮內省)에 소속돼있었지요.
내친김에 설명하자면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 이씨,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이며 직(職)은 공무원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은 조선왕실을 이왕가로 불렀는데 이는 고종-순종이 일본으로부터 왕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고종은 일본 천황가의 아랫단계인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 순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칭하고 종친들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곳을 방문한 고 박정희대통령은 아픈 역사의 흔적에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한국최초의 칼라TV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남산업의 김향수 회장이 이 일에 뛰어듭니다. 이용희 선생에 따르면 강진이 고향인 김향수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청자산업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진 속에서 자기를 만드는 광경을 보고 입맛이 떨어져 청자 재현사업을 포기하고 전자쪽으로 눈을 돌려 그 유명한 아남나쇼날 TV를 만들게 되지요.
박 대통령은 김 회장이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줄기차게 청자에 관심을 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전남 광주로 연두 초도순시를 할 때면 박대통령이 머무는 방과 회의실에 강진 청자를 실어날랐다고 하지요. 아마 당시 도공들은 신이 났겠지요. 아쉽게도 박대통령이 강진은 방문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표하자 1977년 강진에는 사단법인 강진고려청자지원사업단이 발족됩니다. 고려 이후 500년 가까이 무관심속에 방치됐던 강진청자가 부활의 용틀임을 한 것입니다. 이후 사업단은 강진청자사업추진위원회로, 청자사업소로, 마침내 고려청자박물관으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내친김에 설명하자면 이(李)는 조선왕실의 성(姓)인 전주 이씨, 왕(王)은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爵位名)이며 직(職)은 공무원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은 조선왕실을 이왕가로 불렀는데 이는 고종-순종이 일본으로부터 왕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지요. 고종은 일본 천황가의 아랫단계인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 순종은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칭하고 종친들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작위를 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이곳을 방문한 고 박정희대통령은 아픈 역사의 흔적에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고려청자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박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한국최초의 칼라TV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남산업의 김향수 회장이 이 일에 뛰어듭니다. 이용희 선생에 따르면 강진이 고향인 김향수 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청자산업을 살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진 속에서 자기를 만드는 광경을 보고 입맛이 떨어져 청자 재현사업을 포기하고 전자쪽으로 눈을 돌려 그 유명한 아남나쇼날 TV를 만들게 되지요.
박 대통령은 김 회장이 포기했지만 이후에도 줄기차게 청자에 관심을 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전남 광주로 연두 초도순시를 할 때면 박대통령이 머무는 방과 회의실에 강진 청자를 실어날랐다고 하지요. 아마 당시 도공들은 신이 났겠지요. 아쉽게도 박대통령이 강진은 방문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표하자 1977년 강진에는 사단법인 강진고려청자지원사업단이 발족됩니다. 고려 이후 500년 가까이 무관심속에 방치됐던 강진청자가 부활의 용틀임을 한 것입니다. 이후 사업단은 강진청자사업추진위원회로, 청자사업소로, 마침내 고려청자박물관으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이용희선생은 1977년부터 2005년까지 고려청자박물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뒤 근처에 동흔요를 설립한 청자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청자 부활의 첫 목표는 비색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청자 제작법은 체계적으로 남은 것이 거의 없고 있는 것도 알아보기 힘들지요. 일일이 재료를 섞어 만든 유약을 청자에 칠해본 뒤 색을 보고 다시 부수는 일을 반복했지요.
여기서 이용희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유약에 대해서는 구전되는 것도 있고 문헌상 남아있는 것도 없어요. 그중 간혹 복잡한 배합비율이 있는데 전 이렇게 생각했어요. 과연 고려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복잡하게 유약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그래서 이 선생은 강진 근처의 찰흙 속에 들어있는 원소를 분석해 유약을 만들었는데 하늘의 도움인지 이것이 비색과 근접한 색을 냈다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선생의 청자를 손가락으로 튕겨보면 쇠소리가 납니다. 그리고 남다른 효능도 있다고하지요.
“제가 만든 청자는 산성 액체를 알칼리성으로 변화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공인된 기관에서 검증도 받았는데 청자는 그뿐 아니라 전자파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요즘 휴대전화 많이 쓰잖아요? 작은 청자 조각을 부착하면 그걸 막아주는 겁니다.”그래서인지 요즘 강진의 백련사 토굴에 칩거하고있는 손학규 전(前) 새민련 대표도 막걸리 주병으로 이 선생의 작품을 쓰고있다고 하지요.
“제가 만든 청자는 산성 액체를 알칼리성으로 변화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공인된 기관에서 검증도 받았는데 청자는 그뿐 아니라 전자파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요즘 휴대전화 많이 쓰잖아요? 작은 청자 조각을 부착하면 그걸 막아주는 겁니다.”그래서인지 요즘 강진의 백련사 토굴에 칩거하고있는 손학규 전(前) 새민련 대표도 막걸리 주병으로 이 선생의 작품을 쓰고있다고 하지요.
(35):박정희와 고려청자의 부활(下)]
<中편에서 계속>
손 전 대표가 마시는 주병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 주병은 윤동환 전(前) 강진군수가 선물했습니다. 그는 원래 고봉요에서 만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봉요에서 2개의 주병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화학약품이, 하나는 천연재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물하려고 보니 어떤 것이 천연재료로 만든 것인지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도 분간이 되지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이용희선생을 찾아가 물었더니, 이 선생께서 “기왕이면 내 작품을 선물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해 결국 이 선생 것을 선물한 것이죠.
손 전 대표가 마시는 주병에도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 주병은 윤동환 전(前) 강진군수가 선물했습니다. 그는 원래 고봉요에서 만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봉요에서 2개의 주병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화학약품이, 하나는 천연재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물하려고 보니 어떤 것이 천연재료로 만든 것인지 여러 번 설명을 들었는데도 분간이 되지않았다는군요. 그래서 이용희선생을 찾아가 물었더니, 이 선생께서 “기왕이면 내 작품을 선물하는게 어떻겠느냐”고 해 결국 이 선생 것을 선물한 것이죠.
노(老)대가는 청자의 전자파에 주목하고 있지만 강진에 있는 사십여명의 도공들은 저마다의 특기들이 있습니다.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일례로 이영탄(48)씨 같은 작가는 4남1녀의 장남으로 어릴 적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분입니다. 빈농 아버지를 둔 이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무작정 상경했다고 하지요. 서울에 올라와 짜장면 배달부터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아름다움에 눈을 떴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뜻하지 않게 삶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우연히 윈도우 속에 전시된 나전칠기 같은 공예품 문양을 보게 됐다고 하지요. 그런데 가슴 속에서 강렬한 욕망이 일었습니다. “저걸 나도 만들고 싶다!”
혹시 그의 선대(先代)에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아니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동생들 먹여살리시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묘한 것인지 그는 작은 공예품 공장에 들어가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솜씨가 소문나자 마포 신수동 불교미술 제작품 회사로 옮겼습니다. “탱화 조각도 해보고 범종(梵鐘) 조각도 해보고 안해본게 없었습니다. 열네살 때 서울와 스물일곱살 때까지 일했는데 마지막에 받은 월급이 150만원이었어요. 당시로서는 꽤 많은 액수였습니다.” 먹고살게 되자 불현듯 고향 생각이 났다고합니다.
이씨는 수소문 끝에 고향 강진 땅에서 청자 재현사업이 한창이라는 얘길 들었습니다. 청자는 불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그는 “그간 갈고 닦은 불교 조각 솜씨를 청자와 접목시키면 어떨까”하고 생각하다 귀향해 ‘금릉요’를 열었습니다.
ㄱ
그게 1994년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강진에서 청자를 만드는 곳은 지금 고려청자박물관의 전신인 청자사업소의 몇몇 장인들과 개인 요(窯) 서너군데 뿐이었습니다. 당시 장인들의 목적은 비색을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에만 골몰하고있었습니다. 그는 생각이 달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작가의 이름이 등장한 계기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늦은 저녁 다산초당 아래에서였습니다. 다산학 전파자인 윤동환 전 강진군수께서 사방 벽에 가득찬 수백점의 다구와 술병 가운데 찻잔 하나를 척 뽑아온 것입니다. 윤 전 군수는 “요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찻잔이 이겁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호기심에 저는 다음날 아침 이영탄 작가의 금릉요로 달려가 물었지요. “작품 빛깔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퍼센트로 말할 수도 없겠지만 전 생각이 달라요. 고려 청자를 재현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당시와 흙 성분도, 기술도 다르지않습니까? 유명한 시인의 시가 있어요. 그걸 음미하는게 아니라 똑같이 지으라면 어떨까요? 도자기도 같습니다.”
이영탄 작가는 “저만의 칼라와 색깔과 모티브를 조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자기는 가을 하늘처럼 새파랗지도, 비색과 비슷한 것 같지만 뭔가 더 청아한 색을 내자 거기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영탄 작가는 “저만의 칼라와 색깔과 모티브를 조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데도 그의 자기는 가을 하늘처럼 새파랗지도, 비색과 비슷한 것 같지만 뭔가 더 청아한 색을 내자 거기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묘하지요? 그는 사발공모전, 강진청자 공모전, 아름다운 우리 자기 공모전 등에서 수없이 큰 상을 탔지만 이영탄은 “상은 그냥 상일 뿐 의미를 두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시골 강진만의 섬과 바다와 산과 사람들의 놀이를 모티브로 삼고 싶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작품 중에는 작은 단지에 문인화를 새겼는가하면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새긴 접시를 돼지코에 매단 우스꽝스러운 것도 보였습니다. “돼지처럼 살되, 정석(定石)으로 살라는 뜻이지요. 한문으론 다르지만.”
그런가하면 밑을 연꽃으로 감싼듯한 사발의 주특기지만 청자의 3대 미라는 형태-색-문양에서 문양을 과감하게 빼버린 민짜 자기는 수수함을 자랑하는 조선 백자처럼 아무 꾸밈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문양없이 순수한 청색만의 자기도 색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 강진 일대에는 늦가을의 정취가 자욱합니다. 아침에는 바다 앞 섬들이 안개에 쌓여있고 낙엽이 거리를 덮고있지요. 여러분도 머나먼 남도 땅 강진으로 가 옛 선비들의 자취도 짚어보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게 어떨까요.
그런가하면 밑을 연꽃으로 감싼듯한 사발의 주특기지만 청자의 3대 미라는 형태-색-문양에서 문양을 과감하게 빼버린 민짜 자기는 수수함을 자랑하는 조선 백자처럼 아무 꾸밈이 없었습니다. 화려한 문양없이 순수한 청색만의 자기도 색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 강진 일대에는 늦가을의 정취가 자욱합니다. 아침에는 바다 앞 섬들이 안개에 쌓여있고 낙엽이 거리를 덮고있지요. 여러분도 머나먼 남도 땅 강진으로 가 옛 선비들의 자취도 짚어보고 고려청자의 비색을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게 어떨까요.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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